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이한테는 누나 하나밖에 없어요.”도아린이 싸늘하게 잘라버렸다. 순간 말문이 막힌 도정국의 눈빛이 사나워졌다.“내 양아들이 지현이 형이 아니면 뭔데?”“지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형이에요?”“네가 유준이한테 투자했더라면 쟤가 돈 벌어서 지현이 챙겨주지 않았겠어?”도아린은 조롱 섞인 눈빛으로 도정국을 쳐다보았다.“아버지는 많이 벌어도 지현이 병원비 일전 한 푼 낸 적이 없잖아요.”“...”도정국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병원에서 싸워봤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숨을 길게 내뱉고는 화제를 돌렸다.“네 시어머니 또 입원했다며? 이번 약 효과 없는 거 아니야? 내가 사람 찾아서 다시 바꿔 달라고 할게.”도아린은 병실 안의 환자 감시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배씨 가문의 인맥이 아버지보다 넓은데 당연히 아는 사람이 더 많죠.”“인맥이 아무리 넓어도 그건 그 집 거지.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 성의는 보여줘야 하는 거야.”도정국은 도아린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매장 있잖아, 얼른 해결해. 유준이 데리고 먼저 갈게.”그가 가자마자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뚜... 뚜...‘빨리 받아요.’도아린이 다급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드디어 휴대전화 너머로 배건후의 굵은 중저음이 들려왔다.“말해.”“우리 아버지 방금 내려갔어요. 혹시 만나면 해외에서 의사 찾았으니까 지현이 깨어날 가능성 있다고 해요.”배건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도아린이 멀리서 내다보니 엘리베이터가 어느덧 1층에 도착했다.“내가 건후 씨 어머니 앞에서 연기하니까 건후 씨도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연기해요. 그래야 공평하죠.”“근데 넌 4천억이 있잖아.”도아린이 휴대전화를 꽉 쥐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았다.‘내가 손보미를 돕지 않겠다고 해서 지금 이러는 거야? 그러는 거라면...’“건후 씨, 나한테...”“집으로 들어와서 지내.”도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배건후가 이런 조건을
도아린은 갑자기 마음이 움찔했고 불길한 예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아버지랑 도유준이 바로 뒤에 있는데 건후 씨가 까발리기라도 하면...’“누나!”도유준이 그녀를 불렀다.“아빠 엠파이어 빌딩 매장 때문에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셔. 오늘 매형 앞에서 아빠한테 확답을 주는 건 어때?”도정국은 친구들 앞에서 곧 지사를 관리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계속 잠잠하자 친구들이 그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도유준도 사적으로 배건후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모건 그룹은 물론이고 에이트 맨션도 들어갈 수 없었다. 오늘 겨우 배건후를 만났기에 확답을 듣고 싶었다.“그래. 내 친구들은 내가 허세를 부린 줄 알아.”도정국이 말했다.“계속 안 주면 아버지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해.”“누나, 내가 큰일을 해낼 능력은 없어도 인테리어 일꾼들을 감시할 능력 정도는 있어.”“유준이한테 창업할 기회를 못 주겠으면 이번 인테리어 얘한테 맡겨. 단련도 하고 좋잖아.”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도아린에게 매장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근데 문제는 나한테 없는데?’도아린이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이 하도 어두워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몰라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던 도아린이 배건후의 팔을 꼬집었다.“아버지한테 뭐라 했어요?”배건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알아맞혀 봐.”‘알아맞히긴 개뿔.’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도유준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누나, 그동안 나 열심히 공부했어. 이번에는 진짜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그래.”도정국이 계속 말했다.“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넌 걱정하지 마.”도아린은 배건후의 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조금 전의 거래는 도지현의 병에 관한 것이었고 조건은 도아린이 에이트 맨션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화제는 매장이었다. 계속 배건후의 도움을 받으려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역시 사업가는 달랐다. 무슨 일이든 다 거래가 가능했다. 하지만
