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걸에게 상을 내려도 모자랄 판에!” 원경릉이 분노했다.“본왕도 그렇게 생각한다. 안 그래도 마음이 쓰여 오는 길에 성문에 들러 그를 보고 오는 길인데, 원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성문을 지키고 있더라.”우문호는 한숨을 내쉬었다.원경릉은 실망감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원경릉은 연구원으로 정치에 문외한이지만, 만약 원걸에게 벌을 내리면 백성들이 실망할 것임을 알았다.“다른 방법은 없어?” 원경릉이 물었다.우문호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없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잔인해 정말.” 원경릉이 한숨을 내쉬었다.수장이 없었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해낸 수장에게 상을 못 주더라도 벌을 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두 사람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 왕부로 오기 전에 국자감에 냉정언을 보고 왔어.” 우문호가 말했다.“무슨 방법이 있대?” 원경릉이 다급히 물었다.우문호는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네가 죄를 받는 것이다.”“내가? 내가 무슨 죄? 무관 무직인 내가 무슨 죄를?”원경릉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정언이 말하길, 초왕비로서 태상황과 백성들의 총애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장 제지를 하지 못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홍등군주가 중상을 입고 위급해졌다고 말했다.”우문호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어이가 없었다.“그건…… 황상께서 내 설명을 들으시면, 상황을 이해해 주실 거야.”“맞아, 그럼 부황께서 너에게 죄를 내릴까?”“그래서 나보고 죄를 덮어쓰라고? 어장 맛 좀 볼래?”우문호는 퉁명스럽게 “네 어장은 일곱째나 겁줄 수 있지.”라고 말했다.“어쭈? 그래서 안 무섭다고?” 원경릉이 어장을 꺼내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우문호는 다급한 목소리로 “휘두르지 마! 빨리 내려놓거라!”라고 말했다.그녀는 어장을 내려두고 우문호를 바라보았다.“그렇다면 네 말 뜻은 부황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실 거라고? 부황이 네 의도를 간파하실 텐데.”“지금 너는 민심을 얻은
우문호는 원경릉의 허를 찌르는 신랄한 말에 깜짝 놀랐다.사실 그녀의 말도 틀린 게 없다. 일곱째가 태자에 책봉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지금 주수보가 나서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것도 그 원인 중에 하나이다. 지금은 나설 적기가 아니다.원경릉의 태도를 보니 우문호는 문득 그녀가 진짜 황태자비 자리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황태자비가 되면 장차 이 나라의 황후가 될 텐데, 물론 태자가 황제가 안전하게 황제의 자리에 올라간다면 말이다. “너는 본왕이 태자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는 것이 싫으냐?”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그 일에 관여할 필요가 뭐가 있어. 내가 태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그렇지만, 내가 태자가 되면 너는 태자비가 되는데.”원경릉은 웃으며 “태자비나 왕비나 무슨 차이가 있는데?”라고 물었다.“차이가 없다니? 본왕을 바보로 아는 거야? 넌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우문호가 그녀를 쳐다봤다.원경릉은 탁자 위에 마시던 잔을 내려놓더니 조용하게 “마음이 동할 수는 있지만, 가야 할 길이 너무 험해. 굳이 그 길을 걸어야 할 가치는 없어.”라고 말했다.그도 예상했던 말이다. 태자가 된다면 많은 희생을 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가 순조롭게 태자가 된다면 다행이지, 만약 그렇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태자가 된다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우문호가 원경릉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렇게 생각해?”원경릉의 눈이 반짝였다.우문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혹시 몰라서 최악의 상황을 미리 얘기해 두는 거야.”라고 말했다.설사 그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우문호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원경릉은 어깨를 으쓱하며“벌어지지 않은 일을 사서 걱정할 필요 없지. 부황은 아직 건강하시잖아, 지금은 원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야.”라고 말했다.우문호는 마음을 추스르고“네 말이 맞아, 너도 내가 방금 한 말에 동의했으니, 지금 입궁하자. 지금 부황이 어서방에서 내각 대신들과 접견
