손왕비는 뒤를 돌아보며 “초왕비, 셋째를 좀 말려 보세요!”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요리조리 굴렸다.‘위왕하고 한 번도 얘기해 본 적 없는 나보고 말리라고?’위왕의 옆에 있던 여인은 맑은 눈동자를 드리우며 위왕을 보았다.“제가 돌아가서 왕비를 불러올 테니, 왕야께서는 화내지 마십시오.”위왕은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강렬한 눈빛으로 손왕을 노려보았다.“본왕이 이 여인을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이 사람이 본왕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정비는 아니지만 장차 후궁이 될 사람이니 이 여인을 인정하지 않으려거든, 저와도 연을 끊을 준비 하세요.”위왕의 모비는 첫 번째 현비였으며 위왕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왕의 친 모비가 죽자 위왕은 손왕의 모비인 정비(靜妃)에게 맡겨졌다. 그때부터 손왕과 위왕은 친형제처럼 돈독한 우애를 나누며 컸다.“너……”손왕이 화가 나서 볼살이 덜덜 떨며“모비께서 성질나 죽는 꼴 보고 싶어?”라고 물었다.“모비께는 본왕이 설명드리지요.” 위왕은 입을 삐죽거리며 “모비께서는 오히려 손자를 안아볼 생각에 좋아하실걸요? 매번 현모비를 부러워하셨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손왕과 위왕 사이에 서있는 원경릉은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원경릉은 그녀를 위왕 옆에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는 조금도 어색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조용히 위왕 옆에 서있었다.손왕비는 위왕을 위로하며 “오늘 둘째 형님 생신이니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여인을 데리고 가세요. 본비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비인 위왕비를 폐비시킨다는 둥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그 말은 사실입니다.” 위왕이 말했다.원경릉은 뻔뻔한 위왕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다.“셋째 아주버님, 부부관계는 칼로 물 베기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사이가 틀어졌더라도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도 많은데 위왕비 체면도 있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위왕의 옆에 있던 여인은
원경릉은 접객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우문호의 귀를 잡아당겼다.“그럼 당시에 어땠는지 그때의 일들을 말해줘.”“둘만의 사정이 있겠지. 이리 와봐. 어이고 녹주 이 멍청한 계집.”우문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 묻은 연지를 닦았다.“이거 내가 혼자 화장한 거야.” 원경릉은 다른 여인들을 보고 오늘따라 배가 잔뜩 나온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문호는 책상다리를 하고 옆에 놓인 견과류를 집어 호두 알만 꺼내 원경릉에게 주었다.“당시에는 셋째 형님이 셋째 형수를 보고 첫눈에 반했지. 형수 집안이 굉장한 명문가잖아. 그때 형님이 형수와 혼인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몰라. 원래 셋째 형수의 약혼자가 안군왕부(安郡王府) 사람이었거든? 이미 약혼을 했는데 그걸 어떻게 무를 수 있겠어. 그때 셋째 형님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무술도 연마했어 나는 그때처럼 셋째 형님이 열심히 살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아. 하지만 안군왕세자도 형수랑 혼인하겠다고 물러서지 않았고, 양가에서도 반대했기에 결론은 잘 안 됐어.”“그럼 그 후에 어떻게 혼인을 하게 된 거야?”우문호는 미소를 지었다.“그때부터 셋째 형님이 5일 동안 단식을 했어. 하지만 부황이 얼마나 단호한 분인지 알지? 그것도 먹히지 않았지. 그때 셋째 형님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어떻게 했는데?”“형님이 최씨 집안에 가서 셋째 형수를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했지.”원경릉은 이 시대의 여인이 저런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위왕비가 사랑의 도피를 동의했다고?”“거기까지는 몰라. 아무튼 나중에 귀영위에게 잡혀와서 형님이 곤장 서른 대를 맞았지.”“그럼 안군왕세자는 동의했어?”“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어? 셋째 형님이랑 형수가 보름 동안 숨어 지냈는데, 여자가 남자랑 보름을 밖에서 같이 지내다가 들어왔으니, 다들 몸이 더럽혀졌다며 셋째 형님에게 보내라고 해버린 거지.”“그럼 그게 언제야?”“4~5년쯤?”“그것밖에 안 된 거야? 서로 없으면 죽을 것
