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앞에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가녀린 여자를 안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감싸 안고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발을 삐끗했는지 이상한 각도로 휘어있었다.소유정은 도아린이 화들짝 놀라자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나쁜 X끼, 가서 저 자식 머리라도 쥐어뜯어야겠어!”유진혁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고 찍기 시작했다.“대박, 엊저녁에 뜨밤 보낸 거로도 부족해서 대낮에도? 어찌나 많이 했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해?”두 사람이 양쪽으로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혹시라도 소유정이 괴롭힘당할까 봐 유진혁은 다 찍을 생각이었다.지난번에 일이 생겨서 오지 못한 바람에 소유정이 다쳐서 병원에 갔었던 것만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했다.딸깍.차 문이 잠겼다. 소유정이 아무리 차 문을 열어도 열리지 않자 다급하게 말했다.“아린아, 배건후가 손보미 저년이랑 저러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3대 3이에요. 싸우면 누가 이길지 몰라요.”유진혁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려고 하자 소유정이 눈을 희번덕거렸다.“배건후 혼자서도 우리 셋을 해결할 수 있어.”“누구? 누구라고?”유진혁은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배건후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하지 않아도 말로 충분히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도아린은 점점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며 눈빛이 싸늘해졌다. 세 사람이 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른 차 뒤로 사라졌다.잠시 후 은색 마이바흐가 도아린의 차 앞으로 휙 지나갔다.“내가 알아서 할게.”소유정이 또다시 그녀 때문에 경찰서에 가게 해선 안 되었다....병원.의사는 아주 능숙하게 탈골된 손보미의 발목을 맞추었다.“선생님, 보미 언니 미끄러져 넘어졌을 뿐인데 탈골됐다는 건 어젯밤에 누가 언니를 밀어서 넘어진 것과 연관이 있나요?”배지유는 기회만 잡으면 도아린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의사는 어젯밤에 어느 정도 다쳤는지 알 수가 없어 이렇게 말했다.“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요.”“오빠,
그런데 이 고질병이 배지유의 동정을 바꿨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호텔을 나올 때도 배건후에게 안겨 나왔고 병원에 온 후에도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와 관계라도 끊으려는 듯 문 앞에만 서 있었다.손보미가 일어서려 하자 배건후가 휠체어를 옆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면서 안아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못 알아챈 건지 아니면 알고 싶지도 않은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한쪽 발만 탈골된 거라 다른 한쪽 발은 멀쩡했다. 손보미는 하는 수 없이 한 발로 서서 휠체어에 앉았다.“사실 그 디자이너...”따르릉...손보미가 언짢은 얼굴로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여보세요?”“손보미 씨, 알려드릴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맡긴 드레스 망가진 부분이 많고 같은 바다 진주도 찾기 매우 어려워요.”문나연이 차분하게 설명했다.“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안 돼요!”손보미는 다짜고짜 호통쳤다가 배건후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다시 다정한 말투로 부탁했다.“그 드레스 이미 예약한 거라 그쪽 촬영에 영향 주면 안 돼요.”“그럼 더 잘하는 수선 대가님한테 맡기실래요?”문나연이 가볍게 웃었다.“아현 씨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선한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보미 씨가 같은 품질의 바다 진주를 찾으면 모를까.”그러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손보미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무슨 일이야?”배건후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생일날에 빌린 드레스 입고 영상을 찍었는데 불꽃이 갑자기 터진 거야. 다행히 제때 피해서 다치진 않았는데 드레스가 여러 군데 구멍 났어.”그가 시선을 늘어뜨렸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망가졌으면 사면 되지.”손보미가 울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그 드레스는 어떤 미스터리한 사람의 사유품이라 얼마를 줘도 안 판대. 거금을 들여서 업계 최고 수선 대가님한테 맡겼는데 같은 재료를 찾기 어렵대.”배건후는 계속하여 라이터를 돌렸다. 손보미는 그의 표정을
