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양의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소요공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이 원 동생, 원 동생 왔는가!”이건 원 교수를 부르는 소리로 원 교수는 약간 무안한 듯 복도에서 서 있었다.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는데, 몇 개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지더니 곧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원 교수는 자신의 어머니가 고대 차림으로 등에 약상자를 지고 마치 여기 사람 같은 모습인 것을 보고 감동하며 그녀의 손을 부여잡았다. “엄마!”원경릉의 할머니는 아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기쁘게 인사를 건넸다. “왔어? 오늘 길 힘들었지?”“아뇨,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원 교수는 그녀의 등에서 약상자를 내리며 태상황과 삼대 거두에게도 잊지 않고 예를 취했다. “어르신, 헤어진 지 며칠 만에 저희가 또 만나게 됐네요, 잘 지내셨는지요?”태상황도 기쁜 나머지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자네들이 온다는 얘기에 너무 좋아서 말이지.”원 교수가 송구해하며 말했다. “원래는 저희가 찾아봬야 하는데 직접 이렇게 발걸음하시게 만들어 후배로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태상황은 부끄러운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말어. 그럴 필요 없어.”그러고는 원 교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담배 가져왔어?”원 교수가 당황하며 물었다. “돌아오실 때 가져가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빨리 다 피우셨어요?”그때 몇 보루를 가져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담배가 좋지도 않은데 이렇게 빨리 다 피워 버리니 놀랄만도 했다. 태상황이 몰래 할머니를 째려보며 속삭였다. “그 담배는 자네 어머니가 다 버려서 이제 없어. 자네 이번에 올 때 가져온거 맞지?”원 교수가 머쓱하게 말했다. “그게…. 가져는 왔는데 혼례를 위해 남겨두려고….”“옳거니, 과인이 자네에게 맡기지.”할머니가 옆에서 몰래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다가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왜요?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게요? 어디 감히 맡길 수나 있겠어요?”태상황이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그게 과인
그런데 저녁을 먹은 뒤로 할머니가 몰래 담배 한 갑을 원경릉에게 주며 말했다. “가져가시라고 해. 종일 화가 나 있으시면 안 되니까. 정말 하는 행동은 아직 어린애 같다니까.”원경릉은 예상외에 반응에 살짝 놀라했다. “태상황 폐하 못 피우시게 하셨던거 아니세요?”“이걸 안 피워도 담뱃대를 피울 테니까. 수십 년간 인이 배겼으니 어디 정말 끊을 수가 있겠어? 줄이기만 해도 잘하는 거지.”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상당한 노력을 거쳐 비로소 얻은 결론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몰래 숨어서 피우고, 숨겨뒀다가 피우고 하는 게 더 나쁘다.원경릉이 방긋 웃으며, “저도 전에 금연하셨으면 했는데, 잠깐 끊었다가 또 피우고 정말 답이 없더라니까요.”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됐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해. 하지만 꼭 얘기해야 한다. 한 갑으로 열흘은 버텨야 하고 하루에 2대만 피울 수 있고. 더는 안 된다고 말이야. 절대로 내가 허락했다고 하면 안 돼. 이 사람은 조금만 잘해주면 기어오르는 스타일이니 앞으로 안하무인이 될 거야.”“알겠어요!” 원경릉이 담배를 들고 알았다고 하는데 뜻밖에 자신이 태상황이라도 된 듯 기뻤다. 특히 태상황이 담배를 뺏겨서 분통 터져 하는 얼굴을 떠올리니 답답하면서도 웃겼다.삼대 거두가 얘기를 나누고 돌아갈 때 원경릉이 배웅하며 몰래 태상황의 주머니에 담배를 찔러넣으며, “할머니 못 보시게 하세요. 나중에 할머니께서 눈에 불을 켜고 관리하시면 피우고 싶어도 못 피워요. 들키면 할머니께서 저한테까지 화내실 거예요.”태상황은 손끝의 느낌으로 뭔지 바로 눈치채고 기뻐하며 얼른 감췄다. “걱정하지 마, 과인은 절대 널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이건 열흘 치니까 아끼셔야 해요. 열흘 지나면 한 갑 더 챙겨드려 볼게요.” 원경릉이 말했다.‘옳거니, 좋다, 얼씨구!’ 태상황은 기쁜 나머지 흐뭇한 눈으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역시 얘는 내 호의를 배신하지 않는다니까.’ 그리고 약속하듯이 말했다. “걱정 마, 반드시 주디에게
