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도 드레스를 돌려주러 온 것도 전혀 놀랍지 않은 표정이었다. ‘도아린은 어떻게 이 드레스를 대여한 사람이 임진희라는 것을 알았을까? 심지어 임진희가 오늘 방송에서 이 드레스를 입는다는 사실도 어떻게 안 거지?’손보미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어쩌면 도아린은 그녀가 알던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동생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도아린이 어떻게 연성의 상류층인 배건후와 결혼하고 주현정의 편애도 받을 수 있는 거지?대체 그녀보다 나은 게 뭐라고?도아린의 생각 밖의 인맥에 손보미는 소름이 끼쳤다.“얼른 가져와.”임진희는 다시금 재촉했다.손보미는 마치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다가갔다. 다행인 건 인플루언서들이 아직 밖에 있다 보니 그녀한테 불리한 장면은 녹화되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들의 입을 막는데 막대한 돈을 쓸 뻔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떨리는 손가락으로 캐리어를 열었다. 치맛자락의 얇은 망사 부분이 살짝 튀어나온 채 테이블 위에 평평하게 펼쳐졌다.임진희는 캐리어 속의 별도 수납공간에서 전용 손전등을 꺼냈다. 손보미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도 그녀에게 이런 도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모두의 기대가 어린 시선 속에서 임진희는 손전등의 빛을 드레스에 비추었다. 순간, 은은한 파란빛의 별빛 무늬가 물결처럼 퍼졌다. 이 드레스의 이름은 별들이 떠받드는 달로, 스커트의 최고급 진주는 안드로메다 성운을 모티프로 한 디자인이었다. 특수 조명에 비춰졌을 때만 얕은 푸른빛이 은은하게 퍼져나왔다. 안드로메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을 의미하기에 이 드레스는 가장 사랑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치는 것이다.모든 이들이 놀라움의 탄성을 쏟아낼 때 손보미는 갑자기 입을 틀어막더니 깜짝 놀란 눈으로 드레스를 바라봤다. 치맛자락의 별빛 무늬 중 한 곳에
도파민을 자극하는 제목 덕분에 라이브 방송에는 순식간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그중 일부는 손보미의 팬들로 방송 시간을 기다리다 바로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손보미는 조금 앞으로 다가갔다.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어 화면은 보이지 않았지만, 현장의 소리는 라이브 방송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도아린 씨, 디자인 비용만 억대에 달하는 드레스를 이렇게 아무렇게나 다뤄질 순 없잖아.”손보미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반문하자 시청자들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연예인들이 행사에 참석할 때 착용하는 옷이나 장신구는 대부분 브랜드에서 협찬해 주며 담당 매니저나 보조는 인수인계할 때 여러 차례 점검해 책임 문제를 피하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다.손보미가 비록 최고 위치에 있진 않았어도 연예계에서 7~8년 지냈다면 그 정도는 알 법했다.누군가 도아린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도아린은 즉시 핸드폰을 꺼내 그날의 녹음을 재생했다.손보미는 속으로 분노했다. 자신이 영상으로 인수인계하는 걸 거절하자 도아린은 몰래 녹음까지 해두었다니 정말 뻔뻔하다고 생각했다.분위기가 급변하며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손보미는 눈물로 가득 찬 눈을 했지만,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억울함이 배어 나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당시 난 병원에서 율이를 돌보고 있었고, 도아린 씨는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않고 당장 검사를 해보라 재촉했어...아현 씨의 신뢰가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거야? 나중에 도아린 씨를 찾으려 했지만 이미 병원을 떠났지...”손보미의 말에 다시 도아린이 가해자로 몰렸다.율이의 생사를 무시하고 검사만 강요했다는 점은 확실히 도아린의 잘못처럼 보였다.게다가 병원을 서둘러 떠난 모습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 보였고 이후 손보미가 사실을 확인하더라도 도아린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발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인수인계 시 영상을 찍는 대신 녹음을 선택한 것도 녹음이 전체 상황을 담고 있는지 아
임진희는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며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이 업계에서 아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현은 과거 문화재인 곤룡포를 복원해 낸 인물이었다.아현의 손을 거친 용 자수는 컴퓨터 작업보다 훨씬 생동감 넘쳤다. 아현이 있었다면 복원도 문제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조수에 불과한 그녀가 큰소리를 치는 것은 너무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도아린 씨, 제발 불난 집에 기름을 붓지 마.”손보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마침내 떨어졌다. 손보미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마침내 흘러내렸다.“조수 일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됐잖아. 뭘 배웠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손보미의 눈물은 도아린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아까의 험악한 분위기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배건후가 도아린을 감싸주고는 있었지만, 연예계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만약 임진희의 눈 밖에 나거나 브랜드 관계자들에게도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다면 앞으로 좋은 광고나 예쁜 옷을 빌리기는 어려울 터였다.“선배님, 이번 일은 제 불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제 무지와 경솔함에 대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 친구가 디자이너 서대은 씨와 아는 사이인데 서대은 씨의 정교한 드레스가 있으니 우선 촬영에 사용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그 후 그 드레스 소유자에게 저를 맡기셔도 괜찮습니다. 어떤 조치를 취하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손보미의 제안은 현재로선 최선의 해결책이었다.임진희 역시 드레스가 없다고 해서 출연 가수들 스타 멘토들 심지어 프로그램 전체 일정을 조정할 수는 없었다. 생방송이기 때문이었다.비록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임진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보미는 서둘러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최고급 바다 진주도 구할 수 있는 그였으니 ‘브랜드의 메인 상품’이라 불리는 드레스 또한 구할 수 있을 것이다.전화가 연결되기 직전 도아린이 침착하게 말했다.“제가 스승님께 배운 실력은 아직 부족하지만, 이 회색 얼룩은 실이 끊어진 게 아니라 오염된 흔적
