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비의 병은 제때 발견해 한 달 남짓의 치료를 거쳐 많이 좋아진 상태다.그녀의 얼굴에 흉하게 남아있던 붉은 반점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원경릉은 처음으로 약상자에 현미경을 꺼내 희상궁의 상처조직을 채취해 검사했다. 검사 후, 희상궁의 흉터에서 채취한 조직에서는 문둥병 균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는 희상궁의 병에는 전염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사실 이 병은 호흡이나 접촉으로 전염이 된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항체를 가지고 있고 개인 면역력이 다르기에 접촉 후에도 감염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당시 희상궁의 면역력이 떨어져 있었기에 그녀가 감염이 된 것이지 평소의 상태였다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원경릉은 희상궁에게 달려가 전처럼 삼둥이들을 볼 수 있다고 하자 희상궁은 눈물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원경릉은 한 걸음 물러나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달 동안의 치료 기간 동안 원경릉도 물론 힘들었겠지만, 당사자인 희상궁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는가.아마 말은 안 했어도 마음속으로는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이다.원경릉은 희상궁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하지만 희상궁의 병이 전염성을 잃었다고 해도 완벽히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니다. 원경릉은 그녀의 병이 완전히 낫기 전까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는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왕은 남영에 있었지만 가끔 경중으로 돌아왔다. 안왕은 곧 다가오는 귀비의 탄신일을 맞아 경중으로 와 선물을 건넸다. 그는 안왕부에 돌아와 안왕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안왕부 서재로 아라를 불렀다. “다섯째 쪽에서 무슨 얘기가 없느냐?” 안왕이 아라에게 물었다. 그의 남영에서 까맣게 탄 피부로 얼굴이 전보다 많이 야위어 보였다. “왕야, 태자가 대주와 동맹을 맺으려 한 후부터, 지금 조정의 모든 백관들이 태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습니다. 전에는 중립을 지키던 관원들도 주국공이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 설득을 한다고 합
“희상궁이? 정말로?” 안왕이 눈을 크게 떴다.“예, 최근에 나온 건 원경릉과 주국공부에 갔던 게 다 입니다. 그 후로는 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전에 희상궁이 책임지고 하던 왕부 내 물품 조달을 사식이와 만아가 하고 있습니다.’안왕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 앞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눈을 반짝였다. “혹시 설마 병이라도 난 건가?”“겨우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아니, 반년이라도 걸릴 수 있지. 전에 어의가 말했는데 병자와 접촉한 후 몇 년 후 발병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몇 달 만에 발병하기도 한다더라.”안왕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아라를 보았다. “아라야 너는 초왕부에 사람을 심어 내부 상황을 좀 알아보거라. 희상궁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꼭 알아내야 해.”아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왕의 무릎 위에 앉아 요염하고 그에게 기대었다. “왕야, 만약 희상궁이 문둥병에 걸렸다면 초왕부를 폐쇄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문호는 경조부윤에서 물러야 할 겁니다.”안왕은 핏대를 잔뜩 세웠다. “본왕은 우문호가 경조부윤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아.”’“그렇다면……?”“난 우문호를 철저하게 무너뜨릴 거야.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아라는 안왕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을 쓸었다. “왕야 말씀이 맞습니다. 차라리 죽여버리는 것도 괜찮겠네요.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안왕은 아라의 허리를 감싸며 조용히 읊조렸다. “조어의는 지금 초왕부의 어의잖아. 만약 희상궁이 문둥병에 걸린 게 맞다면 조어의도 지금 원경릉을 도와 희상궁을 치료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문둥병 같은 불치병은 치료 방법이 없으니, 일단 조어의 쪽을 공략해 보자고.”