도정국은 붉으락푸르락해서 화를 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건후가 비웃으면 어쩌려고 그래!”그녀는 배건후가 비웃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가 말실수할까 봐 더 걱정이었다.그가 입을 다물기만 한다면 그녀는 위세를 부릴 수 있으니까.“아빠랑 유준은 계속 나한테 가게를 달라고 쫓아다니는데, 이 사람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도아린은 배건후의 팔짱을 끼고 그에게 느긋하게 기대며 말했다.“엠파이어의 가게는 금싸라기 땅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리고 있는지 몰라요. 국제 일류 브랜드들도 아직 입점하지 않았는데 아빠의 작은 디저트 가게가 입주해서 무사하게 오픈하기나 하겠어요?”“...”도정국은 주먹을 꽉 쥐었다.자신의 가게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더욱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상장도 안 된 작은 가게가 입점하면 분명 주변 브랜드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게 완벽히 준비된 후 바로 오픈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도정국은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을 속이고 자리를 주지 않을까 봐 걱정됐다.“누나 말이 맞긴 한데...”도유준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도정국은 눈빛으로 그를 말렸다.“내가 너무 성급했어.”도정국은 어색하게 웃으며 배건후를 바라보았다.“내 몫으로 하나만 있다면 안심할 건데. 그렇지? 건후야.”그는 배건후가 직접 그에게 약속해주기를 바랐다.배건후의 시선은 줄곧 도아린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눈빛은 그윽하고 강렬했다.오늘 그는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캐주얼한 운동복은 그의 날카로운 기운을 누그러뜨렸지만, 카리스마는 여전히 강렬했다.시선이 느껴지자 도아린은 웃으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녀는 남자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그녀가 물러서려는 찰나, 배건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말하지 않는 건 협조하는 거야.”“...”도아린은 그의 팔을 세게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고 웃었다.“원하는 게 뭐죠?”
배건후가 없었더라면 도정국은 진작에 한 대 쳤을 것이다.그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 재산을 나누려고 하다니.그리고 배건후가 백조 원대 자산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쥐꼬리만 한 돈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도아린이 너무나도 탐욕스러웠다.도정국은 손을 움찔거리다가 배건후의 차가운 시선에 결국 사람을 때리지는 못했다.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건후야, 너에게 우스운 꼴을 보였구나. 아린이 이 녀석은 원래 이렇게 장난이 심해.”배건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아린은 공정한 걸 좋아하잖아요.”그를 발기불능이라고 저주한 내용이 담긴 이혼 합의서가 세상에 알려지면 그는 관련된 사람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도아린은 남자의 팔을 더 꼭 끌어안고 웃으며 말했다.“가요. 영화 시작하겠어요.”그녀가 힘을 주어 당겨서야 배건후는 마침내 발걸음을 옮겼다.도정국과 도유준은 급히 길을 비켜주었고 그들이 문을 나서자 도유준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아빠,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누나가 저렇게 나를 싫어하는 걸까요?”“여기 2천만이야. 일단 이걸 쓰고 있어. 새 가게가 계약되기 전까지는 아린을 절대 자극하지 마라.”도정국은 도유준에게 카드를 건네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지현은 오래 못 살 거야. 걔가 죽으면 그 몫은 네 거야. 그리고 아린은 내 재산을 받을 자격이 없어.”...병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도아린은 배건후의 팔을 놓았고 얼굴에 있던 친근한 웃음도 사라졌다.“나는 병원 옮기지 않을게요.”배건후가 입을 열려던 순간, 주현정의 전화가 걸려왔다.“수속은 다 됐어? 지유가 아파 죽겠대.”“바로 갈게요.”배건후는 도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무슨 얘기?손보미에게 진주 사주라는 얘기?절대 안 되지.그녀가 거절할 틈도 없이 배건후는 병원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찬 바람이 불어와 도아린은 몸을 움츠렸다.점심에는 반팔을 입고도 더웠는데 지금은 너무 추워서 덜덜 떨렸다. 찬바람이 이렇게 빨리
