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화났을 때가 언제였는지 알아? 혜민서에 바쁜 일도 많은데 없는 시간, 있는 시간 다 쪼개서 아침 일찍 삼대 거두 진맥하러 별장으로 갔어. 진맥을 마치고 서둘러 혜민서로 돌아가면 맞을 거 같아서. 그런데 하나같이 만취해서 능운각 마구간에 막 드러누워 있는데, 전신은 이슬에 다 젖어 있었고, 심지어는 안풍 친왕이랑 그 검은 옷 입은 사람들까지 다 그 꼴이었다니까. 그 순간 정말 폭발해서 순간 자제력을 잃고 태상황의 귀를 잡아당겨서 정신이 들게 했는데 그 뒤로 삼대 거두가 내 앞에서는 꼼짝을 못해. 안풍 친왕도 평남왕이랑 놀러 나가서 특히나 조심하고 있는 거야.”원경릉은 이 말을 듣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돼지우리처럼 난장판 같은 노후라니. 말 기키우고 채소랑 꽃을 키우면서 왜 그러지?’“희상궁은 단속 못 해요?” 원경릉이 물었다.“희상궁이 주 재상은 단속할 수 있지만 소요공이랑 태상황을 어디 다룰 수나 있겠어? 씨알도 안 먹히고 오히려 맨날 속기나 하겠지. 이전에 별장에 살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래도 나은 것 같아.”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원경릉이 듣고 방긋 웃었다. 이전에 황실 별장에 있을 때는 한 번씩 다녀가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삼대 거두의 나쁜 습관들이 안 들켰을 뿐이지, 지금은 숙왕부에 살아서 할머니가 언제든 갈 수 있었고 혜민서와의 거리도 짧으니 결점이 바로 눈에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대로 좋았다. 할머니가 진압하고 있으니 삼대 거두가 감히 설치지 못하니깐 말이다. 원경릉은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팔을 잡고 돌아가 가족들과 같이 수다를 떨며 새벽이 돼서야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우문호는 종일 흥분해서 방에 목록을 죽 늘어놓고 처가 식구들을 데리고 어디 가서 놀고 뭘 먹으러 갈지 생각 뿐이였다.“어머, 아직도 계획을 짜고 있구나!” 원경릉이 슬쩍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응, 탕 대인에게 물어봤지. 어디가 놀기 좋고, 맛있는 데인지. 어렵게 오신 건데 반드시 다 즐기셔야 해.” 우문호는 진지했다
마차가 멈추고 정후가 뛰어내려 달려오더니 덥석 우문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그 알랑거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위, 아직 집에 있어 다행이야, 마침 일이 좀 생겨서 자네와 상의를 좀 하려고.”사위라는 한 마디에 원 교수와 원경릉 엄마는 순간 화들짝 놀랐으나 곧 경릉이 원래 몸의 부모라는 것을 깨닫고 주진이 그들에 대해 언급했던 걸 기억했다.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원 교수 부부는 가만히 곁에 서서 지켜봤다.정후가 마차에서 내린 뒤 황씨도 함께 내렸는데 체면도 차리지 않고 바로 원경릉 앞으로 오더니 원경릉이 먼저 문안 인사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원경릉은 그저 “왔어요?”라고 대충 말할 뿐이었다.황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쁜 표정으로 답했다. “네 부친과 같이 왔지!”황씨는 원경릉 엄마와 원 교수를 흘끔 보더니 내성적인 분위기가 조정의 관리 같아 보여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원경릉 엄마는 자신의 딸이 이 여자에게 어색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평소에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순간 마음이 복잡한 게 딸에게 부모가 또 생기길 바라지 않지만, 누구든 원경릉에게 잘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우문호가 정후를 보고 말했다. “할 말은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손님이 계셔서 외출해야 하해서요.”정후는 우문호가 손님들에게 더욱 신경쓰는 것을 보고 원 교수와 원경주에게 예를 취했다. “실례합니다만 어느 관아에 근무하시는지요?” 정후는 경성을 떠난 지 오래 되어서 경성의 누가 고관대작인지 몰랐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전에도 본 적도 없어서 함부로 실례를 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우문호가 차가운 표정으로 질문을 막았다. “너무 묻지 말고 무슨 일인지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정후는 아첨하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는 실실 웃으며 다시금 예를 취했다. “예, 예, 우선 볼일 보세요. 전 초왕부에서 기다리겠습니다.”“기다릴 필요 없으니 우선 돌아가시지요!” 우문호가 미간을 찡그렸다.정
