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는 원경릉에게 빚을 지은 것 같았다. 당시에 그가 원경릉과 혼인할 때 기분이 좋지 않아 혼례를 망쳐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원경릉과 그는 이미 부부 사이가 되었기에 다시 혼례를 할 수는 없다.지금 여섯째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그는 그때로 돌아가 원경릉과 다시 한번 혼인식을 하고 싶었다. ‘경릉이에게 난 어떤 신랑이었을까? 경릉이는 혼인식만 생각하면 화가 나겠지? 그나저나…… 다시 혼인을 한다면 경릉이가 정후의 집안이 아닌 이리의 집안이면 좋겠네. 그럼 혼수로 들어온 물품으로 대대손손 부유하게 살 수 있을 텐데……’우문호는 잠깐 쓸데없는 상상을 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회왕의 혼인식에서 문둥산 사건은 잊어버린 채 마냥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아파서 비실거리던 여섯째가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회왕의 혼인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즐거워했다. 제왕도 기분이 좋은 듯 거하게 취해서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말했다.“본왕은 오늘 너무나도 기쁩니다. 나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형제…… 회왕이 드디어 장가를 가다니! 진심으로 축하하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랍니다! 다 같이 건배합시다! 건배!”제왕이 웃고 떠드는 사이에 원용의가 조용히 나타났다.원용의는 제왕에 눈에 띠지 않으려고 조심히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제왕은 한눈에 그녀를 발견하고 말았다. 축제 분위기 속에 상반되게 두 사람 사이에는 냉기가 흘렀다.원용의의 조모는 원경릉과 함께 문둥산 환자를 치료한다면, 그녀에게 다시 혼사를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조건은 원용의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그녀는 한살이라도 젊을 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오늘 밤 원경릉은 이곳에 오지 않고 이리 가문에 남아서 이리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원경릉은 이리 가문에 사람들이 하나같이 빼어난 외모를 가진 것을 보고 유전자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느꼈다.이리 가문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초두취 사람들과 그 거래처 그
사실 회왕의 혼인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역시 노비였다.명원제도 이렇게 좋은 날 빠질 수 없었다. 그 역시도 주황후와 함께 궁을 나와 회왕의 혼인식에 참석했다.미색이 명원제를 보고 무릎을 꿇어 인사를 하자 노비는 감동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노비는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들이 언제 이렇게 커서 여인을 맞이하는지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됐네, 그만 일어나게.”명원제가 말했다.노비는 이렇게 기쁠 일을 미색의 신분을 들먹이며 시간을 끌었는지 후회가 됐다.‘앞으로는 기뻐할 일만 남았네.’혼례가 한창 고조되고 있었고 명원제와 주황후 그리고 노비가 함께 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대흥국(大興國)의 숙친왕(肅親王)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7개국 중에서 대흥국과 대월국(大月國)이 경제나 무역 심지어 농업 면에서도 북당보다 훨씬 좋았다.대흥국과 북당은 일찍 국교를 수립한 적이 있었으나 일부 국경문제로 명원제가 등극한 후 양국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마찰을 빚어왔다. 그렇다고 크게 전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으로 두 나라 관계가 썩 좋지는 않았다.심지어 대흥국은 우문호를 태자로 책봉할 때에도 3품 짜리 사신을 보내 축하의 말을 전했다.그런데 회왕의 혼인식에 대흥국의 숙친왕이 오다니? 명원제는 물론이고 황실 친왕들도 깜짝 놀랐다.주수보는 회왕 혼인 중매가 성공해 이리 가문에서 사례비를 받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 술에 거하게 취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숙친왕의 등장에 주수보는 술이 단번에 깨는 듯했다.숙친왕은 대흥국 문황제(文皇帝)의 친동생으로서 문황제가 제위하기 전에 대흥국에서는 그가 더 똑똑하고 용맹하다고 하마터면 숙친왕을 황제로 삼을뻔했다.숙친왕은 대흥국의 이름난 대장으로서 전장에서도 수많은 활약을 했으며 지금은 대흥국의 병부상서직을 맡고 있었다.‘군직을 맡고 있는 숙친왕이 회왕의 혼인식에 온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인가?’모두들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흥국의 숙친왕과 그의 시종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
