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천천히 조건 반사가 됐는지 뭐만 먹으면 토하는 버릇이 생겼다.어느 하루 배건후가 집에 왔는데 밥을 먹자마자 도아린은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해버렸다. 심하게 토할 땐 가끔 저도 모르게 소변이 나올 때도 있었다.배건후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싸늘하게 지켜보면서 그녀에게 동정심을 얻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거라고 했었다...유민정은 도아린이 꿈쩍도 하질 않자 웃으면서 설명했다.“사모님, 이건 몸에 좋은 한약이에요.”‘언제는 뭐 몸에 좋지 않다고 했나요? 그럼 차라리 아들한테 먹일 것이지. 약 먹고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는데 독수공방하는 기분이 어떤지 아무도 모를 거라고요!’“어머님.”도아린이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주먹을 쥐었다.“이 약 더는 먹지 않겠어요. 저랑 건후 씨 지금...”“아이 가질 준비하고 있어요.”배건후의 굵은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오자 도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경고의 빛이 스쳤다. 그는 4천억 원을 주고 어머니의 기쁨을 샀다.도아린은 그가 손보미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다리를 다치게 했다는 생각만 하면 속이 다 울렁거렸다.웩.주현정이 도아린의 손을 잡고 놀랍고도 기쁜 얼굴로 물었다.“아린아, 벌써 생긴 건 아니지?”‘생리 금방 끝났는데...’배건후는 차 키를 현관 앞 상자에 넣고 슬리퍼를 갈아신은 후 들어왔다.“의사 선생님이 아이 가질 준비하는 기간에는 약을 먹지 말라고 했어요.”배건후가 커다란 주머니를 들고 도아린의 옆으로 다가왔다.“앞으로는 한약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유민정이 주현정의 눈치를 살폈다.“이 한약은 몸에 좋은 거야. 근데 의사 선생님이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 말아야지, 뭐.”주현정은 도아린이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기쁨에 아들마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 같았다.“회사 일로 핑계 대지 말고 아린이 옆에 자주 있어 줘. 임산부는 기분이 좋아야 아이한테도 좋아.”주현정이 도아린의 손을 하도 주물러서 아플 지경이었다.그녀는 진짜로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손녀든 손자든
“어머님만 좋아하시면 돼요.”도아린은 배추 모양 옥을 유민정에게 준 후 나머지 박스들은 전부 위층으로 가져갔다.“사모님, 이거...”유민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짜예요.”도우미도 가짜인 걸 알아봤는데 주현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주현정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이 선물 준 사람 육씨 가문을 무시하는 게 틀림없어. 가는 길에 버려. 우리 육씨 가문과 친분도 있는데 망신당하게 해선 안 되지.”그러면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지유 아직 어리니까 어떤 일은 오빠인 네가 잘 가르치도록 해. 아린이가 생각이 깊어서 우리 배씨 가문의 체면을 남겨둔 거야. 만약 다른 사람이 지유가 새언니 물건으로 선물 준 거 알면 우리 집이 망할 수도 있다고.”“...”배건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라이터를 돌렸다. 그가 아무 반응이 없자 주현정이 쿠션을 확 던졌다.“가끔은 네가 내 아들이 맞나 의심이 들어!”배건후는 쿠션을 잡고 소파에 내려놓았다.“지유 말이에요...”‘됐어. 목걸이는 나중에 얘기하자.’“걔가 철이 없다고 너도 없을 셈이야?”주현정이 호통쳤다.“레스토랑까지 예약해서 밥 먹으러 가라고 했더니 귓등으로 들어? 마음 같아선 널 정말 호적에서 파버리고 싶어.”배건후는 도아린의 ‘남자들’만 생각하면 표정이 싸늘해졌다....도아린은 나영옥의 친구들이 준 선물과 비취 팔찌만 따로 골라냈고 나머지는 다용도실에 넣었다.그녀가 금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열었다. 그런데 맨 위에 두었던 벨벳 케이스가 사라졌다. 도아린은 자신을 비웃었다.비취 팔찌마저 배지유에게 줬는데 루비 목걸이를 남에게 준 것도 딱히 놀랍진 않았다.그녀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장에서 숄을 찾았다.갑자기 바람이 불고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주현정이 추울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돌아선 순간 배건후의 품에 부딪히고 말았다.도아린은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비켜요.”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금고를 열어보았으니 루비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걸 분명 알았을 것이다. 이 일은 그녀에게 직접 말하