초왕비가 밖에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하러 왔다니? 어서방에 있던 내각 대신들이 술렁였다. 측전과 어서방 정전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명원제가 측전 안쪽으로 들어가자 원경릉이 이를 보고 다른 문으로 들어왔다. 원경릉은 무릎을 꿇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명원제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일어나거라!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당장 궁에서 나가거라!”원경릉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부황, 성문에서 벌어진 일은 소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야단법석을 떨어?” 명원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다섯째와 그의 부인은 왜 이렇게 생떼를 쓰는 것일까.’“상관이 있지요. 소인이 초왕비로서 황상님과 백성들의 은혜를 듬뿍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현장에서 잘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부상자가 증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인이 소동을 일찍 막지 못한 탓입니다. 당시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줄곧 먼저 손을 쓰지 않고 요행을 바랐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제때 경조부에 알리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제왕비를 비난하는 것을 보니 같은 친왕비로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 비난은 마땅히 소인이 받았어야 했습니다. 소인을 처단하여 북당의 민심을 다스리십시오.”원경릉이 큰 소리로 말했다.원경릉은 냉정언의 계책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되, 실제로 죄를 지은 주명취를 언급해서 그녀에게도 죄책감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원경릉의 생각과 언변이 점점 태상황을 닮아가고 있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명원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그녀는 진지한 표정을 보니 뭐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고, 자신이 큰 대역 죄를 지은 것처럼 울부짖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밖에 있는 신하들이 듣고 있어서 그는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우문호는 궁문 입구에서 초조하게 원경릉을 기다렸다.‘옴팡 욕을 먹고 있으려나? 혹시 이미 곤장을 맞고 있는 건 아니겠지? 원경릉이 몸은 튼튼해도 맷집은 없는데 말이야.’서일은 오매불망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우문호를 보고 “왕야, 궁에 들어가 보시지요? 왕비께서는 말이 워낙 직설적이셔서 미움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황상의 노여움을 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조용히 좀! 그 정도는 아닐 거다!” 우문호가 뒷집을 지고 입구를 배회했다. ‘곤장을 맞는다고 해도 이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텐데, 설마 정신을 잃은 걸까?’“곤장을 맞는게 그나마 낫죠. 그게 아니라면…….”서일이 우물쭈물했다.우문호는 목을 꼿꼿이 세우고는 서일을 노려보았다.“서일. 넌 입을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게냐?”“소인 걱정이되서 그런겁니다!”그는 걱정이 생기면 말을 함부로 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자신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통제가 잘되지 않았다.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원경릉과 희상궁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붉은 옷에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높게 들었으며 발걸음이 의기양양한 것이 마치 승리를 거둔 붉은 암탉 같았다. 우문호는 한참이나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그녀의 팔을 잡고 위아래로 살피며 “맞았어?”라고 물었다.원경릉은 그를 한 번 흘겨보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맞기라도 바랬던 거야?”라고 물었다.“걱정돼서 그렇지!”우문호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다. “조심해.”원경릉은 웃으며 “얼씨구? 갑자기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거야? 입궁하기 전에는 이렇게 부축도 안 해줬잖아.”라고 말했다.그녀가 마차에 오르자 우문호는 그 옆에 앉아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연신 그녀를 쓰다듬었다.“어땠어, 부황께서 뭐라고 하셨어? 화가 많이 나셨어?”“얼마나 화를 내시던지, 내가 놀라서 말이 안 나오더라니까. 근데 시간이 지나니 화가 좀 풀리셨어.”원경릉이