숙친왕이 왜?어쨌든 노비는 후궁의 몸이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회왕은 이상야릇한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가 예를 취하고, “친왕 전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일단 제가 드리는 혼례 축하주 한 잔 받으시지요?”숙친왕이 시선을 거두고 작게 한숨을 쉬더니, “혼례 축하주는 안 마시겠습니다. 제가 마시는 게 마땅하지도 않고요, 대신 차 한잔 올리시며 장인 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이 말이 떨어지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고 회왕도 어리둥절해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숙친왕의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지?역시 우문호의 반응이 빨라서, “왕야 말씀은 그러니까, 미색이 왕야의 여식이라는?”숙친왕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흠, 그렇습니다.”노비가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세상에 미색이 대흥국의 군주라는 말입니까? 어째서 말하지 않았나요?”명원제가 작게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노비가 자신이 예법에 어긋났음을 느끼고 앉았으나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숙친왕을 바라봤다.명원제가, “자순(子順),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숙친왕이 작은 목소리로, “폐하, 소신 내일 보고드림을 용서하십시오, 우선 미색을 좀 만나보고 싶습니다.”명원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떤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숙친왕을 안내했다.숙친왕이 일어나 예를 취하고 물러나자 커다란 그림자가 재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하객들이 상당히 놀란 것이 전에는 다들 ‘회왕은 폐병을 알아서 상인 집안의 딸과 겨우 혼인하는 거라 가문의 격이 맞지 않지만 돈은 많다더라’ 하고 결혼 잔치에 참석하면서도 다소간 새 신부를 무시했었다.하지만 새 신부는 무려 대흥의 군주인 것이다.신분이면 신분, 돈이면 돈, 회왕은 정말 복도 많다.미색은 오늘 기쁨이 넘쳐서 신방에 들어온 뒤로 계속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에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렇게 적막한 고통을 참아낼 리가 없지만 오늘은 감히 꼼짝하지 않는 것이 수모(手母, 혼례에서 신부를 도와주는 여자)가 그러는
미색의 삼자대면회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때리지 말아요, 무슨 일이든 저한테 하세요.”숙친왕이 손을 들어올린 건 원래 미색에게 겁을 주려고 한 행동인데, 이 녀석이 뛰어들어와 미색 앞을 가로막고 서는 바람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녀석을 밀치며 무공이 어느 정도인가 시험해 봤더니 이거 허약한 것 좀 봐, 역시 못쓰겠어.회왕은 병을 앓았을 때도 무공수련을 했다. 비록 요 몇 년간 병으로 수련에 소홀하긴 했지만 반년 넘게 수련을 해와서 숙친왕이 밀쳤을 때 그래도 안정적으로 서있고 한쪽으로 밀쳐지지 않았다.하지만 미색은 아버지가 회왕을 밀친 것을 보고 분노하며 벌떡 일어나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길, “낭군을 왜 때려요? 낭군은 환자인데 환자 앞에서 세다고 뽐내는 거예요? 어디 저한테 덤벼 보시죠, 우리 나가서 싸운 다음 아버지가 지면 대흥으로 돌아가세요.”미색은 혼례식 전에 회왕과 개인적으로 두세 번 만났지만 만날 때마다 부드럽고 순종적인 성격이라 길 가다가 개미새끼 한 마리도 못 밟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광분해 소리치는 걸 듣고 순간 넋이 나가서, 회왕은 미색을 다시 보는데 나와 혼인할 신부가 바꿔 치기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미색도 자신의 실수에 ‘아차’싶었지만 눈앞의 상황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만약 회왕이 이때문에 자신을 싫어하면 이 혼례는 없었던 일이 되고 미색은 다시는 시집을 가지 못 가니,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솟구쳐올라 발을 쾅쾅 구르며, “봤죠? 그래서 제가 아버지가 오시지 말았으면 했던 거예요. 아버지가 오시면 내 혼사를 깨 버리실 게 분명하니까. 어렵게 어렵게 원하는 낭군을 만나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이제 틀림없이 절 싫어할 거예요.”아름다운 여인이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니 눈가에 보석이 매달린 듯한 것을 보고, 회왕의 마음이 찢어지듯 아파오며 숙친왕이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색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늘 당신과 내가 혼례를 치르고
