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취를 향한 제왕의 마음주명취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어 작은 소리로: “내일 입궁하려고 해요.”제왕은 순간 주명취가 뭘 하려는 지 알지 못해 ‘응’외에 아무 말도 못했다.주명취는 갑자기 눈가가 붉어지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조금 흐느끼며, “제가 잘못한 일은 제가 바로잡아야 지요. 사실 요 며칠 마음속으로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줄곧 부질없는 문제에 매달렸어요. 제가 한 일때문에 당신의 명예가 다치게 될까, 당신까지 아바마마의 처벌에 연루될까 두려운 나머지 그래서, 어떻게든 책임을 피해보려고 온갖 방법을 생각해봤어요. 저는 정말 제가 임신한 줄 알았는데 결과는 요란한 빈 수레였어요. 저는 정말 후회하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입궁해서 보고 드리려고 해요.”주명취는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가까스로 눈물을 참으며, “그래서 저는 내일 입궁해서 죄를 청하기로 결정 했어요. 제가 져야할 책임을 져야죠.”이 말은 제왕에게 의외였다.제왕이 주명취의 눈빛을 보니 아프고, 부끄럽고, 뉘우치며 자책하는 마음 가운데 억지로 강한 척 하는 것이 느껴졌다.제왕은 주명취의 손을 잡고, “안심해. 내가 널 위해 사정할거야.”“응!” 주명취가 눈물을 떨구며 억지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사람의 마음을 더없이 아프게 했다. “여전히 저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제가 오늘…… 저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정말 미쳤나 봐요.”제왕이 너그럽게: “다 각자의 감정이 있는 법이지. 성밖에서 생긴 일이 그렇게 커졌는데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 그런 결과를 나을 줄 생각도 못했지. 그러니 아바마마께서도 당신을 가볍게 처벌할 게요.”주명취는 머리를 숙여 제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당신이 절 여전히 믿어주니 고마워요.”제왕은 한동안 주명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로소 작은 목소리로: “난 당연히 당신을 믿어. 당신은 내 왕비니까.”하지만 그 말을 하는 제왕의 눈은 초점을 잃었다.제왕은 주명취를 믿어야 할지 말지 모르겠다.제왕
원경릉의 호칭과 주명취에 대한 처분원경릉도 오늘밤 파리를 삼킨 기분이다.왜냐면 우문호가 원경릉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원경릉’이라고 직접 이름을 부르자니 분위기가 너무 없고,‘왕비’라고 부르자니 너무 삭막하고 공식적인 느낌이다.‘굥’이……라고 불렀다간 전신에 닭살이 돋아, 닭이 돼서 날아갈 것 같고,‘릉이’는 ‘령이’랑 헷갈린다. 우문호는 ‘령이’가 입에 붙어 있는데다 ‘령이’는 우문령이다.‘릉아’……라는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원경릉이 한 손을 덮었다. 오래 산 부부도 오글거리는 게 싫지만은 않다.최종적으로 우문호는 결정을 내렸다. 원 선생.원경릉의 머릿속에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회장님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손을 잡고 치하하며: “원 선생, 지난 40년 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오늘 드디어 영광스런 퇴직이군요!”원경릉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원 선생이라니, 이 무슨 고색창연한 호칭이란 말인가, 그녀는 지금 고작 17살 소녀란 말이다.원경릉은 뾰로통하게: “그럼 너는 뭐라고 불러?”우문호는 패기 넘치게: “나리!”원경릉은 상대도 하기 싫은 지 등을 돌리고 홱 돌아섰다.우문호는 원경릉의 손목을 잡고, “화났어? 그럼 뭐라고 부를지 얘기해 봐.”“우문호!”“그럼 난 널 어떻게 불러?”“난 이름도 성도 바뀐 적이 없거든. 원경릉!”우문호는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에이 너무 따분해.”우문호는 하여간 원 선생이 꽤 마음에 들었고, 계속 부르다 보면 언젠가 원경릉도 명실상부한 원 선생이 되어 있을 것이다.그땐 둘 다 늙어서 자식과 손자들에 둘러 쌓여 정말 기쁘고 충실한 인생일 거야.원경릉의 머릿속은 황제 폐하께서 주명취를 도대체 어떻게 처분하실 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우문호가 지그시 누르며, “무슨 생각해?”원경릉이 바로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안 해, 너무 졸려.”“좋아, 우리가 잠자는 건 절대 방해할 수 없지!”원경릉은 문득 최근 집 생각을 한 횟수가 점점
