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상궁을 살려서 곁에 두는 이유“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상 어르신은 안녕하시지요?” 희상궁이 말했다.“그래, 상궁은 지금 왕비의 시중을 들고 있다고?” 주재상이 인사말을 나누는 것 같지만 원경릉의 귀엔 상당히 화기애애하게 들렸다.“예!” 희상궁이 말했다. 희상궁은 내내 똑바로 주재상을 바라보지 않았다.반면 주재상은 계속 희상궁을 뚫어지게 쳐다본다.원경릉은 문득 자기가 곁다리란 생각이 들어 한걸음 물러났다.원경릉은 희상궁과 주재상 사이에 얽히고 설킨……과거가 있었음을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론 잘 모른다.전에 원경릉은 두사람은 먼 옛날 관계라 여전히 서로가 마음에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특히 주재상은 지금 높고 막중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젊었던 한 때 궁녀에게 설레고 두근거렸던 마음을 기억할 리가 없겠지?그러나 지금 주재상의 눈빛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마부와 서일이 마차를 한쪽으로 치우고 어찌어찌 길을 비킨 셈이 되었다.마부가 와서: “나으리, 가시지요.”주재상은 미소 띤 얼굴로 원경릉에게: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재상 어르신 살펴 가세요!” 원경릉이 말했다.주재상은 바로 가지 않고 희상궁을 보는데 눈빛마저 온화하게, “희상궁 몸조심하게.”“재상 어르신 강녕하소서!” 주재상에 비해 희상궁은 딱딱하게 말하는 것이 냉담함이 도드라져 보였다.주재상은 또 그윽하게 희상궁을 쳐다보고 비로소 떠나갔다.마차에 올라 주재상의 가리개를 내리기 전에 희상궁을 한번 더 봤다.마차는 희상궁 곁을 지나는데 가리개는 다시 열리는 일 없이 서서히 사라졌다.희상궁은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서 있는데 표정이 쓸쓸하다.서일이 마차를 고치고: “잠깐 궁까지는 모셔다 드릴 수 있겠습니다. 궁에 도착하면 소인이 다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원경릉과 희상궁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희상궁은 가는 내내 말이 없고 원경릉도 묻지 않았다. 사적이고 은밀한 부분에 관한 일은 묻는 개 마땅치 않다.마침내 궁에 거의 다되어 갈 무렵 희상궁이 입을 열어: “
주재상에 대한 희상궁과 원경릉의 생각한참을 생각하더니 원경릉이: “그땐 감히 못 그랬죠.”“감히 못 하셨다고요? 이건 분명 제대로 된 이유는 아니군요.” 희상궁이 말했다.원경릉이 웃으며: “그래요, 확실히 제대로 된 이유는 아니네요.”하지만 이런 생각도 가능한 게 당시의 원경릉은 사면초가였거든.“그래서요?” 희상궁이 물었다.원경릉이 한숨을 쉬며, “모르겠 어요, 사람 인연이란 게 야릇해서 당시 내가 입궁할 때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는데 희상궁이 유일하게 나한테 잘해준 사람이었 거든요. 그거 영원히 기억할거예요.” 그런 희상궁의 배신을 겪었으니, 저 말은 확실히 앞 뒤가 맞는 말은 아니다.하지만 희상궁의 마음을 울렸는지 눈물 같은 것이 얼핏 비쳤다.“영원히.” 희상궁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쓸쓸하게 웃었다. “오래 전에 누군가 저에게 영원히 잘해주겠다고 했지요.”“그 사람 그러지 못했어요?” 원경릉이 물었다. 그 사람 혹시 주재상 아냐? 아니다, 주재상이 고작 궁녀 하나로 눈에 찰 리가 있겠어? “전 안 믿어요!” 희상궁이 실의에 찬 표정으로, “누가 믿겠어요? 그 사람은 어떤 분이며 제 신분은 또 어떤 데요? 안 믿어요. 쭉 사실여부를 모르는 게 좋아요.”슈뢰딩거의 고양이다.믿지 않고, 시도하지 않으면 답은 영원히 두 개로 남아 있다.원경릉은 탄식했다.“이번 생은, 이렇게 뭣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희상궁이 조용히 말했다.