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은 궁 안의 많은 여인들이 자신의 남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앞으로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자 원경릉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우문호는 복숭아처럼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호소했다.“왜 화가 났어? 나는 그 여자들한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그리고 네 남자가 얼마나 잘났으면 많은 여인들이 좋아하겠어?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울 일이지.”“나는 다른 것보다 네가 나한테 말하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됐어 그렇게 억울해 할 필요 없어. 어쨌든 그녀는 기왕의 후궁으로 시집가겠지.”말을 마치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이제야 기왕비가 주명양이 후궁으로 들어오든 말든 병풍 보듯 하는 거구나? 주명양의 마음은 너한테 있으니까?”말을 꺼내자 갑자기 이전의 기억이 떠올랐다.“최근에 너네 둘 만난 적 없어? 얘기나 쪽지를 주고받거나? 없어?”“상상력이 대단하구나. 무슨 쪽지를 주고받아?” 우문호가 웃었다.서일은 문 앞에서 원경릉을 향해 윙크를 했다.원경릉은 황당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우문호를 쳐다봤다.“절대 아니라고!” 우문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원경릉은 슬픈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여태까지 나를 속이다니. 나를 뭘로 아는 거야? 됐다 됐어! 앞으로 맘대로 하고 살아!” 그녀의 목이 메었다.우문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끌어안았다.“화내지 마! 내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잖아. 나는 네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런 거야.”원경릉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며 눈시울을 붉혔다.“말할 필요 없어! 그냥 거짓말하고 살아! 나중에 그 여자가 내 뒤통수를 치겠지.”“그 여자가 감히?” 우문호가 눈을 부라리며 “그럼 내가 그 여자의 다리를 부러뜨릴 것이야.”라고 말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자신도 모르게 풀이 확 죽었다.“나가서 다바오 산책 좀 하고 올 테니까 밥이나 먹어.”그녀가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자 서일이 따라나서며 “왕비님 같이
“서일 방금 왕비님께 말한 게 사실이야?” 사식이는 참지 못하고 서일에게 물었다.“물론이죠.” 서일이 장담했다.“방금 한 말은 함부로 하고 다니면 안 된다. 그럼 어제 너는 왕야께서 화난 모습을 봤어?”사식이가 물었다.“아뇨 왕야께서는 전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이상해서 이 사실을 왕비님께 전하려고 하다가 먼저 탕어른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탕어른께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래서 저도 당일에 왕비께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근데 마침 오늘 손왕비께서 왕비에게 얘기를 하셨길래 이를 숨기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서일은 왕비가 울먹이자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웠다.사식이는 서일을 보고 탄식하며 “왕야께서 널 죽일 거야.”라고 말했다.“왜요? 제가 주씨 아가씨를 왕야 앞으로 대령한 것도 아니고.”원경릉은 서일을 보았다.“서일 당장 관아로 가서 어제 주명양에 경조부에 간 것을 본 사람을 찾아와. 그 여자가 아무 이유 없이 경조부에 갈 일이 없을 테니 무슨 이유로 경조부에 왔는지도 알아보고.”“아가씨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남자 같은 옷을 입은 할머니도 있었어요.” 서일이 말했다.“그 작은 할머님?”원경릉이 놀랐다. “그 할머님을 전에 본 적이 있어?”“아뇨. 처음입니다. 그래도 그 옷이 귀하고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서일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했다.“고민할 필요 없어. 네 머리로는 내년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야. 빨리 경조부로 가봐.”“지금요?”“빨리 가. 나는 1초도 더 기다릴 수 없어.” 그녀는 화가 나서 폭발할 것 같았다.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왕부로 돌아온 우문호가 가소롭게 느껴졌다.“왜 이렇게 안 들어와?”우문호는 원경릉이 안들어오자 걱정이 되는 듯 밖으로 나왔다.원경릉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왜 그래?”걸어오던 우문호는 원경릉의 불꽃 눈빛을 보고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잘 왔네. 내가 물어볼 게 있어. 어제 주명양이 관아로 너를 만나러
원경릉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느낌이 들었다.처음에는 그녀는 우문호가 거짓말하는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우문호의 태도를 보자 원경릉은 점차 그와 주명양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어제 관아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하다.원경릉은 눈을 내리깔고 다바오를 보며 “가자!”라고 말하고는 다바오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우문호는 서일을 무섭게 노려볼 뿐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왜냐하면 그는 어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어제 점심을 먹고 매일 하던 대로 관아 구석의 방에 잠깐 눈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문틈으로 주수보가 보였다. 문을 열어보니 주수보 옆에는 주명양이 서있었고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부승을 만났는데 부승이 얼굴에 입술 자국이 있다고 해서 그는 손으로 그 입술 자국을 지웠다.우문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문지기를 불렀다. 경조부의 점심시간에는 문지기만 밖에 서있고 관원들도 순찰을 돌지 않는다. 문지기는 주수보가 문을 두드렸고 그와 주명양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우문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원경릉이 화난 것을 보고도 변명할 방법도 없었고 화가 잔뜩 난 그녀를 감히 건드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화를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대화를 나누는 방법뿐 없었다. 하지만 우문호가 사실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얘기를 하면 원경릉은 틀림없이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우문호는 사식이를 보고 “사식아 가서 왕비를 보살피거라.”라고 말했다.사식이는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며 “왕야께서 그런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남겨진 것은 서일과 우문호 둘뿐. 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서일을 노려보았다.“나랑 한 번 해보자는 거지? 두 발로 걷는 게 지겨워