손왕을 만나러 간 원경릉원경릉이: “제왕은 분명 아내와 함께 가겠지?”우문호가 고개를 흔들며, “아니, 같이 안 간데. 제왕비만 간데.”원경릉은 또 의외였다. “이렇게 큰 일에, 아내한테 죽고 못사는 제왕이 같이 안 간다고? 성격이 변했나?”“내 생각에도 이상해. 제왕부에 가서 좀 물어볼까 생각 중이야.” 원경릉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아닌지 우문호가 조심스럽게 원경릉의 안색을 살폈다.원경릉이: “가봐.”이렇게 상쾌하게 답하다니 함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됐어,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원경릉이: “가라니까!”원경릉은 우문호의 속셈은 상관없고, 그저 주명취가 왜 스스로 죄를 청했으며, 더군다나 제왕이 왜 같이 가지 않는지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온몸이 근질근질해 죽겠다.우문호는 홱 돌아서며, “안가!”안 간다는 데도 굳이 가라고 함정을 파는 걸 보니 사람을 얕잡아 봐도 한참 얕잡아 봤다.우문호는 다음날 관아로 돌아가고 원경릉은 우선 회왕부로 갔다가 이어서 손왕부로 갔다.손왕은 다친 이래 초왕부에 온 적이 없다.원경릉은 일찍 문병을 가지 못한 무례를 그제서야 깨달았다.손왕이 후궁을 맞는 일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모르겠다.손왕부에 가니 손왕비가 맞이 했다. 원경릉이: “둘째 아주버님은요?”손왕비는 웃으며: “꽃밭에서 뛰고 계세요.”원경릉이 놀라서, “살 빼시는 거예요?”“네, 지난 번 사건 이후로 계속 자기가 살쪘기 때문이라고, 위급할 때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으니 창피하다며 분발하시는 중이랍니다.” 손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면 피격 당한 일이 차라리 잘 된 거라고 해야 하나요.”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손왕비가 그다지 낙관적인 태도가 아닌 게, “며칠이나 갈 지 두고 봐야죠.”이렇게 자극을 받아 살을 빼겠다고 결심하고 맹세한 게 어디 한두 번 이어야지 말이다.매년 새해가 되면 머리에 질끈 띠를 두르고 누구보다 단단하게 결심하지만 보름도 못 가서 또 똑같이 포기한다.“손왕 전하는 이제 겨우 상처가 아물었는데
손왕에 대한 손왕비와 원경릉의 생각손왕은 목욕 하고 의관을 정제한 뒤 나타났다.사실 손왕은 스스로가 좀 날씬하게 야윈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주 약간 빠져 보이긴 하다. 이만한 것도 대단하다.“둘째 아주버님 의지가 아주 대단하신 데요.” 원경릉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손왕는 바나나 같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신체를 단련하니 좋아, 좀 있다가 검술 연습도 해야 돼.”원경릉이 의아해 하며, “검술을 연마하신다고요? 그럼 아주버님 오늘 운동량이 엄청 나신데요, 어쩐지 마르셨더라.”“검술 연습은 필요해, 무공은 꾸준히 정진해야 하는 법이거든.” 손왕이 뻔뻔하게 허세를 부리며, “내가 검술 연습을 제법 하는 편이거든, 고수라고 칭할 만큼은 아니지만 다섯째랑 대련하면 별 차이 없을 게 틀림없어.”손왕비는 차를 마시다가 뿜었다.원경릉은 손왕비를 슬쩍 보고도 그녀가 손왕의 허세를 까발리는 타입이란 걸 알아챘다.우문호의 무공이 어떤 수준인지 원경릉도 모른다. 그녀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하지만 손왕비의 저 반응을 보니 다섯째의 무공이 뛰어난 게 틀림없다.“왜 웃어? 설마 내가 다섯째에 못 미친다는 거야?” 손왕이 노발대발하며 손왕비에게 눈을 흘겼다.“아니요, 어떻게 못 미칠 수가 있어요? 진짜 겨루면 다섯째도 당신의 적수가 못되죠. 당신 엉덩이 한쪽만으로도 다섯째를 깔려 죽게 할 수 있는 걸요.” 손왕비가 진지하게 말했다.손왕은 씩씩거리며 나가버렸다.원경릉이 손왕비에게, “형님은 왜 항상 아주버님을 그렇게 몰아붙이세요? 아주버님이 얼마나 어렵사리 투지를 가진 건데.”손왕비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어렵사리 투지를 가졌다고? 저이가 정말 투지가 있으면 나도 손왕 전하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죠, 그런데 저이는 투지가 없어요. 그저 외모만 살을 좀 빼고 싶을 뿐인데 바깥에 사람들은 저이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죠.”원경릉이 당황해서, “그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손왕비가 한탄하듯, “이 많은 친왕들을, 친왕부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
