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국은 붉으락푸르락해서 화를 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건후가 비웃으면 어쩌려고 그래!”그녀는 배건후가 비웃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가 말실수할까 봐 더 걱정이었다.그가 입을 다물기만 한다면 그녀는 위세를 부릴 수 있으니까.“아빠랑 유준은 계속 나한테 가게를 달라고 쫓아다니는데, 이 사람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도아린은 배건후의 팔짱을 끼고 그에게 느긋하게 기대며 말했다.“엠파이어의 가게는 금싸라기 땅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리고 있는지 몰라요. 국제 일류 브랜드들도 아직 입점하지 않았는데 아빠의 작은 디저트 가게가 입주해서 무사하게 오픈하기나 하겠어요?”“...”도정국은 주먹을 꽉 쥐었다.자신의 가게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더욱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상장도 안 된 작은 가게가 입점하면 분명 주변 브랜드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게 완벽히 준비된 후 바로 오픈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도정국은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을 속이고 자리를 주지 않을까 봐 걱정됐다.“누나 말이 맞긴 한데...”도유준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도정국은 눈빛으로 그를 말렸다.“내가 너무 성급했어.”도정국은 어색하게 웃으며 배건후를 바라보았다.“내 몫으로 하나만 있다면 안심할 건데. 그렇지? 건후야.”그는 배건후가 직접 그에게 약속해주기를 바랐다.배건후의 시선은 줄곧 도아린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눈빛은 그윽하고 강렬했다.오늘 그는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캐주얼한 운동복은 그의 날카로운 기운을 누그러뜨렸지만, 카리스마는 여전히 강렬했다.시선이 느껴지자 도아린은 웃으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녀는 남자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그녀가 물러서려는 찰나, 배건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말하지 않는 건 협조하는 거야.”“...”도아린은 그의 팔을 세게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고 웃었다.“원하는 게 뭐죠?”
배건후가 없었더라면 도정국은 진작에 한 대 쳤을 것이다.그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 재산을 나누려고 하다니.그리고 배건후가 백조 원대 자산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쥐꼬리만 한 돈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도아린이 너무나도 탐욕스러웠다.도정국은 손을 움찔거리다가 배건후의 차가운 시선에 결국 사람을 때리지는 못했다.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건후야, 너에게 우스운 꼴을 보였구나. 아린이 이 녀석은 원래 이렇게 장난이 심해.”배건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아린은 공정한 걸 좋아하잖아요.”그를 발기불능이라고 저주한 내용이 담긴 이혼 합의서가 세상에 알려지면 그는 관련된 사람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도아린은 남자의 팔을 더 꼭 끌어안고 웃으며 말했다.“가요. 영화 시작하겠어요.”그녀가 힘을 주어 당겨서야 배건후는 마침내 발걸음을 옮겼다.도정국과 도유준은 급히 길을 비켜주었고 그들이 문을 나서자 도유준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아빠,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누나가 저렇게 나를 싫어하는 걸까요?”“여기 2천만이야. 일단 이걸 쓰고 있어. 새 가게가 계약되기 전까지는 아린을 절대 자극하지 마라.”도정국은 도유준에게 카드를 건네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지현은 오래 못 살 거야. 걔가 죽으면 그 몫은 네 거야. 그리고 아린은 내 재산을 받을 자격이 없어.”...병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도아린은 배건후의 팔을 놓았고 얼굴에 있던 친근한 웃음도 사라졌다.“나는 병원 옮기지 않을게요.”배건후가 입을 열려던 순간, 주현정의 전화가 걸려왔다.“수속은 다 됐어? 지유가 아파 죽겠대.”“바로 갈게요.”배건후는 도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무슨 얘기?손보미에게 진주 사주라는 얘기?절대 안 되지.그녀가 거절할 틈도 없이 배건후는 병원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찬 바람이 불어와 도아린은 몸을 움츠렸다.점심에는 반팔을 입고도 더웠는데 지금은 너무 추워서 덜덜 떨렸다. 찬바람이 이렇게 빨리
모든 준비를 마친 도아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두 층을 내려갔을 때, 병상이 하나 들어왔고 도아린은 의료진에 밀려 문 쪽으로 몰렸다.“이 약 전혀 효과가 없어요! 아직도 너무 아프단 말이에요!”“조금만 참으세요. 병원장에게 이미 연락했으니 정형외과 전문의가 곧 검사할 겁니다.”주현정은 병상을 따라 들어오면서 자신의 숄을 배지유에게 덮어주며 말했다.“오늘 한파래, 괜히 감기 들지 말고.”배건후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왔을 때 옆에는 가녀린 여자가 함께 있었다.삐삐!엘리베이터가 과부하 상태가 되었다.“무슨 엘리베이터가...”고개를 들자 배지유는 문 앞에 서 있는 도아린을 보았다.“아린 씨,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엘리베이터가 과부하인 거 안 보여요?”주현정은 그제야 도아린을 보고 배지유의 손을 가볍게 쳤다.“아린은 위에서 내려온 거니까 과부하라고 해도 그녀가 내려야 할 이유는 없지.”그녀의 말에 배건후 옆에 있던 손보미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배지유의 전화를 받고 병문안하러 온 거였는데 주현정은 내내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건후 씨가 지유를 병원에 데려다줘. 난 내릴게.”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나가려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는 계속 삐삐 소리를 냈다.“아린 씨, 귀가 먹었어요?”배지유가 소리쳤다.“일부러 내 치료를 방해해서 내 병을 키우게 하려는 거죠?”“조용히 해.”주현정이 나지막하게 나무랐다.“내가 내릴게.”그녀는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에 있어서 입구에 있는 손보미와 배건후가 내려야만 나갈 수 있었다.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지자 손보미는 마지못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지유야, 조금만 참아.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도아린은 그녀가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성큼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손보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던 한쪽 다리를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는 웃음을 지었다.‘진작 알아서 물러서야지, 눈치 없기는.’하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 못했다.삐삐—엘리베이터는 여
