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말했다.“내가 또 널 도와준 거야.”조금 전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도아린은 코웃음 쳤다.“이제 조건을 내세우려는 거죠? 배 대표님.”모건 그룹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배건후가 모든 걸 사업 기회로 보기 때문이었다.“난 보미를 도울 수 없어요. 서 실장과는 별로 친하지 않거든요.”“엠파이어 빌딩의 점포 문제를 도정국한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남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도아린은 휴대폰을 꽉 쥐고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어차피 배건후랑 당장 이혼할 생각은 없으니 도정국에게 점포를 넘기지 않아도 그는 기껏해야 자신을 괴롭힐 뿐, 도지현의 의료 지원은 끊지 않을 것이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배건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집에 도착하기 전에 답해줘.”마이바흐는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담당자가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며 말했다.“저 부부 좀 이상하지 않나?”“저건 아무것도 아니에요.”부하도 따라 나와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며칠 전에 명예훼손 사건을 처리했는데, 그 부부는 서로 자기 신분을 증명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난 내가 그들의 어떤 큰 계획의 일부가 된 줄 알았어요.”차로 20분 거리는 금방 지나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에이트 맨션 앞에 멈춰 있었다.배건후가 먼저 차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그의 여윈 등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처럼 고고하고 차가워 보였다.징징.도아린의 휴대폰에 미확인 메시지 알림이 떴다.그녀가 휴대폰을 열어보니 간병인 아줌마의 번호였다.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아줌마, 동생이 또 무슨 반응을 보였어요?”“아니요. 내가 잠깐 뭐 가지러 나갔다 왔는데 병실 앞에서 누군가 수상하게 서성거리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내가 다가가니까 바로 도망쳤어요.”도아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도정국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이다.점포를 손에 넣지 못하면 그는 겉으로는 도지현
“여보세요.”서대은의 목소리가 들리자 도아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배건후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도아린의 귀는 마치 무언가에 막힌 듯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침을 삼키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침착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 도아린입니다.”“...”서대은의 침묵은 거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배건후는 턱을 살짝 들어 말을 이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도아린은 어쩔 수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서 실장님에게 바다 진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제 친구가 너무 좋아해서요. 혹시 양보해 주실 수 있을까요?”“여보세요?”서대은은 혼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무슨 신호가 이렇게 안 좋아. 앞으로 요트 파티 같은 거 하지 말아야겠어. 일도 못 보잖아.”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도아린은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신호가 안 좋은가 봐요.”“다시 걸어.”배건후의 눈빛이 날카로웠다.비록 전화 내용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도아린의 반응은 분명 이상했다.“양보해 주신다고 해도 지금 바로 진주를 가져올 수는 없잖아요.”도아린은 마음속의 불안함을 감추며 짜증 난 척 말했다.“도와드리겠다고 했으니 최소한 서류는 보여주시죠.”배건후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했다.“아현에게 전화해봐.”???도아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이 사람 미친 거 아냐? 꼭 오늘 밤에 손보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가? 내일이면 그녀가 죽기라도 한대?’“이렇게까지 성급할 필요 있어요?”“시간은 곧 돈이니까.”“서대은이 기꺼이 내놓는다고 해도 드레스를 수선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잖아요.”도아린이 냉소적으로 말했다.“정말로 손보미를 돕고 싶다면 차라리 유럽 쪽에 직접 연락해서 비싼 돈 주고 사 오는 게 낫지 않나요? 그럼, 한 번에 해결될 텐데.”배건후는 담배를 힘껏 재떨이에 눌러 끄며 말했다.“일리 있는 말이야.”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탁자 위의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네가 도울 수 없다면