꽃 감상회의 목적며칠이 지나고 회왕이 입궁해 문안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명원제는 죽을 뻔했던 아들을 보고 감개무량한 나머지 노비 앞에서 원경릉에게 상을 내리도록 목여태감에게 명령했다.상금 천냥……짜리 약속어음 한 장.원경릉은 상금을 받는데, 주명취는 벌금이 만만치 않다.부상자의 약값과 의원비용, 간호비용 외에 조정의 명예를 훼손했기에 상당한 은자를 내야 했고, 성밖에 죽 배급소를 짓는 것 만도 족히 한달은 걸렸다.명원제 생각에 주명취가 저지른 모든 사건 중 가장 괘씸한 것이 바로 가짜 회임이다.비록 호되게 꾸짖었지만 후궁에 돌아가서 황후에게 한바탕 성질을 부렸다.황후도 당연히 주명취가 입궁해서 꾸중을 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주명취는 황후의 말에 억울했지만 감히 하소연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주명취를 가장 힘들게 한 건 황후의 질책으로 제왕은 결국 주명취를 위해 한 마디 변명도 해주지 않고 나무토막처럼 서서 듣고 있었다.다시 이틀이 지나고 황후가 꽃감상 연회를 거행했다.귀족 집안의 부인들과 아가씨들이 입궁해 꽃을 감상하고 친왕비들도 당연히 체면을 위해서라도 출석해야 했다.원경릉도 옷을 갖춰 입고 출석했는데 원걸 일로 황제 폐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황실의 연회가 그렇듯 원경릉은 착실하게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처신하고 있었다.초왕부를 나갈 때 우문호가 신신당부 하며, “만약 황후께서 너한테 ‘어떤 아가씨가 괜찮냐’거나 ‘어떤 아가씨가 마음에 드냐’고 여쭤 보시면 반드시 ‘전부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해. 알았지?”원경릉이 의아해 하며, “나한테 그런 질문을 왜 해?”“하여간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됐어.” 우문호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원경릉이 가만히 곱씹어 보니 놀랍기 그지없는 게, “널 위해 후궁을 찾아줘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우문호가: “일곱째한테만 찾아주며 좋은데, 네가 황후한테 밉보였으니 황후가 분명 나도 한 명 찾아주려고 할 거야.”“내가 언제 황후마마한
마차 전복 사건, 주재상과 희상궁의 만남서일이 머리를 감싸 쥐고 쫓겨나간 뒤 왕비의 마차를 몰아야 했다.원경릉이 마차에 앉아서, 서일이 뚱한 얼굴로 마차에 뛰어 오르는 것을 보고: “너도 따라 가?”“왕야께서 소인에게 마차를 몰아 마마 입궁하시는 거 모셔다 드리래요.” 서일이 웅얼웅얼 대답했다.원경릉이 웃으며, “왜 또 맞았어?”하지만 서일은 감히 원망하지 못하고, “소인이 입이 방정이라 걸핏하면 왕야 심기를 건드리네요.”원경릉이 가리개를 내리며 웃었다. 서일은 정말 매를 버는 존재다.서일이 몰래 가리개를 올리고 머리를 안으로 들이밀며, “왕비마마, 방금 물어보셨던 거기, 소인이 내일 모셔다 드리겠습니다.”왕야 모시기 어려운데 그래도 왕비마마 비위를 맞추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왕비마마께서 서일을 지켜 주실 것이다.희상궁이 혼을 내며, “네가 정말 살기가 싫은 모양이구나. 왕비마마께서 농담 좀 하셨기로 서니 네가 진심으로 받아들여? 밖에 가서 헛소리만 지껄여 봐라, 아주 혀를 잘라 버릴 테니. 왕야께서 걸핏하면 널 때리시는 게 다 이유가 있었네. 이 죽어 마땅한 놈아.”서일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데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난다.요즘 자꾸 죄를 뒤집어 쓰는 게, 사고는 누가 치고, 심기는 누가 건드린 건데? 왜 맨날 내가 혼나는 거야!마차가 청조대로(青鳥大街)를 가는 도중 마차 바퀴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랴’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원경릉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서일……”갑자기 마차가 ‘꽈당’하는 거대한 소리를 내며 한쪽으로 쏠렸다.그나마 다행히 서일의 반응이 빨라서 바로 뛰어 내려와 한쪽을 받쳐 들고 다급한 목소리로: “왕비마마 빨리 내려오세요. 마차가 굴렀어요.”희상궁이 원경릉을 부축해 서둘러 마차에서 내리는데 예의를 차릴 게재가 아닌 게 서일이 받치고 있다가 그대로 넘어 지는게 아닌가 싶었다.두 사람이 모두 마차에서 내린 것을 보고, 서일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괴로워하며 마차를 보