모든 준비를 마친 도아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두 층을 내려갔을 때, 병상이 하나 들어왔고 도아린은 의료진에 밀려 문 쪽으로 몰렸다.“이 약 전혀 효과가 없어요! 아직도 너무 아프단 말이에요!”“조금만 참으세요. 병원장에게 이미 연락했으니 정형외과 전문의가 곧 검사할 겁니다.”주현정은 병상을 따라 들어오면서 자신의 숄을 배지유에게 덮어주며 말했다.“오늘 한파래, 괜히 감기 들지 말고.”배건후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왔을 때 옆에는 가녀린 여자가 함께 있었다.삐삐!엘리베이터가 과부하 상태가 되었다.“무슨 엘리베이터가...”고개를 들자 배지유는 문 앞에 서 있는 도아린을 보았다.“아린 씨,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엘리베이터가 과부하인 거 안 보여요?”주현정은 그제야 도아린을 보고 배지유의 손을 가볍게 쳤다.“아린은 위에서 내려온 거니까 과부하라고 해도 그녀가 내려야 할 이유는 없지.”그녀의 말에 배건후 옆에 있던 손보미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배지유의 전화를 받고 병문안하러 온 거였는데 주현정은 내내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건후 씨가 지유를 병원에 데려다줘. 난 내릴게.”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나가려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는 계속 삐삐 소리를 냈다.“아린 씨, 귀가 먹었어요?”배지유가 소리쳤다.“일부러 내 치료를 방해해서 내 병을 키우게 하려는 거죠?”“조용히 해.”주현정이 나지막하게 나무랐다.“내가 내릴게.”그녀는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에 있어서 입구에 있는 손보미와 배건후가 내려야만 나갈 수 있었다.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지자 손보미는 마지못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지유야, 조금만 참아.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도아린은 그녀가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성큼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손보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던 한쪽 다리를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는 웃음을 지었다.‘진작 알아서 물러서야지, 눈치 없기는.’하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 못했다.삐삐—엘리베이터는 여
“아악!”등을 부딪친 손보미는 그대로 도아린에게 넘어졌다.도아린은 재빠르게 옆으로 비켜섰다.그러자 균형을 잃은 손보미는 벽에 부딪혔다.“보미야!”김지민은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손보미가 도아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도아린이 트집을 잡을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온 것이었다.그런데 손보미가 비상문 뒤에 서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지민아, 내 코...”손보미가 고개를 들고 손을 천천히 치우니 코가 한쪽으로 휘어져 있었다.김지민은 깜짝 놀랐다.촬영이 곧 시작되는데 코를 수정하려면 적어도 반달은 걸리기 때문이다.“곧바로 의사에게 연락할게!”김지민은 도아린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나 여사의 생일 파티에서도 보미를 망신 주더니, 오늘은 또 상처를 입혀요? 너무 잔인하네요!”도아린은 팔짱을 끼고 냉소를 지었다.“그쪽이 문을 열면서 보미 씨를 부딪친 거잖아요.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당신이 피하지 않았다면 보미가 왜 벽에 부딪혔겠어요!”“나는 그녀의 개도 아닌데 왜 안아줘야 하죠?”???김지민: 지금 누구를 개라고 한 거야.손보미는 코가 변형됐다는 소식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김지민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건후에게 전화해서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고 전해줘.”그녀는 배건후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구급차 안에서 배지유는 손보미가 오기를 고집했다.“지금은 치료가 지연되어 병을 키우는 게 두렵지 않아?”주현정이 불만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배지유는 주현정의 손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엄마, 내가 보미 언니에게 돌봐달라고 부른 건데 혼자 두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주현정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그럼 아린에게는 예의가 있었다는 거야? 아린은 네 새언니잖아.”배지유는 차 문 옆에 있는 배건후를 슬쩍 쳐다보며 중얼거렸다.“아프니까 화가 나서…”“다시 아린에게 버릇없이 굴면 몽둥이로 혼내줄 거야.”배지유는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지난번엔 뺨을 때리더
