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눈을 반짝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왜?”온다연은 극도로 내성적인 사람이라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직설적으로 누군가가 싫다며 말하는 건 유강후도 처음 봤다.더군다나 온다연과 임청하 사이에 그 어떤 교집합도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니 온다연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임청하에게 적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온다연이 적대감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유강후 때문 일 것이다.유강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전에 알던 사이야?”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니요. 그냥 싫어요.”“싫어하는 이유는 뭐야? 나한테 접근하려는 것 같아서?”온다연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방에 들아온 후, 유강후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물어볼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유강후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말해봐.”사실 온다연이 어떤 질문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갔다.닫혀 있는 그녀의 마음을 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거듭되는 고난 속에서 온다연의 마음에는 족쇄가 겹겹이 채워져 있었는데 그걸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주한이다.이제 주한이 없으니 온다연은 또다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겹겹이 방어기제를 쌓았다.그동안에 겪었던 일만큼 하고 싶었던 말도 많았을 텐데 이제야 조금씩 솔직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다.유강후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른다.온다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죄책감 때문에 미안해서 이러는 거죠? 그걸 갚으려고 절 잡아두는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 시트를 붙잡고 차마 유강후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정적이 흘렀다.유강후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온다연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심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죄책감이라는 단어에 꽂혀 무작정 본인의 생각을 단정 지으니 답답하기도 했다.온다연은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눈을 내리깔고 다시 말을 이었다.“정말 그 이유라면 괜찮으니까 이만 놓아줘요.”유강후는 그녀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물어볼 수밖에 없다.“예전에...”유강후는 그녀가 나은별에 대해 물어보려는 줄 알고 재빨리 답했다.“말했듯이 나은별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좋아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과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아요. 만약 죄책감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면 절대 안 할 거예요.”“만에 하나 우리가 결혼하게 되어도 회장님을 포함한 유씨 가문 그 어떤 가족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아이는 온씨 성으로 짓는 게 어때? 강씨도 괜찮고.”온다연은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온씨는 안 좋아요.”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도 모자라 오랜 시간 동안 괴롭힘에 시달렸으니 이제는 온씨 성마저도 불길하게 느껴졌다.“강씨로 해요. 아이 이름은 아저씨가 지었어요?”유강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듯 멈칫했다.“아직... 외할아버지한테 여쭤보려고. 우리 엄마가 외동딸이시거든. 그러니까 이 아이가 강씨 가문의 유일한 후손인거지. 이름 짓는 것조차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실 거야.”유강후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질 비범한 운명이다.그러나 지금은...유강후는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했다.“아직 무균실에 몇 달은 더 있어야 하니까 나중에 아이 나오면 다시 얘기하자.”아이에 대해 말하자 온다연의 눈빛은 곧바로 부드러워졌다.“딱 한 번 보긴 했지만 정말 괜찮을까요? 너무 작아서 무서워요...”유강후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많이 좋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그웬을 포함한 모든 의사, 간호사들과 비밀유지 계약서를 체결했다. 그들에게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금액으로 입막음을 했으니 만에 하나 이 비밀이 누설된다면 그들의 목숨이 날아가는 거나 다름없다.그러기에 아이의 일이 새어나갈까 봐 걱정하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건 비슷한 개
유강후의 반응을 보니 믿지 않는 게 분명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고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인데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유강후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온다연의 부드러운 입술을 쓰다듬어며 물었다. “그 사람이랑 몇 번이나 입맞췄어?” 온다연은 그의 엄지손가락을 잡으며 말했다. “한 번도 없다고 하면 안 믿을 거죠? 아무튼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주한이는 특별한 사람이거든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그 속에 담겨있는 무언의 슬픔이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목숨 걸고 저랑 주희를 지켜준 사람이기도 하고요.” 이 세상에서 주한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게 유강후라 해도 불가능하다. 유강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다른데?” 사진 속의 주한은 확실히 청초하고 깔끔하게 잘생겼다. 하지만 외모만으로 봤을 때 유강후는 본인이 주한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온다연이 주장하는 차이점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온다연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무의식적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쥔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달라요. 이제 그만 물어봐요... 정말 신경 쓰이는 거면 날 이렇게 붙잡아둘 필요가 없잖아요. 차라리 그냥...” 유강후는 입술로 그녀의 말을 막고선 벌을 주듯 세게 깨물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런데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 그 버릇 좀 고쳐.” 온다연은 겉보기에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고집이 엄청 세서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은 칼로 입을 비틀어도 절대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유강후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호소했다. “아파요. 살살해요.” 유강후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또 함부로 말하면 다음에는 이렇게 안 넘어간다?” 그 말을 끝으로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입맞춤했다. 이어진 키스는 유강후처럼 격렬했고 온다연이 숨을