도아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아니야. 배건후의 머리가 잘못된 거야.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대체 무슨 낯짝으로 한 거지?’“건후 씨, 손보미 씨는 건후 씨가 아끼는 여자지,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가 그리 체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무슨 수로 바다 진주를 구해요?”도아린이 가려는데 배건후가 어깨를 꽉 잡았다. 그러고는 벽 쪽으로 확 밀어붙였다.배건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안색도 어두워졌다.“체면이 없다고? 체면이 없다면 서대은 씨가 왜 귀한 드레스까지 공짜로 줬겠어?”그의 분노가 극에 달해 도아린의 어깨를 꽉 잡고 말았다. 도아린이 어깨가 아픈 나머지 발버둥 치자 숄이 바닥에 떨어졌다.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배건후는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다. 도아린이 점점 대놓고 비웃었다.“내 남편이 내연녀한테 드레스를 사주면서 연회에서 가장 예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한 걸 서대은이 듣고 보다 못해 드레스를 협찬해줬어요.”배건후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네가 내 돈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내가 안 쓰겠다고 해서 내연녀한테 마구 써? 이건 무슨 이상한 논리야?’도아린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무슨 방식으로 드레스를 얻었든 건후 씨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배건후의 두 눈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도아린은 한시라도 빨리 그와 멀리하고 싶었다.배건후는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건후야, 아린아.”주현정의 목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왔다. 배건후와 도아린의 코끝이 서로 맞닿아 있어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도아린은 배건후를 밀어내고 숄을 주웠다.“어머님... 오늘 날씨가 춥다고 해서 숄을 챙겼어요.”도아린은 숄을 주현정에게 걸쳐주었다.“의사 선생님이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역시 내 걱정하는 건 며느리밖에 없어. 아들은 날 화병 나게 하려고 태어난 것 같아.”주
배지유가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 전 빨리 달리려다가 그만 탱크차 뒷부분과 부딪치고 말았다.BMW R59가 옆으로 돌면서 앞쪽이 탱크차 뒷부분과 부딪쳤다. 에어백이 순식간에 터졌고 배지유는 한쪽 갈비뼈 골절에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배건후 일행이 병원으로 도착해보니 배지유가 침대에 누워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당신이 의사야? 살살해 좀. 아프다고!”“지유야.”배지유는 주현정을 보자마자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다가 고통이 밀려와 다시 누웠다.병원으로 오는 길 내내 주현정은 딸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고 도아린의 손을 하도 꽉 잡아서 퍼렇게 되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서워하지 마. 오빠가 병원 다른 데로 옮겨줄게. 엄마가 입원한 병원으로 가자.”“오빠, 너무 아파요...”함께 온 도아린을 본 배지유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쳤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도아린 씨, 여긴 왜 왔어요? 내 꼴이 어떻나 비웃으려고 왔어요?”그러자 주현정이 호통쳤다.“지유야, 예의 없게 굴지 마.”“엄마.”배지유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쟤가 얼마나 많은 사람 앞에서 날 때렸는지 알아요? 창피해서 이젠 연회 같은 데 갈 수가 없어요. 도아린 씨!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요!”주현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도아린이 배지유를 괴롭힐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배지유의 기분이 좋지 않은 데다가 다치기까지 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주현정이 입을 열기 전에 도아린이 먼저 말했다.“밖에서 기다릴게요.”“병원 옮기는 절차 처리하고 올게요.”배건후도 따라 나갔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두세 걸음 만에 바로 도아린을 따라잡았다.“지유 다쳐서 상태가 불안정해서 그래.”“때린 건 사실이잖아요.”도아린이 피식 웃었다.“날 미워하는 것도 정상이죠.”배건후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도아린은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절차는 1층에서 하면 돼요. 난 지현이 보러 갈게요.”도아린은 에
“지현이한테는 누나 하나밖에 없어요.”도아린이 싸늘하게 잘라버렸다. 순간 말문이 막힌 도정국의 눈빛이 사나워졌다.“내 양아들이 지현이 형이 아니면 뭔데?”“지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형이에요?”“네가 유준이한테 투자했더라면 쟤가 돈 벌어서 지현이 챙겨주지 않았겠어?”도아린은 조롱 섞인 눈빛으로 도정국을 쳐다보았다.“아버지는 많이 벌어도 지현이 병원비 일전 한 푼 낸 적이 없잖아요.”“...”도정국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병원에서 싸워봤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숨을 길게 내뱉고는 화제를 돌렸다.“네 시어머니 또 입원했다며? 이번 약 효과 없는 거 아니야? 내가 사람 찾아서 다시 바꿔 달라고 할게.”도아린은 병실 안의 환자 감시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배씨 가문의 인맥이 아버지보다 넓은데 당연히 아는 사람이 더 많죠.”“인맥이 아무리 넓어도 그건 그 집 거지.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 성의는 보여줘야 하는 거야.”도정국은 도아린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매장 있잖아, 얼른 해결해. 유준이 데리고 먼저 갈게.”