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등을 부딪친 손보미는 그대로 도아린에게 넘어졌다.도아린은 재빠르게 옆으로 비켜섰다.그러자 균형을 잃은 손보미는 벽에 부딪혔다.“보미야!”김지민은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손보미가 도아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도아린이 트집을 잡을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온 것이었다.그런데 손보미가 비상문 뒤에 서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지민아, 내 코...”손보미가 고개를 들고 손을 천천히 치우니 코가 한쪽으로 휘어져 있었다.김지민은 깜짝 놀랐다.촬영이 곧 시작되는데 코를 수정하려면 적어도 반달은 걸리기 때문이다.“곧바로 의사에게 연락할게!”김지민은 도아린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나 여사의 생일 파티에서도 보미를 망신 주더니, 오늘은 또 상처를 입혀요? 너무 잔인하네요!”도아린은 팔짱을 끼고 냉소를 지었다.“그쪽이 문을 열면서 보미 씨를 부딪친 거잖아요.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당신이 피하지 않았다면 보미가 왜 벽에 부딪혔겠어요!”“나는 그녀의 개도 아닌데 왜 안아줘야 하죠?”???김지민: 지금 누구를 개라고 한 거야.손보미는 코가 변형됐다는 소식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김지민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건후에게 전화해서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고 전해줘.”그녀는 배건후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구급차 안에서 배지유는 손보미가 오기를 고집했다.“지금은 치료가 지연되어 병을 키우는 게 두렵지 않아?”주현정이 불만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배지유는 주현정의 손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엄마, 내가 보미 언니에게 돌봐달라고 부른 건데 혼자 두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주현정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그럼 아린에게는 예의가 있었다는 거야? 아린은 네 새언니잖아.”배지유는 차 문 옆에 있는 배건후를 슬쩍 쳐다보며 중얼거렸다.“아프니까 화가 나서…”“다시 아린에게 버릇없이 굴면 몽둥이로 혼내줄 거야.”배지유는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지난번엔 뺨을 때리더
배지유랑 있지 않으면 손보미랑 있겠지.그가 집에 안 가면 그녀도 굳이 에이트 맨션에서 숙박하는 거래를 이행할 필요가 없었다.“에취!”“조수석 서랍에 티슈 있어요.”“고마워요.”도아린은 조수석 앞에 있는 서랍을 열고 티슈를 꺼내다가 그 밑에 있던 향낭을 발견했다.육하경은 곁눈으로 슬쩍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 향낭이 내 목숨을 살렸어요.”“그래요?”도아린은 무심하게 웃었다.“며칠 전에 고향에서 누군가 돌아가셔서 밤새 차를 몰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렀어요.”육하경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백미러를 가리켰다.“그런데 다시 출발하려는데 여기 걸려있던 향낭이 갑자기 떨어지더라고요.”그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려 했지만, 어머니는 왠지 불길하다고 하며 천천히 가자고 말렸다.차 안에서 한 시간쯤 자고 다시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그는 몇 킬로미터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트레일러에 실린 수확기가 떨어져서 자기가 타고 있는 차랑 똑같은 차를 덮쳤는데 운전자는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것이다.“그냥 우연이 아닐까요?”도아린은 코를 닦은 휴지를 티슈로 감싸서 가방에 넣었다.그녀의 시선은 가방 밑에 있는 남자 인형으로 향하더니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육하경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이 향낭은 내 행운의 부적이에요.”우연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그의 할아버지와 육민재의 할아버지는 친형제였고 육씨 가문의 사업 중에서 육하경의 집안이 담당하는 건 극히 일부분이었다.이번에 돌아가신 어르신은 호텔 사업을 맡으셨는데 육하경이 어머니를 모시고 조문을 하러 간 건 단지 가족의 의례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할아버지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셨다.육하경이 늘 여행을 다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가 뭔가 수를 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호텔 운영에 대해 많이 배워왔다.비록 다들 그의 승계에 놀랐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그에게 능
