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의 결과는 더 큰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가두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싼 채 있는 힘껏 격렬하게 키스했다. 불과 몇 초 만에 온다연은 온몸에 힘이 풀렸다. 유강후가 서랍을 여는 모습을 보 온다연은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보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뭐지?’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왜 난 모르고 있었지?’ 유강후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망치려고 했지만 1초 만에 다시 잡혀왔다. 그는 온다연을 품에 가둔 채 벌주듯이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망치려고 했어? 정말?” 이미 온몸에 삭신이 쑤신 온다연은 유강후 손에 들린 박스를 보고 벌벌 떨었다. “왜... 왜 이렇게 많아요?” 유강후는 태연하게 답했다. “한꺼번에 다 쓸 생각은 아니야. 오늘은 한 박스만 쓸 거야.”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박스 외관에 ‘6개입’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온다연은 숫자를 본 순간 막막함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 박스... 절대 안 돼요...” 유강후는 그녀의 가냘픈 목을 가볍게 깨물고선 한 손으로 가는 허리를 꼬집었다. “말 잘 들으면 살살하게. 네가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면 하나쯤은 버려도 돼.” 온다연은 곧바로 울부짖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싫어요...” 한 박스를 다 쓰게 된다면 아마 며칠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강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려 욕실로 향했다. “말 안 들으니까 전부 다 써야지.” 욕실의 욕조에는 이미 따뜻한 물이 준비되었다. 따뜻하면서도 므흣한 분위기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온다연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날만을 기다려온 유강후에게서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 곧 욕실은 애원하는 온다연의 목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 문이 열렸다. 유강후가 온다연을 품에 안고 나온 찰나에 마침 장화연이 뜨거운 우유를 주러 들어왔다. 장화연은 온다연을 힐끗 보고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세히 살폈다.야들야들한 손목에 푹 파인 자국이 두 개 생겼고, 깊은 곳은 이미 피부가 벗겨졌다.흰 피부 때문에 보기가 더 흉했다.‘별로 힘을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피부가 벗겨졌지?’유강후가 긴장하며 자세히 살피려 하자, 온다연이 손을 움츠리며 울먹였다.“저리 가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울어서 눈이 빨개졌지만 피부는 여전히 희고 보드라워 순진무구하고 만만해 보였다.유강후는 눈빛이 사악해졌고, 또 그녀를 안고 한바탕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손목 피부가 까지고 울어서 눈이 빨개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안쓰러웠다.유강후는 억지로 그녀를 안아 다리 위에 올려놓고 그녀의 머리에 키스하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다음에는 살살 할게. 뚝, 그만 울어.”그는 말하면서 그녀의 잠옷 단추를 벗겼다.“좀 보자, 다쳤으면 약을 발라야 해.”온다연은 급히 옷깃을 붙잡으며 풀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유강후는 그녀를 달래면서 억지로 단추를 풀었다.정말 다쳐서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렇게 쉽게 다쳐?”유강후가 자기 몸을 지켜보자, 그녀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아저씨가 너무 세게 해서 그렇죠.”그가 눈이 빨개져서 날뛰는 모습은 정말 무서웠다.유강후는 옷을 입혀준 후 지난번에 의사가 처방한 연고를 찾아 조금씩 발라주었다.온다연은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가 꽉 잡고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붉히며 그가 약을 바르게 내버려두었다.아직 세 개가 남아있고, 그가 꼭 한 통을 다 써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 그녀는 덜컥 겁이 나서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이만하면 안 돼요?”유강후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얘가 나를 뭐로 보고? 내가 그렇게 인정이 없는 사람인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내가 계속한다는 건가? 아니면 이 일 자체를 거부하는 건가? 그건 안 된다.’게다가 처음에는 그녀도 분명
유강후는 부드러운 캐시미어 니트를 가져와 갈아입히고 머리를 정리해 준 후에야 그녀를 안고 식사하러 나갔다.장화연이 꽃게 요리를 만들었다.온다연은 조금 먹어보니 맛있어서 스스로 게살을 바르다가 손이 찔렸다.그녀의 가늘고 흰 손가락에서 작은 핏방울이 흘러나왔다.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직접 가위와 도구를 챙겨와 게살과 게알을 조금씩 발라 그녀의 앞접시에 올려주었다.하지만 그녀가 두 개째 먹으려 하자, 유강후는 동작을 멈추었다.“게는 성질이 차서 한 개만 먹어야 해. 먹고 싶으면 여름에 실컷 먹자. 지금은 안 돼.”그는 장화연을 돌아다보며 말했다.“장 집사가 점점 일을 못하네. 출산한 지 1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앞으로 이렇게 성질이 찬 음식은 상에 올리지 마.”장화연은 온다연의 목에 생긴 빨간 자국을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출산한 지 1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아시면 됐어요.”유강후는 안색이 확 변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이권이 들어오더니 나지막이 보고했다.“주희가 오늘 아침에 깨어났는데, 온다연 씨를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떼를 쓰고 있어요. 그 바람에 상처가 벌어지면서 또 출혈이...”“안 만나.”유강후는 안색이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해. 옥상에 다시 올라가서 뛰어내리면 되겠네.”하지만 온다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만날게요.”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강경한 말투로 말했다.“안 돼.”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막 깨어났는데, 또 내장 출혈이 생기면 힘들어요. 만날게요.”그녀는 의자를 밀어내고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녀를 와락 끌어당겼고 눈에 분노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말했잖아. 안 된다고.”온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발끝을 쳐들고 유강후의 아래턱에 뽀뽀하고는 그의 팔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주한의 동생이잖아요. 주한이
