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갑자기 마음이 움찔했고 불길한 예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아버지랑 도유준이 바로 뒤에 있는데 건후 씨가 까발리기라도 하면...’“누나!”도유준이 그녀를 불렀다.“아빠 엠파이어 빌딩 매장 때문에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셔. 오늘 매형 앞에서 아빠한테 확답을 주는 건 어때?”도정국은 친구들 앞에서 곧 지사를 관리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계속 잠잠하자 친구들이 그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도유준도 사적으로 배건후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모건 그룹은 물론이고 에이트 맨션도 들어갈 수 없었다. 오늘 겨우 배건후를 만났기에 확답을 듣고 싶었다.“그래. 내 친구들은 내가 허세를 부린 줄 알아.”도정국이 말했다.“계속 안 주면 아버지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해.”“누나, 내가 큰일을 해낼 능력은 없어도 인테리어 일꾼들을 감시할 능력 정도는 있어.”“유준이한테 창업할 기회를 못 주겠으면 이번 인테리어 얘한테 맡겨. 단련도 하고 좋잖아.”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도아린에게 매장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근데 문제는 나한테 없는데?’도아린이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이 하도 어두워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몰라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던 도아린이 배건후의 팔을 꼬집었다.“아버지한테 뭐라 했어요?”배건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알아맞혀 봐.”‘알아맞히긴 개뿔.’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도유준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누나, 그동안 나 열심히 공부했어. 이번에는 진짜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그래.”도정국이 계속 말했다.“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넌 걱정하지 마.”도아린은 배건후의 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조금 전의 거래는 도지현의 병에 관한 것이었고 조건은 도아린이 에이트 맨션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화제는 매장이었다. 계속 배건후의 도움을 받으려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역시 사업가는 달랐다. 무슨 일이든 다 거래가 가능했다. 하지만
도정국은 붉으락푸르락해서 화를 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건후가 비웃으면 어쩌려고 그래!”그녀는 배건후가 비웃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가 말실수할까 봐 더 걱정이었다.그가 입을 다물기만 한다면 그녀는 위세를 부릴 수 있으니까.“아빠랑 유준은 계속 나한테 가게를 달라고 쫓아다니는데, 이 사람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도아린은 배건후의 팔짱을 끼고 그에게 느긋하게 기대며 말했다.“엠파이어의 가게는 금싸라기 땅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리고 있는지 몰라요. 국제 일류 브랜드들도 아직 입점하지 않았는데 아빠의 작은 디저트 가게가 입주해서 무사하게 오픈하기나 하겠어요?”“...”도정국은 주먹을 꽉 쥐었다.자신의 가게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더욱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상장도 안 된 작은 가게가 입점하면 분명 주변 브랜드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게 완벽히 준비된 후 바로 오픈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도정국은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을 속이고 자리를 주지 않을까 봐 걱정됐다.“누나 말이 맞긴 한데...”도유준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도정국은 눈빛으로 그를 말렸다.“내가 너무 성급했어.”도정국은 어색하게 웃으며 배건후를 바라보았다.“내 몫으로 하나만 있다면 안심할 건데. 그렇지? 건후야.”그는 배건후가 직접 그에게 약속해주기를 바랐다.배건후의 시선은 줄곧 도아린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눈빛은 그윽하고 강렬했다.오늘 그는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캐주얼한 운동복은 그의 날카로운 기운을 누그러뜨렸지만, 카리스마는 여전히 강렬했다.시선이 느껴지자 도아린은 웃으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녀는 남자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그녀가 물러서려는 찰나, 배건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말하지 않는 건 협조하는 거야.”“...”도아린은 그의 팔을 세게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고 웃었다.“원하는 게 뭐죠?”
