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가 따라준 차를 마시면 대가 치러야 해.”도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배건후의 차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손보미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도아린은 그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배건후가 그 뒷말을 하게 해선 안 되었다.“배건후 씨!”도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배건후의 팔짱을 잡아당기면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하도 당황한 바람에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배건후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배건후는 그녀를 잡지 않고 그저 싸늘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도아린은 그의 허리춤을 잡고 올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말하지 말아요.”배건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민재가 네가 한 짓을 알까 봐? 그 비열한 수단을 알고 네가 역겹다고 생각할까 봐?”도아린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 배건후는 육민재의 마음속 도아린의 완벽한 이미지가 망가질까 봐 겁을 먹은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배건후의 팔을 잡고 화제를 돌렸다.“보미 씨 괜찮아졌어요?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내가 여기 있어서 거슬려?”배건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걸 보고 도아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육민재만 만나면 배건후는 생각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끼어든 건 나죠. 친구끼리 얘기해요.”도아린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는 육민재에게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그 일은 고마웠어요. 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육민재가 증거를 찾아줘서 고맙단 뜻이었다. 육민재는 도아린의 말대로 배건후에게 영상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그런데 배건후의 눈에는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것으로 보였다.그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도아린은 배건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배건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이 한마디를 남기고 배건후도 그녀를 따라나섰다.호텔 문 앞, 그는 도아린과 한마디도 섞지 않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배지유는 배건후
손보미는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배지유의 등을 토닥였다.“울지 마, 울지 마. 호텔에서 묵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길에서 나쁜 사람 만나면 어쩔 뻔했어.”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방안을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화장실로 향했을 때 배지유는 움찔하면서 손보미의 손을 꽉 잡았다. 정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었다.“건후 씨, 나 먼저 화장실 써도 될까? 급하게 오느라 약을 바르지 못했어.”손보미가 심장 쪽에 손을 올려놓았다. 옷을 벗어야만 약을 바를 수 있었다.배건후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옆에 기댔다.“먼저 들어가, 그럼.”아무리 경험이 많은 손보미라도 화장실의 전리품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배지유가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한 게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어젯밤에 호스트가 한 명만 있었던 거 맞아? 휴지랑 콘돔은 변기로 내려보낸다고 해도 포장 박스는 어떡하지?’거울에도 흔적을 남겼었는지 배지유가 말끔하게 닦았다. 재벌 집 아가씨가 샤워하지도 않고 잠을 잔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거울에 물기가 없어서 오히려 더 이상했다.손보미는 더는 방법이 없어 휴지를 변기에 내려보낸 후 문을 열었다.“으악!”“보미 언니...”배지유가 황급히 달려왔다. 손보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오른쪽 발이 이상한 각도로 틀어져 있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건후 씨, 발 너무 아파.”배건후는 담배를 끄고 손보미를 들어 올렸다.“물건 챙겨.”이 말은 배지유에게 한 말이었다. 배지유는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속으로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그녀와 손보미의 가방을 챙기고 문을 닫았다....도아린이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황급하게 나가는 소유정을 만났다.“어디 가?”“잘됐다. 나 좀 데려다줘. 한 친구가 손보미에 관한 흑역사를 찾았대.”도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손보미 좀 그만 내버려 둬. 그러다가 또 되레 모함당하면 어쩌려고.”소유정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까발리진 않더라고 갖고는 있어야지.