“아악!”등을 부딪친 손보미는 그대로 도아린에게 넘어졌다.도아린은 재빠르게 옆으로 비켜섰다.그러자 균형을 잃은 손보미는 벽에 부딪혔다.“보미야!”김지민은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손보미가 도아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도아린이 트집을 잡을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온 것이었다.그런데 손보미가 비상문 뒤에 서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지민아, 내 코...”손보미가 고개를 들고 손을 천천히 치우니 코가 한쪽으로 휘어져 있었다.김지민은 깜짝 놀랐다.촬영이 곧 시작되는데 코를 수정하려면 적어도 반달은 걸리기 때문이다.“곧바로 의사에게 연락할게!”김지민은 도아린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나 여사의 생일 파티에서도 보미를 망신 주더니, 오늘은 또 상처를 입혀요? 너무 잔인하네요!”도아린은 팔짱을 끼고 냉소를 지었다.“그쪽이 문을 열면서 보미 씨를 부딪친 거잖아요.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당신이 피하지 않았다면 보미가 왜 벽에 부딪혔겠어요!”“나는 그녀의 개도 아닌데 왜 안아줘야 하죠?”???김지민: 지금 누구를 개라고 한 거야.손보미는 코가 변형됐다는 소식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김지민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건후에게 전화해서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고 전해줘.”그녀는 배건후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구급차 안에서 배지유는 손보미가 오기를 고집했다.“지금은 치료가 지연되어 병을 키우는 게 두렵지 않아?”주현정이 불만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배지유는 주현정의 손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엄마, 내가 보미 언니에게 돌봐달라고 부른 건데 혼자 두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주현정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그럼 아린에게는 예의가 있었다는 거야? 아린은 네 새언니잖아.”배지유는 차 문 옆에 있는 배건후를 슬쩍 쳐다보며 중얼거렸다.“아프니까 화가 나서…”“다시 아린에게 버릇없이 굴면 몽둥이로 혼내줄 거야.”배지유는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지난번엔 뺨을 때리더
배지유랑 있지 않으면 손보미랑 있겠지.그가 집에 안 가면 그녀도 굳이 에이트 맨션에서 숙박하는 거래를 이행할 필요가 없었다.“에취!”“조수석 서랍에 티슈 있어요.”“고마워요.”도아린은 조수석 앞에 있는 서랍을 열고 티슈를 꺼내다가 그 밑에 있던 향낭을 발견했다.육하경은 곁눈으로 슬쩍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 향낭이 내 목숨을 살렸어요.”“그래요?”도아린은 무심하게 웃었다.“며칠 전에 고향에서 누군가 돌아가셔서 밤새 차를 몰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렀어요.”육하경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백미러를 가리켰다.“그런데 다시 출발하려는데 여기 걸려있던 향낭이 갑자기 떨어지더라고요.”그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려 했지만, 어머니는 왠지 불길하다고 하며 천천히 가자고 말렸다.차 안에서 한 시간쯤 자고 다시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그는 몇 킬로미터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트레일러에 실린 수확기가 떨어져서 자기가 타고 있는 차랑 똑같은 차를 덮쳤는데 운전자는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것이다.“그냥 우연이 아닐까요?”도아린은 코를 닦은 휴지를 티슈로 감싸서 가방에 넣었다.그녀의 시선은 가방 밑에 있는 남자 인형으로 향하더니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육하경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이 향낭은 내 행운의 부적이에요.”우연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그의 할아버지와 육민재의 할아버지는 친형제였고 육씨 가문의 사업 중에서 육하경의 집안이 담당하는 건 극히 일부분이었다.이번에 돌아가신 어르신은 호텔 사업을 맡으셨는데 육하경이 어머니를 모시고 조문을 하러 간 건 단지 가족의 의례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할아버지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셨다.육하경이 늘 여행을 다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가 뭔가 수를 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호텔 운영에 대해 많이 배워왔다.비록 다들 그의 승계에 놀랐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그에게 능
“백구 씨인가요?”전화를 받자마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닙니다.”배건후는 차갑게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백구 씨, 사모님이 우리 쪽에...”“죽여버리던가 맘대로 해!”배건후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사기 전화가 자기한테도 걸려오다니.이 번호는 배 씨 일가족이나 친한 친구들만 알고 있는 것으로 스팸 문자조차 온 적 없던 번호였다.딩동.낯선 번호로 사진 메시지가 왔다.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조사실 조명에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고 초조해 보였다.도아린이었다.그녀는 지금 경찰서에 있었다.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전화를 걸며 물었다. “어느 경찰서죠?”경찰서로 가는 길에 배건후는 최근 콜택시가 여성 혼자 타기엔 위험하다고 했던 조수현의 말을 떠올리며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도아린은 오늘 정말 재수 없었다.