배건후가 없었더라면 도정국은 진작에 한 대 쳤을 것이다.그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 재산을 나누려고 하다니.그리고 배건후가 백조 원대 자산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쥐꼬리만 한 돈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도아린이 너무나도 탐욕스러웠다.도정국은 손을 움찔거리다가 배건후의 차가운 시선에 결국 사람을 때리지는 못했다.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건후야, 너에게 우스운 꼴을 보였구나. 아린이 이 녀석은 원래 이렇게 장난이 심해.”배건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아린은 공정한 걸 좋아하잖아요.”그를 발기불능이라고 저주한 내용이 담긴 이혼 합의서가 세상에 알려지면 그는 관련된 사람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도아린은 남자의 팔을 더 꼭 끌어안고 웃으며 말했다.“가요. 영화 시작하겠어요.”그녀가 힘을 주어 당겨서야 배건후는 마침내 발걸음을 옮겼다.도정국과 도유준은 급히 길을 비켜주었고 그들이 문을 나서자 도유준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아빠,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누나가 저렇게 나를 싫어하는 걸까요?”“여기 2천만이야. 일단 이걸 쓰고 있어. 새 가게가 계약되기 전까지는 아린을 절대 자극하지 마라.”도정국은 도유준에게 카드를 건네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지현은 오래 못 살 거야. 걔가 죽으면 그 몫은 네 거야. 그리고 아린은 내 재산을 받을 자격이 없어.”...병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도아린은 배건후의 팔을 놓았고 얼굴에 있던 친근한 웃음도 사라졌다.“나는 병원 옮기지 않을게요.”배건후가 입을 열려던 순간, 주현정의 전화가 걸려왔다.“수속은 다 됐어? 지유가 아파 죽겠대.”“바로 갈게요.”배건후는 도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무슨 얘기?손보미에게 진주 사주라는 얘기?절대 안 되지.그녀가 거절할 틈도 없이 배건후는 병원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찬 바람이 불어와 도아린은 몸을 움츠렸다.점심에는 반팔을 입고도 더웠는데 지금은 너무 추워서 덜덜 떨렸다. 찬바람이 이렇게 빨리
모든 준비를 마친 도아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두 층을 내려갔을 때, 병상이 하나 들어왔고 도아린은 의료진에 밀려 문 쪽으로 몰렸다.“이 약 전혀 효과가 없어요! 아직도 너무 아프단 말이에요!”“조금만 참으세요. 병원장에게 이미 연락했으니 정형외과 전문의가 곧 검사할 겁니다.”주현정은 병상을 따라 들어오면서 자신의 숄을 배지유에게 덮어주며 말했다.“오늘 한파래, 괜히 감기 들지 말고.”배건후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왔을 때 옆에는 가녀린 여자가 함께 있었다.삐삐!엘리베이터가 과부하 상태가 되었다.“무슨 엘리베이터가...”고개를 들자 배지유는 문 앞에 서 있는 도아린을 보았다.“아린 씨,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엘리베이터가 과부하인 거 안 보여요?”주현정은 그제야 도아린을 보고 배지유의 손을 가볍게 쳤다.“아린은 위에서 내려온 거니까 과부하라고 해도 그녀가 내려야 할 이유는 없지.”그녀의 말에 배건후 옆에 있던 손보미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배지유의 전화를 받고 병문안하러 온 거였는데 주현정은 내내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건후 씨가 지유를 병원에 데려다줘. 난 내릴게.”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나가려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는 계속 삐삐 소리를 냈다.“아린 씨, 귀가 먹었어요?”배지유가 소리쳤다.“일부러 내 치료를 방해해서 내 병을 키우게 하려는 거죠?”“조용히 해.”주현정이 나지막하게 나무랐다.“내가 내릴게.”그녀는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에 있어서 입구에 있는 손보미와 배건후가 내려야만 나갈 수 있었다.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지자 손보미는 마지못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지유야, 조금만 참아.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도아린은 그녀가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성큼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손보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던 한쪽 다리를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는 웃음을 지었다.‘진작 알아서 물러서야지, 눈치 없기는.’하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 못했다.삐삐—엘리베이터는 여
“아악!”등을 부딪친 손보미는 그대로 도아린에게 넘어졌다.도아린은 재빠르게 옆으로 비켜섰다.그러자 균형을 잃은 손보미는 벽에 부딪혔다.“보미야!”김지민은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손보미가 도아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도아린이 트집을 잡을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온 것이었다.그런데 손보미가 비상문 뒤에 서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지민아, 내 코...”손보미가 고개를 들고 손을 천천히 치우니 코가 한쪽으로 휘어져 있었다.김지민은 깜짝 놀랐다.촬영이 곧 시작되는데 코를 수정하려면 적어도 반달은 걸리기 때문이다.“곧바로 의사에게 연락할게!”김지민은 도아린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나 여사의 생일 파티에서도 보미를 망신 주더니, 오늘은 또 상처를 입혀요? 너무 잔인하네요!”도아린은 팔짱을 끼고 냉소를 지었다.“그쪽이 문을 열면서 보미 씨를 부딪친 거잖아요.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당신이 피하지 않았다면 보미가 왜 벽에 부딪혔겠어요!”“나는 그녀의 개도 아닌데 왜 안아줘야 하죠?”???김지민: 지금 누구를 개라고 한 거야.