“좋습니다. 그럼 안왕께서 오늘 밤 저와 같이 있어주시는 겁니까?” 안왕은 아름다운 아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아니, 본왕이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왕비와 있어야지.” “아, 예……” 아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안왕의 무릎에서 내려와 실의에 찬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안왕비는 안왕 옆에 누워 뜬 눈으로 뒤척이다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왕야, 아라는 당신과 함께 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녀를 후궁으로 들이는 게 맞지 않을까요?”안왕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아라가 본처인 줄 아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아라를 더 의지하고 모든 일은 아라에게 맡기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안왕부에서도 그녀가 훨씬 더 활개를 치고 다니고…… 요즘은 제가 아라의 눈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안왕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안왕에게 말했다. “바보야. 본왕에게 아라는 그저 시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어찌 시녀 주제에 내 후궁이 될 수 있겠느냐?”“그래도…… 당신과 아라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고, 또 함께한 세월이 깊지 않습니까?”“그래서 우리 왕비가 나와 시녀 사이를 질투라도 했다는 건가?” 안왕이 그녀의 턱을 위로 올렸다. 안왕비는 자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질투를 안 했다면 거짓이겠지요. 하지만 질투해서 뭐 합니까? 어쨌든 안왕에게는 후궁이 필요할 텐데……”라고 말했다. “본왕은 후궁 따위는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된다.” 안왕이 그녀를 껴안았다. “정말요?” 안왕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당연하지. 본왕이 후궁이 필요했다면 진작에 후궁을 들였을 것이야. 근데 보아라, 난 너에게 후궁 얘기를 꺼낸 적도 없지 않느냐? 본왕에겐 오직 너뿐이야. 설마 혼인 때 했던 약속을 잊은 것이야?”안왕의 말을 들은 안왕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예. 왕야께서 이번 생은 후궁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그래, 난 뱉은 말을 지킨다.” 안왕이 말했다. 안왕비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미소를 지었다. “왕야 그거 아십니까? 초왕도 후궁을 들이지 않고 한결같이 초왕비만 사랑하겠다고 했답니다. 그 얼마나 순결하고 귀한 사랑입니까? 저는 내심 그 둘을 보며 부러워했습니다. 왕야께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네요
조어의를 떠보는 적운근래 안왕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정에서 요직을 담당하는 고관대작들로, 이들은 일전에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성은을 입어 어의를 청하곤 했다. 그래서 조어의와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람도 여럿 있는데 그들은 평일에도 가끔 모이곤 했다.이번에 조어의를 술자리에 초대한 사람은, 명원제가 파격적으로 ‘국구(國舅, 황제의 처남)’로 봉한적위명의 장자 적운(狄雲)이다.원래 태후나 황후의 형제만 국구로 봉해지는데, 적운은 3년전 천자를 호위할 때 명원제를 구한 공이 있어 그 자리에서 바로 국구로 봉해졌다.국구 적운의 장모가 전부터 심근경색을 앓아왔는데 항상 귀비의 은혜로 조어의가 몇 번 치료하러 다녔고, 그렇게 왕래하다 보니 국구와 친해졌다.이제 국구가 술자리에 초대하면 조어의는 안 갈 도리가 없었다.하지만 조어의도 바보가 아닌 지라 안왕과 태자 사이에 드리운 암울한 기운의 심각성을 알고, 가기 전에 우문호를 찾아가서 물었다.우문호가, “신경 쓰지 말고 가시게, 만약 술자리에서 희상궁 일을 물으면 희상궁이 확실히 병이 있는데 본인은 치료에 참여하지 않고 태자비가 직접 한다고. 그리고 희상궁이 혼자 따로 살고 있어 아무도 드나들 수 없다고 얘기 잊지 말고.”조어의는 희상궁이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태자가 신신당부하는 것이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므로 알았다고 했다.적국구와 만난 뒤 예의상의 인사말을 나누자마자 바로 술이 들어왔다.이렇게 속히 술을 권하는 걸 보고 조어의도 마음을 다잡고 술이 세 순배쯤 돌자 상당히 취한 척 했다.적국구가 상황을 보고 술잔을 내려 놓으며 이것저것 주워섬기다가, “맞아, 사람들이 전에 태상황의 시중을 들던 희상궁이 지금은 초왕부에 있다고 하던데, 조어의는 희상궁과 알고 지내십니까?”조어의가 듣고 ‘과연 희상궁 일을 묻는구나’ 싶어 태자의 선견지명에 놀라며, “맞습니다, 희상궁이 확실이 태자비 마마의 시중을 들고 있지요, 저는 희상궁과 우연히 몇 마디 섞어봤을 뿐이라 알고 지낸다고 하긴 어렵군요.”적국