배건후는 금속 라이터를 쥔 채 차갑게 물었다.“무슨 재료인데?”손보미는 가슴이 쿵쾅거렸다.‘연락하지 않겠다는 건 그냥 한 말인데 건후 씨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겠지? 우리 관계에 날 모른 척할 리가 없어.’“최고 품질의 바다 진주.”배지유는 문득 뭔가 생각했다.“그 드레스 가게에 있어요!”블랙 벨벳 드레스를 봤을 때 소매 부분에 크고 둥근 최고 품질의 바다 진주가 박혀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원래는 손보미에게 사달라고 할 생각이었으나 도아린과 불쾌한 일이 생긴 바람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손보미가 물었다.“확실해?”배지유가 대답했다.“확실해요!”손보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그 드레스 가게 디자이너가 건후 씨한테 잘 보이려고 했으니까 건후 씨 전화 한 통이면 바로 갖다 바칠 거야. 도아린, 내 앞길을 막아? 건후 씨가 내 편인 이상 아무도 날 못 건드려.’“건후 씨...”손보미가 빤히 쳐다보자 배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처리할게.”배건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손보미는 한시름을 놓았다.“가서 일 봐. 지유가 잠깐 있어 주면 돼. 지민이 오는 길이라고 했어.”배건후가 다시 돌아섰다.“자르지 않았어?”손보미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멋쩍게 웃었다.“지민이가 무릎 꿇고 꼭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용서해줬어.”‘건후 씨를 빨리 보내야 해. 지민이를 만났다간 들킬지도 몰라.’“회사 일이 더 중요하지. 난 내가 알아서 잘 챙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배건후는 다른 사람이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럼 먼저 갈게.”배건후가 나간 후 손보미가 휴대전화를 꺼냈다.“병원비 얼마 나왔어? 이체해줄게.”“괜찮아요...”배지유의 시선이 멍하기만 했다.“그럼 200만 원 줄게. 용돈으로 써.”윙윙하는 진동에 배지유가 움찔했다.“왜 그래?”손보미가 배지유의 손을 잡았다.“손이 왜 이렇게 차?”배지유는 계좌 이체 알림인 걸 보고서야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아무것도 아니에
부탁하는 일이라 가게 문 앞에 ‘손보미와 배건후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걸려있다는 건 얘기하지 않았다. 우정윤은 할 수 있는 얘기만 골라서 했다.“서대은 씨 디자인계에서 명성이 자자하고 성격도 불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든 사람한테는 공짜로 퍼주기도 하는데 거슬리는 사람한테는 얼마를 줘도 팔지 않는대요.”배건후가 펜을 꽉 쥐었다. 그는 서대은과 아무런 친분이 없었고 서대은도 도아린만 도와줄 뿐 손보미를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도아린은 블랙 카드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전에 장뇌삼을 사느라 도아린이 전 재산을 거의 다 털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가게 드레스도 비싸고 메이크업까지 더하면 지출이 꽤 컸다.“도아린 누구 카드 긁었어?”배건후는 우정윤이 가장 대답하기 싫어하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대답을 피할 수도 없었다. 우정윤이 아무 말이 없자 배건후가 고개를 들었다.배건후의 싸늘한 눈빛에 우정윤은 폴더를 꽉 잡고 화를 당해낼 준비를 했다.“사모님 드레스랑 메이크업 다 공짜로 받으셨어요. 서대은 씨가 선물한 겁니다.”차가운 냉기가 순식간에 커다란 사무실을 휩쓸었다. 사인펜이 뚝 부러졌고 배건후의 손등에 핏줄이 다 튀어나왔다.결혼 3년 동안 도아린은 배건후의 옆에만 있거나 주방에만 있었다. 인맥을 넓히라고 여러 번 설득했었는데도 도아린은 귓등으로 듣기만 했다.‘대체 언제 서대은과 친해진 거야? 그것도 비싼 드레스를 공짜로 받을 정도로?’조금 전 우정윤이 말했던 ‘마음에 든 사람에게는 공짜로 퍼준다는’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그렇게 급하게 에이트 맨션에서 나간 게 저런 볼품없는 사람들을 만나려고 그런 거였어?’우정윤은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천천히 문 쪽으로 물러났다. 나가려는데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난번에 알아보라고 했던 일 어떻게 됐어?”우정윤이 발걸음을 멈췄다.‘깜빡할 뻔했네.’그는 다시 돌아서서 조사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손보미 씨가 귀국한 그날에 뒤에서 오던 버스가 피하려다가 배수구에