손보미는 코가 변형됐다는 소식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김지민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건후에게 전화해서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고 전해줘.”그녀는 배건후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구급차 안에서 배지유는 손보미가 오기를 고집했다.“지금은 치료가 지연되어 병을 키우는 게 두렵지 않아?”주현정이 불만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배지유는 주현정의 손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엄마, 내가 보미 언니에게 돌봐달라고 부른 건데 혼자 두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주현정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그럼 아린에게는 예의가 있었다는 거야? 아린은 네 새언니잖아.”배지유는 차 문 옆에 있는 배건후를 슬쩍 쳐다보며 중얼거렸다.“아프니까 화가 나서…”“다시 아린에게 버릇없이 굴면 몽둥이로 혼내줄 거야.”배지유는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지난번엔 뺨을 때리더
배지유랑 있지 않으면 손보미랑 있겠지.그가 집에 안 가면 그녀도 굳이 에이트 맨션에서 숙박하는 거래를 이행할 필요가 없었다.“에취!”“조수석 서랍에 티슈 있어요.”“고마워요.”도아린은 조수석 앞에 있는 서랍을 열고 티슈를 꺼내다가 그 밑에 있던 향낭을 발견했다.육하경은 곁눈으로 슬쩍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 향낭이 내 목숨을 살렸어요.”“그래요?”도아린은 무심하게 웃었다.“며칠 전에 고향에서 누군가 돌아가셔서 밤새 차를 몰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렀어요.”육하경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백미러를 가리켰다.“그런데 다시 출발하려는데 여기 걸려있던 향낭이 갑자기 떨어지더라고요.”그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려 했지만, 어머니는 왠지 불길하다고 하며 천천히 가자고 말렸다.차 안에서 한 시간쯤 자고 다시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그는 몇 킬로미터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트레일러에 실린 수확기가 떨어져서 자기가 타고 있는 차랑 똑같은 차를 덮쳤는데 운전자는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것이다.“그냥 우연이 아닐까요?”도아린은 코를 닦은 휴지를 티슈로 감싸서 가방에 넣었다.그녀의 시선은 가방 밑에 있는 남자 인형으로 향하더니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육하경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이 향낭은 내 행운의 부적이에요.”우연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그의 할아버지와 육민재의 할아버지는 친형제였고 육씨 가문의 사업 중에서 육하경의 집안이 담당하는 건 극히 일부분이었다.이번에 돌아가신 어르신은 호텔 사업을 맡으셨는데 육하경이 어머니를 모시고 조문을 하러 간 건 단지 가족의 의례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할아버지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셨다.육하경이 늘 여행을 다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가 뭔가 수를 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호텔 운영에 대해 많이 배워왔다.비록 다들 그의 승계에 놀랐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그에게 능
“백구 씨인가요?”전화를 받자마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닙니다.”배건후는 차갑게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백구 씨, 사모님이 우리 쪽에...”“죽여버리던가 맘대로 해!”배건후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사기 전화가 자기한테도 걸려오다니.이 번호는 배 씨 일가족이나 친한 친구들만 알고 있는 것으로 스팸 문자조차 온 적 없던 번호였다.딩동.낯선 번호로 사진 메시지가 왔다.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조사실 조명에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고 초조해 보였다.도아린이었다.그녀는 지금 경찰서에 있었다.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전화를 걸며 물었다. “어느 경찰서죠?”경찰서로 가는 길에 배건후는 최근 콜택시가 여성 혼자 타기엔 위험하다고 했던 조수현의 말을 떠올리며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도아린은 오늘 정말 재수 없었다.그녀가 소유정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집주인이 찾아왔고 집주인은 방 안에 낯선 사람이 있는걸 보더니 소유정이 재임대했다고 우겨댔다.“재임대 한 사람들은 다 친구나 친척이라고 하더라. 날 속이려 하지 마!”도아린이 아무리 설명해도 집주인은 끝까지 경찰을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하필 이때 소유정은 공연 중이라 전화도 받지 않았다.배건후 그 개자식은 지금 분명 병원에 있을 것이다.동생도 다쳤고 사랑하는 여자도 얼굴을 다쳤으니 그녀에게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전화를 걸고 나서 도아린은 후회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경찰 직원이 들어왔다.“도아린 씨, 이제 가셔도 됩니다.”빠른 걸음으로 조사실을 빠져나온 도아린은 배건후를 보자 걸음을 멈췄다.배건후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있었고 바짓가랑이는 물에 젖어 짙은 색을 띠었다.얼핏 보면 서둘러 집을 나선 것 같았다.하지만 자세히 보니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도아린은 다가가 배건후가 던져준 차 키를 받아들고 먼저 차에