“백구 씨인가요?”전화를 받자마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닙니다.”배건후는 차갑게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백구 씨, 사모님이 우리 쪽에...”“죽여버리던가 맘대로 해!”배건후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사기 전화가 자기한테도 걸려오다니.이 번호는 배 씨 일가족이나 친한 친구들만 알고 있는 것으로 스팸 문자조차 온 적 없던 번호였다.딩동.낯선 번호로 사진 메시지가 왔다.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조사실 조명에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고 초조해 보였다.도아린이었다.그녀는 지금 경찰서에 있었다.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전화를 걸며 물었다. “어느 경찰서죠?”경찰서로 가는 길에 배건후는 최근 콜택시가 여성 혼자 타기엔 위험하다고 했던 조수현의 말을 떠올리며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도아린은 오늘 정말 재수 없었다.그녀가 소유정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집주인이 찾아왔고 집주인은 방 안에 낯선 사람이 있는걸 보더니 소유정이 재임대했다고 우겨댔다.“재임대 한 사람들은 다 친구나 친척이라고 하더라. 날 속이려 하지 마!”도아린이 아무리 설명해도 집주인은 끝까지 경찰을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하필 이때 소유정은 공연 중이라 전화도 받지 않았다.배건후 그 개자식은 지금 분명 병원에 있을 것이다.동생도 다쳤고 사랑하는 여자도 얼굴을 다쳤으니 그녀에게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전화를 걸고 나서 도아린은 후회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경찰 직원이 들어왔다.“도아린 씨, 이제 가셔도 됩니다.”빠른 걸음으로 조사실을 빠져나온 도아린은 배건후를 보자 걸음을 멈췄다.배건후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있었고 바짓가랑이는 물에 젖어 짙은 색을 띠었다.얼핏 보면 서둘러 집을 나선 것 같았다.하지만 자세히 보니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도아린은 다가가 배건후가 던져준 차 키를 받아들고 먼저 차에
그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말했다.“내가 또 널 도와준 거야.”조금 전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도아린은 코웃음 쳤다.“이제 조건을 내세우려는 거죠? 배 대표님.”모건 그룹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배건후가 모든 걸 사업 기회로 보기 때문이었다.“난 보미를 도울 수 없어요. 서 실장과는 별로 친하지 않거든요.”“엠파이어 빌딩의 점포 문제를 도정국한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남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도아린은 휴대폰을 꽉 쥐고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어차피 배건후랑 당장 이혼할 생각은 없으니 도정국에게 점포를 넘기지 않아도 그는 기껏해야 자신을 괴롭힐 뿐, 도지현의 의료 지원은 끊지 않을 것이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배건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집에 도착하기 전에 답해줘.”마이바흐는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담당자가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며 말했다.“저 부부 좀 이상하지 않나?”“저건 아무것도 아니에요.”부하도 따라 나와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며칠 전에 명예훼손 사건을 처리했는데, 그 부부는 서로 자기 신분을 증명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난 내가 그들의 어떤 큰 계획의 일부가 된 줄 알았어요.”차로 20분 거리는 금방 지나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에이트 맨션 앞에 멈춰 있었다.배건후가 먼저 차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그의 여윈 등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처럼 고고하고 차가워 보였다.징징.도아린의 휴대폰에 미확인 메시지 알림이 떴다.그녀가 휴대폰을 열어보니 간병인 아줌마의 번호였다.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아줌마, 동생이 또 무슨 반응을 보였어요?”“아니요. 내가 잠깐 뭐 가지러 나갔다 왔는데 병실 앞에서 누군가 수상하게 서성거리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내가 다가가니까 바로 도망쳤어요.”도아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도정국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이다.점포를 손에 넣지 못하면 그는 겉으로는 도지현