“제일 화났을 때가 언제였는지 알아? 혜민서에 바쁜 일도 많은데 없는 시간, 있는 시간 다 쪼개서 아침 일찍 삼대 거두 진맥하러 별장으로 갔어. 진맥을 마치고 서둘러 혜민서로 돌아가면 맞을 거 같아서. 그런데 하나같이 만취해서 능운각 마구간에 막 드러누워 있는데, 전신은 이슬에 다 젖어 있었고, 심지어는 안풍 친왕이랑 그 검은 옷 입은 사람들까지 다 그 꼴이었다니까. 그 순간 정말 폭발해서 순간 자제력을 잃고 태상황의 귀를 잡아당겨서 정신이 들게 했는데 그 뒤로 삼대 거두가 내 앞에서는 꼼짝을 못해. 안풍 친왕도 평남왕이랑 놀러 나가서 특히나 조심하고 있는 거야.”원경릉은 이 말을 듣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돼지우리처럼 난장판 같은 노후라니. 말 기키우고 채소랑 꽃을 키우면서 왜 그러지?’“희상궁은 단속 못 해요?” 원경릉이 물었다.“희상궁이 주 재상은 단속할 수 있지만 소요공이랑 태상황을 어디 다룰 수나 있겠어? 씨알도 안 먹히고 오히려 맨날 속기나 하겠지. 이전에 별장에 살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래도 나은 것 같아.”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원경릉이 듣고 방긋 웃었다. 이전에 황실 별장에 있을 때는 한 번씩 다녀가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삼대 거두의 나쁜 습관들이 안 들켰을 뿐이지, 지금은 숙왕부에 살아서 할머니가 언제든 갈 수 있었고 혜민서와의 거리도 짧으니 결점이 바로 눈에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대로 좋았다. 할머니가 진압하고 있으니 삼대 거두가 감히 설치지 못하니깐 말이다. 원경릉은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팔을 잡고 돌아가 가족들과 같이 수다를 떨며 새벽이 돼서야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우문호는 종일 흥분해서 방에 목록을 죽 늘어놓고 처가 식구들을 데리고 어디 가서 놀고 뭘 먹으러 갈지 생각 뿐이였다.“어머, 아직도 계획을 짜고 있구나!” 원경릉이 슬쩍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응, 탕 대인에게 물어봤지. 어디가 놀기 좋고, 맛있는 데인지. 어렵게 오신 건데 반드시 다 즐기셔야 해.” 우문호는 진지했다
마차가 멈추고 정후가 뛰어내려 달려오더니 덥석 우문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그 알랑거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위, 아직 집에 있어 다행이야, 마침 일이 좀 생겨서 자네와 상의를 좀 하려고.”사위라는 한 마디에 원 교수와 원경릉 엄마는 순간 화들짝 놀랐으나 곧 경릉이 원래 몸의 부모라는 것을 깨닫고 주진이 그들에 대해 언급했던 걸 기억했다.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원 교수 부부는 가만히 곁에 서서 지켜봤다.정후가 마차에서 내린 뒤 황씨도 함께 내렸는데 체면도 차리지 않고 바로 원경릉 앞으로 오더니 원경릉이 먼저 문안 인사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원경릉은 그저 “왔어요?”라고 대충 말할 뿐이었다.황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쁜 표정으로 답했다. “네 부친과 같이 왔지!”황씨는 원경릉 엄마와 원 교수를 흘끔 보더니 내성적인 분위기가 조정의 관리 같아 보여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원경릉 엄마는 자신의 딸이 이 여자에게 어색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평소에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순간 마음이 복잡한 게 딸에게 부모가 또 생기길 바라지 않지만, 누구든 원경릉에게 잘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우문호가 정후를 보고 말했다. “할 말은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손님이 계셔서 외출해야 하해서요.”정후는 우문호가 손님들에게 더욱 신경쓰는 것을 보고 원 교수와 원경주에게 예를 취했다. “실례합니다만 어느 관아에 근무하시는지요?” 정후는 경성을 떠난 지 오래 되어서 경성의 누가 고관대작인지 몰랐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전에도 본 적도 없어서 함부로 실례를 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우문호가 차가운 표정으로 질문을 막았다. “너무 묻지 말고 무슨 일인지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정후는 아첨하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는 실실 웃으며 다시금 예를 취했다. “예, 예, 우선 볼일 보세요. 전 초왕부에서 기다리겠습니다.”“기다릴 필요 없으니 우선 돌아가시지요!” 우문호가 미간을 찡그렸다.정