희상궁의 병을 의심하는 적운과 조어의조어의가 이번엔 직접 술을 따라 적국구의 잔을 가득 채우더니 자신의 잔에도 따르고, “오늘밤 국구 나리께서 오직 저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해 주셨으니, 제가 국구 나리께 한 잔 올릴 차례입니다.”적국구는 조어의가 이번에 권한 술은 평소처럼 어물어물 넘기지 않고 바로 다 비우더니 술잔을 내려놓고, “그럼 태자비 마마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조어의가, “태자비 마마께선 짧은 논평에서 나병에 관해 보시고 소인에게 물어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적국구가 당황하며, “논평에 나병에 관해 써 있다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조어의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으며, “진짜인지 아닌지 누가 따지겠습니까? 자자, 계속 드십시다.”적국구가 웃으며, “만약 정말 나병에 걸렸으면 어의에게 알릴 리 없었을 테지요.”조어의가, “그야 그렇지요, 태자비 마마시니까요, 하지만 국구 나리 눈은 속일 수 없으니 말씀드립니다. 초왕부 시녀 만아가 약방에서 나병을 치료하는 약을 사더군요, 단지 이것은 기밀사항으로 아무도 알게 해서는 안됩니다.”“정말입니까?” 적국구의 눈이 빛나더니, “확실하지요?”“됐어요, 그만 합시다. 이 일은 저희와 무관하니 자자, 술 드십시다.” 조어의가 입을 다물었다.적국구가 더 캐내기가 뭐해서 대충 몇 잔 더 마시더니 핑계를 대고 일이 있다며 갔다.조어의가 돌아와서 우문호에게 보고하고 적국구가 과연 희상궁 일을 물었다고 했다.우문호가 서탁에 앉더니 얼굴에 화색이 가득 돌며, “잘 됐군, 물어 보다니 잘 됐어.”조어의가 어리둥절해 하며, “왕야, 희상궁이 정말 나병에 걸린 건가요?”우문호가 손을 흔들며, “어찌 그럴 리가? 희상궁은 전에 계속 황궁에 있었고, 출궁한 뒤로 초왕부에 있었으며 나병 환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무 이유도 없이 나병에 걸릴 수가 있나?”조어의가 다소 걱정하며, “하지만 희상궁이 이미 한 달이 넘도록 문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우문호가 바깥을 둘러보
희상궁이 나병이라고 조정에서 터트리다이렇게 이틀이 지나고 적국구가 아침 일찍 상소를 올렸는데, ‘희상궁이 나병에 걸렸음에도 태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면서 고의로 감추고 개인적으로 나병 환자를 초왕부에 숨겨두었다’는 내용이었다.초왕부에 나병 환자가 있다는 말에 온 조정이 놀라서 술렁거렸다.5년전 역병이 창궐했던 공포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관원들에게 되살아나며 거의 매일 나병 확진자가 나오고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려고 했다.당시 명원제가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으나, 바로 결단을 내려 신속하게 환자를 검사하고 병자들을 문둥산으로 보내 격리시켰다. 그리고 석회가루로 환자가 살았던 곳을 소독하고 환자가 사용한 옷과 일상용품 전부를 태워 다른 사람에게 전염을 막았다.그때 거의 경성 전체에 나병의 그림자가 드리웠는데 병에 걸린 사람은 몸에 병을 앓고,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마음에 병을 앓았는데, 조정에서 이 병은 몇 년의 잠복기를 거친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모두 자신이 잠재적인 환자가 아닌가 두려워했다.지금 적국구가 조정에서 나병이란 두 글자를 입에 담으니 어찌 사람이들이 떨지 않을 수 있을까?더욱 두려운 것은 이번에 병에 걸린 사람이 희상궁이라는 점으로 희상궁은 전에 계속 궁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인데 만약 희상궁이 환자면 그러니까?순간 문무백관의 눈동자가 전부 높은 자리에 앉은 명원제를 주목했다.명원제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명원제는 당연히 그 공포를 잊을 리가 없는 것이 그 일이 마침 명원제가 등극하자 마자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막강한 대국에서 강력한 군대가 쳐들어 왔다면 출병해 맞서 싸울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악질이란 불치병이 발생해 폭증할 경우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적국구를 바라보고 적국구는 우문호를 바라보고 있다.10월에 하늘에서 내린 용의 아들을 순산한 경조부 부윤이자 황실의 태자 우문호는, 순간 막막한지 무고하다는 맑은 눈빛으로, “희상궁이 나병에 걸려