“민재야, 도와줘...”“한 번 더 말해 봐!”도아린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잡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의 싸늘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건후 씨? 건후 씨가 왜 여기에...”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유리 벽에 도아린을 밀어붙이더니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여긴 내 방이야, 누구이길 바라는데? 응?”도아린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놓으라고요...”“날 건드렸으면 끝까지 버텨야지.”남자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구 더듬었다.“으악...”쿵!도아린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꿈에서 깼다.앞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는데 버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가의 배수구에 빠지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에는 온통 욕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뿐이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3년 전 그날 밤의 사고에 비하면 이번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아린은 그 사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배건후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배씨 가문 사모님이 되어 위기들을 해결하긴 했지만...“죽고 싶어요? 얼른 밖으로 기어 나와요!”누군가의 재촉에 도아린은 이미 망가진 케이크를 버리고 선루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아린은 구급차가 멀지 않은 곳의 아우디 밴 옆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의료진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차 안의 다친 환자를 부축했다. 그때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고 나온 후 구급차에 태웠다.찰나였지만 도아린은 그 남자가 바로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늘 잊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유학 간 그녀를 줄곧 잊지 못했다.도아린은 팔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싸늘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용건만 간단히.”“오늘 집에 들어와
“대표님!”배건후의 차를 알고 있는 경비원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대표님, 아린 씨도 자주 농땡이 치는 건 아니에요. 근데 다른 도우미로 바꾸고 싶다면 소개해드릴게요...”관리사무소 팀장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배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썼다. 게다가 월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재벌 2세를 만날 기회가 많기에 도아린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았다.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는 모두를 압도해 버렸다.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연성의 7월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1분 후,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할 일 다 하고 여기서 수다질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꺼져.”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배건후의 언행은 상업계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관리사무소를 내쫓는다면 관리사무소는 연성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에게 머물렀다.“타.”“난 할 일이 있어서요...”그러자 배건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건후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차 문 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마이바흐가 맨션을 나간 후 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도아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배건후가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이거 무슨 뜻이야?”도아린이 힐끔 쳐다보니 그녀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다.“이혼하고 싶어요.”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힐 듯이 답답해졌다.운전기사 조수현은 당장이라도 도망
전화를 받으면서 도아린을 쳐다보는 배건후의 두 눈에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관리사무소 사람마저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이혼 얘기를 꺼내겠는가?도아린은 배건후가 보는 앞에서 더러운 장갑을 팀장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팀장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노트와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관리사무소 팀장으로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요! 날 내쫓는다고 해도 당신은 에이트 맨션에 못 들어가요. 배건후 씨는 여우같이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당신도 여우 같긴 한데 나이가 너무 많아요!”어차피 곧 떠날 거라 참고 싶지 않았고 이참에 배건후를 한 방 먹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도아린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따라 마셨다.