도아린은 벽에 기대어 슬며시 빠져나가려다 말했다.“그럼 계속 잠복 연습하시고요. 전 뭐 좀 먹으러 갈게요.”그녀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 목덜미가 꽉 잡혔다.“밥해. 배고파.”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고 속으로 그를 한 대 때렸다.“미안한데, 난 건후 씨 엄마 앞에서만 연기하는 것뿐이니 평소엔 자급자족하세요.”“연기 한 번에 4천억을 받아? 네가 뭐 톱스타라도 된 줄 아냐?”‘그래, 나는 톱스타가 아니다. 손보미가 곧 네 덕분에 톱스타가 되겠지!’속으로 한바탕 이 남자를 욕한 후, 도아린은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4천억을 위해서라면 배 대표님이 원하는 캐릭터는 뭐든지 연기해야죠.”배건후의 눈빛이 흔들렸다.“네 말 잘 기억해 둬.”그가 주방에서 나가자 도아린은 그의 등 뒤에서 주먹을 휘둘렀다.‘나쁜 놈, 돈 많으면 다냐! 돈 많으면 대놓고 내연녀를 감싸고 아내를 괴롭혀도 되는 거냐고! 밥? 밥 줄게.’도아린은 냉동실에서 미리 얼려둔 밥을 꺼내고 햄과 당근을 잘게 썰기 시작했다.금세 맛있는 볶음밥이 완성됐다.“건후 씨, 식사하세요.”그녀는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배건후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하지만 앞에 놓인 볶음밥을 보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이어트식이 아닌 지방 함량이 초과된 계란 볶음밥이었던 것이다.“사람 몸에는 적당한 지방이 필요해요. 지방을 너무 줄이면 건강에 해로울 수 있거든요.”도아린은 접시와 숟가락을 배건후 앞에 놓으며 활짝 웃었다.“옛말에 남에게 얻어먹은 것이 있으면 사정을 봐줄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점포 서류를 조금만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가식적인 그녀의 태도에 배건후는 속이 울렁거렸다.그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밥 먹고 나서 얘기해.”“알겠습니다!”도아린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불닭면 소스를 꺼냈다.소유정과 있을 때는 늘 배달 음식만 먹었는데 오랜만에 맛있는 집밥을 먹게 되니 그녀도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배건후는 마치 고급 요리를 대하듯 우아하게 계란 볶음밥을
“새언니, 나 지유예요”도아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화가 맞는지 확인한 뒤 물었다.“머리를 다쳤어요?”그녀는 하품하며 옆에 텅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배건후는 어젯밤에 들어와서 자지 않았다.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서재 쪽에서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아마 화상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렇게 늦은 밤까지 일하다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어제는 교통사고로 정신이 없어서 새언니한테 무례하게 굴었어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배지유의 말투에는 억지로 사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배씨 가문에 시집온 지 3년이 되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공손하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도아린은 웃음이 나와 몸을 벌떡 일으켰다.“어머님이 뭘 약속해주셨어요?”“그런 거 없어요. 난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예요.”도아린은 화장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스피커로 바꾸어 놓았다.“사과받아줄게요.”그녀는 대충 씻고 외출 준비를 했다. 비록 괘씸하긴 해도 드레스 수선은 해야 했으니 말이다.그리고 배건후는 조만간 ‘아현’의 연락처를 알아낼 테니 그녀를 대신해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전화기 너머에서 배지유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나보러 병원에 올 수 있어요? 엄마도 볼 겸.”주현정의 꼼꼼한 점검 본능이 이제 온 가족에게까지 적용될 모양이었다.작업실에 가기 전에 병원에 들러서 주현정을 안심시킬 수 있다면 한 번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알겠어요.”도아린이 계단을 내려왔을 때 배건후는 아직 집에 있었다.그녀를 보자 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도아린은 오늘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쳤고 긴 머리는 약간 말린 상태로 옆으로 땋아 끝을 리본으로 묶었다.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는 옅은 화장까지 한 모양이었다.배건후는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미모로 점포 계약을 따내려고?”도아린은 그를 흘겨보았다.배건후는 잘생기고 돈도 많지만 그게 공작처럼 으스댈 이유는 아니었다.도아린은 웃으며 대답했다.“난 일하러
