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호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눈짓했고 그 사람은 차를 준비하는 척하며 CCTV의 전원을 끊었다.“어? 이게 무슨 일이지?” 경호 팀장은 당황하여 말했다. “전기기사 불러서 누가 전기 차단기를 잘못 건드린 건 아닌지 확인해봐.”직원은 잠시 멈칫하다가 상황을 알아차렸다.CCTV 백업 컴퓨터는 옆방에 있었지만, 그는 상사가 자신에게 정확히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CCTV 실에서 도아린은 성대호가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보고 사태가 단순하지 않다고 짐작했다.육하경은 그녀의 눈빛을 주시하고 있다가 정수기 뒤쪽 전원이 꺼진 것을 재빨리 발견했다.그는 조용히 다가가 전원을 다시 연결했다.옆방의 CCTV 화면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화면이 켜지는 순간 그 직원은 컴퓨터 앞에서 일어났다.성대호는 화면이 너무 많아 그 직원의 행동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세심한 육하경은 그의 긴장과 안도감을 놓치지 않았다.“가요. 옆 가게 CCTV도 한번 봅시다.” 도아린은 일어나며 나갈 채비를 했다. 이제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육하경과 성대호도 함께 따라 나왔다.성대호는 육하경에게 담배를 건네며 말했다.“CCTV 조사는 나에게 맡겨. 꼭 찾아줄게.”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말했다.“성 팀장은 자기 차 CCTV는 조사 안 하나요?”“그냥 긁힌 거라 괜찮아요.” 성대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도아린 옆에 다가섰다.“아린 씨 아버지는 양아들과 함께 길에서 아린 씨에게 치욕을 주었는데 아린 씨는 그 사람을 위해 CCTV를 확인해 주는 거예요? 나쁜 사람은 언젠가 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은 당해도 싸요.”“저는 그의 생사에 관심이 없어요. 저는 그저 누군가 뒤에서 음모 꾸미는 게 싫은 것뿐이에요.”도아린은 성대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성대호는 바로 시선을 피하며 육하경을 보았다.“누가 감히 그래요? 여긴 엠파이어 빌딩인데 건후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육하경은 도아
방우진은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A18 가게에서 나왔다. 그는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오토바이에 올라탔고 방향을 돌릴 때 차량 번호판이 드러났다.사흘 뒤 밤, 방우진은 경찰차 소리를 듣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창문을 통해 탈출해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도망쳤지만,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체포당했다.같은 방식으로 창문을 통해 도망치던 하춘녀도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다 방우진이 경찰차에 태워지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도아린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육하경과 배건후는 취조실에서 나오고 있었다.며칠 동안 배건후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큰 계약을 따내며 돈을 버는 일과 도지현의 치료를 챙기느라 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배건후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자백했어요?” 도아린은 육하경을 바라보며 물었다.배건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고 얇은 입술이 굳어졌다.도아린의 태도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육하경은 배건후를 잠시 바라보다가 망설이며 말했다.“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 해요.”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았고 희망이 담긴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건후 씨, 상가는 당신이 손보미에게 줬는데, 왜 방우진이 임대료를 받고 있는지 설명해 줄래요?”배건후의 냉랭한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고 주머니 속에서 손은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그는 방우진이 잡힌 이유가 그 오토바이 번호판 덕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 번호판을 찾아낸 사람이 도아린과 육하경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배건후는 도아린의 팔을 잡고 반쯤 끌고 가듯 그녀를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네가 육하경과 함께 CCTV를 조사했으면, 나한테 먼저 설명을 해야 했던 거 아닌가?”