맨 앞에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가녀린 여자를 안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감싸 안고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발을 삐끗했는지 이상한 각도로 휘어있었다.소유정은 도아린이 화들짝 놀라자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나쁜 X끼, 가서 저 자식 머리라도 쥐어뜯어야겠어!”유진혁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고 찍기 시작했다.“대박, 엊저녁에 뜨밤 보낸 거로도 부족해서 대낮에도? 어찌나 많이 했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해?”두 사람이 양쪽으로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혹시라도 소유정이 괴롭힘당할까 봐 유진혁은 다 찍을 생각이었다.지난번에 일이 생겨서 오지 못한 바람에 소유정이 다쳐서 병원에 갔었던 것만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했다.딸깍.차 문이 잠겼다. 소유정이 아무리 차 문을 열어도 열리지 않자 다급하게 말했다.“아린아, 배건후가 손보미 저년이랑 저러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3대 3이에요. 싸우면 누가 이길지 몰라요.”유진혁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려고 하자 소유정이 눈을 희번덕거렸다.“배건후 혼자서도 우리 셋을 해결할 수 있어.”“누구? 누구라고?”유진혁은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배건후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하지 않아도 말로 충분히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도아린은 점점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며 눈빛이 싸늘해졌다. 세 사람이 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른 차 뒤로 사라졌다.잠시 후 은색 마이바흐가 도아린의 차 앞으로 휙 지나갔다.“내가 알아서 할게.”소유정이 또다시 그녀 때문에 경찰서에 가게 해선 안 되었다....병원.의사는 아주 능숙하게 탈골된 손보미의 발목을 맞추었다.“선생님, 보미 언니 미끄러져 넘어졌을 뿐인데 탈골됐다는 건 어젯밤에 누가 언니를 밀어서 넘어진 것과 연관이 있나요?”배지유는 기회만 잡으면 도아린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의사는 어젯밤에 어느 정도 다쳤는지 알 수가 없어 이렇게 말했다.“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요.”“오빠,
그런데 이 고질병이 배지유의 동정을 바꿨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호텔을 나올 때도 배건후에게 안겨 나왔고 병원에 온 후에도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와 관계라도 끊으려는 듯 문 앞에만 서 있었다.손보미가 일어서려 하자 배건후가 휠체어를 옆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면서 안아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못 알아챈 건지 아니면 알고 싶지도 않은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한쪽 발만 탈골된 거라 다른 한쪽 발은 멀쩡했다. 손보미는 하는 수 없이 한 발로 서서 휠체어에 앉았다.“사실 그 디자이너...”따르릉...손보미가 언짢은 얼굴로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여보세요?”“손보미 씨, 알려드릴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맡긴 드레스 망가진 부분이 많고 같은 바다 진주도 찾기 매우 어려워요.”문나연이 차분하게 설명했다.“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안 돼요!”손보미는 다짜고짜 호통쳤다가 배건후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다시 다정한 말투로 부탁했다.“그 드레스 이미 예약한 거라 그쪽 촬영에 영향 주면 안 돼요.”“그럼 더 잘하는 수선 대가님한테 맡기실래요?”문나연이 가볍게 웃었다.“아현 씨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선한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보미 씨가 같은 품질의 바다 진주를 찾으면 모를까.”그러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손보미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무슨 일이야?”배건후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생일날에 빌린 드레스 입고 영상을 찍었는데 불꽃이 갑자기 터진 거야. 다행히 제때 피해서 다치진 않았는데 드레스가 여러 군데 구멍 났어.”그가 시선을 늘어뜨렸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망가졌으면 사면 되지.”손보미가 울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그 드레스는 어떤 미스터리한 사람의 사유품이라 얼마를 줘도 안 판대. 거금을 들여서 업계 최고 수선 대가님한테 맡겼는데 같은 재료를 찾기 어렵대.”배건후는 계속하여 라이터를 돌렸다. 손보미는 그의 표정을