그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말했다.“내가 또 널 도와준 거야.”조금 전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도아린은 코웃음 쳤다.“이제 조건을 내세우려는 거죠? 배 대표님.”모건 그룹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배건후가 모든 걸 사업 기회로 보기 때문이었다.“난 보미를 도울 수 없어요. 서 실장과는 별로 친하지 않거든요.”“엠파이어 빌딩의 점포 문제를 도정국한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남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도아린은 휴대폰을 꽉 쥐고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어차피 배건후랑 당장 이혼할 생각은 없으니 도정국에게 점포를 넘기지 않아도 그는 기껏해야 자신을 괴롭힐 뿐, 도지현의 의료 지원은 끊지 않을 것이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배건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집에 도착하기 전에 답해줘.”마이바흐는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담당자가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며 말했다.“저 부부 좀 이상하지 않나?”“저건 아무것도 아니에요.”부하도 따라 나와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며칠 전에 명예훼손 사건을 처리했는데, 그 부부는 서로 자기 신분을 증명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난 내가 그들의 어떤 큰 계획의 일부가 된 줄 알았어요.”차로 20분 거리는 금방 지나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에이트 맨션 앞에 멈춰 있었다.배건후가 먼저 차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그의 여윈 등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처럼 고고하고 차가워 보였다.징징.도아린의 휴대폰에 미확인 메시지 알림이 떴다.그녀가 휴대폰을 열어보니 간병인 아줌마의 번호였다.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아줌마, 동생이 또 무슨 반응을 보였어요?”“아니요. 내가 잠깐 뭐 가지러 나갔다 왔는데 병실 앞에서 누군가 수상하게 서성거리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내가 다가가니까 바로 도망쳤어요.”도아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도정국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이다.점포를 손에 넣지 못하면 그는 겉으로는 도지현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
“지금 두 분은 어느 정도까지 간 거예요?”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아린은 본론부터 꺼냈다.그녀는 오빠와 변슬기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진 걸 단번에 눈치챘다.“아...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변슬기는 난간에 양손을 올린 채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시작은 안 했어도 뭔가 있었네요?”“크흐흑!”그 말에 변슬기는 자신이 삼킨 침에 갑자기 사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벌게졌다.변명하려 할수록 기침은 더 거세졌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물 한 잔을 건넸다.“너무 걱정 마요. 변슬기 씨 덕분에 우리 집에 큰 도움 됐잖아요.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진짜 아니에요...”변슬기는 눈물까지 닦으며 손을 저었고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그날 밤 나랑 같이 집에 안 갔잖아요. 여기서 잤던 거 아니에요?”“그랬었죠. 그런데요...”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도아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설마 우리 오빠가 그쪽에 문제 있어요?”‘설마 그럴 리가... 아빠는 나이 들었어도 정력이 넘치시던데 오빠도 피는 못 속일 텐데?’변슬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날 서로 안기도 했고 키스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 진수혁이 스스로 멈췄고 그는 침실을 양보하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다음 날 술이 깬 듯한 표정으로 전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변슬기도 굳이 꺼낼 수 없었다.그 후로도 그들의 사이는 은근하게 가까워졌지만 딱히 확실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오빠한테 물어볼게요.”“안 돼요!”변슬기는 도아린의 팔을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도 선생님...제 신분이 황태자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 잘 알아요. 남자들은 술 먹으면 착각할 수도 있고...다행히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은 책임감 없는
“아!”변슬기는 병아리마냥 진수혁 차로 옮겨졌다.도아린은 웃으며 문을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녀는 휴대전화로 사진 하나를 골라 일남에게 전송했다.일남은 안전벨트를 하려던 참 알림 소리에 바로 폰을 꺼내 들었다.사진을 본 그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아가씨 사진 실력이 정도면 필터도 울고 갈 수준인데요.”“정말? 나도 볼래!”송 비서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앉아. 운전해야 해”일남은 그의 머리를 눌러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시내에선 뒷좌석 안전벨트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연성은 관리가 그렇게 심해? ”송 비서는 투덜대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일남은 일북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너도 보지 마. 그냥 안 본 셈 쳐.”그 사진은 일남이 일북을 힐끔 바라보는 순간을 캡처한 것이었다.일북은 정면만 똑바로 응시하는 완전 군인 양식이었고 일남은 몰래 보는 범인 양식이었다.하지만 일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동을 걸어 배건후 차량을 따라갔다.