“아름답고도 슬픈 옛날 이야기네요.” 원경릉이 말했다.희상궁이 웃으며, “그런 가요?” 아름답지 않다. 오직 당사자만 알 뿐이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그 오랜 세월, 기나긴 고통을 희상궁은 하나하나 다 겪으며 지나왔기 때문이다.후회했지만 한없이 후회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일단 끝없이 후회하기 시작하면, 수많은 헛된 마음이 들고 그러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지금은 비록 뭣도 모르는 것처럼 이나마 한평생을 평안하게 아무 일없이 고인 물처럼 지냈다.원경릉이 분위기가 갑자기 애통해지는 것을 느끼고: “맞아
황후의 팔찌대낮도 아닌데 이렇게 촉박하게 연회를 거행하는 게 분명 황후에게 무슨 속셈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원경릉이 왔을 때 손왕비는 이미 와있어서 원경릉에게 와서 인사를 했다. 원경릉이 보니 등불 아래 각양각색의 소녀들이 연지분을 바르고 그들의 노리개와 패옥에서 딸랑 거리는 소리가 난다. 저 멀리 주명취와 주명양 자매도 자리한 게 보인다.“오늘 밤은 정말 왁자지껄하네!” 원경릉이 말했다.손왕비가 웃으며: “당연히 왁자지껄하죠, 황후께서 친히 초대장을 보내셨는데 누가 감히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대낮에 거행하면 좀 좋아요?” 원경릉이 말했다.손왕비가: “흠천감에서 앞으로 며칠간 계속 비가 오니 이 귀하신 아가씨들께서 젖으면 낭패고 황후마마도 성격이 급하셔서 자연스럽게 밤이라도 구애 받지 않으시는 거죠.”그렇게 된 거로 구나.손왕비와 원경릉이 앞으로 걸어가니 공주들이 거의 모두 출석해 있다.우문령은 원경릉이 즐거운 것을 보고 원경릉의 손목을 잡고, “가요, 우리 먼저 황후마마께 안부인사를 드리고 어마마마께 인사 드리러 가요.”“태후마마 오셨어요? 먼저 태후마마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원경릉이 물었다.“태후마마는 안 오셨어요. 괜히 가서 나이 드신 분을 귀찮게 하지 말아요.” 우문령이 말했다.황후와 몇 명의 비빈은 화원 정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고, 우문령은 원경릉을 데리고 가서 문안인사를 드리고 손왕비는 아까 인사를 해서 따라가지 않았다.황후, 귀비, 현비, 덕비, 진비가 모두 있는 가운데 원경릉이 가서 일일이 인사를 드렸다.원경릉은 가장 최근에 혼인했고 초라한 후작 가문의 딸에서 일약 친왕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황제 폐하와 태상황 폐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소문에 부부 금슬도 좋다니 당연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현비를 제외하고 말이다.현비는 아무리 뜯어봐도 원경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출신이 문제인 게, 행동거지가 신분에 맞게 우아하지 못해서 망신스럽고 눈꼴사납다.예를 취하는 꼴도, 말본세도,
원용의와의 만남우문령이: “알아요.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 못하죠. 하지만 새 언니는 믿을 수 있으니까.”원경릉이 웃으며 이 아이는 정말 단순해서 둘이 그렇게 오래 만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다니 역시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하지만 한편으론 이 아이의 천진함에 감동했다.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은 약간 단순해야 해야 하지만 황궁에서 자라고 있으니 단순한 건 치명적일 수 있다.“새언니, 어마마마가 언니를 완전 안 좋아해요. 다음엔 언니한테 도움이 될 말을 할까 봐요.”우문령이 말했다.