정후는 우문호가 가자마자 씩씩거리며 막말을 해댔다. “만약 그때 내가 술수를 쓰지 않았으면 네가 어떻게 아들을 다섯이나 두고 또 어떻게 태자가 될 것이며 제위에 오를 수나 있었겠어?!”원륜문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났지만, 뭐라 하지 않고 가만히 들어가 할머니에게 왔다고 인사를 올렸다.잠시 후 노부인은 정후에게 들어오라고 하고 문을 닫으라고 했다. 그리고 지팡이를 집어들더니 정후를 마구 때렸다. 정후가 머리를 감싸 쥐고 내빼다 문까지 가지도 못하고 몇 대를 생으로 맞아 정신을 다 잃을 정도였다.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행동이 있고서야 정후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한동안 나가서 사고 치는 일은 그만두었다.노부인은 정후가 한 마디라도 잘못하거나 법도를 어긋난 짓을 하면 바로 경성에서 내쫓아 맞아 죽을 뻔한 그 마을로 돌려보내 밤낮으로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게 하겠다고 했다.정후는 어머니가 한다면 정말 하는 사람이란 걸 잘 알기에 이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정후 노부인은 그 후 직접 초왕부로 가서 원경릉을 안심시켰다.원경릉은 노부인에게 자신의 부모님을 소개 시켜드리고 노부인이 전에 어떻게 자신을 보호해 주었는지 얼마나 자신에게 잘해 주셨는지 털어 놓았다. 그 얘기를 듣고 원경릉의 엄마는 굉장히 감격해 노부인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노부인이 그들의 신분을 궁금해해 물어보니 원경릉은 최근 연을 맺은 대부와 대모라고 했다. 그러자 노부인은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경릉한테 일어난 많은 일을 자신은 잘 모르기 때문에말하지 않는 일은 묻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의 분수에 맞는 말년을 보내기로 했다.노부인은 초왕부에 남아 식사를 한 뒤 앞으로 있을 경사에 대해 원경릉과 얘기를 나눴다.“혼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 이 할미의 마음이니 아무 말 말고 꼭 받아주려무나.” 그러자 원경릉이 혼수를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전부 할머니가 고생해서 모으신 건데 제가 어찌 감히 가져가나요…?”“어떡하긴, 꼭 가져가야지. 됐다.
명원제가 퇴위하면서 새로운 임금이 등극하는 일이 핵심 안건으로 바뀌었다.그리고 그중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바로 태자가 초왕부에 더는 살 수 없다는 것으로 우선 궁으로 들어와 동궁에 살아야 했다.초왕부에서 이사가는 것은 초왕부의 어떤 사람 말에 따르면 극도로 힘든 일이라고 했다.사식이가 듣고는 울고불고했다. 사식이는 궁에 들어가 살 수 없었고, 가능하다고 해도 잠시 있을 수 있을 뿐이지 궁 안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그동안 원경릉 곁에서 지내며 피붙이로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헤어지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일찍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고 최근 서일도 계속 이 일을 언급해 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사식이는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우문호 부부 또한 초왕부에 특히 더 많은 애착이 있었다. 그래서 이 저택은 앞으로 누구에게도 하사하지 않고 혹시 아이들에게 집을 하사할 때 그때 가서 누구에게 줄지 볼 생각이었다.하지만 우문호가 자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줄 리가 없었다. 이곳은 원경릉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궁에서 법도를 가르치기 위해 왔던 상궁은 벌써 돌아갔다. 앞으로 후궁에 별다른 법도가 없을 것으로 다른 비빈이 있을 리 없으니 존귀함의 서열도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 없어서 평범한 집처럼 살면 되기 때문이었다.집을 떠나기 이틀 전 두 사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밤중에 일어나 등을 들고 온 초왕부를 돌아다녔다.땅 한 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기와 한 장 한 장에 그들의 영혼이 새겨져 있었다.마지막으로 원경릉이 떡들을 낳은 방으로 들어가자 우문호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문호와 원경릉의 생사가 갈릴 뻔했던, 우문호에게는 악몽과 같은 공간으로 다시 그때를 생각하니 여전히 가슴이 덜덜 떨리는 것이 아직도 진정으로 어마마마를 용서할 수 없었다.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모퉁이마다 불을 비춰보았는데 전에 피비린내가 나던 곳도 지금은 차가운 어둠만이 구석마다 꽉