그가 가자마자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뚜... 뚜...‘빨리 받아요.’도아린이 다급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드디어 휴대전화 너머로 배건후의 굵은 중저음이 들려왔다.“말해.”“우리 아버지 방금 내려갔어요. 혹시 만나면 해외에서 의사 찾았으니까 지현이 깨어날 가능성 있다고 해요.”배건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도아린이 멀리서 내다보니 엘리베이터가 어느덧 1층에 도착했다.“내가 건후 씨 어머니 앞에서 연기하니까 건후 씨도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연기해요. 그래야 공평하죠.”“근데 넌 4천억이 있잖아.”도아린이 휴대전화를 꽉 쥐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았다.‘내가 손보미를 돕지 않겠다고 해서 지금 이러는 거야? 그러는 거라면...’“건후 씨, 나한테...”“집으로 들어와서 지내.”도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배건후가 이런 조건을
도아린은 갑자기 마음이 움찔했고 불길한 예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아버지랑 도유준이 바로 뒤에 있는데 건후 씨가 까발리기라도 하면...’“누나!”도유준이 그녀를 불렀다.“아빠 엠파이어 빌딩 매장 때문에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셔. 오늘 매형 앞에서 아빠한테 확답을 주는 건 어때?”도정국은 친구들 앞에서 곧 지사를 관리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계속 잠잠하자 친구들이 그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도유준도 사적으로 배건후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모건 그룹은 물론이고 에이트 맨션도 들어갈 수 없었다. 오늘 겨우 배건후를 만났기에 확답을 듣고 싶었다.“그래. 내 친구들은 내가 허세를 부린 줄 알아.”도정국이 말했다.“계속 안 주면 아버지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해.”“누나, 내가 큰일을 해낼 능력은 없어도 인테리어 일꾼들을 감시할 능력 정도는 있어.”“유준이한테 창업할 기회를 못 주겠으면 이번 인테리어 얘한테 맡겨. 단련도 하고 좋잖아.”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도아린에게 매장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근데 문제는 나한테 없는데?’도아린이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이 하도 어두워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몰라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던 도아린이 배건후의 팔을 꼬집었다.“아버지한테 뭐라 했어요?”배건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알아맞혀 봐.”‘알아맞히긴 개뿔.’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도유준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누나, 그동안 나 열심히 공부했어. 이번에는 진짜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그래.”도정국이 계속 말했다.“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넌 걱정하지 마.”도아린은 배건후의 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조금 전의 거래는 도지현의 병에 관한 것이었고 조건은 도아린이 에이트 맨션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화제는 매장이었다. 계속 배건후의 도움을 받으려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역시 사업가는 달랐다. 무슨 일이든 다 거래가 가능했다. 하지만
도정국은 붉으락푸르락해서 화를 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건후가 비웃으면 어쩌려고 그래!”그녀는 배건후가 비웃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가 말실수할까 봐 더 걱정이었다.그가 입을 다물기만 한다면 그녀는 위세를 부릴 수 있으니까.“아빠랑 유준은 계속 나한테 가게를 달라고 쫓아다니는데, 이 사람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도아린은 배건후의 팔짱을 끼고 그에게 느긋하게 기대며 말했다.“엠파이어의 가게는 금싸라기 땅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리고 있는지 몰라요. 국제 일류 브랜드들도 아직 입점하지 않았는데 아빠의 작은 디저트 가게가 입주해서 무사하게 오픈하기나 하겠어요?”“...”도정국은 주먹을 꽉 쥐었다.자신의 가게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더욱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상장도 안 된 작은 가게가 입점하면 분명 주변 브랜드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게 완벽히 준비된 후 바로 오픈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도정국은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을 속이고 자리를 주지 않을까 봐 걱정됐다.“누나 말이 맞긴 한데...”도유준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도정국은 눈빛으로 그를 말렸다.“내가 너무 성급했어.”도정국은 어색하게 웃으며 배건후를 바라보았다.“내 몫으로 하나만 있다면 안심할 건데. 그렇지? 건후야.”그는 배건후가 직접 그에게 약속해주기를 바랐다.배건후의 시선은 줄곧 도아린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눈빛은 그윽하고 강렬했다.오늘 그는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캐주얼한 운동복은 그의 날카로운 기운을 누그러뜨렸지만, 카리스마는 여전히 강렬했다.시선이 느껴지자 도아린은 웃으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녀는 남자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그녀가 물러서려는 찰나, 배건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말하지 않는 건 협조하는 거야.”“...”도아린은 그의 팔을 세게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고 웃었다.“원하는 게 뭐죠?”