우문호는 뛰쳐나가 손왕을 찾았다.손왕은 제왕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보고 자신의 생일잔치라는 것도 망각하고 왕부에 있던 남자들을 모두 한 자리로 모아서 제왕부로 향했다.제왕부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원용의는 다급히 제왕부로 향했다.손왕부도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친왕, 부마, 관원, 남성 모든 사람들이 불을 끄는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싹 들고 갔다. 남은 시녀들은 손왕부가 비자 불안하여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자리를 지켜야 하나 고민했다.손왕비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접객실에 사람을 모아 앉혔다.주명취는 향로 앞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여기 있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거겠죠.”라고 말했다.손왕비는 어차피 이혼할 사람이니 저러는 것도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을 맞대고 살았던 사람인데 어쩜 저렇게 무정할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사람들은 안채에 앉히고 차와 간식을 대접했다. 위왕이 간 후에도 그가 데리고 온 여인은 손왕부에 남아있었지만 들어와 앉지 않고 밖에 서있었다.주명취는 원경릉 옆에 천천히 앉아 그녀를 묘한 눈빛으로 보았다.“너 지금 무섭지?”“뭐가 무서워?”주명취가 소름 끼치게 웃었다. “불! 불은 싹 다 태워버리잖아. 검은 재만 남기고 싹.” 원경릉은 그녀를 노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우문령은 주명취의 말을 듣고 화가 났다.“왜 초왕비를 괴롭혀요? 그 입 다무세요.”“하하하하! 초왕비? 그거 알아? 원래는 내가 초.왕.비였어야 해!”경박스러운 주명취를 보고 문경공주는 크게 화를 냈다.“주명취. 말조심하세요. 비록 당신이 곧 황실을 떠날 테지만 주씨 집안에서도 당신이 이렇게 경거망동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주명취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공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죠. 고귀하신 공주님들. 호호호”손왕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초왕비.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으세요.”원경릉도 주명취가 옆에 앉아 있는 게 불안했다. ‘혹시 알아? 저러다가 눈 돌아서 비녀로 날 찌를지
“사식아 네가 저 여자를 따라가거라. 진짜 불이라도 지르면 어떡해!”손왕비가 주명취가 대청을 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식이에게 소리쳤다.사식이는 우문호의 당부대로 손왕부에 남아서 원경릉을 지키려고 했으나 만약 주명취가 손왕부에 불이라도 지른다면 원경릉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위험해진다고 판단했기에 주명취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손왕부에 있던 병사들도 모두 제왕부에 불을 끄러 갔고, 부중의 다른 하인들은 사식이만큼 무공을 할 줄 몰랐다. 만약 주명취가 돌발행동을 한다면 남아있는 부녀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원경릉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식아 나가면서 대문을 닫아줘! 그리고 주명취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거든 꼭 막아야 해!”“예! 알겠습니다.”사식이는 원경릉의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주명취를 쫓아가며 대문을 닫았다.손왕비가 벌떡 일어나 원경릉을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지금 여러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귀가 밝은 원경릉은 밖에서 들리는 예사롭지 않은 발소리에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손왕비를 보았다.공주와 그 자리에 있던 황족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원경릉을 보았다.“뭐라고요?”“여러분 제가 나가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들 진정하세요.” 손왕비는 손님들에게 침착하게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사식이가 대문을 닫으면서 손왕부의 하인들에게 뒷문과 측문까지 닫으라고 분부해놓았기에 손왕부로 들어오는 길은 모두 막혀있었다.손왕비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왜 이런 일이 하필 손왕의 생일에 일어났는지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났다. 만약 손왕부 행사에 초대되어 온 손님에게 사고라도 난다면 손왕부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왕부 책임 집사를 불러 모든 하인들을 대청으로 모으라고 명령했다.생일잔치에 초대된 손님은 황족 또는 황족의 친척, 관원들의 가족이었고 저녁에 오기로 한 일부 손님들은 손왕부로 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현재로서는 어린아이 다섯 명을 포함해서 총 서른