“왜 웃어?”배건후는 도아린이 조수석에서 혼자 피식거리는 걸 보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아무것도 아냐. 그냥 재밌는 사진 하나 건졌어.”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밀크티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김지민네 진짜 끝도 없네. 혹시 배 회장님 유골 넘기면서 돈 요구한 거 아냐?”진옥경 고모 장례 때도 남편이 돈부터 요구했었다.다행히 진가에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사망 후에도 부부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배석준 역시 김지민 가족한테는 그냥 은행 통장 같은 존재였고 이제 더는 못 빨아먹으니까 마지막으로 크게 한몫 뜯어내려고 하는 거였다.“2억.”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티슈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방금 마신 밀크티를 뿜을 뻔했고, 그 티슈로 입까지 닦았다.“진짜 줬어?”“아니.”배건후는 새 티슈를 또 건네며 그녀의 티슈 재활용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눈빛엔 오히려 다정함이 가
진수혁은 변슬기의 얼굴이 붉어진 걸 못 봤거나 봤더라도 모른 척했는지 담담히 말했다.“우린 여기서 기다릴게.”도아린은 변슬기 머리 위에 달린 풍선을 가리켰다.“이렇게 눈에 띄는 표시도 있으니까 제가 금방 찾으러 갈게요. 오늘 관광객 많으니까 지금 덜 붐빌 때 구석구석 잘 봐요.”“길 잃으면 전화해.”진수혁은 풍선 끈을 가볍게 당기며 변슬기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일북은 도아린 뒤를 바짝 따라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혹시나 누가 해코지할까 혹은 누가 몰래 물건을 훔쳐 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반면 일남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관광에 진심이었다.관광 가이드 옆에 붙어 설명을 듣고는 돌아와서 일북에게 흥분한 얼굴로 그대로 전달했다.“아까 가이드가 그러는데 양평산 대군이 남자인데 얼굴이 여자처럼 생겨서 어떤 후궁이랑 닮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황제가 유독 아껴줬대.”일북은 그런 일남의 말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시선은 한시도 도아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둘이 가서 마음껏 구경하고 와.”“아가씨...”도아린은 손목에 찬 긴급 호출 시계를 들어 보이면서 웃었다.“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게. 오늘은 놀러 나온 거니까, 일은 잠시 내려놔.”도아린의 반복된 설득에 일북도 결국 잠깐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일남은 일북을 끌고 다니며 계속 얘기했고 도아린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오늘 날씨는 참 좋은데 운동복만 입어도 괜찮지만 햇살은 은근히 따가워서 그늘 아래는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아린은 마침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양산을 쳐다보고는 옆쪽에 서 있는 송 비서를 바라보았다‘아 맞다! 얘도 있었지. 애매하게 끼어 있는 애 하나 더.’그렇게 해서 도아린은 송 비서와 함께 느긋하게 궁 안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끔 변슬기를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지나쳤다.공왕부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곳이라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 일남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놨다.“갈비뼈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에 유치장에 있을 때 남궁유민 차가 폭발했잖아요? 그때 도아린 씨를 안고 같이 넘어지면서 또 다쳤거든요. 아까 강재민이랑 싸울 때 그 부위를 건드렸을 수도 있어요...”도아린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이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알겠어.”일남은 일북을 힐끔 바라봤고 일북은 눈빛으로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아가씨,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알아. 나 안 화났어.”도아린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까 대충 눈치챘거든.”야밤에 신지훈이 간호사 유선미를 데리고 배건후에게 수액을 놓으러 간 걸 봤다. 그 사람 몸에는 분명히 예전부터 앓고 있던 상처가 남아 있었다.배건후는 약한 척해서 동정을 사려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주말이 되자 모두 함께 공왕부로 향했다.입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도아린은 진범준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부모님은?”“주 대표님이랑 장비 사러 가셨어.”진수혁은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변슬기 손에서 자연스럽게 배낭을 받아 메며 말했다.“출발할 때 들었는데 부모님이 주 대표님이랑 같이 자가 여행 떠나신다고 하더라고.”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배건후는 배석준 회장님 장례 치르러 갔어.”김지민은 아직도 운전기사에게서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버티고 있었고 끝까지 합의서에는 사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배건후는 김지민 동생의 약점을 찾아냈고 오늘 반드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동생을 감옥에 보낼 거라고 통보했다. 김지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 집안의 욕심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히 배건후에게 또 뭘 요구하려고 들 것이다.하지만 배건후는 배석준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