원경릉이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그럴 필요 없어요, 현비마마께서 나를 대하는 눈빛이 한순간에 바뀔 순 없어요. 어쩌면 평생 안 바뀔 수도 있죠.”“왜요?” 우문령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원경릉이: “예로부터 고부간은 서로 눈에 거슬린다고 해요. 우리는 둘 다 같은 남자를 좋아하거든요.”우문령이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으며, “그럼 언니도 어마마마가 눈에 거슬려요?”그래요, 어디 눈에 거슬리기만 하겠어요? 아주 싫죠.“어떻게 하죠? 이제 와서 비위를 맞추긴 늦었네요.”우문령은 이 문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원경릉의 손목을 끌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만나는 사람마다 작은 목소리로 원경릉에게 소개 해주었다. 이건 누구의 천금 같은 딸이고, 이 분은 누구의 금지옥엽이고, 이분은 어느 집안 큰딸이라고 말이다.원경릉은 우문령의 기억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문령은 구중궁궐에 살아서 바깥 사람을 접촉할 기회가 매우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명확하게 기억할 수가 있을까?“용의(詠意).” 우문령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원경릉을 데리고 청색 해당화 자수가 놓인 하얀 치마를 입은 소녀에게 다가갔다.소녀는 둥글고 매끄러운 얼굴에 눈이 크고 짙은 눈썹에 양 갈래로 머리를 올리고 있어 특히 귀여웠다.소녀가 우문령을 발견하고 바로 그녀의 손을 잡고 씩 웃는데, 하얀 이빨이 가지런하게 빛났다.어떤 사람은 한번 보면 특히 좋아할 외모다.원경릉은 그녀가 좋
천진난만한 우문령과 원용의“맞아, 오늘밤 꽃감상 연회는 사실 우리 오빠들을 위해 후궁을 뽑으려는 목적이야. 용의야, 넌 우리 오빠들 중에 누가 좋아?” 우문령이 물었다.원용의는 하염없이 원경릉을 바라보며, “초왕 전하.”원경릉은 깜짝 놀라 이 귀엽고 순진한 아이를 쳐다봤다.원경릉은 이 아이가 너무 좋아서 어쩌질 못하겠다. 우문호 그 호색한에게 미쳤어, 가당 키나 해?우문령이 좋아라: “잘됐다. 네가 우리 다섯째 오빠 후궁으로 시집오면 다섯째 새언니랑 짝꿍 하면 되겠다.”“바로 그거야!” 원용의는 감격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사슴 같은 눈망울로 원경릉을 쳐다본다. “새언니 어때요? 이따가 황후마마께서 언니더러 누가 좋으냐고 하면, 용의가 좋다고 말씀하세요.” 우문령이 신나서 말했다.원경릉은 미소를 머금고 우문령의 뇌를 꺼내 연구 표본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왜? 오늘은 제왕 전하를 위해 후궁을 뽑은 날이잖아요, 모든 친왕은 그걸 돕는 구성원이죠.” “꽃감상 연회잖아요. 마음에 들면 맞아들이는 거죠.” 우문령이 말했다.꽃감상 연회는 어화원의 꽃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아직 피지 않은 혹은 앞으로 필 송이송이 소녀라는 꽃을 감상하는 연회다.원용의는 두 사람의 화제가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듯 원경릉만 주구장창 바라본다.원경릉은 백기를 들고 바로 손왕비를 찾아갔다. 손왕비는 지혜 주머니 같은 사람과 얘기할 필요가 있었다.“어때? 물색 끝났어?” 손왕비도 비꼬며 말했다.원경릉이 눈을 흘기며, “꽃감상 연회라는 게 고작 모든 친왕들 후궁 찾는 목적인가요?” “그래.” 손왕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건 너무……” 원경릉은 아무 힘도 없는 주제에 해도 되는 말일까?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젠 모르겠다.손왕비가 해명하며: “후궁을 맞는 건 원래도 급한 일은 아니고 예전에도 이렇게 중요시된 적 없어. 하지만 지금 대를 잇는 것이 급한데 친왕비들에게 회임 소식이 없는데다 제왕비의 가짜 임신 사건으로 태후마마께서 자연히 마음이 급해 지셨어.