유강후는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가장 좋아해서 참지 못하고 그녀를 꼭 붙들어 찐하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말했다. “계약 세 가지 맺자고 했지? 남은 두 가지는?” 온다연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리고 저도 제 친구가 있는데 제가 친구들을 사귀는 걸 막지 말아 줘요.”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래.”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천만 가지 대책들이 떠올랐다. 각각의 계획이 그녀를 벗어날 수 없는 덫으로 가둘 생각이었다. “세 번째는 뭐지?” 온다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기가 좀 더 괜찮아지면 저도 정상적으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마치 유강후가 동의하지 않을까 두려운 듯 온다연은 얼른 덧붙였다. “만약 아저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기를 데리고 아저씨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갈 거예요.”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 거 허락할게.” 그에게는 친구 사귀는 문제보다 일이든 학교든 훨씬 통제하기 쉬운 일이었다. 특히나 임혜린 같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친구는 온다연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할 생각이었다. 온다연은 그가 너무 쉽게 동의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동의한다고요? 그렇게 빨리요?”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용이 있어? 어차피 몰래 할 거잖아.” 온다연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꼬며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다면 됐어요.” 그때 이권이 밖에서 들어왔다. “셋째 도련님, 주희 씨의 상태가 좀 나아졌습니다. 헌혈자도 몇 명 도착해서 이제 온다연 씨도 안심하셔도 됩니다. 또한, 혈액 전문의도 국내에 도착했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 정도면 경원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주희 씨도 운이 참 좋네요. 이 정도로도 살아남다니!” 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가슴에 걸려 있던 돌이 한순간에 내려앉았다.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안심됐어?” 온다연은 침대에 무릎
이날 밤 온다연은 깊이 잠들어 있어 유강후가 언제 떠났는지도 몰랐다. 동이 트기 직전,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병원 옥상에 요란하게 착륙했다. 유강후는 인큐베이터를 직접 안고 급히 헬기에서 내려 미리 대기하던 그웬에게 상자를 건넸다. 그웬을 제외하고는 병원의 모든 인원이 회의에 불려간 상태였기 때문에 작은 아기가 언제 무균실에 들어왔고 언제 구조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그웬뿐이었다. 사무실에서 로운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고 유강후를 보자마자 키가 190cm에 달하는 큰 체격의 로운이 즉시 무릎을 꿇었다. “셋째 도련님, 우리 어린 주인님은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유강후는 그를 일으켜 앉히고 상황을 물었다. 새벽에 유강후는 갑작스레 전화를 받았다. 양준구에게 사고가 발생하여 공항으로 사람을 맞이하러 와달라는 것이었다. 양준구는 유강후의 생사를 함께한 친구이자 동남아시아 최대 부동산 사업자이자 조직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이 전화가 오자마자 유강후는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것은 아기 인큐베이터를 품에 안은 양준구의 측근 로운뿐이었다. 로운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희 주인님께서 사촌 동생 양시안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부인 하이연 씨는 독을 먹고 위험에 처했으며 주인님께서는 그저 어린 주인님이라도 구하기 위해 아기를 조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어린 주인님을 당신께 맡기고 부인 곁으로 가셨습니다...” 로운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이어 말했다. “지금 양 씨 가문은 양시안이 장악했습니다. 그 자는 원래 주인님이 키운 사람이었는데 결국 악랄한 늑대를 키운 셈이 되었습니다. 저는 구 어르신을 대신해 반드시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그는 열쇠 모양의 옥패를 꺼내어 두 손으로 정중히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구 어르신과 부인께서 어린 주인님에게 남긴 유품입니다. 이는 양 씨 가문의 삼대에 걸친 재산이 보관된 금고의 열쇠이니 어린 주인님이 성인이 되면 꼭 전해주십시오.” “구 어르신께서 말
잠시 후 소형 헬리콥터 한 대가 병원 옥상에서 빠르게 이륙해 하늘로 사라졌다. 이곳은 유강후의 개인 병원이라 헬리콥터의 이착륙이 잦았기에 이번 이륙도 특별한 주목을 끌지 않았다. 헬리콥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이권이 말했다. “셋째 도련님, 그 조직은 십 년간 심혈을 기울여 쌓아 오신 것입니다. 그 가치는 말로 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유강후는 먼 하늘을 보며 말했다. “양준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준구가 이토록 나를 신뢰하며 아기를 맡겼으니 계정 하나쯤은 별것 아니야.” 이권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유강후가 가로막았다. “다연이는 깼어?” 이권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직 아닙니다. 장 집사가 막 만든 아침 식사를 가져왔으니 조금 드시죠.”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쪽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온다연이 침대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있는 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유강후를 보자 약간 더 정신이 들었는지 먼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어디 갔었어요?”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좀 일 있어서 회사에 갔었어. 왜? 나 보고 싶었어?” 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거든요.” 그녀는 유강후의 옷자락을 잡고 불안한 듯 물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 줘요. 아기 지금 어떻게 된 거예요?” 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많이 좋아졌어. 아까 가서 그웬 박사와 얘기했는데 아기도 조금 더 자랐고 상태도 훨씬 안정됐대.” 온다연은 금세 기운을 차리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문밖에서라도 아기를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요?” 유강후가 대답이 없자 급해져서 말했다. “한 번이면 돼요! 딱 한 번만!” 하지만 의외로 유강후는 바로 동의했다. 온다연은 믿을 수 없었다. “진짜요?”