침대에 한 달 동안 누워있어서 그런지, 그는 많이 야위어 무척 허약해 보였다.하지만 눈은 주한과 좀 더 비슷해진 것 같았다.온다연이 온 것을 보고, 그는 애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가 나를 만나주지 않을 줄 알았어요.”온다연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가슴이 아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왜 너를 만나지 않겠어? 몸조리 잘해. 몸이 중요하잖아. 완쾌하면 그때 만나도 늦지 않아.”주희가 자조 섞인 말투로 나지막이 말했다.“완쾌하면 오지 않을 거잖아요.”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희야, 이러지 마. 너 이제 유명인이잖아. 팬도 많고. 팬들이 네가 이러는 걸 알면 속상할 거야.”주희의 눈에 대수롭지 않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상관없어요. 스타가 된 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예요. 그들한테 좋아해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이때 들어온 유강후는 주희를 보자, 눈에 짙은 독기와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손바닥에 땀이 났네. 옷을 벗어. 여기 난방이 너무 잘 되네.”그는 말하면서 직접 그녀의 코트 지퍼를 열었다.옷이 너무 두꺼워서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덥다고 느꼈다.그래서 그녀는 순순히 유강후의 말대로 코트를 벗었다.유강후는 코트를 비서에게 건넨 후 또 그녀의 스카프도 풀었다.주희는 그녀의 목을 지켜보며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음침해지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잠시 후, 그는 갑자기 격렬하게 기침을 하더니 피를 토했다.깜짝 놀란 의사와 간호사가 얼른 다가와 검사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온다연은 걱정됐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 자리에 서서 보고만 있었다.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의사와 간호사에게 둘러싸인 주희를 힐끗 보고는 온다연에게 스카프를 다시 매주며 나지막이 말했다.“스카프를 매는 게 좋겠어. 바람 맞으면 안 되니까.”온다연은 주희 생각만 하며 조바심을 쳤다.“왜 갑자기 피를 토하죠? 다쳤던 곳에 문제가 생긴
추운 날인데 옷을 얇게 입은 것을 보니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다.항상 풀메이크업을 하던 얼굴도 민낯 그대로라 어려 보이고 이목구비가 깨끗하면서도 화사해 보였다.하지만 얼굴이 눈물범벅인 것을 보니 조금 전에 울었던 것 같다.그녀는 유강후를 보고 황급한 기색을 띤 채 걸음을 멈추었다.“유 대표님...”유강후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들어가 봐요.”남하윤은 눈물을 닦더니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 유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아버지가 저를 풀어주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오늘에야 주희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어요...”“주희는 지금 좀 어때요?”유강후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을 말하듯 극히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4층에서 뛰어내려 장기를 다쳤는데, 응급 수술을 한 후에 한 달 동안 누워 있다가 오늘에야 깨어났어요.”남하윤은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졌다.“혹시 불구가 됐나요?”“아니요. 게다가 예전과 똑같이 성질이 더러워요. 들어가 보면 알아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하윤은 극히 복잡한 눈빛으로 유강후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온다연을 쳐다보았다.이를 발견한 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남하윤 씨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주희가 남하윤 씨랑 잘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이 말을 들은 유강후가 코웃음을 쳤다.“남씨 집안 아가씨의 눈에 든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데. 저 자식은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남의 것을 넘보고 있으니 좋은 결말이 있을 수 없어.”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괴롭히지 마세요.”“나이가 어리다고? 나는 저 나이일 때 미래그룹 경영을 맡았어. 그리고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심리적 연령이 실제보다 높아. 연하남이 순진한 척, 거친 척하는 것은 다 수단일 뿐이야.”온다연은 잠자코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어쨌든 앞으로 자주 만나지 않을 테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더니 입을 다물었다.위층에 올라가니