후궁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원경릉과 우문호꽃감상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과연 황후가 원경릉과 손왕비를 오라고 부르더니 어느 가문의 영양이 특히 호감이 가는지 물었다.손왕비는 몇몇을 언급했고 원경릉은 고개를 흔들며: “없어요.”이 말은 황후와 마마님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다들 속으로 말하길, 초왕비가 질투가 심하다더니 정말이네.하지만 현비가 앞에 있어서 누구도 말로 하진 않았다.황후도 억지로 웃으며,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었 다니 그럼 할 수 없지.”원경릉은 현비의 매서운 눈총을 받았다.출궁할 때 희상궁이: “왕비마마 반드시 몇을 언급하셔야 합니다.”“몇이라고?” 원경릉은 가슴이 답답해서, “나는 하나도 언급하고 싶지 않은데, 몇 명이나 언급해야 한다고?”희상궁이: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 뿐이지요, 결국 후궁을 몇이나 둘 수도 없고, 꽃감상 연회는 황후마마께서 주관하시니 몇몇이 좋다고 말해서 황후의 체면도 세워 주는 것이지요. 왕비마마께서는 손왕비마마께서 정말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저 체면 치레일 뿐입니다. 대충대충 황후마마의 체면을 구기지 않고 자신의 명예도 다치지 않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왕비마마께서는 오늘밤 확실하게 질투심이 많은 여자라는 오명을 쓰셨습니다.”원경릉은 하늘이나 알지 누가 알까?초왕부로 돌아와서 우문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원경릉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한마디도 묻지 못했다. 괜히 잘못 물어봤다가 미움을 받을 까봐 서다.원경릉은 퉁명스럽게: “앉아,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우문호는 는적거리며 원경릉 곁에 앉아, 무심한 척: “오늘밤 꽃감상 연회는 어땠어?”“감상하느라 눈이 짓무르는 줄 알았네.” 원경릉은 우문호를 보니 화가 나면서, “모든 친왕이 다 후궁을 둬야 하는 거야?”“꼭 그렇지만은 않아.” 우문호가 원경릉의 배를 보며, “만약 네 배가 좀 분발해준다면, 아바마마께 후궁을 사양할 빌미가 될텐데 말이야.”원경릉이 매우 슬퍼하며, “어떤 게 분발하는 건데?”“10명은 안 되도 8명쯤
제왕의 후궁이 된 원용의와 기왕 후궁의 죽음원경릉 생각에 여자 아이가 우문호를 피해 숨는 건 정말 우문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좋아해서 일 가능성도 있다. 소녀의 수줍음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원경릉이: “널 좋아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일부러 너를 피해 숨는 거? 원용의는 수줍음을 많이 타 더라고.”“부끄럽다고?” 우문호가 하하 웃으며, “네가 부끄럽다고 하면 내가 믿겠는데, 용의가 부끄럽다는 건 절대로 못 믿어. 그 기지배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파락호라고.”원경릉이 우문호에게,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해. 오늘밤 내가 본 용의는 완전히 애교 있고 수줍음을 타는 얼굴에, 비록 빤히 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내가 자기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뒤로 숨더라.”우문호도 의아해하며: “그럼 분명 같은 사람이 아닐 거야. 용의 기지배는 절대 부끄러워할 리가 없거든. 남자보다 간이 큰 녀석이야.”“그럼 너는 왜 용의가 널 무서워한다고 해?”우문호가 지난 일을 얘기하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용의가 처음 입궁할 때로 고작 대여섯 살이었을 거야. 원부인이 그녀를 데리고 궁에 와서 황조모께 안부 인사를 드리고 당시 나도 고작 열한두살이라 놀기 좋아했지. 어화원에 작은 뱀이 한 마리 있었는데 내가 잡아서 놀다 보니 재미나서 황조모께 가져다 드리고 싶지 뭐야.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 뱀을 놓치는 바람에 그 뱀이 용의 지지배 치마속에 들어갔지. 놀란 용의는 주저앉아 울었지. 그때 이후로 용의 인생에 제일 두려운 게 바로 뱀이랑 나야.”우문호는 위대한 업적이라도 말하듯이 아주 기고만장하다.원경릉이 우문호에게 눈을 흘기며, “꼬마 여자애나 울리고, 아주 영웅 나셨네.”우문호는 마음이 홀가분해 졌다. 만약 용의 지지배면 절대로 자기에게 시집올 리 없기 때문이다.며칠 지나 우문호는 룰루랄라 궁에서 돌아와 원경릉을 끌고 소월각으로 갔다.“일곱째의 후궁이 결정됐어.” 우문호가 흥분해서 말했다.“누구로?” 원경릉이 자기도 모르게 물어봤다.“바로
기왕은 슬퍼했다. 그는 붉은 눈으로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문호는 처참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기왕의 모습을 보고 그가 유후궁(劉側妃)에 대한 마음이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문호는 앞으로 나가 앉았다. “형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기왕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돌려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왔구나!”“응, 부황께서 와보라고 하셨습니다.”그는 사건 조사하러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우문호가 말하지 않아도 기왕은 우문호가 온 목적을 알고 있었다. 기왕은 몸을 곧게 펴고 앉아 표정을 가다듬었다.“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다른 부중 사람들에게는 다 물어봤잖아.”“형수님을 빼고는 다 물어봤습니다.”우문호가 답했다.기왕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담담하게 “네 형수는 몸이 안 좋아서 부중의 일은 하나도 몰라. 그녀에게 물어봐도 소용없을 거야.”라고 말했다.“후궁의 시녀가 말하길, 후궁이 사고를 당하기 전에 부친으로부터 황량한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형님에게 부황께 사정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우문호가 말했다.기왕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지. 하지만 본왕은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어. 그녀의 부친이 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는 그런 부탁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었지”“형님께서 당부를 하셨다고요?”기왕은 수심에 잠긴 채 괴로워했다. “본왕이 너무 모진 말을 해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아…….”“형님께서는 자결했다고 보십니까?” 우문호가 물었다.기왕은 우문호를 보며 “자결이 아니면? 타살이라는 말이냐?”라고 물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조사해 보거라.” 기왕은 지친 모습으로 손을 저었다.“이 사건 외에 혹시 후궁에게 혹시 다른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기왕은 차갑게 웃으며 “무슨 안 좋은 일? 그녀가 본왕의 아이를 임신했지 않는가? 아들만 잘 낳으면 평생 귀한 대접을 받으면 잘 살았을 텐