배건후는 오늘따라 일 처리 효율이 별로 높지 않았다. 도아린이 밖에서 아무나 만나고 다닌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우정윤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프로젝트가 곧 빼앗길 위기에 놓여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대표님, 유럽 그 프로젝트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우리보다 3% 높은 가격을 제시했대요.”배건후의 집안과 명성이라면 10% 높은 가격을 불러도 그쪽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망설인다는 건 그분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뜻했다. 하여 가격을 많이 부르지도 않았고 딱 3%만 올렸다. 대놓고 배건후와 맞서겠다는 뜻이었다.배건후가 주먹을 불끈 쥐었고 검은 두 눈에 냉기가 가득했다.지난번에 급히 귀국하는 바람에 상대에게 기회를 주고 말았다. 그렇지 않으면 진작 계약했을 텐데!“그 사람 누군지 알아봐.”“알겠습니다.”...주현정은 계속 기다렸지만 배건후는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얘는 일 말고는 다른 걸 잘하는 게 없어. 와이프 달래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그녀는 유전자검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진짜 내가 낳은 아들 맞아? 왜 자기 아버지처럼 로맨틱한 면이라곤 하나도 없어?’“아린아, 집이야?”결국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저... 지금...”도아린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물었다.“어머님, 어디 안 좋으세요?”“그게 아니라 에이트 맨션에 가본 지 오래돼서 너희들 보러 가려고.”“지금요?”“응. 민정 아줌마랑 같이 갈 생각이야.”도아린은 전화를 끊자마자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배건후에게도 문자를 보냈다.[어머님 에이트 맨션에 오신대요. 아무래도 검사하러 오시는 것 같아요.]주현정이 출발하자마자 배지유가 병원에 도착했다. 간호사에게서 아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온다는 소리를 듣고 배지유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도아린이 루비 목걸이가 사라진 걸 발견한다면 그녀의 욕을 얼마나 할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안 돼. 막아야 해!’배지유는 BMW R59를
그렇게 천천히 조건 반사가 됐는지 뭐만 먹으면 토하는 버릇이 생겼다.어느 하루 배건후가 집에 왔는데 밥을 먹자마자 도아린은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해버렸다. 심하게 토할 땐 가끔 저도 모르게 소변이 나올 때도 있었다.배건후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싸늘하게 지켜보면서 그녀에게 동정심을 얻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거라고 했었다...유민정은 도아린이 꿈쩍도 하질 않자 웃으면서 설명했다.“사모님, 이건 몸에 좋은 한약이에요.”‘언제는 뭐 몸에 좋지 않다고 했나요? 그럼 차라리 아들한테 먹일 것이지. 약 먹고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는데 독수공방하는 기분이 어떤지 아무도 모를 거라고요!’“어머님.”도아린이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주먹을 쥐었다.“이 약 더는 먹지 않겠어요. 저랑 건후 씨 지금...”“아이 가질 준비하고 있어요.”배건후의 굵은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오자 도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경고의 빛이 스쳤다. 그는 4천억 원을 주고 어머니의 기쁨을 샀다.도아린은 그가 손보미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다리를 다치게 했다는 생각만 하면 속이 다 울렁거렸다.웩.주현정이 도아린의 손을 잡고 놀랍고도 기쁜 얼굴로 물었다.“아린아, 벌써 생긴 건 아니지?”‘생리 금방 끝났는데...’배건후는 차 키를 현관 앞 상자에 넣고 슬리퍼를 갈아신은 후 들어왔다.“의사 선생님이 아이 가질 준비하는 기간에는 약을 먹지 말라고 했어요.”배건후가 커다란 주머니를 들고 도아린의 옆으로 다가왔다.“앞으로는 한약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유민정이 주현정의 눈치를 살폈다.“이 한약은 몸에 좋은 거야. 근데 의사 선생님이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 말아야지, 뭐.”주현정은 도아린이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기쁨에 아들마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 같았다.“회사 일로 핑계 대지 말고 아린이 옆에 자주 있어 줘. 임산부는 기분이 좋아야 아이한테도 좋아.”주현정이 도아린의 손을 하도 주물러서 아플 지경이었다.그녀는 진짜로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손녀든 손자든