배건후가 없었더라면 도정국은 진작에 한 대 쳤을 것이다.그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 재산을 나누려고 하다니.그리고 배건후가 백조 원대 자산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쥐꼬리만 한 돈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도아린이 너무나도 탐욕스러웠다.도정국은 손을 움찔거리다가 배건후의 차가운 시선에 결국 사람을 때리지는 못했다.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건후야, 너에게 우스운 꼴을 보였구나. 아린이 이 녀석은 원래 이렇게 장난이 심해.”배건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아린은 공정한 걸 좋아하잖아요.”그를 발기불능이라고 저주한 내용이 담긴 이혼 합의서가 세상에 알려지면 그는 관련된 사람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도아린은 남자의 팔을 더 꼭 끌어안고 웃으며 말했다.“가요. 영화 시작하겠어요.”그녀가 힘을 주어 당겨서야 배건후는 마침내 발걸음을 옮겼다.도정국과 도유준은 급히 길을 비켜주었고 그들이 문을 나서자 도유준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아빠,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누나가 저렇게 나를 싫어하는 걸까요?”“여기 2천만이야. 일단 이걸 쓰고 있어. 새 가게가 계약되기 전까지는 아린을 절대 자극하지 마라.”도정국은 도유준에게 카드를 건네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지현은 오래 못 살 거야. 걔가 죽으면 그 몫은 네 거야. 그리고 아린은 내 재산을 받을 자격이 없어.”...병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도아린은 배건후의 팔을 놓았고 얼굴에 있던 친근한 웃음도 사라졌다.“나는 병원 옮기지 않을게요.”배건후가 입을 열려던 순간, 주현정의 전화가 걸려왔다.“수속은 다 됐어? 지유가 아파 죽겠대.”“바로 갈게요.”배건후는 도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무슨 얘기?손보미에게 진주 사주라는 얘기?절대 안 되지.그녀가 거절할 틈도 없이 배건후는 병원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찬 바람이 불어와 도아린은 몸을 움츠렸다.점심에는 반팔을 입고도 더웠는데 지금은 너무 추워서 덜덜 떨렸다. 찬바람이 이렇게 빨리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건 분명히 도아린과 관련이 있었고 아버지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상 도아린을 달래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재민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하지만 막 1층에 도착하자 머리 위에서 강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했을 때 넌 바로 달려가지 않았어. 이미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참인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주얼리 매장에 심각한 타격을 줄 거라고.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생각이야?”강재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순간적으로 욕지거리가 나갔지만 결국 방향을 바꿔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강재희를 지나칠 때, 차갑게 말했다.“누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아? 내 사람한테 그럴 생각은 접어.”강재희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정말 여자를 모르네!’한편, 도아린이 장수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드디어 절 찾아왔군요!”두 사람이 악수할 때 심지어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가 유자차를 한 잔 내밀었지만 도아린은 차를 바라보며 손을 대지 않았다.“배 대표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아린 씨가 오면 유자차를 타 드리라고 하셨죠.”장수현은 배건후의 말을 떠올리며 덧붙였다.“따뜻한 물로 우려내고 레몬즙 두 방울 추가했어요. 한 번 맛보세요.”도아린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작은 컵이었지만 그녀는 손이 떨려 쉽게 들지 못했고 장수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나요?”“그런게 아니라...”말을 마친 후 도아린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배 대표의 사건은요?”“그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증거만으로도 배 대표님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어요.”장수현은 서랍에서 두 개의 서류봉투를 꺼냈다.“이 두 개의 문서는 도아린 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저요?”도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