원경릉과 숙친왕의 독대숙친왕이 일어나 맞아들이는데 방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시종 하나가 차 시중을 들고 있었다. 숙친왕이, “태자비, 앉으시게.”원경릉이 예를 취하며, “왕야, 강녕하십니까.”원경릉이 앉은 후 숙친왕을 훑어보니 외모가 준수한데 미색과는 그다지 닮지 않은 듯했다. 눈은 닮았으나 다른 데는 그다지 닮지 않았고, 숙친왕의 얼굴선은 비교적 강인한 것이 우문호와 같다.“듣자 하니,” 숙친왕이 입을 여는데 목소리가 중후하고 듣기 좋다, “미색의 혼사는 태자비가 중매를 한 것이라고 하던데 그러 한가?”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지만 이것도 미색이 먼저 회왕에게 첫눈에 반해서 제가 중매를 나선 것입니다.”숙친왕이 미소를 지으며, “태자비에게 특히 감사해야 겠군, 미색을 위해 좋은 혼사길을 마련해 주었으니 말이야, 딱 봐도 회왕이 미색에게 잘 하더군, 아주 만족스러워.”원경릉은 마음이 일단 놓였다. 방금 숙친왕이 질문할 때 표정이 긴장돼 보이길래 회왕이란 사위가 마음에 안 드는가 싶었다.“회왕은 어질고 정이 많은 성격으로 분명 미색에게 잘할 것이고, 미색의 성격으로 보아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겁니다.” 원경릉이 말했다.숙친왕이 살짝 고개를 흔들며, “여자는 아무리 강인해 보여도 약점이 있는 법이라, 일단 한 번 마음을 주어 굳어버린 마음은 만신창이로 다치기도 하지. 미색은 그런 사람이라 만약 회왕이 그녀에게 잘해주지 않거나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줏대 없이 굴면 미색은 상처 받을 게 틀림없네.”이런 말이 강인한 남자의 입에서 나오다니 원경릉은 다소 의외였으나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왕야 말씀이 맞습니다.”숙친왕이 원경릉에게, “하지만 내가 태자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 건 미색 일 때문은 아니네. 내일 시간을 내서 사람을 하나 만나러 오지 않겠는가?”“누구를 만나는지?” 원경릉이 물었다.숙친왕이, “내 선배인데, 태자비가 산에 올라 나병을 치료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 용감한 태자비를 만나고 싶어 하셔서 말이야
기분좋게 취한 우문호우문호는 오늘밤 70~80%는 취한 상태라 서일의 부축을 받고 돌아왔다.원경릉은 우문호보다 조금 일찍 와서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우문호가 침대에 앉아 두 다리는 바닥에 여덟 팔자로 쭉 뻗고 손을 들고 웃으며 힘껏 원경릉을 향해 손목을 흔들더니, “이리와, 음냐음냐, 이리와.”원경릉이 뜨거운 물수건을 가져가서 우문호의 얼굴을 닦으려고 하는데, 우문호가 손을 뻗어, “손잡자.”원경릉은 우문호를 상대하지 않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뽀독뽀독 닦았다.우문호는 아무렇게나 원경릉의 손목을 잡고 힘껏 원경릉의 손을 흔들며, “옳지, 잘한다, 옆에 엎드려, 내일 고기 주께.”원경릉은 이 말을 듣고 또 자기를 다바오 취급하는 걸 보니 우문호가 상당히 마셨다는 걸 알았다.다바오는 문 귀퉁이에 숨어서 ‘왈’ 하고 한번 짖더니 약간 안됐다는 듯 원경릉을 쳐다봤다.원경릉은 개한테까지 동정 받는 바람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우문호의 겉옷을 벗겨주며, “전신에 술 냄새.”우문호가 한 손으로 원경릉의 허리를 감아 쥐고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아무 말이나 막 하기 시작하는데, “원 선생, 오늘 나 기분 좋다, 내가 왜 기분 좋은 지 알아?”“동생이 결혼했으니까!” 원경릉이 우문호의 벌건 얼굴을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얼마나 마셨길래 눈이고 목이고 다 벌건 거야.“그럼, 당신은 여섯째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 전에 난 꿈에도 생각을 못했지, 여섯째 병은 나때문에…… 나때문에 병에 걸린 거야, 거의 죽을 뻔 했다고, 만약 여섯째가 죽었으면……” 우문호는 원경릉의 얼굴을 받치고 약간 짜증을 내며, “머리 좀 흔들지 마, 내가 다 어지럽잖아.”원경릉이 우문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응, 안 흔들게, 자기 눈 감아.”“안돼,” 우문호가 눈을 감았다가 바로 다시 번쩍 뜨더니, “눈을 감으니까 더 어지러워.”우문호는 원경릉을 안고 눕더니 몸을 돌려 엎드려서 체중을 실어 원경릉을 누르고, 술냄새가 터지며 원경릉의 귀에 대고 중얼