남자의 시선은 칼처럼 날카로웠고 도아린은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아팠지만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당신은 내 말을 절대 믿지 않으면서 무슨 설명을 바라는 거예요? 성대호 씨는 당신 사람이잖아요. 내가 CCTV를 조사하러 갔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도아린은 밀쳐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자 그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악! 도아린, 너 개야?”도아린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여기 경찰서예요!”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고 복도에서 육하경을 보자 다시 입을 닦았다.뒤따라 나온 배건후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대로 그녀를 품에 가둬 버렸다.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육하경이 들을 만큼 충분히 컸다.“집에 가서 얘기하자.”“...”분명 그가 잘못했는데 마치 그녀가 쩔쩔매는 것처럼 상황이 흘러갔다.육하경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대호와 지유가 왔다는 얘기를 들었어.”도아린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예상하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잠시 후, 성대호가 배지유를 부축하고는 나오면서 다정하게 달리고 있었다.배지유는 입을 막고 울다가 육하경을 보자마자 성대호의 품에서 재빨리 벗어났다.성대호는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깨닫고 눈에 자조적인 기색이 스쳤다.“왜 온 거야.” 배건후는 차갑게 물었다.“저는…” 배지유는 도아린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마음속 분노를 억누르려 애썼다.모두 도아린 탓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방우진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왜 아린이를 쳐다봐.” 배건후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배지유는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오빠, 집에 가서 얘기하면 안 돼요?”성대호는 배지유가 꾸짖음을 당할까 봐 함께 가고 싶었지만, 배지유는 육하경 앞에서 그와의 관계를 끊으려 애쓰고 있었다.결국, 성대호는 육하경의 차를 타고 먼저 떠날 수밖에 없었다.배지유는 차에 오르면서 도아린에게 말했다.“새언니, 나 오빠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아린이도 우리 집 식구고 네 새언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을 안고 뒷자리에 탔고 배지유는 못마땅했지만 할 수 없이 천천히 조수석에 앉았다.그들은 주현정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에이트 맨션으로 향했다.배지유는 사실대로 다 말하지 않고 일부만 말했다.그녀는
도아린은 밥을 짓고 고기 요리 하나와 채소 요리 하나를 준비했다.막 앞치마를 벗으려던 참에 배건후와 배지유가 얘기를 마치고 식사실로 들어왔다.식탁 위에 놓인 청경채 찜과 소고기볶음을 보자 배지유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빠는 재산이 수십조인데 도아린은 이렇게 초라한 음식이나 만들다니, 돈을 엄청 많이 빼돌린 게 분명했다.“오빠, 난 엄마랑 같이 먹고 오후에 다시 올게요.”배지유는 가방을 들고 가려고 했다.“다시 올 것 없어. 당분간 특별한 일 없으면 외출하지 마.”배건후는 한마디 당부하고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도아린이 혼자서 밥을 퍼서 먹기 시작하자 배건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봤다.“내 밥은?”“다이어트 식단으로 배달시켰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나 방금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배달음식을 먹으라고?”배건후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도아린은 젓가락으로 식탁을 가리켰다.“내가 만든 밥을 안 먹을 거라면서요?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죠?”“아린아, 적당히 해. 하루라도...”“하루라도 이혼하지 않으면 난 배씨 가문 사모님이겠죠.”도아린은 그의 말을 가로채며 비웃었다.“어느 부잣집 사모님이 삼시 세끼를 직접 차려요? 나중에 에이트 맨션에 정착하면 최고급 요리사를 고용해서 식사를 책임지게 할게요. 괜히 배 대표가 아내를 홀대한다는 소문이 돌면 안 되잖아요.”배건후는 원래 위가 아팠는데 지금은 화가 나서 머리까지 아파 오기 시작했다.도아린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주거나 비위를 맞추지 않았고 말하는 태도는 담담했으며 눈빛에는 안쓰러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그는 손가락을 움츠렸다 펴기를 반복하더니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한두 입 맛보았다...밥을 반 공기쯤 비운 뒤에야 배건후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오늘 반찬은 기름기가 많아 다소 느끼했지만, 경련을 일으키던 위는 한결 편안해졌다.