유강후는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숙여 붉어진 그녀의 귀 끝을 가볍게 깨물며 속삭였다. “더한 것도 이미 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그는 그녀를 들어 올려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정성껏 닦아주며 말했다. “그리고 네가 내 아기를 낳아주었으니 내가 직접 돌봐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아기가 언급되자 온다연의 눈에 작은 반짝임이 더해졌다. 그녀는 기쁜 듯이 말했다. “빨리 먹고 우리 가서 문밖에서라도 아기를 잠깐 봐요.” 그녀가 아기를 기대하는 모습이 어딘가 가슴 아팠던 유강후는 손을 그녀의 부드러운 뺨에 올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연아, 앞으로도 우리에겐 아기가 더 생길 거야.” 온다연은 그의 말이 어딘가 이상하게 들려 긴장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죠?” 유강후는 그녀를 바라봤고 눈빛에는 슬픔이 담겨있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나중에 아기가 더 많이 생길 거라고. 너도 아기를 무척 좋아하지 않아?”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아기들은 너무 귀여워요. 정말 착하고 사랑스러워요.” 유강후는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두 명 더 낳을까?” 그의 따뜻한 숨결이 온다연의 목덜미를 간지럽히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세 명은 너무 많지 않나요?” 유강후는 부드럽게 그녀를 유혹하듯 말했다. “아니야. 내 아기는 네가 낳아줘야만 해. 그러니까 몸을 잘 회복하고 우리 함께 노력하자.” 온다연은 얼굴이 더욱 빨개졌고 목까지 빨개졌으며 부끄러운 듯 작게 말했다. “제발 그만 말해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가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덮으며 깊은 키스를 나눴다. 공간 안은 속삭임과 그의 낮고 부드러운 유혹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한참 후 유강후의 품에 안겨 나온 온다연은 입술이 빨갛게 부풀고 한쪽이 살짝 트여 있었다. 죽을 한 입 마셨지만 아픈 듯이
그러면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병실 밖으로 나섰다. 온다연은 문 앞에서 간호사가 입을 가리고 몰래 웃고 있는 걸 보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몸부림쳤다. “내려줘요! 저 혼자 걸을 거예요!” 그러나 유강후는 온다연을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팔에 힘을 더 주며 차가운 눈길로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웃기나?” 간호사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저었다. 유강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얘기 소문내는 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들리면 다들 일하지 말고 나가요!” 간호사는 겁에 질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온다연은 작게 속삭이며 말했다. “너무 무섭게 굴어요!” 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내가 아무에게나 이렇게 참을성이 많을 거라 생각해?” 그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얼마 안 가 아이가 있는 병실 앞에 도착했다. 이번엔 그웬의 표정이 이전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그는 다소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온 아가씨, 아이 상태가 많이 나아졌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온다연을 바라보는 눈에 깊은 동정과 연민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유강후가 경고하는 눈빛을 보내자 다시 냉정을 찾았다. “오늘은 여기서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지만 안에 들어가지는 마세요. 아직 인큐베이터를 떠나기엔 이릅니다.” 온다연은 문에 기대어 거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인큐베이터 안을 들여다보았다. 인큐베이터가 커진 듯했고 특수 제작된 투명 덮개를 통해 안의 작은 존재가 제법 뚜렷하게 보였다. 정말 조금은 커진 것 같았다. 아직 빨갛고 몸에 여러 관이 꽂혀 있어서 구체적인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온다연은 그저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며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득 차 있었다. 온다연은 두려움과 긴장감에 휩싸였다. 두 번이나 꾼 악몽이 그녀를 절망의 끝으로 몰아넣었고 그동안 이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현대 의학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무려 임산부였다.게다가 그 남자의 품에 안겨 가냘픈 목소리로 아저씨를 찾기도 했다.남자는 그녀가 숨이 딸릴 정도로 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손을 쓰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그 꿈은 꽤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린 폭우가 쉼 없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릴 때야 온다연은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본 광경은 키 큰 남자가 창가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었다.온다연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사람을 부르려던 찰나 그 남자가 다급히 제지했다.“부르지 말아요, 저예요!”낮은 목소리는 익숙했다.온다연은 잠시 멈칫한 끝에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다름 아닌 꿈속의 그 남자였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것인지 의문이 가득하던 찰나 온다연의 인기척을 느낀 경호원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경호원들은 여전히 걱정되어 물었다.