다음 날, 배지유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경호원은 그녀를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의사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아이고!”의사가 병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일부러 다리를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다시 감염된 거 아닐까요? 유 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유승호가 다가가려 하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저희 대표님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가씨는 저희가 병원에 모셔가겠습니다.”“유 쌤! 제발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배지유가 손을 뻗어 유승호의 가운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승호는 경호원과 함께 그녀를 지나쳐 가버렸고 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저희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배지유는 악에 받쳐 어금니를 꽉 물었다.“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경호원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주현정에게 보고했다.주현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놈들도 슬슬 초조해지는군.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지.”“어디 나갈 거야?”진경수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고 급히 다가갔다.“지우 씨의 촬영이 거의 끝나가요. 가서 봐야겠어요.”“일남이 하고 일북이 보호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진경수가 그녀의 가방을 잡으며 말렸지만 도아린이 피했다.“오빠, 이렇게 날 집에 가둬놓는 건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들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는 거야.”“가둬놓다니...”진경수가 눈을 피하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인간성이 없어! 위험한 일은 우리가 할 테니, 너는 그냥 부모님 곁에서 안전하게 있어 주면 안 되겠어?”“오빠, 솔직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진씨 가문의 사업에는 영향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오빠나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예요.”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배 대표가 사
주현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배지유는 몇 번 울먹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남궁유민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강요한 것이었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남궁 변호사한테 내 교통사고 소송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 변호사가, 글쎄, 나한테 오히려 오빠를 모함하라고 했어요.”“나는 오빠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알거든요. 오빠가 절대 회사 자금을 횡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겉으로는 남궁유민의 협박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오빠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길 바랐어요! 오빠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주현정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딸이 이렇게 교활하고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이렇게 고상한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왔다.배지유는 눈물이 나지 않자 점점 더 통곡하며 눈물 연기를 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내가 처음에 약을 바꾼 것도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엄마 목숨을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고요!”“게다가 내가 왜 오빠를 해치려 하겠어요? 난 미끼로 자처해서 남궁유민 그 배신자를 까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엄마!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두 분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계속 같이 살았을 거고 아빠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나도 남궁유민에게 협박당하지 않았을 거고,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회사 일을 아빠가 처리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내 말이 틀렸어요?”주현정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딸에게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남궁유민이 널 협박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무슨 수로 널 협박할 수 있겠어?”“그게...”배지유는 급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잠시 고민하던 배지유는 사실대로 말