“어머님만 좋아하시면 돼요.”도아린은 배추 모양 옥을 유민정에게 준 후 나머지 박스들은 전부 위층으로 가져갔다.“사모님, 이거...”유민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짜예요.”도우미도 가짜인 걸 알아봤는데 주현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주현정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이 선물 준 사람 육씨 가문을 무시하는 게 틀림없어. 가는 길에 버려. 우리 육씨 가문과 친분도 있는데 망신당하게 해선 안 되지.”그러면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지유 아직 어리니까 어떤 일은 오빠인 네가 잘 가르치도록 해. 아린이가 생각이 깊어서 우리 배씨 가문의 체면을 남겨둔 거야. 만약 다른 사람이 지유가 새언니 물건으로 선물 준 거 알면 우리 집이 망할 수도 있다고.”“...”배건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라이터를 돌렸다. 그가 아무 반응이 없자 주현정이 쿠션을 확 던졌다.“가끔은 네가 내 아들이 맞나 의심이 들어!”배건후는 쿠션을 잡고 소파에 내려놓았다.“지유 말이에요...”‘됐어. 목걸이는 나중에 얘기하자.’“걔가 철이 없다고 너도 없을 셈이야?”주현정이 호통쳤다.“레스토랑까지 예약해서 밥 먹으러 가라고 했더니 귓등으로 들어? 마음 같아선 널 정말 호적에서 파버리고 싶어.”배건후는 도아린의 ‘남자들’만 생각하면 표정이 싸늘해졌다....도아린은 나영옥의 친구들이 준 선물과 비취 팔찌만 따로 골라냈고 나머지는 다용도실에 넣었다.그녀가 금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열었다. 그런데 맨 위에 두었던 벨벳 케이스가 사라졌다. 도아린은 자신을 비웃었다.비취 팔찌마저 배지유에게 줬는데 루비 목걸이를 남에게 준 것도 딱히 놀랍진 않았다.그녀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장에서 숄을 찾았다.갑자기 바람이 불고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주현정이 추울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돌아선 순간 배건후의 품에 부딪히고 말았다.도아린은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비켜요.”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금고를 열어보았으니 루비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걸 분명 알았을 것이다. 이 일은 그녀에게 직접 말하
도아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아니야. 배건후의 머리가 잘못된 거야.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대체 무슨 낯짝으로 한 거지?’“건후 씨, 손보미 씨는 건후 씨가 아끼는 여자지,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가 그리 체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무슨 수로 바다 진주를 구해요?”도아린이 가려는데 배건후가 어깨를 꽉 잡았다. 그러고는 벽 쪽으로 확 밀어붙였다.배건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안색도 어두워졌다.“체면이 없다고? 체면이 없다면 서대은 씨가 왜 귀한 드레스까지 공짜로 줬겠어?”그의 분노가 극에 달해 도아린의 어깨를 꽉 잡고 말았다. 도아린이 어깨가 아픈 나머지 발버둥 치자 숄이 바닥에 떨어졌다.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배건후는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다. 도아린이 점점 대놓고 비웃었다.“내 남편이 내연녀한테 드레스를 사주면서 연회에서 가장 예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한 걸 서대은이 듣고 보다 못해 드레스를 협찬해줬어요.”배건후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네가 내 돈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내가 안 쓰겠다고 해서 내연녀한테 마구 써? 이건 무슨 이상한 논리야?’도아린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무슨 방식으로 드레스를 얻었든 건후 씨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배건후의 두 눈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도아린은 한시라도 빨리 그와 멀리하고 싶었다.배건후는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건후야, 아린아.”주현정의 목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왔다. 배건후와 도아린의 코끝이 서로 맞닿아 있어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도아린은 배건후를 밀어내고 숄을 주웠다.“어머님... 오늘 날씨가 춥다고 해서 숄을 챙겼어요.”도아린은 숄을 주현정에게 걸쳐주었다.“의사 선생님이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역시 내 걱정하는 건 며느리밖에 없어. 아들은 날 화병 나게 하려고 태어난 것 같아.”주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싫증뿐이었다.도아린은 힘을 주어 방심하고 있던 배건후를 밀어냈고 뒤돌아 걸어갔다.배건후는 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도아린, 나한테 시간을 줘.”배건후가 잡은 손목의 위치가 마침 도아린이 떨어질 뻔했을 때 배건후에게 잡힌 위치였다. 