녹주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졌다. “태자비 마마, 쇤네와 기라도 마마를 따라 입궐할 수 없는 것입니까?”“입궐하고 싶어?” 원경릉이 물었다.두 사람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쇤네는 당연히 태자비 마마를 따르고 싶습니다.”그러자 원경릉이 두 사람에게 와서 앉으라고 했다. 우문호는 셋이 할 말이 있어 보여 옆방에 딸을 보러 간다고 하면서 피해주었다. 원경릉이 두 시녀에게 얘기했다. “사실 난 너희를 데리고 입궐하고 싶지 않아. 너희가 왕부에 남아주기를 바랄 뿐이지. 기 상궁에게 너희 혼처를 알아봐 달라고 하고. 솔직히 혼사 건은 벌써 준비해서 그동안 기 상궁이 너희한테 여러 번 물었는데 너희가 시집가기 싫다고….”기라가 울면서 말했다. “태자비 마마, 쇤네 시집가기 싫습니다.. 시집가면 초왕부를 떠나야 하고, 시집간다고 잘 살 거라는 보장도 없고 마마를 따라 마음 편하게 세끼 따순 밥 먹고 싶어요. 쇤네는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녹주도 옆에서 말을 보탰다. “태자비 마마, 쇤네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쇤네도 기라 언니와 마찬가지로 마마를 따라가는 게 좋습니다.”원경릉이 두 사람에게 놀랐다. “이런 바보탱이 아가씨들을 다 봤나, 누군가와 함께 평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은 거야?”기라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태자비 마마,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가면 세끼 끼니 때울 걱정에서 벗어날 날이 없고, 사는 게 좀 넉넉한 사람을 만나면 먹고 사는 걱정은 없지만 자나 깨나 첩들일 궁리만 할 테니, 태자 전하처럼 평생 마마 한 사람에게 잘하는 사람을 천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쇤네에게 그런 복도 없고요. 그런 남자를 찾지도 못하고 찾고 싶지도 않습니다.”시녀들은 정확했다. 초왕 부부는 신화나 전설 속의 유니콘 같은 존재로 그녀들에게는 그런 복이 없었다. 평생 자신만을 좋아하는 남자를 찾아도 가난한 집안이면 먹고 사느라 헉헉대고, 적당히 먹고살 만하면 처첩 간의 싸움이 치열했다. 시녀들은 두 가지 상황 모두가 다 싫었다. 차라
동궁은 이미 사람을 시켜 모든 물건은 새것으로 바꾸며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다. 내무부 창고를 회왕이 맡은 뒤로 은자가 부족할 일이 없었다. 태자가 동궁에서는 며칠밖에 머물지 않겠지만, 그 뒤로도 동궁이 비어 있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등극하면 곧바로 태자를 책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황태손이 이미 정해져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태자가 동궁에 들어오는 것을 맞이하는 것도 원래는 큰 행사이지만 우문호가 조용히 진행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제 즉위식 직전이라 소란 떨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그래도 동궁에 들어가는 거라 친왕 부부들이 저마다 와서 배웅했다. 천하 백성에게 황실의 형제들이 화목하고 우애가 깊으며 친왕들이 계속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것으로 다시는 황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공표였다.원경릉 부모는 오늘 입궐하지 않고 내일 탕양, 서일과 함께 궁으로 가기로 했다.태자 부부가 준비를 마치고 가족을 이끌고 여러 친왕과 왕비들이 따르는 가운데 마차를 타고 갔다.원경릉은 최대한 초왕부와 작별하고 싶지 않아서 앞으로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면 며칠 돌아와서 있을 수 있다고 우문호와 자신을 타일렀다.‘그래 이건 이별이 아니다, 여기는 언제나 원경릉의 집이다.’초왕부에서 싣고 나간 물건들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는데 옷 외에 그럴싸한 골동품이나 보석 하나 없고 그나마 옷도 별로 없어서 애들 물건까지 다 해서 마차 두 대가 전부였다.이것은 일부 물건은 아예 챙기지 않았기 때문인데, 큰 집기들은 초왕부에서 쓰는 게 익숙해서 챙기지 않았고 그저 초왕부 물건으로 남겨두고 싶었다.원경릉과 우문호가 마차에 오르기전까지 아무도 울지 않았다. 경사이므로 행여 감상적인 생각이 들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사식이 마저 눈물을 꾹 참고 미소를 지으며 배웅했다.그런데 서일 이 멍청한 놈이 기어코 눈물을 터트린 것이다.초왕부는 서일이 자란 곳으로 자신의 주인이 있고, 자신도 이곳에서 혼인을 했으며 딸을 낳았다. 그들이 여전히 초왕부 근처에 살아서 언제든 초왕