배지유는 도아린의 손을 놓았다.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는 과일 바구니에서 큰 사과를 하나 꺼내서 도아린에게 건넸다.“사과 좀 깎아줄래요?”여전히 그녀를 도우미 취급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도아린은 거절하려다가 배지유의 상태가 어젯밤보다 더 안 좋아 보여서 그냥 넘어갔다.그녀는 사과를 깨끗이 씻고 껍질을 깎은 뒤, 잘게 썰어 배지유에게 건넸다.“난 일이 있어서 어머님을 기다리지 않을게요.”“잠깐만요.”배지유는 침대 옆 서랍에서 종이 서류봉투를 꺼내 들었다.“이건 어제 오빠가 여기 두고 간 서류인데 오빠한테 전해줘요.”“시간 없어요.”“그냥 서류 하나 전해주는 거니까 얼마 안 걸려요!”배지유는 당황해하며 말했다.“사무실에 올라가기 싫으면 비서한테 받아가라 하면 되잖아요.”“...”도아린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배건후가 집에서 일할 때도 그녀는 그의 서류에 손을 대지 않았다.“내가 전화해서 가져가라고 할게요. 건후 씨도 금방 집에서 나왔을 테니까.”“전화하지 말아요!”배지유는 도아린의 휴대폰을 세게 쳐서 떨어뜨리고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내가 사과도 다 했는데 서류 하나 전해주는 것도 못 해줘요?”배지유가 서류를 급하게 밀어 넣을수록 도아린은 점점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지유 씨, 또 무슨 수작 부리려는 거예요?”“수작이라니요.”배지유는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내가 보미 언니를 더 좋아하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엄마는 아린 씨만 며느리로 인정한다잖아요. 어젯밤에는 너무 아파서 실수로 보미 언니 앞에서 아린 씨를 망신 줬어요. 그래서 오늘은 아린 씨에게 오빠에게 접근할 기회를 주려고요. 난 진심으로 두 사람을 엮어 주고 싶을 뿐인데 무슨 나쁜 속셈이 있겠어요.”‘지유가 나와 건후를 엮어준다고? 누가 그 말을 믿겠어.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나한테 목을 길게 뽑고 소리쳤으니 어머님이 따끔하게 혼내줬겠지. 아마 서류를 보내라는 것도 어머님이 시켰을 거야.’도아린이 잠시 망설이자 배지유는 서둘러 서류를 건넸다.“
“아주머니가 믿어주시니까 말씀해보세요.”성대호는 도아린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서류는 대체 어떻게 된 거죠?”도아린은 눈살을 찌푸렸다.“지유 씨가 이 서류는 건후 씨가 여기에 두고 간 거라면서 나보고 대신 회사에 갖다 주라고 했어요.”“그런 거 아니야!”배지유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아린 씨가 이게 오빠 서류인 걸 알고 일부러 회사에 가져가서 자기 위치를 과시하려고 한 거야!”“...”배지유를 바라보는 도아린의 눈빛에 섬뜩한 기운이 스쳤다.‘아침부터 날 불러서, 결국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였구나.’서류를 가져다주며 자기 위치를 과시하려는 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인데 그녀는 왜 이렇게 겁을 내는 걸까?배지유는 감히 도아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드리우고 떨고 있었다.성대호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안쓰러워서 부드럽게 말했다“도아린 씨가 가져다주겠다면 그냥 주면 되지 그걸로 뭐하러 다퉈.”그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배지유를 달래며 동시에 손을 뒤로 뻗어 서류를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몇 초 후 성대호는 뒤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서류를 가져다주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지유 씨가 자꾸 나한테 보내 달라고 한 거예요. 난 거절했어요.”도아린의 말에 배지유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성대호를 힐끔 쳐다보았다.성대호는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그럼 내가 서류를 갖다 줄게.”그는 말하며 침대 머리맡에 있는 깎아놓은 사과를 배지유에게 건넸다.“과일 좀 먹어, 입술이 다 말랐잖아.”배지유는 그릇을 들고 있었지만,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아린한테 사과하라니까 이렇게 한 거야?”주현정의 목소리는 꾸짖는 듯했지만, 눈빛만은 딸의 상처를 걱정하는 듯 따뜻했다.“스스로 넘어져서 아픈 것이니 쌤통이야.”배지유는 입을 꾹 다물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도아린은 주현정에게 의자를 끌어다 주며 말했다.“어머니, 전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