기쁜 우문호우문호는 원경릉을 가슴에 끌어당겨, “가지마, 당신한테 할 말이 많아, 앉아봐, 여기서 내 얘기 들어.”원경릉이 하는 수 없이, “좋아요, 얘기해요, 들을 게요.”우문호가 누워서 원경릉이 일어나지 못하게 가슴 앞에 꼭 끌어 안고, 눈을 감고 자신과 회왕이 어릴 때부터 자라나며 있었던 각종 재미난 일과 흑역사를 얘기하기 시작했다.술에 취한 사람의 주정은 특히 느릿느릿하고 말꼬리를 질질 끌어서, 완전 자장가가 따로 없었는데 원경릉은 아예 편안한 자세를 잡고 잠이 들었다.삼경(밤 12시)에 일어나 보니 우문호는 쿨쿨 잠이 들었는데, 붉었던 얼굴은 이미 색이 돌아왔고 머리에 관을 아직 벗지 않은 모습이 꽤 멋지다. 깊이 잠든 우문호는 들뜬 기운이 사그라지니 오히려 학문이 깊고 온화해 보인다.원경릉은 우문호의 볼에 뽀뽀하고 팔을 괴고 우문호를 바라봤다.이 남자는 전신이 결점 투성이로, 거칠고 난폭하며 고집스럽고 더럽고 어떨 땐 사건을 처리하고 돌아와 씻지도 않고 옷만 벗고 침대에 쓰러져 잔다.우문호의 결점은 손가락 발가락 다 동원해도 부족할 만큼이다.하지만 우문호는 장점도 많은데, 효심이 깊고 원칙을 고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전에는 개를 무서워했는데 지금은 다바오와 거의 ‘절친’이 되었다.우문호는 황실의 아들이나 백성의 둘러싸여 살며 허세를 부리지도 않고 땅에 발을 붙이고 생활의 향기를 풍긴다. 쉽게 말해 실질적이고 명실상부한 한 명의 사람이다.전에 할머니가 그러셨다. 원경릉은 나중에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오직 연구에만 몰두하고 연애라 고는 1도 모르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이다.만약 원경릉이 결혼 정도가 아니라 아이까지 셋을 낳았다는 걸 할머니께서 아시면 분명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시겠지.가족을 생각하니 원경릉은 또 눈가가 붉어졌다. 천천히 누워 팔베개를 하니, 전생에 가족과 같이 한 추억이 방울방울 마음 속에 떠올랐다.사실 그들 가족이 서로 모인 날은 많지 않은 게, 1년을 통틀어 모두가 같이 모이
이리 저택이리 저택 쪽에 신시(오후3시~5시)에 올 거라던 손님이 벌써 도착해 태자비를 오라고 했다.원경릉은 초왕부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날이 좋은 김에 다바오를 한바퀴 산책 시키고, 열이와 호명의 일을 살피며 고시(古詩)를 몇 수 가르쳐 주고 차 한잔하며 일상을 즐겼다.그간 쌓인 피로는 며칠 느긋하게 쉬면서 거진 사라졌고 거기에 차까지 마시니 정신이 맑아졌다. 살구 빛 옷으로 갈아입고 정성 들여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보석을 장식하니 원경릉은 딱 위엄 있는 귀부인 모습이다. 오늘 날씨가 특히 좋아서 사식이는 집에 갔고, 이리 저택엔 만아와 서일을 데리고 갔다. 사식이가 빠져서 수행하는 호위가 부족해 보일지 모르나 비밀리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따라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 고수들은 호시탐탐 길 가는 모든 사람들을 주시하며 갑자기 어느 흉악한 자객이 늑대파의 20만냥 현상금을 노리고 태자비를 살해할까 감시했다. 이리 저택에 도착하자 불식이 문 앞에서 원경릉을 기다리고 있다. 기울어져 비취는 햇살에 정원은 온통 금빛이고, 가을 바람이 여전히 강하게 불어와 원경릉의 옷자락이 펄럭였다.하인은 황금빛 오동나무 잎이 가득 떨어진 마당을 쓸고 있어 먼지가 이는데, 황금빛 햇살 아래 먼지도 마치 금가루 같았다.원경릉은 마치 시간의 모양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불식은 원경릉을 데리고 들어가며, “숙친왕 전하와 이리 나리 모두 편청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였다.원경릉과 불식이 본관을 돌아 후원으로 들어가니 접객실은 후원 바로 맞은 편에 있다.네 쪽 문을 활짝 열고 석양이 안으로 비쳐 드는데, 원경릉은 멀리서도 숙친왕과 이리 나리가 본관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원경릉이 들어가자 숙친왕이 일어나 예를 취하고, 원경릉과 숙친왕이 대면한 뒤 이리 나리를 보니 태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에 지금 그가 사부라는 사실이 떠올라 문안인사를 올리며, “사부님 안녕
우문호는 혼인을 하사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탕양의 혼사에 화룡점정을 더하는 일이었다.온 경성 사람들이 탕양이 황제를 모시는 신하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혼사에 주목했다.탕양은 왕부에서부터 황제를 지지해 온 충신이었으며, 군신 간의 정은 형제의 관계에 못지않았다.거기에 황제가 직접 혼인을 하사했으니,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래서 다들 두터운 예물을 준비해 축하하러 왔다.혼례는 초왕부에서 열렸다. 비록 초왕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이번 경사에 많은 지원이 몰렸다. 여러 왕부에서 사람을 보내왔고, 미색은 돈에 힘까지 보태며 혼사 지출의 3할이나 부담했다.희상궁도 돌아와 모든 일을 총괄했다. 희상궁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여러 왕부에서 온 사람들을 지휘하며 완벽하게 일을 조율했다.혼례 당일, 황제와 황후도 참석했다.신부가 도착하여, 혼례를 올릴 때 우문호와 원경릉은 상석에 앉아 신랑 신부의 절을 받고는, 그 다음으로 기상궁도 절을 받았다.