원경릉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돌아서자 우문호가 쫓아와서 원경릉의 손을 잡아당겼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그래서 뭐? 말해 봐 네가 말하는 대로 그냥 믿을게.” 원경릉은 진정하고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이 남자는 그런 황당한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그가 왜 거짓말을 하는지를 알고 싶었다.우문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주명양이 왔어. 근데 그 이후로는 걔랑 무슨 말을 했는지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 그리고 걔 혼자 온 게 아니야 주수보도 같이 왔었어.”“서일은 주수보를 못 봤다고 하던데? 작은 할머니를 봤다고 했어.”우문호는 서일을 보며 “주수보를 보지 못했다고? 작은 할머니?”라고 물었다.서일은 머리를 긁다가 무엇이 생각이 난 듯 눈을 크게 떴다.“소인 기억이 났습니다! 확실히 주수보는 아니었…… 주수보의 옷! 학이 수놓인 그의 옷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걸 입은 사람이 주수보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남장을 한 작은 할머님 같았는데 얼굴에 주름이 아주 많았습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어. 본왕이 문지기를 불러 물었더니 문지기는 주수보와 주명양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어.”“방에 들어간 후에는?” 원경릉이 물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문지기도 그냥 지나쳤다고 하더라고. 나도 아무 것도 기억 나지 않아……” 라고 말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본왕 얼굴에 입술 자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난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정말이야.”원경릉은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그들이 방에 들어가서 얼마나 후에 나온 거야?”“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라고 문지기가 말했어.”“나갈 때 문지기가 주수보를 보았대 아니면 할머니를 봤대?”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문지기는 나가는 사람을 똑바로 보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배웅하거든.”이라고 말했다.“그럼 너는 주수보랑 주명양이 들어오는 것은 기억이
깊은 밤이 되자 우문호는 침실을 맴돌다 솜이불 하나를 들고 침실 밖의 회랑(回廊)에서 잠을 잤다. 우문호는 이불을 꼭 끌어안고 생각을 했다. 그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분했다.바닥은 딱딱하고 뒤척일 때마다 허리가 시큰거리고 등이 아팠다. 그는 한밤중에 살금살금 침실로 들어갔다. 쓱 목을 빼서 보니 원경릉은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는 살포시 발을 들어 침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등을 대고 눕자 원경릉이 바로 발로 그를 걷어찼다. 그는 침상 아래로 떨어졌고 아픈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다시 회랑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원경릉은 그가 회랑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새겼다. 그녀는 사실 우문호를 믿고 있었다. 그가 정신이 멀쩡했으면 절대로 주명양과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없다. 우문호는 주명양을 증오했고, 그 사실은 원경릉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명양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일까? 우문호 몰래 들어가서 무슨 짓을 했다면 그녀는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우문호는 동이 트자마자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원경릉 앞에 대령했다. 원경릉은 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얼굴 몇 번 닦았어?”라고 물었다.“삼백 번! 삼백 번은 닦았어! 봐봐 얼마나 박박 닦았는지 뼈가 보인다니까?”우문호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원경릉은 능청을 떠는 우문호가 꼴 보기 싫었다. 때마침 사식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왕비! 탕양 어른이 찾아오셨습니다!”사식이는 우문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우문후는 사식이의 말을 듣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나 보구나! 들어오라고 하여라!”탕양은 소월각에 도착하자마자 서일에게 잡혀 어제 왕부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다. 서일은 우문호가 원경릉에게 뺨을 맞았다고 말했다. 탕양이 들어오자 제일 먼저 우문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많이 야윈 것 같았다. “조사가 끝났느냐?” 우문호가 그에게 인사도 생략하고 다급히 물었다.“예. 주