우문호는 원경릉의 얼굴을 꼬집었다.“서일이 너는 입으로 미움을 산다고 하던데, 그 말이 딱 맞구나.”원경릉은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네 생각엔 부황께서 주명취를 벌하실 것 같아?”라고 물었다.우문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보았다.“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어.”“내 생각엔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물론 내가 부황님을 찾아간 게 아무런 효과가 없지는 않을 거야. 부황님은 적어도 원걸을 벌하시지는 않겠지.”우문호도 원경릉의 생각과 같았기에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주수보가 그날 주명취를 위해 사정 하는 것을 미루어보아 주명취가 자신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황도 일곱째를 위해서 주명취에게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사실 주명취가 어떻게 되든 우문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단지 원걸이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기만을 바랐다.하지만, 그는 원경릉이 내심 서운할까 걱정이 됐다. 자신을 희생해서 원걸을 빼냈지만, 정작 죄를 지은 주명취는 무탈하니 말이다.‘부황께서 뭐에 단단히 씐 게 틀림없다. 눈앞에 죄인을 보지 못하다니.’그 시각 제왕부.주명취는 제왕의 침상에 걸터앉아 한 손에는 탕을 한 손에는 수저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수저로 탕을 휘휘 젓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자, 입 벌리세요!”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왕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그의 턱에는 상처가 보였다. 검붉은 상처가 있음에도 그의 얼굴은 흉악해 보이기는커녕 가련하게 느껴졌다.제왕이 손을 내밀어 “본왕 스스로 먹겠다.”라고 말하며 그릇을 뺏었다.주명취는 멍한 얼굴로 그가 꿀꺽꿀꺽 탕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마치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탕을 서둘러 마시는 그를 보고 주명취가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어?”제왕은 그릇을 한쪽으로 치워두고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눈빛을 피했다.“아니, 너도 다쳤는데 내 시중을 들게 할 수는 없지.”“왕야를 돌보는 게 부인으로서
주명취가 천천히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제왕의 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배에 얹었다.“이 아이는 장차 황자(皇子)가 될 아이야.”제왕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서 손을 홱 빼고 그녀를 응시했다.주명취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너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야?”라고 물었다.제왕은 깜짝 놀랐다. 그는 주명취에게 이런 야심이 있을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현재 그는 친왕의 신분으로 뱃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이라고 쳐도 기껏해야 세자다. 아직 태자로 책봉된 것도 아닌데, 뱃속의 아이를 황자라고 말하다니. “명취야, 그런 허튼 소리 하지 마!”제왕은 너무 놀라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잊어버렸다.주명취는 제왕의 반응에 뺨을 내리치고 싶었지만, 그의 몸 상태를 보며 화를 억눌렀다. 그녀는 자신이 야망도 없고 쓸모없는 사람과 혼인을 했다는 것이 한스러웠다.잠시 후 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제왕에게 다가갔다. “조부께서 너를 태자로 세우겠다고 하시며 너의 마음을 시험해보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 시험이다.”“시험?” 제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응, 조부께서는 네가 태자가 될 그릇인지. 네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고 싶어 하셨지.”주명취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제왕은 잠시 침묵하더니 “주수보께서 생각을 많이 하셨구나. 태자 책봉은 부황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참견하지 않는 게 좋다.”라고 말했다.주명취는 속으로 비웃었다. ‘태자 책봉을 참견하지 말라고? 궁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태자 자리에 쏠려있다! 지금 문무백관들이 태자로 올릴 적당한 친왕을 물색 중이란 말이다. 국정에 관심도 없던 손왕마저 계획을 세우는데, 어찌 너만 이렇게 태평한 것이야!’주명취는 제왕의 태도를 보고 마음이 차게 식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넌 쉬고 있어. 난 어디 좀 다녀올게.”그러자 제왕이 놀라서 소리쳤다.“명취야!”그녀는 고개를 돌려 제왕을 보았다. 제왕은 놀란 듯 숨을 헐떡였다. “너…… 너 치마에……, 월경이 시작된 것 같