희상궁을 살려서 곁에 두는 이유“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상 어르신은 안녕하시지요?” 희상궁이 말했다.“그래, 상궁은 지금 왕비의 시중을 들고 있다고?” 주재상이 인사말을 나누는 것 같지만 원경릉의 귀엔 상당히 화기애애하게 들렸다.“예!” 희상궁이 말했다. 희상궁은 내내 똑바로 주재상을 바라보지 않았다.반면 주재상은 계속 희상궁을 뚫어지게 쳐다본다.원경릉은 문득 자기가 곁다리란 생각이 들어 한걸음 물러났다.원경릉은 희상궁과 주재상 사이에 얽히고 설킨……과거가 있었음을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론 잘 모른다.전에 원경릉은 두사람은 먼 옛날 관계라 여전히 서로가 마음에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특히 주재상은 지금 높고 막중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젊었던 한 때 궁녀에게 설레고 두근거렸던 마음을 기억할 리가 없겠지?그러나 지금 주재상의 눈빛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마부와 서일이 마차를 한쪽으로 치우고 어찌어찌 길을 비킨 셈이 되었다.마부가 와서: “나으리, 가시지요.”주재상은 미소 띤 얼굴로 원경릉에게: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재상 어르신 살펴 가세요!” 원경릉이 말했다.주재상은 바로 가지 않고 희상궁을 보는데 눈빛마저 온화하게, “희상궁 몸조심하게.”“재상 어르신 강녕하소서!” 주재상에 비해 희상궁은 딱딱하게 말하는 것이 냉담함이 도드라져 보였다.주재상은 또 그윽하게 희상궁을 쳐다보고 비로소 떠나갔다.마차에 올라 주재상의 가리개를 내리기 전에 희상궁을 한번 더 봤다.마차는 희상궁 곁을 지나는데 가리개는 다시 열리는 일 없이 서서히 사라졌다.희상궁은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서 있는데 표정이 쓸쓸하다.서일이 마차를 고치고: “잠깐 궁까지는 모셔다 드릴 수 있겠습니다. 궁에 도착하면 소인이 다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원경릉과 희상궁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희상궁은 가는 내내 말이 없고 원경릉도 묻지 않았다. 사적이고 은밀한 부분에 관한 일은 묻는 개 마땅치 않다.마침내 궁에 거의 다되어 갈 무렵 희상궁이 입을 열어: “
주재상에 대한 희상궁과 원경릉의 생각한참을 생각하더니 원경릉이: “그땐 감히 못 그랬죠.”“감히 못 하셨다고요? 이건 분명 제대로 된 이유는 아니군요.” 희상궁이 말했다.원경릉이 웃으며: “그래요, 확실히 제대로 된 이유는 아니네요.”하지만 이런 생각도 가능한 게 당시의 원경릉은 사면초가였거든.“그래서요?” 희상궁이 물었다.원경릉이 한숨을 쉬며, “모르겠 어요, 사람 인연이란 게 야릇해서 당시 내가 입궁할 때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는데 희상궁이 유일하게 나한테 잘해준 사람이었 거든요. 그거 영원히 기억할거예요.” 그런 희상궁의 배신을 겪었으니, 저 말은 확실히 앞 뒤가 맞는 말은 아니다.하지만 희상궁의 마음을 울렸는지 눈물 같은 것이 얼핏 비쳤다.“영원히.” 희상궁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쓸쓸하게 웃었다. “오래 전에 누군가 저에게 영원히 잘해주겠다고 했지요.”“그 사람 그러지 못했어요?” 원경릉이 물었다. 그 사람 혹시 주재상 아냐? 아니다, 주재상이 고작 궁녀 하나로 눈에 찰 리가 있겠어? “전 안 믿어요!” 희상궁이 실의에 찬 표정으로, “누가 믿겠어요? 그 사람은 어떤 분이며 제 신분은 또 어떤 데요? 안 믿어요. 쭉 사실여부를 모르는 게 좋아요.”슈뢰딩거의 고양이다.믿지 않고, 시도하지 않으면 답은 영원히 두 개로 남아 있다.원경릉은 탄식했다.“이번 생은, 이렇게 뭣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희상궁이 조용히 말했다.“아름답고도 슬픈 옛날 이야기네요.” 원경릉이 말했다.희상궁이 웃으며, “그런 가요?” 아름답지 않다. 오직 당사자만 알 뿐이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그 오랜 세월, 기나긴 고통을 희상궁은 하나하나 다 겪으며 지나왔기 때문이다.후회했지만 한없이 후회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일단 끝없이 후회하기 시작하면, 수많은 헛된 마음이 들고 그러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지금은 비록 뭣도 모르는 것처럼 이나마 한평생을 평안하게 아무 일없이 고인 물처럼 지냈다.원경릉이 분위기가 갑자기 애통해지는 것을 느끼고: “맞아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