배건후는 금속 라이터를 쥔 채 차갑게 물었다.“무슨 재료인데?”손보미는 가슴이 쿵쾅거렸다.‘연락하지 않겠다는 건 그냥 한 말인데 건후 씨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겠지? 우리 관계에 날 모른 척할 리가 없어.’“최고 품질의 바다 진주.”배지유는 문득 뭔가 생각했다.“그 드레스 가게에 있어요!”블랙 벨벳 드레스를 봤을 때 소매 부분에 크고 둥근 최고 품질의 바다 진주가 박혀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원래는 손보미에게 사달라고 할 생각이었으나 도아린과 불쾌한 일이 생긴 바람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손보미가 물었다.“확실해?”배지유가 대답했다.“확실해요!”손보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그 드레스 가게 디자이너가 건후 씨한테 잘 보이려고 했으니까 건후 씨 전화 한 통이면 바로 갖다 바칠 거야. 도아린, 내 앞길을 막아? 건후 씨가 내 편인 이상 아무도 날 못 건드려.’“건후 씨...”손보미가 빤히 쳐다보자 배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처리할게.”배건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손보미는 한시름을 놓았다.“가서 일 봐. 지유가 잠깐 있어 주면 돼. 지민이 오는 길이라고 했어.”배건후가 다시 돌아섰다.“자르지 않았어?”손보미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멋쩍게 웃었다.“지민이가 무릎 꿇고 꼭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용서해줬어.”‘건후 씨를 빨리 보내야 해. 지민이를 만났다간 들킬지도 몰라.’“회사 일이 더 중요하지. 난 내가 알아서 잘 챙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배건후는 다른 사람이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럼 먼저 갈게.”배건후가 나간 후 손보미가 휴대전화를 꺼냈다.“병원비 얼마 나왔어? 이체해줄게.”“괜찮아요...”배지유의 시선이 멍하기만 했다.“그럼 200만 원 줄게. 용돈으로 써.”윙윙하는 진동에 배지유가 움찔했다.“왜 그래?”손보미가 배지유의 손을 잡았다.“손이 왜 이렇게 차?”배지유는 계좌 이체 알림인 걸 보고서야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아무것도 아니에
부탁하는 일이라 가게 문 앞에 ‘손보미와 배건후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걸려있다는 건 얘기하지 않았다. 우정윤은 할 수 있는 얘기만 골라서 했다.“서대은 씨 디자인계에서 명성이 자자하고 성격도 불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든 사람한테는 공짜로 퍼주기도 하는데 거슬리는 사람한테는 얼마를 줘도 팔지 않는대요.”배건후가 펜을 꽉 쥐었다. 그는 서대은과 아무런 친분이 없었고 서대은도 도아린만 도와줄 뿐 손보미를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도아린은 블랙 카드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전에 장뇌삼을 사느라 도아린이 전 재산을 거의 다 털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가게 드레스도 비싸고 메이크업까지 더하면 지출이 꽤 컸다.“도아린 누구 카드 긁었어?”배건후는 우정윤이 가장 대답하기 싫어하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대답을 피할 수도 없었다. 우정윤이 아무 말이 없자 배건후가 고개를 들었다.배건후의 싸늘한 눈빛에 우정윤은 폴더를 꽉 잡고 화를 당해낼 준비를 했다.“사모님 드레스랑 메이크업 다 공짜로 받으셨어요. 서대은 씨가 선물한 겁니다.”차가운 냉기가 순식간에 커다란 사무실을 휩쓸었다. 사인펜이 뚝 부러졌고 배건후의 손등에 핏줄이 다 튀어나왔다.결혼 3년 동안 도아린은 배건후의 옆에만 있거나 주방에만 있었다. 인맥을 넓히라고 여러 번 설득했었는데도 도아린은 귓등으로 듣기만 했다.‘대체 언제 서대은과 친해진 거야? 그것도 비싼 드레스를 공짜로 받을 정도로?’조금 전 우정윤이 말했던 ‘마음에 든 사람에게는 공짜로 퍼준다는’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그렇게 급하게 에이트 맨션에서 나간 게 저런 볼품없는 사람들을 만나려고 그런 거였어?’우정윤은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천천히 문 쪽으로 물러났다. 나가려는데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난번에 알아보라고 했던 일 어떻게 됐어?”우정윤이 발걸음을 멈췄다.‘깜빡할 뻔했네.’그는 다시 돌아서서 조사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손보미 씨가 귀국한 그날에 뒤에서 오던 버스가 피하려다가 배수구에