“여보세요.”서대은의 목소리가 들리자 도아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배건후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도아린의 귀는 마치 무언가에 막힌 듯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침을 삼키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침착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 도아린입니다.”“...”서대은의 침묵은 거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배건후는 턱을 살짝 들어 말을 이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도아린은 어쩔 수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서 실장님에게 바다 진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제 친구가 너무 좋아해서요. 혹시 양보해 주실 수 있을까요?”“여보세요?”서대은은 혼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무슨 신호가 이렇게 안 좋아. 앞으로 요트 파티 같은 거 하지 말아야겠어. 일도 못 보잖아.”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도아린은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신호가 안 좋은가 봐요.”“다시 걸어.”배건후의 눈빛이 날카로웠다.비록 전화 내용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도아린의 반응은 분명 이상했다.“양보해 주신다고 해도 지금 바로 진주를 가져올 수는 없잖아요.”도아린은 마음속의 불안함을 감추며 짜증 난 척 말했다.“도와드리겠다고 했으니 최소한 서류는 보여주시죠.”배건후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했다.“아현에게 전화해봐.”???도아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이 사람 미친 거 아냐? 꼭 오늘 밤에 손보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가? 내일이면 그녀가 죽기라도 한대?’“이렇게까지 성급할 필요 있어요?”“시간은 곧 돈이니까.”“서대은이 기꺼이 내놓는다고 해도 드레스를 수선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잖아요.”도아린이 냉소적으로 말했다.“정말로 손보미를 돕고 싶다면 차라리 유럽 쪽에 직접 연락해서 비싼 돈 주고 사 오는 게 낫지 않나요? 그럼, 한 번에 해결될 텐데.”배건후는 담배를 힘껏 재떨이에 눌러 끄며 말했다.“일리 있는 말이야.”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탁자 위의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네가 도울 수 없다면
도아린은 벽에 기대어 슬며시 빠져나가려다 말했다.“그럼 계속 잠복 연습하시고요. 전 뭐 좀 먹으러 갈게요.”그녀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 목덜미가 꽉 잡혔다.“밥해. 배고파.”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고 속으로 그를 한 대 때렸다.“미안한데, 난 건후 씨 엄마 앞에서만 연기하는 것뿐이니 평소엔 자급자족하세요.”“연기 한 번에 4천억을 받아? 네가 뭐 톱스타라도 된 줄 아냐?”‘그래, 나는 톱스타가 아니다. 손보미가 곧 네 덕분에 톱스타가 되겠지!’속으로 한바탕 이 남자를 욕한 후, 도아린은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4천억을 위해서라면 배 대표님이 원하는 캐릭터는 뭐든지 연기해야죠.”배건후의 눈빛이 흔들렸다.“네 말 잘 기억해 둬.”그가 주방에서 나가자 도아린은 그의 등 뒤에서 주먹을 휘둘렀다.‘나쁜 놈, 돈 많으면 다냐! 돈 많으면 대놓고 내연녀를 감싸고 아내를 괴롭혀도 되는 거냐고! 밥? 밥 줄게.’도아린은 냉동실에서 미리 얼려둔 밥을 꺼내고 햄과 당근을 잘게 썰기 시작했다.금세 맛있는 볶음밥이 완성됐다.“건후 씨, 식사하세요.”그녀는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배건후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하지만 앞에 놓인 볶음밥을 보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이어트식이 아닌 지방 함량이 초과된 계란 볶음밥이었던 것이다.“사람 몸에는 적당한 지방이 필요해요. 지방을 너무 줄이면 건강에 해로울 수 있거든요.”도아린은 접시와 숟가락을 배건후 앞에 놓으며 활짝 웃었다.“옛말에 남에게 얻어먹은 것이 있으면 사정을 봐줄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점포 서류를 조금만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가식적인 그녀의 태도에 배건후는 속이 울렁거렸다.그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밥 먹고 나서 얘기해.”“알겠습니다!”도아린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불닭면 소스를 꺼냈다.소유정과 있을 때는 늘 배달 음식만 먹었는데 오랜만에 맛있는 집밥을 먹게 되니 그녀도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배건후는 마치 고급 요리를 대하듯 우아하게 계란 볶음밥을