도아린은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배건후의 손을 때렸다.“이거 놔!”“친구 사귀지 마.”배건후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둘러 친구 사귈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줘.”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발길질을 했고 배건후는 피하지 않았다. 바지에는 발자국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거 안 놓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당신이 함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배건후의 힘이 조금 빠진 틈을 타서 도아린은 빠르게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다.나영옥은 도아린이 손목이 빨갛게 된 채로 한참이 지나 돌아온 것을 보고 묻지 않았고 가정부에게 도아린한테 식사를 올려달라고 했다.배건후가 돌아왔을 때, 육하경이 작은 숟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도아린의 앞에 놓아주는 것을 보았다.“내일 하경 오빠가 아린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는데 저희도 함께 가요.”육청아은 갈비를 하나 집어 배건후의 접시에 놓았다.배건후는 가정부를 불러 접시를 바꿔 달라고 했다.“...”식사를 마친 후, 육하경은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배건후는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아린이 지금 사는 곳은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불편해.”도아린은 자신의 주소를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게 맞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건후가 미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하경 씨는 외부인이 아니에요.”도아린은 차를 빙 돌아가더니 반대편으로 올랐다.육하경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배건후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육씨 가문을 떠나 시 중심에 들어서자 도아린이 갑자기 말했다.“앞에
“아!”육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는 다 젖었고 찻물이 그녀의 치마를 적셨다.“죄송해요.”배건후는 주전자를 놓고 자신의 냅킨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를 닦았다.육청아는 도아린을 흘겨보고는 치마를 정리하러 갔다.작은 소란이 일었어도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나영옥이 잔소리를 했다.“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저렇게 칠칠치 못한 거야. 단정하지 못해.”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웃음을 짓던 두 눈은 어리둥절했다.“천사 보육원이 압류당했는데 세인트존스 호텔의 수선 계획은 계속할 거야?”배건후는 육하경과 도아린의 대회를 끊었다.그는 소매를 말아 올렸고 손목에는 빨간 끈이 드러났다. 그의 행동이 나른하고 관능적이었다. 도아린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이혼한 마당에 이런 물건으로 그녀를 치욕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가서 손을 씻고 올게요.”도아린은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육하경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며 배건후의 말에 대답했다.“수선 계획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도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객실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밖에 있었는데 도아린이 수도꼭지를 틀려고 할 때 여자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도아린은 ‘배건후’와 ‘네티즌을 산다’라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듣게 되었다.도아린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육청아은 빠르게 핸드폰을 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칸막이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변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을 내렸다.문을 열자마자 역시 육청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도아린 씨.”육청아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당신이 배지유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