그녀가 소유정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집주인이 찾아왔고 집주인은 방 안에 낯선 사람이 있는걸 보더니 소유정이 재임대했다고 우겨댔다.“재임대 한 사람들은 다 친구나 친척이라고 하더라. 날 속이려 하지 마!”도아린이 아무리 설명해도 집주인은 끝까지 경찰을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하필 이때 소유정은 공연 중이라 전화도 받지 않았다.배건후 그 개자식은 지금 분명 병원에 있을 것이다.동생도 다쳤고 사랑하는 여자도 얼굴을 다쳤으니 그녀에게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전화를 걸고 나서 도아린은 후회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경찰 직원이 들어왔다.“도아린 씨, 이제 가셔도 됩니다.”빠른 걸음으로 조사실을 빠져나온 도아린은 배건후를 보자 걸음을 멈췄다.배건후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있었고 바짓가랑이는 물에 젖어 짙은 색을 띠었다.얼핏 보면 서둘러 집을 나선 것 같았다.하지만 자세히 보니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도아린은 다가가 배건후가 던져준 차 키를 받아들고 먼저 차에
그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말했다.“내가 또 널 도와준 거야.”조금 전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도아린은 코웃음 쳤다.“이제 조건을 내세우려는 거죠? 배 대표님.”모건 그룹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배건후가 모든 걸 사업 기회로 보기 때문이었다.“난 보미를 도울 수 없어요. 서 실장과는 별로 친하지 않거든요.”“엠파이어 빌딩의 점포 문제를 도정국한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남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도아린은 휴대폰을 꽉 쥐고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어차피 배건후랑 당장 이혼할 생각은 없으니 도정국에게 점포를 넘기지 않아도 그는 기껏해야 자신을 괴롭힐 뿐, 도지현의 의료 지원은 끊지 않을 것이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배건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집에 도착하기 전에 답해줘.”마이바흐는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담당자가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며 말했다.“저 부부 좀 이상하지 않나?”“저건 아무것도 아니에요.”부하도 따라 나와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며칠 전에 명예훼손 사건을 처리했는데, 그 부부는 서로 자기 신분을 증명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난 내가 그들의 어떤 큰 계획의 일부가 된 줄 알았어요.”차로 20분 거리는 금방 지나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에이트 맨션 앞에 멈춰 있었다.배건후가 먼저 차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그의 여윈 등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처럼 고고하고 차가워 보였다.징징.도아린의 휴대폰에 미확인 메시지 알림이 떴다.그녀가 휴대폰을 열어보니 간병인 아줌마의 번호였다.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아줌마, 동생이 또 무슨 반응을 보였어요?”“아니요. 내가 잠깐 뭐 가지러 나갔다 왔는데 병실 앞에서 누군가 수상하게 서성거리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내가 다가가니까 바로 도망쳤어요.”도아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도정국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이다.점포를 손에 넣지 못하면 그는 겉으로는 도지현
“여보세요.”서대은의 목소리가 들리자 도아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배건후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도아린의 귀는 마치 무언가에 막힌 듯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침을 삼키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침착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 도아린입니다.”“...”서대은의 침묵은 거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배건후는 턱을 살짝 들어 말을 이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도아린은 어쩔 수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서 실장님에게 바다 진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제 친구가 너무 좋아해서요. 혹시 양보해 주실 수 있을까요?”“여보세요?”서대은은 혼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무슨 신호가 이렇게 안 좋아. 앞으로 요트 파티 같은 거 하지 말아야겠어. 일도 못 보잖아.”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도아린은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신호가 안 좋은가 봐요.”“다시 걸어.”배건후의 눈빛이 날카로웠다.비록 전화 내용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도아린의 반응은 분명 이상했다.“양보해 주신다고 해도 지금 바로 진주를 가져올 수는 없잖아요.”도아린은 마음속의 불안함을 감추며 짜증 난 척 말했다.“도와드리겠다고 했으니 최소한 서류는 보여주시죠.”배건후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했다.“아현에게 전화해봐.”???도아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이 사람 미친 거 아냐? 꼭 오늘 밤에 손보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가? 내일이면 그녀가 죽기라도 한대?’“이렇게까지 성급할 필요 있어요?”“시간은 곧 돈이니까.”“서대은이 기꺼이 내놓는다고 해도 드레스를 수선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잖아요.”도아린이 냉소적으로 말했다.“정말로 손보미를 돕고 싶다면 차라리 유럽 쪽에 직접 연락해서 비싼 돈 주고 사 오는 게 낫지 않나요? 그럼, 한 번에 해결될 텐데.”배건후는 담배를 힘껏 재떨이에 눌러 끄며 말했다.“일리 있는 말이야.”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탁자 위의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네가 도울 수 없다면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건 분명히 도아린과 관련이 있었고 아버지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상 도아린을 달래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재민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하지만 막 1층에 도착하자 머리 위에서 강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했을 때 넌 바로 달려가지 않았어. 