원경릉은 추 할머니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리 나리를 몰래 끌고 나가 조용히 물었다.“왕비께 자녀가 있습니까?”그러자 이리 나리가 되물었다. “예이와 진이를 말하는 것이냐?”원경릉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네, 예이와 진이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북당에는 없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이미 추 마마를 보러 오라고 하셨다는구나.”추 할머니와 왕비가 같은 세대 사람이였기 때문에 이리 나리는 항상 추 할머니를 마마라고 불렀다.“그들이 돌아온다니… 정말입니까?”원경릉은 순간 이유 모를 흥분을 느꼈다.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 북당이 그들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아,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뻤다.“그래. 돌아올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돌아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부님이 명을 내렸으니,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마 다섯째도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어찌 그들은 친왕과 왕비의 곁에서 지내지 않는 것입니까?”“상황을 대충 알고 있지 않느냐? 사부님께서 한때 황태자가 될 뻔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무상황도 장인어른께서도 황위에서 물러나 다섯째가 황제가 되었다. 상황이 변했으니, 그들도 이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혹시 그들이 너무 조심스러웠던 건 아닙니까? 굳이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것입니다.”원경릉이 답했다.이리 나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작은 위험이라도 있을 수 없다. 작은 일이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조정에 폐를 끼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동안 일이 참 많지 않았냐?”원경릉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에 수많은 문제가 쌓여 있어 몇십 년 동안도 해결되지 않았으니, 굳이 더 많은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세히 생각하니, 북당이 그들에게 빚진 것이 참 많은
하지만 원경릉은 거절했다. 모두가 시중을 들지 않는데, 그녀만 시중을 데리고 오면 괜히 특별한 척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후라는 신분도 숙왕부 사람들 눈에는 단지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그녀는 짐을 다 챙긴 후, 계란에게 아버지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곤, 서일의 보호를 받으며 궁을 나섰다.그러자 사식이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막 궁에 왔는데, 원경릉이 다시 나가버리니 앞으로 심심한 나날을 보내야 할 자신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원경릉이 숙왕부에 도착했을 때, 이리 나리 부부도 추선을 방문하기 위해 와 있었다.이리 나리도 추선과 정이 깊은 사이었다. 공주는 원경릉에게 이리 나리가 어렸을 때부터 왕비가 키웠다고 말해 주었다. 처음에는 왕비가 아이를 키우는 법을 모르기에 대부분 추할머니가 그를 돌보았는데, 나중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도 추할머니 덕분에 엄한 왕비 곁에서 고생을 조금 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 왕비께서 아이를 낳지 않으셨으니, 아이를 키우는 게 익숙하지 않으셨겠지요.""듣자 하니, 왕비께서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으셨다고 하네. 열몇 살에 어디론가 보내셨다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리도 그들을 몇 번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왕비께서 아이를 낳으셨다니요?"원경릉이 살짝 놀란듯 물었다."저는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보친왕..."공주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네. 정말 아니네. 왕비께서 직접 낳으신 아들딸이네. 쌍둥이고, 나리보다 훨씬 나이가 많네.""그렇습니까?"원경릉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 왕비 부부가 은거하고 지낸 탓에 자녀를 보지 못한 것이 이해는 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 그들은 경성에 머물러 있었고, 자녀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관계가 아무리 나빠도 몇 년 동안 부모를 찾아오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혹시나 부모와 자식 간에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 되었다. "그렇네. 나리가