온다연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그동안의 불안과 걱정을 한순간에 보상받은 느낌이랄까. 그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조산했을 때 20주밖에 되지 않아 십중팔구 살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기적이 있을 줄이야.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기의 작은 손을 살짝 건드렸다.아기는 잠들어 있었지만 손을 꼼지락거리며 반응을 보였고 가냘프게 옹알거렸다.그 부드러운 촉감이 온다연에게는 꿈만 같았다.그녀가 이렇게 자기 아이를 만진 것은 처음이다.이전에는 문밖에 멀찍이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이제 그녀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도 있다.아직 안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살짝 만지고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굉장히 만족했다.그녀는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탐욕스럽게 훑어보았고, 그 진지한 모습은 마치 아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것 같았다.이제 이 세상에서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영원히 그녀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그녀를 버리지 않을 아이가 생겼다.그녀는 아이의 성장 과정을 함께할 것이다. 이렇게 조그마한 아기에서 점차 소년이 되고, 소년에서 아빠처럼 키 크고 듬직한 남자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것이다.그녀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동요를 불러주며 눈이 올 때는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여름의 밤바람 속에서 함께 잠자리를 잡을 것이다.꽃이 만발한 산비탈에 가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고상한 음악 연주를 듣기도 하며 함께 긴 거리를 거닐며 인간 세상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그녀의 모든 희망과 사랑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아이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그녀가 눈시울을 붉히자, 유강후는 마음이 아파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울지도 마. 이제는 정상적인 아기와 똑같아. 며칠 더 지나면 안을 수도 있어. 그때 실컷 안아주면 돼.”온다연은 여전히 뚫어져라 아기를 들여다보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너무 기뻐서 눈물이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보더니 말했다.“여기서 아기를 좀 더 보고 있어. 전화 좀 받고 올게.”아기에게 정신이 팔린 온다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그래요.”방에서 나온 유강후는 직접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남하윤은 주희의 병실에 없었다.주희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기대어 앉아 사람을 갈기갈기 찢으려는 듯이 날이 선 눈빛으로 유강후를 쏘아보았다.유강후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키가 큰 데다 카리스마가 있어 같은 높이에서 마주 보아도 상대방을 작아지게 한다.그런 그가 이렇게 내려다보면 상대방에게 한없이 비천한 느낌을 준다.주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강후가 그렇게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비천하고 어두운 생각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그는 지금처럼 자신의 출신과 무능함이 싫었던 적은 없다.하지만 유강후에게 이런 생각을 들키면 안 된다.그는 일부러 경멸의 눈빛을 지었다.“당신은 나를 구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유강후, 나는 당신을 누나 곁에 두지 않을 거야.”유강후는 개미 한 마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떻게 막을 건데?”“스타인 너의 인지도로? 아니면 남씨 집안 아가씨의 재력으로?”그는 말하면서 손가락에 낀 반지를 문지르더니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쉬워.”“그리고 남씨 집안은 절대 너를 위해 나와 맞서지 않을 거야.”“주희야, 좀 똑똑하게 굴어. 네 형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다연의 마음을 잘 이용하고 나랑 얘기할 때 예의를 갖추면 너한테 많은 득이 될 거야.”“스타가 아니라 엔터 회사를 차리는 것도 문제 되지 않아.”그는 거들먹거리면서 주희를 힐끗 보았다.경멸에 찬 그 모습은 더없이 모욕적이었다.“안타깝군. 온다연의 관심을 끌려고 투신자살할 생각을 하다니.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아무도 너를 존중하지 않아.”주희는 화가 나서 이마에 핏줄이 섰지만 억지로 분노를 참으로 코웃음을 쳤다.“다른 사람의 존중 따위는
“3월 25일까지 한 달 남짓 남았는데, 그날이 정말 기대되네.”“그날이 되면 누나는 빨간색 스카프를 매고 형을 그리워할 거야.”“그 스카프는 누나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형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인데, 누나는 정말 좋아했어. 그때는 아까워 매지 않았지만 형이 죽은 후 매년 그날이 되면 그 스카프를 매고 형을 추모했어.”유강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무척 기분 좋아진 주희는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누나가 입은 흰색 옷들은 당신이 골라준 거지? 불쌍하네. 이렇게 오래됐는데 누나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도 몰라. 누나는 빨간색을 좋아하고, 해바라기색도 좋아해...”유강후는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보면서 속에서 분노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온다연이 해바라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그녀가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하지만 주희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온다연은 확실히 빨간색 스카프를 가지고 있다.버들개지가 흩날리던 어느 날 저녁, 본가의 대문 밖에 온다연이 검은색 옷차림으로 서 있었는데, 평소에 본 적이 없는 빨간색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그때는 봄인데도 날씨가 추워서 스카프를 매는 게 정상이었다.하지만 그녀가 그 스카프를 맸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그날 저녁, 유강후가 차를 몰고 그녀의 곁을 지나갈 때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이 바람에 휘날렸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다.석양 아래서 먹물 같은 머리카락과 검은색 옷차림 때문인지, 피부가 눈보다 더 흰 것 같았고 입술은 짙은 붉은색을 띠었다. 버들개지가 눈송이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슬픈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그녀는 조금 전에 울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얌전히 거기 서서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당시 가슴이 쿵 하는 느낌이었다.바로 그 순간, 유강후는 인내심을 잃고 앞당겨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