이미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참인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주얼리 매장에 심각한 타격을 줄 거라고.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생각이야?”강재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순간적으로 욕지거리가 나갔지만 결국 방향을 바꿔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강재희를 지나칠 때, 차갑게 말했다.“누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아? 내 사람한테 그럴 생각은 접어.”강재희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정말 여자를 모르네!’한편, 도아린이 장수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드디어 절 찾아왔군요!”두 사람이 악수할 때 심지어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가 유자차를 한 잔 내밀었지만 도아린은 차를 바라보며 손을 대지 않았다.“배 대표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아린 씨가 오면 유자차를 타 드리라고 하셨죠.”장수현은 배건후의 말을 떠올리며 덧붙였다.“따뜻한 물로 우려내고 레몬즙 두 방울 추가했어요. 한 번 맛보세요.”도아린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작은 컵이었지만 그녀는 손이 떨려 쉽게 들지 못했고 장수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나요?”“그런게 아니라...”말을 마친 후 도아린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배 대표의 사건은요?”“그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증거만으로도 배 대표님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어요.”장수현은 서랍에서 두 개의 서류봉투를 꺼냈다.“이 두 개의 문서는 도아린 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저요?”도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
다음 날, 배지유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경호원은 그녀를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의사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아이고!”의사가 병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일부러 다리를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다시 감염된 거 아닐까요? 유 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유승호가 다가가려 하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저희 대표님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가씨는 저희가 병원에 모셔가겠습니다.”“유 쌤! 제발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배지유가 손을 뻗어 유승호의 가운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승호는 경호원과 함께 그녀를 지나쳐 가버렸고 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저희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배지유는 악에 받쳐 어금니를 꽉 물었다.“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경호원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주현정에게 보고했다.주현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놈들도 슬슬 초조해지는군.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지.”“어디 나갈 거야?”진경수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고 급히 다가갔다.“지우 씨의 촬영이 거의 끝나가요. 가서 봐야겠어요.”“일남이 하고 일북이 보호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진경수가 그녀의 가방을 잡으며 말렸지만 도아린이 피했다.“오빠, 이렇게 날 집에 가둬놓는 건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들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는 거야.”“가둬놓다니...”진경수가 눈을 피하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인간성이 없어! 위험한 일은 우리가 할 테니, 너는 그냥 부모님 곁에서 안전하게 있어 주면 안 되겠어?”“오빠, 솔직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진씨 가문의 사업에는 영향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오빠나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예요.”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배 대표가 사
주현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배지유는 몇 번 울먹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남궁유민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강요한 것이었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남궁 변호사한테 내 교통사고 소송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 변호사가, 글쎄, 나한테 오히려 오빠를 모함하라고 했어요.”“나는 오빠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알거든요. 오빠가 절대 회사 자금을 횡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겉으로는 남궁유민의 협박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오빠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길 바랐어요! 오빠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주현정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딸이 이렇게 교활하고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이렇게 고상한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왔다.