추선의 방에서 나온 원경릉은 청우헌으로 가서 세 거두와 이야기를 나누고 혈압까지 재주었다.그녀는 그들의 말에서 추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추선으로, 왕비의 옛 시녀였다. 그러나 가장 힘든 시절에 추선은 왕비와 왕부를 떠나지 않았고, 줄곧 평남왕 우문극을 돌봐왔다고 했다.그리고 그 두 명의 첩인 운 마마와 몽 마마는 실제로 왕비의 첩이라고 했다. 대체 왜 왕비의 첩이 되었는지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두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녀들은 이미 왕비의 첩으로 불렸다.세 거두는 추선의 병세를 물었다. 원경릉이 악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자 충격을 받았다.현대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그들은 ‘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에 한순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아, 원경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왕비의 시녀라 하셨는데, 잘 아시는 것입니까?”무상황이 말했다.“숙왕부에서는 누구의 시녀인지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매미도 시녀를 그만두고, 모두와 함께 고생했다. 평생 혼인도 하지 않고.”“매미요?”“네가 말하는 추선이다.”원경릉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추선의 이름을 매미로 부르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추선이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숙왕부 전체에 퍼졌고, 많은 사람이 원경릉에게 그녀의 병세를 물었다.원경릉은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도, 누군가를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평소 그들은 늘 차가운 태도를 보였고, 유일하게 열정을 보일 때는 식사 시간뿐이었으니 말이다.그날, 원경릉은 숙왕부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숙왕부의 식사 방식은 한 사람이 큰 사발 하나씩 받는 것이었다. 이날 집안사람들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아, 남긴 음식이 가득했다.이런 일은 전례가 없었다.원경릉은 이로부터 추선이 그들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소요공에 따르면, 과거 추선은 적성루에서 음식을 배분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고기를 얼마나 줄
“이전에 무슨 큰 병을 앓았습니까?”원경릉이 물었다.“폐결핵이었네. 의원을 불러 치료했지만, 몇 년 동안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았네.”왕비가 대답했다.“치료했던 의원의 능력이 뛰어났겠습니다. 누구였습니까?”“주진이요.”왕비가 말했다.주진의 이름을 들으니, 원경릉은 그녀가 왕비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자라는 것을 확신했다.원경릉은 초능력을 사용해 노파의 폐 상태를 감지했다. 결절과 섬유화가 있었고, 심지어 종양으로 의심되는 덩어리도 발견했다. 나이가 많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고, 우선 약물을 통해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그저 악성이 아니길 바라며 기도할 뿐이었다.우선 링거를 놓고 산소를 공급하며, 스테로이드를 사용해 기관지를 확장해 그녀가 조금 더 편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했다.약물을 사용하자 노파의 안색이 서서히 나아졌고, 호흡도 훨씬 수월해졌다.그러자 노파가 감사의 말을 전했다.“이렇게 숨을 쉬어본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두 명의 나이 든 여성이 방을 드나들었다. 다들 원경릉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왕비가 그녀들을 소개해주었다.“모두 수년간 나와 함께해온 사람들이네.”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내 첩들이네.”그러자 원경릉은 자신이 잘못 들은건 아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첩인지 아니면 왕의 첩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질문하기엔 입이 쉽게 열어지지가 않았다.잠시 후, 원경릉이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그럼, 이분은요?”“날 처음 모신 사람이네. 이름은 추선이야. 수십 년 동안 대부분 평남왕부에서 평남왕을 돌보며 지냈네.”왕비가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원경릉은 이해했다. 그들은 정말 이곳에 정착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전에 함께 지내던 사람들을 하나씩 데려와 함께 여생을 보내려는 것이었다.젊은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니, 나이가 들어도 서로 곁에 머물고 싶어 했다.왕비는 원경릉과 함께 밖으로 나와 진지하게 말했다.“심각하다는 건
다섯째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아이가 혼인을 올리지 않고 곁에 머무는 건 분명 기쁜 일이었고 효심이 있는 일이었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외로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만약 자기와 원경릉이 저세상으로 떠난다면, 그녀가 혼자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싶었다.그렇다고 해서 혼사를 허락하자니, 세상에 과연 걸맞은 사내가 있을지 걱정되었다.택란을 그녀보다 못 한 사내에게 보내는 건 그녀에게 너무 큰 희생이다.다섯째가 갈등하는 것 같자 원경릉이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택란은 이제 여덟 살이네. 너무 앞서 생각하지 마오.”다섯째가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자네는 모르네.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흘러가네. 벌써 여덟 살이니, 7년만 지나면 성인이 되오.”그는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두는 게 좋소. 너무 멀리 내다봐도 소용없네.”원경릉은 그의 손을 잡고 살며시 깍지를 꼈다.“아이도 운명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언젠가 자네만큼 훌륭한 남자를 만난다면, 그와 혼사를 해도 나쁠 게 없지 않겠소?”“그런 남자는 있을 리 없소!”우문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이런 칭찬해도 우문호는 여전히 복잡해 보였기에, 원경릉은 자신이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후회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택란이 태어난 날부터 우문호에게는 새로운 적이 생겼다. 바로 택란과 혼인할 상대였다.그 적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그는 여전히 미워하고 있었다.더구나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혼사를 직접 언급했으니, 이제 그 적은 실체가 생겼고, 이에 따라 그는 한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그 후 며칠간 택란은 매우 순진하고 착하게 행동했다. 아버지가 시간이 날 때마다 곁에 머물며 대화를 나누고, 놀고,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아부하는 법을 터득해, 다섯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더 이상 화낼 수 없게 했다.다