사식이는 주명취를 발견하고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주명취는 차갑게 웃으며 “사식, 너는 내가 정말 불을 지를까 무섭니?”라고 물었다.“당신은 불 못 지를걸요?”“그럼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이유가 뭐야?” 주명취는 고개를 돌려 사식이를 보았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광기가 서려있었다.“당신을 따라온 게 아니라 여기 경치가 좋아서 온 겁니다.”지금 손왕부의 모든 출입문이 닫혀있기에 손왕부 내에 위험인물은 주명취 뿐이었다.주명취는 정원 한 귀퉁이에 노랗게 시든 나무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나무가 시들어서 좋아. 다 시들어서 없어졌으면 좋겠어.”주명취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사식이를 보았다.“여기 앉아. 서있으면 얼마나 힘드니?”사식이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주명취는 차갑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사식이를 보았다.“너는 사람이 절망의 끝에 다다르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사식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명취를 보았다.주명취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귀 옆으로 흘러나온 머리를 쓸어 넘겼다.“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1년 전만 해도 난 주씨 집안에서 가장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지. 내가 초왕비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적자인 제왕을 택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지 뭐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왕이 태자가 될 줄 알았어. 난 그럼 태자비가 되었을 것이고, 그럼 난 이 나라에 국모가 되었을 텐데……”“그럴 그릇이 안 되는데 야심만 커서 뭐 합니까?” 사식이가 차갑게 말했다.“네 말이 맞아. 야심만 컸지.” 주명취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식이를 보았다.“근데 이건 사실 야심의 문제가 아니야. 누구나 마음속에 원하는 게 있어. 사식이 너는 야심이 없니? 원하는 게 없어? 원경릉이라고 부처일 것 같아? 걔도 야심이 없을까? 사람이라면 모두 마음속에 야심 하나쯤 다 있단 말이야. 어쩌겠니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을……”“그것 또한 당신의 선택이니 누굴 탓할 수 없죠.”주명취는 사식이의 말을 듣고
사식이는 주명취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그녀가 단도를 드는 순간 사식이가 달려들었다.“멈춰! 죽으려거든 딴 데 가서 죽……어!”주명취 자신을 향하던 단도가 순식간에 방향을 돌려 사식이를 겨누자 사식이 급히 달려가 단도를 빼앗으려 했다. 가녀린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어찌나 세었는지 사식이는 주명취의 반항에 온 몸이 휘청였다. 그 순간 주명취가 손을 빼 단도로 사식이의 복부를 찌른 후 빠르게 도망갔다.사식이는 그녀의 뒤를 쫓기 위해 달렸으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너……”주명취는 차갑게 웃으며 쓰러져있는 사식이를 보았다. “사람이 절망에 다다랐을 때는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야.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증오하는 사람이든 다 죽여서 데리고 갈 거야.”주명취는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 측문을 열었다.“들어오시게.”사내 몇 명이 들어오더니 허리를 굽히고 빠르게 손왕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대청 안에서 기다리던 원경릉은 바깥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갑자기 왜 이렇게 어지럽지?” 문경공주가 관자놀이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나도 머리가 아파.” 진평공주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원경릉은 고개를 번쩍 들어 발자국 소리를 따라 귀를 쫑긋 세웠다. 발자국 소리가 몇 번 크게 울리더니 손왕부 마당에 멈춰 선 것 같았다.원경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제왕부에 불을 낸 것은 함정이었어!’원경릉은 병풍 뒤로 들어가 약상자를 안에서 날카로운 수술칼과 후추 스프레이를 꺼냈다.약상자를 오래 사용하니 이제 약상자도 원경릉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았다.그녀가 병풍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를 듣고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다. 손왕비가 밖으로 나가 상황을 보니 처음 보는 사내들이 칼을 들고 부중의 하인들과 싸우고 있었다. 하인들이라고 해봤자 음식을 하는 하인, 정원을 가꾸는 하인, 목욕을 시키는 하