“좋아요. 내가 CCTV를 확인해볼게요. 누가 가져갔든 간에 난 건후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도아린 씨가 가져갔다면 꼭 지유에게 사과해야 해요!”“내가 가져간 게 아니라면요?”도아린은 성대호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성대호는 바로 배지유를 보호하며 말했다.“도아린 씨를 억울하게 했다면 내가 지유를 대신해 보상해 드리죠.”그 말을 끝내고 그는 주현정을 바라보았다.“아주머니, 제가 가서 CCTV를 확인해도 괜찮을까요?”주현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배건후는 물론이고 그녀도 멋대로 서류를 열어보는 걸 싫어했다. 게다가 원래 서류봉투에 있어야 할 USB가 왜 밖에 나와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성대호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도아린의 옆을 지나칠 때 그는 차가운 목소리를 들었다.“성 팀장님께서 공정하게 처리해 주길 바라요.”성 팀장이라니.지금까지 도아린은 계속 그의 이름을 불렀다.성대호는 심장이 찌릿해지며 병실 문을 나섰다.CCTV는 복도 끝에 있는 방에 모두 집중되어 있었다.그는 곧바로 모니터 화면을 조작했다.성대호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USB는 분명 배지유가 서류봉투에서 꺼낸 것으로 도아린이 주방에서 사과를 깎는 사이에 그녀의 가방에 넣었고 또 가방을 향해 사진을 찍어 누군가에게 보내주고 있었다.배지유는 금이야 옥이야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였고 배건후의 친구들도 그녀를 아주 많이 귀여워했다.성대호는 특히 배지유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동생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을 보니 마음은 정말 편치 않았다.그는 2초 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마우스를 잡고 삭제 버튼을 클릭했다.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말했다.‘보미가 오기만 하면 건후의 태도는 불분명했어. 그리고 지유도 본래 보미를 좋아했으니 아마도 오빠와 새언니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그랬을 거야. 지유는 단순한 장난이었고, 악의는 없었어.도아린은 건후의 아내이고
도아린의 마음에 찌르듯 한 통증이 스쳤다.배씨 가문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오직 주현정뿐이었다.그녀 대신 배건후를 욕해주기도 했고 배지유가 함부로 말하면 혼내주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잊고 있었다. 주현정은 그들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말이다.작은 일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자식이 억울해도 참을 수 있었지만, 회사 문서에서 USB를 몰래 꺼내는 건 장난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큰 문제였다. 심하면 기밀을 훔친 혐의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이런 책임을 주현정은 배지유에게 지게 할 리가 없었다.성대호는 도아린의 눈에 비친 실망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도아린에게 사과를 시킬 생각은 없었다. 단지 배지유가 창피를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아주머니, 지유가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잖아요.”“옳은 것은 옳은 거고 틀린 것은 틀린 거야.”주현정이 고집을 부렸다.도아린은 주현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우 잘 관리되어 있어 5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30대처럼 보였고 한때 강인한 사업가로 뼛속 깊이 자부심과 위엄이 있었다.도아린과 눈을 마주치는 주현정의 눈빛은 아주 밝았다.사과의 말을 도아린은 입 밖으로 내기 힘들었고 애초에 사과할 생각도 없었다.“저는 사과하지 않을 겁니다.”도아린은 확고하게 말했다.배지유는 초조하게 성대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는 뜻이었다.성대호는 늘 도아린을 아끼던 주현정이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할 줄은 몰랐다.“아주머니, 가족끼리 잘못을 알면 됐지 않나요?”“내가 뭘 잘못됐는데요?”도아린의 차가운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순간 성대호의 얼굴이 굳었다.그는 입술을 오므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호야.”주현정이 조용히 말했다.“넌 건후의 절친이자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난 네 능력을 믿고 네 사람됨도 믿어. 네가 아린이가 USB를 가져갔다고 했으니 아린의 잘못이 맞는 거겠지.”“아주머니.”성대호는 지금처럼 당황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