”이제 화가 풀린 것이오?”원경릉이 웃으며 물었다.“화 풀렸네. 하지만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조심해야 하오. 어린 자식이, 정말 너무하오!”우문호는 선물을 하나 열었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도자기로 만든 정교한 인형이 있었는데, 머리카락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는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이 도자기 인형, 정말 우리 딸을 닮았구나. 예쁘오!”“내가 산 것이오!”원경릉이 질투라도 난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산 것이니 더 좋소. 아주 좋아!”우문호는 선물을 하나씩 열어보며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몇 개를 연 후에야 그는 약도성의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원경릉은 자리에 앉아 약도성에서 있었던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특히 택란이 약도성에서 보여준 대처 방법에 대해 상세히 말했다.그러자 우문호가 매우 놀라며 말했다.“택란이 지진을 예측하고 백성들을 대피시켰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오. 정말 대단하네. 원 선생, 난 택란이 약도성에서 놀기만 했을 줄 알았네. 몰래 이런 큰일을 해내다니.”“택란과 경단은 모두 자네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오. 자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말이네. 그래서 자네한테 말하지 않았던 거고. 이게 택란이 자네를 더 사랑한다는 이유요. 자네를 평생 아끼며 짐을 덜어주고 싶어 하오.”우문호는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원 선생,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소.”원경릉은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웃으며 말했다.“그래, 우시오. 우리 큰 아기 울어도 괜찮네!”우문호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자네가 날 ‘큰 아기’라고 부르니 눈물이 갑자기 멈추네요.”“그럼 울지 말고 어서 앉으시오. 약도성 백성들이 택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말해주겠소.”원경릉이 그의 팔을 잡아 의자에 앉히고는, 약도성에서 한 달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우문호는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감동하였다. 특히 약도성 백성들이 택란을 존경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믿기 어려워했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
목여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문호에게 말했다.“폐하, 공주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공주께서는 단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한 것 뿐입니다.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왕과 위왕도 그곳에 있었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잖습니까?”우문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택란이 자네에게는 과자 한 조각을 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주더군.”택란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아버지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환심을 사려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드셔 보세요. 이건 그렇게 달지 않은 생강 과자인데, 정말 맛있습니다!”생강 과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딸의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니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결국 한입 물었고 생강과 설탕의 맛이 입안에 퍼졌고, 딸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니 얼굴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나도 먹고 싶은데.”원경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다섯째야, 맛있느냐?”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정을 어겼으니, 좋은 표정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원경릉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택란아, 나한테도 한 조각 줘 보거라!”택란은 다시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엄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의 엄마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원경릉은 과자를 먹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다 먹었으니 나가서 좀 자거라.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못 잤으니.”“예!”택란은 얌전히 대답하고 나머지 과자를 빨리 먹어 치운 뒤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한 번 안아주었다.“아바마마, 저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깨고 나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우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어서 가거라.”택란은 목여 태감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한 번 돌아보며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원경릉은 문을 닫고 탁자 옆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