“새언니, 나 지유예요”도아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화가 맞는지 확인한 뒤 물었다.“머리를 다쳤어요?”그녀는 하품하며 옆에 텅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배건후는 어젯밤에 들어와서 자지 않았다.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서재 쪽에서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아마 화상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렇게 늦은 밤까지 일하다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어제는 교통사고로 정신이 없어서 새언니한테 무례하게 굴었어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배지유의 말투에는 억지로 사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배씨 가문에 시집온 지 3년이 되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공손하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도아린은 웃음이 나와 몸을 벌떡 일으켰다.“어머님이 뭘 약속해주셨어요?”“그런 거 없어요. 난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예요.”도아린은 화장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스피커로 바꾸어 놓았다.“사과받아줄게요.”그녀는 대충 씻고 외출 준비를 했다. 비록 괘씸하긴 해도 드레스 수선은 해야 했으니 말이다.그리고 배건후는 조만간 ‘아현’의 연락처를 알아낼 테니 그녀를 대신해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전화기 너머에서 배지유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나보러 병원에 올 수 있어요? 엄마도 볼 겸.”주현정의 꼼꼼한 점검 본능이 이제 온 가족에게까지 적용될 모양이었다.작업실에 가기 전에 병원에 들러서 주현정을 안심시킬 수 있다면 한 번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알겠어요.”도아린이 계단을 내려왔을 때 배건후는 아직 집에 있었다.그녀를 보자 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도아린은 오늘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쳤고 긴 머리는 약간 말린 상태로 옆으로 땋아 끝을 리본으로 묶었다.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는 옅은 화장까지 한 모양이었다.배건후는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미모로 점포 계약을 따내려고?”도아린은 그를 흘겨보았다.배건후는 잘생기고 돈도 많지만 그게 공작처럼 으스댈 이유는 아니었다.도아린은 웃으며 대답했다.“난 일하러
배지유는 도아린의 손을 놓았다.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는 과일 바구니에서 큰 사과를 하나 꺼내서 도아린에게 건넸다.“사과 좀 깎아줄래요?”여전히 그녀를 도우미 취급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도아린은 거절하려다가 배지유의 상태가 어젯밤보다 더 안 좋아 보여서 그냥 넘어갔다.그녀는 사과를 깨끗이 씻고 껍질을 깎은 뒤, 잘게 썰어 배지유에게 건넸다.“난 일이 있어서 어머님을 기다리지 않을게요.”“잠깐만요.”배지유는 침대 옆 서랍에서 종이 서류봉투를 꺼내 들었다.“이건 어제 오빠가 여기 두고 간 서류인데 오빠한테 전해줘요.”“시간 없어요.”“그냥 서류 하나 전해주는 거니까 얼마 안 걸려요!”배지유는 당황해하며 말했다.“사무실에 올라가기 싫으면 비서한테 받아가라 하면 되잖아요.”“...”도아린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배건후가 집에서 일할 때도 그녀는 그의 서류에 손을 대지 않았다.“내가 전화해서 가져가라고 할게요. 건후 씨도 금방 집에서 나왔을 테니까.”“전화하지 말아요!”배지유는 도아린의 휴대폰을 세게 쳐서 떨어뜨리고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내가 사과도 다 했는데 서류 하나 전해주는 것도 못 해줘요?”배지유가 서류를 급하게 밀어 넣을수록 도아린은 점점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지유 씨, 또 무슨 수작 부리려는 거예요?”“수작이라니요.”배지유는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내가 보미 언니를 더 좋아하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엄마는 아린 씨만 며느리로 인정한다잖아요. 어젯밤에는 너무 아파서 실수로 보미 언니 앞에서 아린 씨를 망신 줬어요. 그래서 오늘은 아린 씨에게 오빠에게 접근할 기회를 주려고요. 난 진심으로 두 사람을 엮어 주고 싶을 뿐인데 무슨 나쁜 속셈이 있겠어요.”‘지유가 나와 건후를 엮어준다고? 누가 그 말을 믿겠어.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나한테 목을 길게 뽑고 소리쳤으니 어머님이 따끔하게 혼내줬겠지. 아마 서류를 보내라는 것도 어머님이 시켰을 거야.’도아린이 잠시 망설이자 배지유는 서둘러 서류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