주재상 앞에 무릎 꿇은 주명취주명취는 자신이 계속 밀고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주명취는 뼈 속 깊이 후회하고 있다. 당초에 왜 우문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지금 호오빠는 황제 폐하의 마음에 든 데다 태상황 폐하의 병이 나은 후 태자가 될 확률이 가장 높아졌다.친정에 돌아와 할머니 곁에 있는데, 할머니는 목소리를 잃은 후 앓아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고 계신다.주명취는 계속 기다렸지만 주재상은 밤 늦게 서야 돌아왔다.주재상이 주명취를 보더니 차갑게: “왕비마마 저와 서재로 가시지요.”주명취가 “예!”하고 대답했다.주재상이 서재에 들어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자, 안에 입은 검은 박쥐무늬 비단 옷때문에 더욱 위엄 있고 신중하게 보였다.장미목 책상 뒤에 앉아 주명취를 깊이 쏘아보며, “제왕이 칼에 찔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주명취는 감히 사실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고: “손녀가 그랬습니다.”주재상이 싸늘하게: “일 하는 꼴이 갈수록 네 멋대로구나.”“손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성문밖에 일도 모함을 당했다, 누군가 제왕부에 맞서고 있다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방법이 이것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주명취가 억울함을 호소했다.“그럼 네 계책은 성공했느냐? 초왕의 눈을 속였느냐?” 주재상이 냉랭하게 말했다.주명취의 눈에 아픔이 스쳐 지나며 숨도 거의 쉬어지지 않았다, “초왕이…… 손녀는 초왕이 이렇게 매정할 줄 몰랐습니다.”주재상이 냉소를 지으며, “너는 초왕이 정말 멍청하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이 각자 혼인한 뒤 초왕이 알아챈 게 틀림없어. 황제의 아들 중에 제일 똑똑한 게 바로 초왕이야, 너의 그런 잔꾀에 초왕이 넘어갈 성 싶으냐? 주제도 모르는 것 같으니!”주명취는 무릎을 꿇고 슬픈 목소리로: “할아버지, 후회하고 있습니다. 당초에 제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주재상은 천천히 책상 위의 담뱃대를 집어 들고 안에 담배를 채우더니 음침한 목소리로: “오늘 내가 어서방에 있
주재상의 뜻을 안 주명취주명취는 바닥에 꿇어 앉아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주명취처럼 똑똑한 사람이 할아버지가 두고 있는 바둑의 수를 어찌 모를까?할아버지에게 있어 주명취는 버려진 바둑돌이다.주명취은 온통 슬픔과 분노로 예의 범절도 무시하고 차갑게 물었다: “두렵 건데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제왕비인 게 못마땅하시지요? 누구 물색해 둔 사람이 있으세요? 명양인가요?”“너는 신경 쓸 것 없다. 네 몫의 일이나 잘 해내면 돼.” 주재상은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고 말했다.“왜요?” 주명취가 사무쳐 하며: “손녀가 일 하나를 잘못했을 뿐인데 어째서 할아버지는 저를 버리려 하십니까? 제가 성밖에서 죽을 배급하는 것도 할아버지의 뜻이었고, 만약 굳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하면, 할아버지야 말로……”재난의 원흉이란 5글자에서 딱 막혔다. 주명취가 제아무리 당돌해도 감히 이 5글자를 내뱉을 순 없었다.하지만 주재상은 차갑게: “재난의 원흉이란 말이지? 맞아. 네가 죽 배급소를 열고 어질다는 명성을 퍼트리는 건 전부 내 생각이었지. 그러나 아쉽게도 넌 과유불급이라 죽 배급소를 널리 열어 며칠간 죽을 배급하는 것으로, 수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면 될 것을 어쩌자고 양부인과 예친왕비를 찾아 간 것이냐? 너는 매사에 지나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아마 쓸데없이 지혜를 낭비하고 기회를 틈타 욕심을 채우겠지. 네가 하나를 제대로 했으면 지금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상황 병환이 위중할 때 너는 내 말이라고 속여 희상궁을 위협했지. 그때부터 너를 버릴 마음이었으나 네가 정실부인의 손녀라는 점을 생각해 한 번 더 기회를 주었 건만, 너는 귀하게 여기지 않았어. 게다가 일이 터지자 또다시 회임을 했다는 핑계를 대며 문책에서 빠져나가 조금도 책임을 질 생각이 하지 않지. 그런 너를 어찌 제왕비라고 하겠느냐? 나는 절대로 네가 제왕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주명취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해,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의 친 손녀가 아닙니까, 제왕을 그토록 생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