적위명 초왕부에 들이닥치다기왕 엄밀히 조사하기로 했으니 어의 몇 명을 관원과 함께 보내야 했다.하지만 나병인지라 관원들은 감히 가려고 들지 않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아무도 이 난관을 해결하려고 들지 않았다.주재상이 나와서 목소리를 깔고, “소신이 어의와 함께 가 보길 원합니다.”적위명이 이 얘기를 듣자마자, “소신 부자도 함께 가 보길 원합니다.”주재상이 희상궁과 태자를 얼마나 감싸고 도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주재상 혼자 어의와 가게 둔 말 말인가? 주재상은 지금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어의도 주재상의 말을 들을 것이라 나병 진단이 나면 주재상이 어의에게 함구하라는 엄명을 내릴 지도 모른다.주재상과 적위명 대장군의 대열을 따라 조정의 다수의 관원들도 흩어져서 따라 가는데 어쨌든 가긴 가지만 희상궁과 접촉한다고 하지는 않았으니 초왕부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고 다행히 주재상 일행과 같이 가는 형식이다.이렇게 여럿이 모여 시너지를 얻은 관원들과 망연자실한 태자가 보무도 당당하게 초왕부로 갔다.가는 길에 태자 우문호는 백치미를 드러내며 계속 적국구에게, “도대체 누가 희상궁이 나병에 걸렸다고 한 겁니까? 이거 뜬 소문 아닌가요? 만약 희상궁이 알면 분개하지 않겠어요?”적국구는 우문호를 상대하지 않았지만, 다른 관원들은 태자를 이렇게 거북스럽게만 하기도 곤란해서 ‘이 일은 어쩌면 누군가가 작심하고 초왕부와 태자 전하를 목표로 유언비어를 퍼트렸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원래는 그냥 적당히 위로하려던 심산이었는데 이 말에 주재상도 고개를 끄덕이며, “초왕부를 목적으로 삼은 유언비어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군.”그래서 가는 길에 관원들 사이에 이 얘기가 퍼지며 ‘희상궁이 정말 나병이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초왕부를 격리해서 폐쇄하려고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 처럼 되었다.적위명 부자가 이 얘기를 듣고 마음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때가 되면 유언비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우문호가 아닌 척을 하지만 척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나병
희상궁은 나병인가?주재상이 위엄 있게 헛기침을 하니 이 소리에 밖으로 나가려던 사람들이 눌러앉아 뿔뿔이 흩어져 엉거주춤하게 입구를 보다가, 주재상 한번 보고 태자 한번 보고 한다.잠시 후 탕양이 희상궁을 데리고 나오는 게 보였다.희상궁은 검은 비단 옷에 은발을 높게 틀어 올리고 위엄 있게 단장하고 얼굴에 분을 발랐는데 60세의 노인 얼굴이 여전히 희고 탱탱한 것이 팔자주름이 약간 깊어지고 눈가의 주름이 좀 더 생긴 것을 빼면 그녀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팔자주름이 깊으면 위엄이 있고 게다가 태상황을 모신지 수년이라 후궁의 지위에 초연하고 초왕부에 와서도 집사역할을 해왔기에 탕양과 함께 오는 모습은 비단의상을 바람에 날리며 패기가 넘친다.주재상은 자기도 모르게 자부심이 솟아나서 냉랭하게 적위명을 쏘아보았다.희상궁 뒤에 태자비 원경릉이 있는데 둘 사이 거리가 멀지 않다. 손에는 아이를 안고 있는데 태자비가 마르고 허약해 아이를 안고 천천히 걸으니 희상궁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태자비가 안고 있던 아이를 받아 들고 본관으로 들어왔다.황태손을 넘겨받아 안고 들어오는 이 행동으로 이미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만약 희상궁이 나병을 앓고 있었으면 태자비가 어떻게 황태손을 안길 수 있겠는가? 희상궁이 본관으로 들어온 뒤 안에 사람들을 살피고 평범하게, “이렇게 많은 대인께서 계시 다니요? 쇤네 황태손을 안고 있는지라 예를 취하기 어려운 점 대인들께 양해를 구합니다.”희상궁이 이렇게 대범하게 서 있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아무 흔적도 없는 것을 대중이 똑똑히 보았으며 황태손을 안고 있는 두 손도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현장에 있는 상당수 사람들이 문둥병 환자를 본적이 있는데 얼굴에 반상출혈이 나 있고 손가락 관절이 부어 있거나 독창이 나서, 발병한 환자를 처음 봐도 딱 알아 볼 수 있는데 희상궁에게 지금 문둥병 환자의 모습을 어디 한 구석이라도 찾아볼 수 없었다.적국구가 일단 놀랐고, 천천히 다가가서 희상궁과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탕 대인이 저를 예쁘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러니 일곱째 아가씨께도 예쁘다고 말해 보십시오.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하지만 탕 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를 겁니다. 일곱째 아가씨는 이제 그런거에 좋아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지금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하면, 그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어찌 그럴 리 있습니까?