이 길은 입궐하는 길이 아닌, 인생의 더 높은 곳을 향해 가는 것으로 친척과 친구 중 빠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태자 부부는 다시금 감동했다. 궁에 도착하자 서일과 탕양이 동궁 사람들과 바쁘게 물건을 정리하는 한편 태자 부부는 가족들을 이끌고 명원제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다.명원제는 원래 매화장에 먼저 가있고 싶어 했으나, 즉위식을 마친 뒤 새로운 황제의 알현을 마치고 가라고 예부에서 권유했다. 즉위식 당일 새로운 황제가 매화장에 가서 절을 올리려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종묘에 고하는 등의 각종 의식들이 전부 지극히 엄숙하고 장중하게 치르기 때문에 아주 절차가 번잡한데 이를 마치고 매화장을 다녀오면 결국 시간을 지체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지금 준비 과정으로 짐작하면 황제 즉위식과 황후 책봉례를 동시에 거행해 사흘간 치러질 예정이다.우문호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원래 있어야 할 과정을 간소화해서 천지신명께 고하는 것과 피로연만 남기고 황후의 화장 등의 일들은 전부 조정이 맡아서 처리하게 했는데, 회왕이 이미 처리를 마쳤기에 당일 궁에 보내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북당의 남녀노소 모두 즉위식만을 기다렸다. 마치 섣달그믐 며칠 전 같은 성대한 분위기로, 한껏 들떠있어 민간에는 각종 경축 행사가 성황리에 치러지기도 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세금 감면이 있을 것이고 대대적인 사면이 행해질 것으로 이는 백성에게도 이는 아주 중요했다. 물론 새로운 황제가 북당에 새로운 기상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는 마음도 컸다. 동궁은 우문호가 태자로 책봉되었을 때 한 번 개비를 마쳤었다. 태후는 줄곧 태자가 궁에서 살기를 그렇게 바랬는데 아쉽게도 이 순간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그래서 우문호와 원경릉은 명원제를 알현한 뒤 종묘에 가서 하늘에 있는 황태후의 영혼에 궁에 왔음을 알렸다.우리 만두와 아이들은 황태후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태조모는 자기들을 굉장히 예뻐해 주셔서 태조모가 자기들을 안아주실 때 눈가에 주름이 가득 잡혔던 모습을 기억했다.
다음날 원경릉 부모와 원경주, 이렇게 세 사람이 입궐했다. 원경릉은 비록 세 사람이 태자비의 대부, 대모, 의형제이긴 하지만, 정후부의 그 인간이 전당에 오를 자격이 없어 직접 모셨다고 명원제에게 알렸다.명원제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기에 원경릉만 좋으면 됐다며 자신은 매화장에서 보낼 나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삼대 거두는 당분간 궁으로 돌아와 살기로 했고, 안풍 친왕 부부와 평남왕도 억지로 데리고 들어왔다.주 재상은 즉위식 주례를 맡아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주관하게 되었다. 예부에서 예행연습을 하자고 했지만 주 재상은 필요 없다고 했다. 이 일은 주 재상이 머릿속으로 수십 번 예행연습을 해왔기에 실수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예부는 당일의 일정을 주 재상에게 써 주고 몇 명을 보조로 보냈다. 즉위식은 큰 행사로 조금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럴 시엔 불길한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마침내 모두가 하나같이 오랫동아 기다려온 6월 20일이 되었다.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자시부터 우문호는 잘 수 없었다. 그 시간에 제단에 올라가 봉선제라는 제천의식을 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온 경성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큰길마다 관에서 가로등을 밝혔으며, 성루 위에는 횃불을 달아 상제에게 북당에 새로운 황제가 등극함을 알렸다.곤룡포는 어젯밤에 이미 궁으로 보내졌고 봉선제 때 입는 것은 다른 길복으로 등극할 때 입는 곤룡포와는 구별되었다.모든 신하가 자시 전에 궁문에 모여 기다리다가 새로운 황제의 가마가 출발하면 동시에 제단으로 가 봉선제를 거행했다. 의장대 음악도 자시에 정확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황실 금군은 황궁 각처의 대문을 활짝 열고 위아래 황색 옷을 입은 금군이 줄줄이 나와 각 궁문을 지켰다. 친왕들은 동궁으로 가서 새로운 황제를 맞고, 구사는 길을 열어 궁문에서 문무 대신들과 합류해 바로 제천대로 향했다.건곤전에는 삼대 거두가 의관을 정제하고 태상황은 자신의 곤룡포를 입었다. 오랫동안 입지 않다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
안지여는 소야쌍을 놓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이틀 뒤가 내 생일인데, 당신 몸 상태는 어때?”그러자 소여쌍은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몇 걸음 만에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안지여 뒤로 넘어질 뻔했다.안지여는 소여쌍을 잡아줄 수 있었지만, 손을 뻗지 않고 그녀를 등지며 보이지 않는 척했다.시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얼른 소여쌍을 부축해 바닥에 넘어지는 것까지 막았다.소여쌍이 숨을 돌리고 살짝 웃었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오빠 생일에 당연히 제가 곁에 있어야죠.”