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잡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탕 대인이 드디어 철이 들었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정말 기쁘네.”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마음이 풀립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시지요.”“잔소리는 계속할 것이다. 이젠 아이를 낳으라고 해야지.”우문호는 걱정이 끝이 없다는 듯 말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이 낳는 일은 하늘에 맡겨야 하네.”“그래도 몇 가지 비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소.”우문호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좀 더 크게 말해보시오. 다른 사람들이 못 들을까 봐 걱정이오?”원경릉이 그를 흘겨보았다.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며 부러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많은 사람이 첩을 두고도 황제만큼 자식을 많이 두지는 못했지만, 황제는 복도 많고 자식도 많은 사람이었다. 저녁 연회에서 우문호는 과음했지만 원경릉은 그를 막지 않았다. 이런 노부의 감격은 술로 달래야 한
탕양이 뜨거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거짓말이라면 제 목숨을 앗아가도 됩니다.”일곱째 아가씨가 그의 시선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돌고 돌아 결국 대인과 함께하게 되었네요. 하지만 미리 말하자면 혼사가 너무 급작스럽게 성사되어 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집간 후에도 그저 명목상 부부로만 살 뿐, 당분간은 벗으로 지낼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혼사를 승낙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없던 걸로 하시지요.”그러자 탕양이 거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받아들이겠습니다. 무엇이든 다 좋습니다. 혼사만 승낙한다면 그저 명분이라도 상관없습니다!”이로써 드디어 그의 수년간의 바람이 이루어졌다.일곱째 아가씨가 담담히 말했다.“그렇다면 어디서 지낼지 생각해 보시지요. 하지만 대인 방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곳에 지낼 수는 없습니다.”탕양이 다급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마마와 상의를 해보았습니다. 지금 초왕부에 아무도 살지 않으니, 우선 그곳에서 지내시지요. 전에 그 방은 저도 쓰지 않고, 바로 서일에게 줬습니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물었다.“저택을 따로 살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전에 혼자였을 땐 그런 생각까지 하지 못 했습니다. 초왕부도 누군가 관리해야 하는 터라... 하지만 아가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돈을 모아 작은 집이라도 살 수 있습니다.”일곱째 아가씨는 초왕부를 둘러보았는데, 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몹시 편안했다. 하지만 황제의 옛 저택이라, 평생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우선은 이곳에서 지내고, 나중에 땅을 사서 직접 집을 지으십시다.”땅을 사고 집을 짓는다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탕양은 순간 자기가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꼭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일곱째 아가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땅도 제가 사고, 집도 제가 지을 것입니다. 나중에 대인이 잘못이라
노태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안 된다. 혼인 전에는 신랑 신부가 만날 수 없어. 이건 풍습이고 규칙이니, 어길 수 없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이 혼사에 정해진 규칙이 있긴 합니까?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를 만나 오히려 싸움이 나서 혼사가 그릇될까 봐 걱정되시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께 약속했으니, 반드시 혼사를 올릴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 놓이십니까?”노태군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좋다. 너도 장사하는 사람이니 신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약속했으니, 절대 번복할 수 없어. 