우문호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원경릉의 손을 잡았다. “이거 놔!”원경릉이 손을 뺐다.“가만히 있어. 네 손을 잡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진단 말이야. 그래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원경릉은 할 수 없이 그가 손을 잡도록 내버려 두었다.잠시 후 원경릉은 우무호에게 “이제 좀 기억이 나?” 라고 물었다.“안고 있으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우문호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너…… 좀 진지하게 굴 수 없어?” 원경릉이 분노했다.“나 지금 엄청 진지해. 근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서 모든 것들이 엉키는 기분이야.”“잘 생각해 봐. 주수보의 손이나 옷, 머리 장신구 혹은 다른 것들……” 원경릉인 천천히 말했다.“옷…… 그 옷에는 학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게 움직이면서 소리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우문호가 고개를 들었다.원경릉은 무언가 깨달은 듯 서일에게 “빨리 나가서 술하고 살아있는 닭 한 마리를 가져오게.” 라고 말했다.서일은 빠르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가 술과 닭을 들고 들어왔다.“반 병만 마시는 거야.” 원경릉은 술병을 들고 우문호에게 말했다.“왜 술을 마시라는 거야?” 우문호가 물었다.“그냥 마셔!” 원경릉은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 그를 재촉했다.술을 받은 우문호는 고개를 들고 꿀꺽꿀꺽 술을 반 병 마셨다.“이제 이리 와서 의자에 반쯤 걸 터 앉아 봐.”우문호는 의자로 걸어가면서도 머리가 팽글팽글 도는 기분이 들었다.원경릉은 닭을 가슴에 안고 우문호에게 다가가자 놀란 닭이 소리를 빽 질렀다. 우문호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닭이 우는소리가 귀에 거슬리는 듯 두 눈을 질금 감았다.원경릉은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몸에 긴장을 풀고 머리를 비워.”우문호는 온몸이 축 처지고 긴장이 풀렸다.“당신은 지금 관아에 작은방에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매우 졸립니다. 눈이 감깁니다. 근데 어디선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당신은
주명양의 손은 천천히 그의 허리를 감더니 그의 허리띠를 풀고 요염하게 웃었다.“소첩을 가지세요. 왕야가 갖지 않으면 소첩은 기왕의 후궁이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그녀의 입술이 그의 뺨과 귀에 닿았다. “문호 오라버니. 나를 갖고 싶지 않습니까?”우문호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더니 갑자기 한 손으로 주명양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꺼져!”주명양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우문호의 귀에는 짹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주명양을 노려보았다.옆에 있던 주수보가 다가와 주명양을 당기며 고개를 저었다.“안되겠어. 그의 저항력이 너무 강해. 이만 가자.”주명양은 그를 노려보며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끌려갔다.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주수보는 천천히 문쪽으로 걸어가며 가면을 찢었다. 가면이 벗겨지자 주름진 얼굴이 드러났다. “왕야, 오늘은 실례했습니다. 왕야의 혼인 증표를 가져가겠습니다. 이제 저희 둘째 아가씨는 왕야와 혼인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말을 마치고 노인은 우문호의 허리춤에 달린 옥패를 끊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는 주명양의 한쪽 귀고리를 빼서 우문호의 비단 주머니 속에 넣었다.잠시 후 정신이 든 우문호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문을 열고 그들을 내보내고 다시 누웠다.얼마나 지났을까 우문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그 앞에는 원경릉과 서일 그리고 사식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주머니를 뒤집었다. 과연 그 안에는 진주 귀고리 하나가 들어있었다.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주명양의 덫에 걸리다니.’그는 원경릉을 보고 두 손을 들고 맹세했다.“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서일은 웃으며 “알겠습니다. 왕야께서 방금 다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주명양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기왕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스스로 말해놓고 지금
우문호는 바로 주부(周府)로 가지 않고는 경조부 관아로 향했다.관아에 도착한 우문호는 당일에 근무한 문지기와 그날 주명양을 본 관원들 그리고 예친왕과 소요공도 함께 주부로 데리고 갈 준비를 했다.주수보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명양이 밤새도록 밖에 무릎을 꿇고 앉아 초왕과 혼인 증표를 주고받았으니 기왕과의 혼사를 취소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주수보는 주명양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손녀인 주명양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그는 주명양이 밖에서 얼어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당일 아침.주명양이 걱정된 주대부인이 주명취를 주부로 불러 주명양을 설득하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고 온 주명취는 주명양이 우문호와 혼인을 하겠다고 하자 깜짝 놀랐다. 주명양이 주수보의 정원에 들어서자 주명양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 모습이 마치 서리 맞은 동백꽃처럼 생기는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에서는 굳은 심지가 보였다.“주명양.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한 것이냐? 기왕과 혼인하는 게 싫어?” 주명취가 물었다.주명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내가 누구한테 시집을 가든 언니랑 무슨 상관입니까? 언니는 당연히 내가 초왕에게 시집가는 게 싫겠죠? 언니는 못 누릴 호사를 내가 누릴 생각을 하니까 배 아픕니까?”“너는 왜 말을 그따위로 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무슨 죄라도 지었어?” 주명취가 화를 냈다.“그럼 내가 무슨 결정을 하든 내버려 둬요! 서로 신경 쓰지 말고 살자고요!” “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런 거다! 너는 왜 우문호와 혼인을 못해서 안달인 거야? 보아 하니 초왕비가 하루 이틀 내에 죽을 것 같지 않은데, 넌 만년 후궁 자리라도 좋다는 거야? 기왕은 정비 자리라도 노려볼 수 있잖아!”“그럼 지금 당장 죽여요.” 주명양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주명취를 보았다.“그걸 지금 말이라고!”주명양은 밤새 무릎을 꿇고 조부를 기다렸지만 주수보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