배지유랑 있지 않으면 손보미랑 있겠지.그가 집에 안 가면 그녀도 굳이 에이트 맨션에서 숙박하는 거래를 이행할 필요가 없었다.“에취!”“조수석 서랍에 티슈 있어요.”“고마워요.”도아린은 조수석 앞에 있는 서랍을 열고 티슈를 꺼내다가 그 밑에 있던 향낭을 발견했다.육하경은 곁눈으로 슬쩍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 향낭이 내 목숨을 살렸어요.”“그래요?”도아린은 무심하게 웃었다.“며칠 전에 고향에서 누군가 돌아가셔서 밤새 차를 몰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렀어요.”육하경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백미러를 가리켰다.“그런데 다시 출발하려는데 여기 걸려있던 향낭이 갑자기 떨어지더라고요.”그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려 했지만, 어머니는 왠지 불길하다고 하며 천천히 가자고 말렸다.차 안에서 한 시간쯤 자고 다시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그는 몇 킬로미터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트레일러에 실린 수확기가 떨어져서 자기가 타고 있는 차랑 똑같은 차를 덮쳤는데 운전자는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것이다.“그냥 우연이 아닐까요?”도아린은 코를 닦은 휴지를 티슈로 감싸서 가방에 넣었다.그녀의 시선은 가방 밑에 있는 남자 인형으로 향하더니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육하경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이 향낭은 내 행운의 부적이에요.”우연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그의 할아버지와 육민재의 할아버지는 친형제였고 육씨 가문의 사업 중에서 육하경의 집안이 담당하는 건 극히 일부분이었다.이번에 돌아가신 어르신은 호텔 사업을 맡으셨는데 육하경이 어머니를 모시고 조문을 하러 간 건 단지 가족의 의례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할아버지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셨다.육하경이 늘 여행을 다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가 뭔가 수를 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호텔 운영에 대해 많이 배워왔다.비록 다들 그의 승계에 놀랐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그에게 능
“백구 씨인가요?”전화를 받자마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닙니다.”배건후는 차갑게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백구 씨, 사모님이 우리 쪽에...”“죽여버리던가 맘대로 해!”배건후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사기 전화가 자기한테도 걸려오다니.이 번호는 배 씨 일가족이나 친한 친구들만 알고 있는 것으로 스팸 문자조차 온 적 없던 번호였다.딩동.낯선 번호로 사진 메시지가 왔다.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조사실 조명에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고 초조해 보였다.도아린이었다.그녀는 지금 경찰서에 있었다.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전화를 걸며 물었다. “어느 경찰서죠?”경찰서로 가는 길에 배건후는 최근 콜택시가 여성 혼자 타기엔 위험하다고 했던 조수현의 말을 떠올리며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도아린은 오늘 정말 재수 없었다.그녀가 소유정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집주인이 찾아왔고 집주인은 방 안에 낯선 사람이 있는걸 보더니 소유정이 재임대했다고 우겨댔다.“재임대 한 사람들은 다 친구나 친척이라고 하더라. 날 속이려 하지 마!”도아린이 아무리 설명해도 집주인은 끝까지 경찰을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하필 이때 소유정은 공연 중이라 전화도 받지 않았다.배건후 그 개자식은 지금 분명 병원에 있을 것이다.동생도 다쳤고 사랑하는 여자도 얼굴을 다쳤으니 그녀에게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전화를 걸고 나서 도아린은 후회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경찰 직원이 들어왔다.“도아린 씨, 이제 가셔도 됩니다.”빠른 걸음으로 조사실을 빠져나온 도아린은 배건후를 보자 걸음을 멈췄다.배건후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있었고 바짓가랑이는 물에 젖어 짙은 색을 띠었다.얼핏 보면 서둘러 집을 나선 것 같았다.하지만 자세히 보니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도아린은 다가가 배건후가 던져준 차 키를 받아들고 먼저 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