몸이 편안해지자 말투 또한 부드러워졌다.“치료비와 영양제 비용 외에 도유준에게 보상금으로 2억을 더 줄게.”도아린은 씹던 동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며느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육하경의 온화하고 준수한 얼굴은 굳어졌고 마음속으로 도아린에게 미안한 감정이 일었다.그날 저녁, 형제들은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성대호는 담배를 돌렸지만, 아무도 피울 생각이 없어 보이자 스스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예전 고객과 연락이 닿았는데, 그분도 스카이 빌딩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찾았는지 궁금해하더라고.”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성대호는 방우진의 의식주를 해결해 준 후 직접 찾아갔고, 마침내 단서를 찾아냈다. “그래서 뭐래?”육하경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물었다.“스카이 빌딩 측에서는 그들 대표 여자 친구가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더라.”성대호는 이 단서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줄 거라고 확신했다.자료를 빼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비서 아니면 배건후의 비서였기 때문이다.배건후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명문가 자제들 사이에서 늘 술자리가 많았지만, 그의 주량은 좋지 않았다.와인 한 병이면 취할 정도였다.테이블 위의 와인이 반쯤 줄어들자, 육하경은 와인 병을 자기 앞으로 가져가고 배건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약간 취기가 오른 배건후는 소파에 기대앉아 물었다.“증거 있어?”“두 사람은 정표로 나눈 루비 목걸이가 있대”배건후는 눈을 뜨지 않았지만,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았고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성대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배건후에게 주동적으로 해명했다.“그날 아린 씨가 CCTV 확인하러 왔을 때, 난 급한 일이 생겨서 함께 조사하지 못했고 나중에도 너에게 말하는 걸 깜빡했어. 지유는 아직 어려서 장난이 지나쳤던 거야. 애가 이번엔 진짜 반성했어.”성대호가 육하경의 발을 차자 육하경은 맞장구치며 말했다.“내일 나도 고소 취하할게.”술자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배건후는 피로가 몰려와 우정윤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했지만, 뜻밖에도 도아린의 목소리가 들렸다.주현정의 옷 치수를 재고 있던 도아린은 전화를 받아 귀에 댄 채 말했다.
배건후는 약간 취해서 테라스로 나가 술을 깨고 있었다.이전 사업 파트너 두 명이 마침 옆 테라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그를 보고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말을 걸었다.“배 대표님, 엠파이어 빌딩의 상인들을 스카이 빌딩에서 많이 빼앗아 갔다면서요. 아무리 라윤주의 행운이 있다고 해도 관리가 따라가지 못하면 엠파이어를 이길 수 없죠.”“라윤주의 행운이라는 건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손보미가 라윤주와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밝히더니 그 후로 출연 제의가 끊이지 않잖아요. 차라리 그 운을 빌려 엠파이어의 광고 모델로 쓰는 건 어때요?”“그건 자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손보미가 빌린 건 라윤주의 행운이 아니라 우리 배 대표님의 총애지.”둘은 서로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뭔가 내막이 있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클럽 앞 도로를 응시했다. 10시가 넘은 연성은 막 밤 문화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대도시의 번화함 속에서 젊은이들의 열정은 네온사인이 켜지는 순간 쾌락을 즐기거나 혹은 타락하기 시작했다.그는 이 두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눈치 없는 그들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배 대표님과 손보미 씨가 빨리 결혼 날짜 잡으셔야 딴 마음먹은 것들이 헛짓거리 못 할 건데.”“누가 감히 배 대표님을 괴롭혀요? 그 여자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요! 배 대표님께서 손을 더럽히실 필요 없이 제가 쓰레기를 치워 드릴게요.”“어이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왔네요.”두 사람은 테라스 입구에 서 있는 도아린을 보고 비웃었다.배건후는 담배꽁초를 끄고 성큼성큼 도아린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대표님이 저를 부른 건 일부러 망신 주려는 건가요?”“난 아무 말도 안 했어.”배건후는 불쾌해했다.그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아린의 신분을 인정하지도, 그들의 비방을 부인하지도 않았다.침묵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강렬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도아린이 발을 들여놓자마자 배건후는 그녀를 벽으로