정후는 우문호가 가자마자 씩씩거리며 막말을 해댔다. “만약 그때 내가 술수를 쓰지 않았으면 네가 어떻게 아들을 다섯이나 두고 또 어떻게 태자가 될 것이며 제위에 오를 수나 있었겠어?!”원륜문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났지만, 뭐라 하지 않고 가만히 들어가 할머니에게 왔다고 인사를 올렸다.잠시 후 노부인은 정후에게 들어오라고 하고 문을 닫으라고 했다. 그리고 지팡이를 집어들더니 정후를 마구 때렸다. 정후가 머리를 감싸 쥐고 내빼다 문까지 가지도 못하고 몇 대를 생으로 맞아 정신을 다 잃을 정도였다.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행동이 있고서야 정후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한동안 나가서 사고 치는 일은 그만두었다.노부인은 정후가 한 마디라도 잘못하거나 법도를 어긋난 짓을 하면 바로 경성에서 내쫓아 맞아 죽을 뻔한 그 마을로 돌려보내 밤낮으로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게 하겠다고 했다.정후는 어머니가 한다면 정말 하는 사람이란 걸 잘 알기에 이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정후 노부인은 그 후 직접 초왕부로 가서 원경릉을 안심시켰다.원경릉은 노부인에게 자신의 부모님을 소개 시켜드리고 노부인이 전에 어떻게 자신을 보호해 주었는지 얼마나 자신에게 잘해 주셨는지 털어 놓았다. 그 얘기를 듣고 원경릉의 엄마는 굉장히 감격해 노부인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노부인이 그들의 신분을 궁금해해 물어보니 원경릉은 최근 연을 맺은 대부와 대모라고 했다. 그러자 노부인은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경릉한테 일어난 많은 일을 자신은 잘 모르기 때문에말하지 않는 일은 묻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의 분수에 맞는 말년을 보내기로 했다.노부인은 초왕부에 남아 식사를 한 뒤 앞으로 있을 경사에 대해 원경릉과 얘기를 나눴다.“혼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 이 할미의 마음이니 아무 말 말고 꼭 받아주려무나.” 그러자 원경릉이 혼수를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전부 할머니가 고생해서 모으신 건데 제가 어찌 감히 가져가나요…?”“어떡하긴, 꼭 가져가야지. 됐다.
명원제가 퇴위하면서 새로운 임금이 등극하는 일이 핵심 안건으로 바뀌었다.그리고 그중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바로 태자가 초왕부에 더는 살 수 없다는 것으로 우선 궁으로 들어와 동궁에 살아야 했다.초왕부에서 이사가는 것은 초왕부의 어떤 사람 말에 따르면 극도로 힘든 일이라고 했다.사식이가 듣고는 울고불고했다. 사식이는 궁에 들어가 살 수 없었고, 가능하다고 해도 잠시 있을 수 있을 뿐이지 궁 안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그동안 원경릉 곁에서 지내며 피붙이로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헤어지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일찍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고 최근 서일도 계속 이 일을 언급해 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사식이는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우문호 부부 또한 초왕부에 특히 더 많은 애착이 있었다. 그래서 이 저택은 앞으로 누구에게도 하사하지 않고 혹시 아이들에게 집을 하사할 때 그때 가서 누구에게 줄지 볼 생각이었다.하지만 우문호가 자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줄 리가 없었다. 이곳은 원경릉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궁에서 법도를 가르치기 위해 왔던 상궁은 벌써 돌아갔다. 앞으로 후궁에 별다른 법도가 없을 것으로 다른 비빈이 있을 리 없으니 존귀함의 서열도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 없어서 평범한 집처럼 살면 되기 때문이었다.집을 떠나기 이틀 전 두 사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밤중에 일어나 등을 들고 온 초왕부를 돌아다녔다.땅 한 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기와 한 장 한 장에 그들의 영혼이 새겨져 있었다.마지막으로 원경릉이 떡들을 낳은 방으로 들어가자 우문호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문호와 원경릉의 생사가 갈릴 뻔했던, 우문호에게는 악몽과 같은 공간으로 다시 그때를 생각하니 여전히 가슴이 덜덜 떨리는 것이 아직도 진정으로 어마마마를 용서할 수 없었다.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모퉁이마다 불을 비춰보았는데 전에 피비린내가 나던 곳도 지금은 차가운 어둠만이 구석마다 꽉