“네 목적은 나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필요 없이 나를 여기서 죽이든지 나를 데리고 나가!”원경릉이 주명취에게 다가가 소리쳤다.그녀는 주명취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죽이려고 했으면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텐데 이렇게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었겠는가.주명취의 눈이 반짝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원경릉을 보았다.“초왕비, 그게 무슨 말이죠? 저 사람들은 잔치집을 털러 들어온 강도 아닙니까? 저 사람들하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럽니까? 무고한 사람을 연루시키지 말고 저 사람들을 따라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뭔 쓸데없는 소리야. 같이 가자고!” 주명취가 다가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초왕비, 저기 향로를 봐, 내가 방금 약을 탔거든? 네가 저 사람들만 잘 따라간다면 내가 여기 남은 손님들에게 해독제를 줄 것이야.”원경릉은 대청 가운데에 위치한 금빛 향로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들은 이미 눈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었고, 손왕비도 눈이 풀려 휘청거렸다.“데려가!” 주명취의 명령에 사내들이 원경릉을 에워쌌다.“주명취 네가 나를 죽이면 너도 죽는 거야!”원경릉이 소리를 지르자 주명취가 음흉하게 웃었다.“내가 죽는 게 무서울 것 같아? 죽는 게 무서웠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지…… 널 죽이고 제왕도 죽이고, 우리 사이좋게 황천길에서 만나자고.”“네 죄로 남은 가족들이 죽어나갈 것은 생각도 안 하는구나?”“그들이 죽든 살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주명취가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원경릉은 사내들에 힘에 못 이겨 질질 끌려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떠나면서 뒤돌아 손왕부를 보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손왕비가 휘청거리더니 바닥으로 쓰러지자 원경릉은 정원에 숨어있던 하인들에게 소리쳤다.“나를 쫓아올 필요 없으니 빨리 사식이를 찾아!”원경릉은 열린 측문으로 끌려가다가 골목에 세워진 마차에 집어던져졌다.잠시후 주명취가 그 마차
멀리 있는 향로에 독을 넣었다는 말에 원경릉은 마음이 놓였다. 만약 주명취가 해독제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소량의 독은 황실의 어의들이 충분히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원경릉은 주명취가 하라는 대로 충실히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주명취의 광기 어린 편집증에 원경릉이 맞서 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주명취는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에 원경릉을 데려가 천천히 긴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만약 주명취의 목적이 원경릉을 죽이는 것이라면 마차에 태워서 이동할 필요도 없다.마차가 부두에 이르렀을 때 주명취가 마차에서 내려 손을 뻗었다.“내 마지막 호의.”원경릉이 주명취의 손을 잡고 내려오자 두 명의 인부가 원경릉의 양 쪽 겨드랑이에 팔을 넣었다.부두에서는 짐꾼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고, 인력거꾼들은 마대를 싣고 달려왔다.그중 한 명이 시간에 쫓겨 급하게 인력거를 몰다가 원경릉과 부딪칠 뻔했다.“걔가 눈이 멀어서 그럽니다!” 옆에 있던 여자 인부가 황급히 사과를 했다.그 순간 원경릉의 얼굴에 희망이 스쳤다.‘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목소리인데?’원경릉은 팔을 단단히 잡고 있는 사내들이 불편해서 몸을 흔들어 사내들의 팔을 뺐다.“아프다고! 내가 알아서 갈 테니 이거 놓아라!”앞장 서던 주명취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그러자 원경릉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를 따라갔다.강가를 따라 걷다 보니 구석에 정박되어있는 배가 한 편 보였다. 인부는 원경릉을 배에 끌어올렸고 주명취도 뒤따라 배에 올랐다. 그 후에도 몇명의 인부들이 배에 올랐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배를 몰았다.배에 탄 원경릉은 은연중에 걱정이 되었다. ‘육지였다면 귀영위가 어떻게 해서든 구하러 왔을 텐데, 배를 타고 간다면… 귀영위가 나를 찾을 수 있을까?’수를 쓰더라도 배가 출발하기 전에 써야 한다.주명취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선실의 등받이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바다를 보았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