목을 매겠다는 이 어미의 결심은 너가 반대하면 언제든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일곱째 아가씨가 이를 갈며 투덜댔다.“이렇게 얄미운 늙은이는 정말 처음입니다!”“나도 너처럼 고집 센 딸은 처음 본다.”노태군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원가 사람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일곱째 아가씨가 시집가는 것이 정말 꿈만 같게 느껴졌다.일곱째 아가씨의 혼사는 원가 사람들에게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가 무사히 경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고 나니,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이 북받쳤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생각에 그는 코끝이 다 시큰 거렸다.그날 밤, 일곱째 아가씨가 초왕부로 탕양을 찾아가자, 탕양은 그녀를 안으로 들인 후, 단둘이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탕양은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붉은색 옷차림에 머리를 단정히 올려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이 여전히 돋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패기 넘치던 청춘 시절이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이렇게나 많이 늙어 버렸다.탕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수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지만, 한마디 말도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특히 약도성에서의 일을 겪고 난 뒤라, 첫마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일곱째 아가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는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찌 그와 그런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그녀의 표정을 보았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잠시 멍해졌다.노태군이 이 상황을 보고 말했다.“정말 그와...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냐?”“물론입니다! 그날 밤 그는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일곱째 아가씨가 퉁명스레 답했다.노태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그런 기본적인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탕양이 정말 쓸모없는 놈이라 생각되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 믿을 것 같으냐? 혼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물릴 수 없다. 혼사를 올리지 않으면, 이 어미 시신이나 수습해야 할 거다!”노태군이 차갑게 말하자, 일곱째 아가씨는 그만 분통을 터뜨렸다.“어머니, 어찌 이렇게 억지를 부리시는 것입니까?”“이 어미는 평생 이치를 따지며 살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예외다. 본디 자식의 혼사는 부모가 결정하는 법이다. 게다가 황후까지 중매에 나섰으니, 너에겐 반대할 권리가 없다. 어서 가서 준비나 하거라. 열닷새에 식을 올려야 하니.”“열닷새요? 모레잖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이리 급히 저를 시집보내면, 제 체면은 어쩌라는 말씀입니까?”일곱째 아가씨가 소리치자, 노태군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화를 냈다. “체면? 지금 체면이라 한 것이냐? 이 어미는 벌써 체면 다 버렸다! 네 혼담이 계속 흐지부지 되어 여태껏 시집도 못 가고 늙은 아가씨 취급받는 게 얼마나 창피한 줄 아느냐?! 매번 연회에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물어보는데, 이 어미의 체면을 생각한 적 있느냐?”“그래도 아무에게나 시집갈 순 없지 않습니까. 평소 늘 말이 통하시는 분이신데, 어찌 이 문제에서는 이리도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노태군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아무나? 그럼 내가 물으마. 탕양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느냐?”그러자 일곱째 아가씨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애써 침착하게 답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