“누구...?”“너무 팬이에요! 저 ‘화성의 별빛’이에요!”“아, 안녕하세요!”도지현은 그녀를 바로 기억해 냈다.이 팬은 그가 방송을 시작한 날부터 채팅방에 있었고 팬 단톡방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도지현의 스태프가 그녀에게 팬카페 관리자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대신, 팬으로 남아 계속 응원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나눴고 전미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기...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저분한테 잘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보험사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수리비는 제가 전액 부담할게요.”도지현은 강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형...”강재민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그냥 가세요. 괜찮습니다. 너도 얼른 차 타.”“정말 고맙습니다!”전미나는 연신 인사를 하며 빠르게 자신의 차로 돌아갔고 강재민은 명함을 휙 차 안으로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명함이 미끄러져 내려가 도지현의 발밑에 떨어졌다.“전미나?”‘티파니 주얼리의 수석 디자이너... 거긴 진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보석 브랜드잖아?’도지현은 누나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강재민에게 물었다.“형, 이 명함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저 팬분인데, 팬카페 관리자로 모시고 싶어서요.”“가져가.”강재민은 애초에 전미나에게 차 수리비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단지 티파니 주얼리의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였다.그는 도지현을 집 앞에 내려준 후, 바로 차를 수리하러 갔다.도지현은 도아린의 부탁대로 그날 사고 이후 모건 그룹의 동향과 배건후의 근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그날 사고 이후, 주현정은 모건 그룹의 고위 부사장을 지명해 그룹 운영을 대리하게 했다.한편, 배건후가 입원한 사립 병원은 철저한 경비 속에 통제되고 있었고 경호원들이 출입을 관리하고 있어 의료진 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어디 불편한 데 없어?”“손이 아직 불편하고 가끔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아.”도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동생이 이렇게 강한데 누나가 이런 일로 무너지면 창피하지 않겠어?”“그래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누나가 다치면 나는 더 이상 의지할 사람도 없다고!”“이번엔 지현이 말이 맞아요.”강재민이 두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며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만약에...”그는 말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그녀가 먼저 연락했더라면 그는 최대한 그녀가 그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 그 차 사고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한 후, 진씨 가문은 외부인의 병문안을 철저히 차단하며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했다.강재민은 진수혁과의 친분 덕분에 그가 있을 때 잠깐 들어와 도아린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혼수 상태였던 도아린은 계속 배건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배건후가 그녀를 구한 일만으로 그의 모든 잘못이 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원래부터 미묘하고 어색했던 강재민과 도아린의 관계는 이제 배건후까지 다시 끼어들면서 더욱 복잡해졌다.“지현아, 네 핸드폰 좀 써도 될까?”도아린이 손을 내밀자, 도지현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누나, 내가 새 핸드폰 사줄까? 이제 방송해서 돈도 버는데!”“누나도 핸드폰은 있어.”도아린은 단지 남동생의 핸드폰도 집에서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진수혁이 새 핸드폰을 사주긴 했지이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용 시간을 제한해 놓았다.밤중에 몰래 핸드폰을 켜봤지만 항상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반면, 도지현의 핸드폰은 인터넷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사용은 가능했다.이는 집 인터넷의 제한 속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차단기를 작동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계정이 뭐야? 나중에 방송 챙겨볼게.”도아린이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