안지여는 그제야 소여쌍을 돌아봤다. “생일엔 손님이 많이 올 거야,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성대하게 하니까 당신도 잘 차려입어. 내가 내일 사람을 시켜 장신구를 보내도록 하지.”“네, 알았어요!” 소여쌍이 기쁜 듯이 말하며 안지여를 한없이 바라봤다.하지만 안지여는 소여쌍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정 설명했고 체면도 차렸으니 됐다 싶어 말했다.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당신 쉬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쉬고 있어.”안지여는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고 했다.이때 소여쌍이 갑자기 닭발 같은 손을 뻗어 안지여의 팔을 붙잡으며 서둘렀다. “오빠, 어렵사리 왔는데 저랑 얘기 좀 더 해요.”안지여가 고개를 숙이고 소여쌍의 마르고 늙은 손을 바라봤다. 손등에 주름이 자글거리는 것이 구겨진 비단 뭉치처럼 너무 흉해서 혐오감이 든 나머지 쓱 손을 뺐다. “말했잖아, 일이 바쁘다고.”소여쌍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지며, 늙고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이 바쁜 거예요, 아니면 그 여우 년을 찾아가는 거예요?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여자를 성에 얼마나 숨겨놨는지.”안지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소여쌍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축 처진 눈에서 원한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늙었다고 싫어하는 거잖아요, 아녜요? 잊지 마세요. 오빠의 동안도 결국 늙는다고요. 이리봉청이 아직 살아있어도 지금 저보다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상인, 인근 주와 현의 관리, 무림 사람들, 강호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안지여는 그동안 사교의 폭이 넓고, 각계각층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있어 이번에 생일잔치란 이름을 빌려 그들 모두 한자리에 모아 대사를 논의하고자 했다.안지여는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전에 시기를 놓치고 이제 우문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이때가 대사를 치를 적기였다.우문호가 몇 년 더 북당을 다스리고 나면 그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몰랐다.그래서 조정이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에 그는 기뻤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천문 세가의 무덤도 생일잔치 후 태워버릴 계획으로, 물론 완벽한 구실을 붙여 백성들에게 설명할 생각이었다.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온 건, 안지여에게 아주 완벽한 빌미를 제공해 주는 셈이었다. 모든 것을 이리 부마 탓으로 돌리고 백성들에게 조정이 저지른 일이라고 알리면 천문 세가를 그토록 떠받들던 풍도성 백성들은 조정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안지여는 부마 이리율을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그의 내력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부이자 늑대파 문주라고 했으나 그건 전부 민간에 있을 때 신분에 불과했다. 결국 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는 길을 택한 이 사람은 극도로 지위와 재산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을 다루기 어렵지 않은 건, 안지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부마 이리율의 마음 저 밑엔 상인이란 출신을 벗어던지고 상류 계층에 들어 후작 세가가 된 후 2~3세대가 지나면 철저하게 이전 상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목표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생일까지 아직 이틀 남았다.안지여는 두번 다시 소여쌍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은 가야 했다. 그의 생일잔치에 소여쌍이란 성주 부인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성주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해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허상을 심어주려는 것뿐이었다.소여쌍은 풍도성 동쪽 무쌍거에 살고 있었다. 혼인하던 그해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