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탕 대인, 대인께서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탕 대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예? 하하하. 그렇습니까?""예! 모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탕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과찬입니다.""기분 좋으십니까?"택란이 묻자 탕 대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멈칫하며 말했다."이 녀석!"택란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탕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꼭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탕 대인은 이 말에 크게 감동해서 택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 고맙습니다."저녁엔 계약이 성공한 기념으로 연회가 열렸다.소박한 술자리긴 했지만, 커다란 술통들이 준비되어 있어 모두 마음껏 마시며 즐길수 있었다.택란은 술을 마시지 않기에, 주 아가씨가 매실청을 대신 준비해 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택란의 마음에 쏙 들었다.술잔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모두 패기 있게 약도성을 북당에서 제일가는 도성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일곱째 아가씨는 벌써 독산을 어떻게 개발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대부분이 경치를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반면, 택란은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다. 독산에 온천이 있으니 오두막을 지어 온천을 끌어들여 돈을 받고 여러 개의 탕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온천수가 몸에 좋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자고 제의하였다.택란의 생각은 이 시절
탕양은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자부했었다. 특히 일곱째 아가씨처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하기에 굳이 자신과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그의 큰 착각이었다.여인의 마음은 늘 갈대처럼 변덕스럽고,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다정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아가씨는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지내왔는데, 중년에 접어들며 그 외로움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누군가 곁에 있다면,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지만, 물론 잘못된 연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원가의 가훈은 항상 군주에게 충실하며, 엄청난 용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원가에서 키운 닭조차 남의 집의 닭보다 더욱 용감할 정도였다.하지만 한 번의 좌절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용기있는 행동 일까?물론 그녀가 반드시 탕양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탕양이 먼저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그녀 역시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여태껏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오직 탕양뿐이었다.그리고 어쩌면 시도해 봐야만 서로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탕양과 잘 맞는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경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탕양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공개적으로 구혼에 나설 생각이었다. 한편, 택란이 주 아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탕 대인이 왜 나쁜 사람인 것이오?""여인을 훔쳐봤습니다.""탕 대인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소? 어찌 못 보는 것이오?"주 아가씨는 택란이 이런 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내가 여인을 사모하면 상대의 시선을 바라보지,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탕 대인은 일곱째 아가씨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