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무언가가 현관의 거치대에 놓여있었다.짐 정리를 다 마치고 나와서야 거치대에 놓여있는 물건이 그녀의 휴대전화라는 걸 알았다.‘내가 휴대전화를 건후 씨 차에 떨어뜨려서 다시 들어온 건가?’이번에 도아린은 약삭빠르게 차고에 있던 카이엔을 몰고 나갔다.카이엔은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배건후가 준 예물 중 하나였다. 평소 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았고 또 연성에 차가 막혀 계속 차고에 가만히 세워두기만 했다.배건후의 재산을 나눠 가지진 못하더라도 이 차는 혼전 재산이라 그녀의 것이었다. 무뚝뚝하고 매정한 남자를 곧 떠날 거란 생각만 하면 도아린은 기분이 너무 좋아 액셀을 미친 듯이 밟았다.운전하는 중에 절친 소유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보고 걱정돼서 전화한 것이었다. 도아린이 힘들어할까 봐 기분도 풀 겸 술 먹으러 가자고 하자 도아린은 모든 걸 정리한 다음에 다시 축하하자면서 거절했다.아파트 청소를 마치긴 했지만 도아린은 처음 자는 침대에 눕기 전에 침구청소기로 청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청소기를 돌리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갑자기 들어왔다.“문 한참이나 두드렸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문 열고 들어왔어요.”도
“걔가 작정하고 접근하지만 않았어도 오빠는 걔랑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배지유가 화를 내며 말했다.“엄마가 아무리 좋은 한약을 먹여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오빠는 그 여자랑 애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데.”손을 닦으면서 나오던 도아린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다시 뒷걸음질 쳤다.“오빠, 난 친구들 만나도 오빠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못 하겠어요. 저런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망신이에요. 보미 언니 이젠 톱스타가 됐으니까 엄마도 더는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말만 하면 내가 엄마한테 말해줄게요.”“보미 지금 한창 일할 때야...”배건후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이혼을 동의하지 않은 건 손보미가 내연녀라는 욕을 먹을까 봐서였다. 배건후는 언제든지 항상 손보미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도아린은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의 존엄 따위는 이미 배건후에게 짓밟혀서 가루가 되고 말았다.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체면마저 모두 잃을 것 같았다.“으악!”차를 내오던 도우미가 도아린과 부딪히고 말았다. 도우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사모님, 손이...”“괜찮아요.”도아린의 손이 뜨거운 물에 데어 시뻘겋게 됐다.그때 배건후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주방으로 끌고 가서 찬물로 헹궜다.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던 배건후는 도아린이 데고도 찍소리도 하지 않자 더 답답하고 화가 났다.“내가 널 터치하지 않는다는 걸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어?”“...”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사실 그녀는 말한 적이 없었다. 배지유가 에이트 맨션에 갔을 때마다 배건후가 없는 걸 보고 배건후가 도아린과 함께 살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것이었다.거의 사실이나 다름없었기에 도아린은 아니라고 설명하지도 않았다.“내 말이 틀렸나요?”“난 너한테 관심이 없어.”“관심이 없으면서 왜 이혼 안 하는데요?”아무렇지 않은 도아린의 태도에 배건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담배를 꽉 쥐어 손등에 핏줄이 다 튀어
다들 잠이 든 시간이라 복도부터 문 앞까지 어슴푸레한 등이 두 개만 켜져 있었다.배건후가 현관 앞으로 나온 그때 거실 불이 갑자기 켜졌다.“이 늦은 밤에 어딜 가?”주현정이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무슨 급한 일이길래 아린이까지 버리고 가?”“...”배건후는 불편한 몸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주현정은 주부로 살아왔어도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회사 일로 핑계를 댔더라면 말리진 않았을 것이다.“그게...”배건후가 얘기하려는데 도아린이 다급하게 내려왔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도아린은 하도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내려오면서 머리를 매다가 주현정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늦추었다.“어머님, 제 동생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서 오라고 해서요.”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주현정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얼른 가봐. 건후야, 운전 조심하고.”도아린은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그녀가 까발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얼굴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배건후가 망신당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망신당하기 싫었다.“얼른 가.”주현정이 문 앞까지 나온 바람에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배건후의 차에 탔다.“건후 씨랑 같이 갈 생각 없으니까 저 앞에서 내려주면 돼요.”“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친동생을 저주해?”배건후는 그녀가 한밤중에 집을 나오려고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도 피곤했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의 남동생에게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배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도아린은 택시를 잡기 쉬운 곳에서 내린 후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제 동생 어떤가요?”“환자분 의식 없이 3년이나 누워있어서 이젠 몸의 장기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도아린은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