그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등을 타고 올라와 능숙하게 후크를 풀고 그녀의 몸을 돌아 가슴을 덮었다.“아!”도아린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건후 씨, 만지지 말아요!”“그럼 누구한테 만져달라고 할 건데?”남자는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민재한테? 민재가 외국에 있을 땐 그렇게 큰 억울함도 참아내더니 이제 돌아오니까 네 인내심도 바닥났나 보지? 민재가 널 안 받아주니까 하경이한테 눈을 돌렸어? 아린아, 넌 꼭 그렇게 비참하게 육씨 가문에 시집가야겠니?”도아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서럽고 억울했다.육민재가 외국에 있을 땐 입도 뻥긋 안 하더니 이제 돌아오니 싸울 때마다 그를 들먹이니 말이다.도대체 누가 육민재의 귀국에 신경 쓰는 건지 모르겠다.징징.배건후의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하자, 도아린은 재빨리 운전석으로 도망치듯 돌아가 차를 몰고 떠났다.그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운전 중에는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까.“왔어.”배건후는 전화를 받으며 도아린을 흘끗 보곤 말했다. “너희도 적당히 마셔. 난 먼저 간다.”전화를 끊자, 배건후는 예상대로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맨션에 도착하자, 배건후는 먼저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침구를 세탁하고 나가려던 안미자는 도아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위층으로 올라가셨는데,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요.”도아린은 신발을 갈아 신으며 무심하게 대꾸했다.“주기적으로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이니 괜찮아요.”안미자는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배건후가 안방에 없다는 사실에 도아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안미자에게 새 침구 세트를 사 오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만약 배건후가 정말 여기서 계속 살 거라면, 매일 서재에서 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에게 손님방을 내주면 안방을 두고 다툴 필요도 없을 것이다.도아린은 잠옷으로 갈아입다가 옷에 밴 담배와 술 냄새를 맡고 욕실로 향
“배건후, 이 나쁜 놈아!”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도아린은 옆에 있던 목욕 스펀지를 집어던졌다.배건후는 여유롭게 스펀지를 받아내더니 욕조 안으로 휙 던져버렸다. 순간 거품이 도아린의 얼굴에 튀어 그녀는 기침을 쏟아냈다.그녀가 얼굴을 닦고 나니 배건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정말 치사하고 유치해. 내가 왜 저 자식이랑 결혼하려고 했던 거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해.’도아린이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소유정에게서 전화가 왔다.“내가 고른 노래, 임진희 선생님께 인정받았어!”“잘됐네! 축하해.”“네가 도전 명단에 넣어준 덕분이지.”소유정 쪽이 좀 시끄러운 걸 보니 밖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도아린은 유진혁이 그녀에게 광어회를 먹을지 도미회를 먹을지 묻는 소리도 들었다.소유정은 그에게 아무거나 시키라고 하고는 말을 이었다.“있잖아. 천사 보육원 폐쇄됐대. 인터넷에 그 뚱보 둘하고 마른 사람 하나가 경찰차에 실려 가는 사진이 돌아다니더라.”도아린은 좀 의외였다.배건후가 뒷배를 봐주고 있으니 설마 신고당한다 해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하경 씨가 신고한 거 아냐?”“아닌 것 같아. 내가 얘기했을 때 그 사람도 꽤 놀라던데.”소유정은 누군가 음식을 먹여주는 듯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로 물었다.“혹시 네가 납치당한 일 때문에 건후 씨가 그들에게 화풀이를 한 건 아닐까?”도아린은 코웃음을 쳤다.그녀는 수건을 한쪽에 던져놓고 화장대 앞에 앉아 크림을 발랐다.“아마 전에 피해를 입었던 여자아이가 신고한 걸 수도 있어. 건후 씨가 말하길, 나를 납치한 사람들은 보육원과는 관련이 없다고 했어.”“그래. 난 건후 씨가 널 사랑하는데 자기 마음도 모르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야.”소유정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너나 잘해. 넌 먹으면서도 꼭 그렇게 사랑받는 티를 내야겠니.”소유정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무슨 소리야~~ 나중에 얘기하자. 내일 만나서 얘기해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