배건후는 오늘따라 일 처리 효율이 별로 높지 않았다. 도아린이 밖에서 아무나 만나고 다닌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우정윤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프로젝트가 곧 빼앗길 위기에 놓여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대표님, 유럽 그 프로젝트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우리보다 3% 높은 가격을 제시했대요.”배건후의 집안과 명성이라면 10% 높은 가격을 불러도 그쪽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망설인다는 건 그분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뜻했다. 하여 가격을 많이 부르지도 않았고 딱 3%만 올렸다. 대놓고 배건후와 맞서겠다는 뜻이었다.배건후가 주먹을 불끈 쥐었고 검은 두 눈에 냉기가 가득했다.지난번에 급히 귀국하는 바람에 상대에게 기회를 주고 말았다. 그렇지 않으면 진작 계약했을 텐데!“그 사람 누군지 알아봐.”“알겠습니다.”...주현정은 계속 기다렸지만 배건후는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얘는 일 말고는 다른 걸 잘하는 게 없어. 와이프 달래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그녀는 유전자검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진짜 내가 낳은 아들 맞아? 왜 자기 아버지처럼 로맨틱한 면이라곤 하나도 없어?’“아린아, 집이야?”결국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저... 지금...”도아린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물었다.“어머님, 어디 안 좋으세요?”“그게 아니라 에이트 맨션에 가본 지 오래돼서 너희들 보러 가려고.”“지금요?”“응. 민정 아줌마랑 같이 갈 생각이야.”도아린은 전화를 끊자마자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배건후에게도 문자를 보냈다.[어머님 에이트 맨션에 오신대요. 아무래도 검사하러 오시는 것 같아요.]주현정이 출발하자마자 배지유가 병원에 도착했다. 간호사에게서 아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온다는 소리를 듣고 배지유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도아린이 루비 목걸이가 사라진 걸 발견한다면 그녀의 욕을 얼마나 할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안 돼. 막아야 해!’배지유는 BMW R59를
그렇게 천천히 조건 반사가 됐는지 뭐만 먹으면 토하는 버릇이 생겼다.어느 하루 배건후가 집에 왔는데 밥을 먹자마자 도아린은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해버렸다. 심하게 토할 땐 가끔 저도 모르게 소변이 나올 때도 있었다.배건후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싸늘하게 지켜보면서 그녀에게 동정심을 얻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거라고 했었다...유민정은 도아린이 꿈쩍도 하질 않자 웃으면서 설명했다.“사모님, 이건 몸에 좋은 한약이에요.”‘언제는 뭐 몸에 좋지 않다고 했나요? 그럼 차라리 아들한테 먹일 것이지. 약 먹고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는데 독수공방하는 기분이 어떤지 아무도 모를 거라고요!’“어머님.”도아린이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주먹을 쥐었다.“이 약 더는 먹지 않겠어요. 저랑 건후 씨 지금...”“아이 가질 준비하고 있어요.”배건후의 굵은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오자 도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경고의 빛이 스쳤다. 그는 4천억 원을 주고 어머니의 기쁨을 샀다.도아린은 그가 손보미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다리를 다치게 했다는 생각만 하면 속이 다 울렁거렸다.웩.주현정이 도아린의 손을 잡고 놀랍고도 기쁜 얼굴로 물었다.“아린아, 벌써 생긴 건 아니지?”‘생리 금방 끝났는데...’배건후는 차 키를 현관 앞 상자에 넣고 슬리퍼를 갈아신은 후 들어왔다.“의사 선생님이 아이 가질 준비하는 기간에는 약을 먹지 말라고 했어요.”배건후가 커다란 주머니를 들고 도아린의 옆으로 다가왔다.“앞으로는 한약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유민정이 주현정의 눈치를 살폈다.“이 한약은 몸에 좋은 거야. 근데 의사 선생님이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 말아야지, 뭐.”주현정은 도아린이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기쁨에 아들마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 같았다.“회사 일로 핑계 대지 말고 아린이 옆에 자주 있어 줘. 임산부는 기분이 좋아야 아이한테도 좋아.”주현정이 도아린의 손을 하도 주물러서 아플 지경이었다.그녀는 진짜로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손녀든 손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