녹주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졌다. “태자비 마마, 쇤네와 기라도 마마를 따라 입궐할 수 없는 것입니까?”“입궐하고 싶어?” 원경릉이 물었다.두 사람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쇤네는 당연히 태자비 마마를 따르고 싶습니다.”그러자 원경릉이 두 사람에게 와서 앉으라고 했다. 우문호는 셋이 할 말이 있어 보여 옆방에 딸을 보러 간다고 하면서 피해주었다. 원경릉이 두 시녀에게 얘기했다. “사실 난 너희를 데리고 입궐하고 싶지 않아. 너희가 왕부에 남아주기를 바랄 뿐이지. 기 상궁에게 너희 혼처를 알아봐 달라고 하고. 솔직히 혼사 건은 벌써 준비해서 그동안 기 상궁이 너희한테 여러 번 물었는데 너희가 시집가기 싫다고….”기라가 울면서 말했다. “태자비 마마, 쇤네 시집가기 싫습니다.. 시집가면 초왕부를 떠나야 하고, 시집간다고 잘 살 거라는 보장도 없고 마마를 따라 마음 편하게 세끼 따순 밥 먹고 싶어요. 쇤네는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녹주도 옆에서 말을 보탰다. “태자비 마마, 쇤네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쇤네도 기라 언니와 마찬가지로 마마를 따라가는 게 좋습니다.”원경릉이 두 사람에게 놀랐다. “이런 바보탱이 아가씨들을 다 봤나, 누군가와 함께 평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은 거야?”기라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태자비 마마,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가면 세끼 끼니 때울 걱정에서 벗어날 날이 없고, 사는 게 좀 넉넉한 사람을 만나면 먹고 사는 걱정은 없지만 자나 깨나 첩들일 궁리만 할 테니, 태자 전하처럼 평생 마마 한 사람에게 잘하는 사람을 천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쇤네에게 그런 복도 없고요. 그런 남자를 찾지도 못하고 찾고 싶지도 않습니다.”시녀들은 정확했다. 초왕 부부는 신화나 전설 속의 유니콘 같은 존재로 그녀들에게는 그런 복이 없었다. 평생 자신만을 좋아하는 남자를 찾아도 가난한 집안이면 먹고 사느라 헉헉대고, 적당히 먹고살 만하면 처첩 간의 싸움이 치열했다. 시녀들은 두 가지 상황 모두가 다 싫었다. 차라
동궁은 이미 사람을 시켜 모든 물건은 새것으로 바꾸며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다. 내무부 창고를 회왕이 맡은 뒤로 은자가 부족할 일이 없었다. 태자가 동궁에서는 며칠밖에 머물지 않겠지만, 그 뒤로도 동궁이 비어 있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등극하면 곧바로 태자를 책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황태손이 이미 정해져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태자가 동궁에 들어오는 것을 맞이하는 것도 원래는 큰 행사이지만 우문호가 조용히 진행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제 즉위식 직전이라 소란 떨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그래도 동궁에 들어가는 거라 친왕 부부들이 저마다 와서 배웅했다. 천하 백성에게 황실의 형제들이 화목하고 우애가 깊으며 친왕들이 계속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것으로 다시는 황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공표였다.원경릉 부모는 오늘 입궐하지 않고 내일 탕양, 서일과 함께 궁으로 가기로 했다.태자 부부가 준비를 마치고 가족을 이끌고 여러 친왕과 왕비들이 따르는 가운데 마차를 타고 갔다.원경릉은 최대한 초왕부와 작별하고 싶지 않아서 앞으로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면 며칠 돌아와서 있을 수 있다고 우문호와 자신을 타일렀다.‘그래 이건 이별이 아니다, 여기는 언제나 원경릉의 집이다.’초왕부에서 싣고 나간 물건들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는데 옷 외에 그럴싸한 골동품이나 보석 하나 없고 그나마 옷도 별로 없어서 애들 물건까지 다 해서 마차 두 대가 전부였다.이것은 일부 물건은 아예 챙기지 않았기 때문인데, 큰 집기들은 초왕부에서 쓰는 게 익숙해서 챙기지 않았고 그저 초왕부 물건으로 남겨두고 싶었다.원경릉과 우문호가 마차에 오르기전까지 아무도 울지 않았다. 경사이므로 행여 감상적인 생각이 들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사식이 마저 눈물을 꾹 참고 미소를 지으며 배웅했다.그런데 서일 이 멍청한 놈이 기어코 눈물을 터트린 것이다.초왕부는 서일이 자란 곳으로 자신의 주인이 있고, 자신도 이곳에서 혼인을 했으며 딸을 낳았다. 그들이 여전히 초왕부 근처에 살아서 언제든 초왕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