배지유는 눈물이 나지 않자 점점 더 통곡하며 눈물 연기를 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내가 처음에 약을 바꾼 것도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엄마 목숨을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고요!”“게다가 내가 왜 오빠를 해치려 하겠어요? 난 미끼로 자처해서 남궁유민 그 배신자를 까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엄마!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두 분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계속 같이 살았을 거고 아빠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나도 남궁유민에게 협박당하지 않았을 거고,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회사 일을 아빠가 처리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내 말이 틀렸어요?”주현정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딸에게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남궁유민이 널 협박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무슨 수로 널 협박할 수 있겠어?”“그게...”배지유는 급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잠시 고민하던 배지유는 사실대로 말
“누구...?”“너무 팬이에요! 저 ‘화성의 별빛’이에요!”“아, 안녕하세요!”도지현은 그녀를 바로 기억해 냈다.이 팬은 그가 방송을 시작한 날부터 채팅방에 있었고 팬 단톡방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도지현의 스태프가 그녀에게 팬카페 관리자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대신, 팬으로 남아 계속 응원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나눴고 전미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기...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저분한테 잘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보험사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수리비는 제가 전액 부담할게요.”도지현은 강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형...”강재민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그냥 가세요. 괜찮습니다. 너도 얼른 차 타.”“정말 고맙습니다!”전미나는 연신 인사를 하며 빠르게 자신의 차로 돌아갔고 강재민은 명함을 휙 차 안으로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명함이 미끄러져 내려가 도지현의 발밑에 떨어졌다.“전미나?”‘티파니 주얼리의 수석 디자이너... 거긴 진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보석 브랜드잖아?’도지현은 누나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강재민에게 물었다.“형, 이 명함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저 팬분인데, 팬카페 관리자로 모시고 싶어서요.”“가져가.”강재민은 애초에 전미나에게 차 수리비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단지 티파니 주얼리의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였다.그는 도지현을 집 앞에 내려준 후, 바로 차를 수리하러 갔다.도지현은 도아린의 부탁대로 그날 사고 이후 모건 그룹의 동향과 배건후의 근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그날 사고 이후, 주현정은 모건 그룹의 고위 부사장을 지명해 그룹 운영을 대리하게 했다.한편, 배건후가 입원한 사립 병원은 철저한 경비 속에 통제되고 있었고 경호원들이 출입을 관리하고 있어 의료진 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어디 불편한 데 없어?”“손이 아직 불편하고 가끔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아.”도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동생이 이렇게 강한데 누나가 이런 일로 무너지면 창피하지 않겠어?”“그래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누나가 다치면 나는 더 이상 의지할 사람도 없다고!”“이번엔 지현이 말이 맞아요.”강재민이 두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며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만약에...”그는 말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그녀가 먼저 연락했더라면 그는 최대한 그녀가 그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 그 차 사고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한 후, 진씨 가문은 외부인의 병문안을 철저히 차단하며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했다.강재민은 진수혁과의 친분 덕분에 그가 있을 때 잠깐 들어와 도아린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혼수 상태였던 도아린은 계속 배건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배건후가 그녀를 구한 일만으로 그의 모든 잘못이 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원래부터 미묘하고 어색했던 강재민과 도아린의 관계는 이제 배건후까지 다시 끼어들면서 더욱 복잡해졌다.“지현아, 네 핸드폰 좀 써도 될까?”도아린이 손을 내밀자, 도지현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누나, 내가 새 핸드폰 사줄까? 이제 방송해서 돈도 버는데!”“누나도 핸드폰은 있어.”도아린은 단지 남동생의 핸드폰도 집에서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진수혁이 새 핸드폰을 사주긴 했지이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용 시간을 제한해 놓았다.밤중에 몰래 핸드폰을 켜봤지만 항상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반면, 도지현의 핸드폰은 인터넷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사용은 가능했다.이는 집 인터넷의 제한 속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차단기를 작동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계정이 뭐야? 나중에 방송 챙겨볼게.”도아린이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