“아가씨, 천둥소리에 놀라셨습니까? 같이 있어 줄 사람이라도 필요하십니까?”“필요 없다니까요!”“아가씨,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거셉니다. 문을 열어주시면 창문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저희가 검사해드리겠습니다!”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필요 없다고 말했잖아요. 귀찮으니까 더 말 시키지 말아요!”온다연이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경호원들도 잠잠해졌다.유강후의 옷과 바지는 모두 반쯤 젖어있었고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강후의 기세만큼은 가려지지 않았다.게다가 옷이 젖은 탓에 거의 보일락 말락 한 그의 탄탄한 몸매에 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졌다.“강 대표님이 왜 창문으로 들어오는 거죠?”유강후는 창문을 닫고 몸을 돌려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깼어요?”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가 창문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여긴 2층이라고요!”유강후는 여
남자는 안윤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채며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평범한 사람이라고?”“안 아가씨, 10년 전 금우역에서 불을 지른 일을 기억하나? 내 얼굴 좀 봐. 이 흉터, 네놈들이 지른 불 때문에 생긴 거야!”남자의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우리 부모님은 그저 평범한 농민이었어.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나를 잘 키워 공부를 시켜 성공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부모였어.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너희는 지나가다가 웃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분들을 악의 화신이라 규정했지! 그러고는 우리를 집 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어. 우리 부모님은 필사적으로 날 품에 안으셨고, 덕분에 나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어. 하지만 부모님은 그만 온몸이 새까맣게 타버리고 말았지.”“그분들이 무슨 죄가 있었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살아갈 자격조차 없었다는 거야? 몇 년 동안 너희를 찾아 헤맸어. 그렇게 한 명씩 제거했지. 너희가 세상을 정화한다고? 난 너희 같은 악마들을 정화할 거다!”남자는 안윤희의 목을 세게 움켜쥐었고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안윤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너희들 정말 잘 숨어 있더구나. 한 놈을 찾는 데 꼬박 반년에서 일 년이 걸렸어. 그런데 오늘은 누가 너를 직접 내게 데려다주고 돈까지 준 거야.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줄이야!”그는 안윤희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지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형님들, 배 위에서 고기 구경 못한 지 오래됐지? 오늘 마음껏 즐겨보자!”“저기요, 이 아가씨는 신국 안씨 가문의 큰 아가씨입니다.”“걱정하지 마. 방금 뉴스에서 이 아가씨가 이미 죽었다고 나왔어. 심지어 시신도 확인됐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이 여자는 그저 안씨 가문의 아가씨를 닮은 여자일 뿐이야.”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안윤희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안 돼! 나는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너희가 날 건드리면 우리 이모부가
유강후는 진시현의 볼록하게 나온 배를 한 번 바라보며 웃음을 띠고 말했다.“얼마나 됐어?”진시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거의 다섯 달 됐어요.”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움직이기도 해요.”유강후의 눈에 잠시 어두운 빛이 스쳤다. 예전에 자신의 아이도 딱 이 정도였을 때...유강후는 곧 미소를 짓고 로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로운, 대단하네. 이제 아빠가 됐구나. 결혼식 때 참석 못한 게 많이 아쉬웠는데 나중에 네 아들 태어나면 큰 선물로 보답할게.”항상 무표정하던 로운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받았습니다.”유강후는 말했다.“전에 준 건 모두 준구 것이었지. 지난 몇 년 동안 잘 관리해서 자산을 두 배로 늘렸더라. 하지만 이제 아내도 있고 아이도 생겼으니 너 자신을 위해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그걸 나눠서 20% 지분을 네가 가져. 내가 네 아들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라고 생각하고.”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뒤돌아 진시현의 볼록한 배를 몇 초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 대표님.”“며칠 동안 도련님을 데리고 가서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조상님께 향도 한 번 올리고요.”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똑똑한 아이이니 지금처럼 잘 키우면 성년이 되기 전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가 일을 맡길 수 있을 거다. 데려가는 건 좋지만 아직은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물론입니다.”유강후는 다시 물었다.“내가 찾으라고 한 자료는 확인했어?”로운은 묶어둔 자료를 꺼내 유강후에게 건넸다.“이것은 성염 조직에 대한 정보입니다. 인원은 많지 않지만 굉장히 단결되어 있습니다. 한 번 목표로 삼으면 끈적한 반창고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조직은 크게 두려워할 것은 없지만 상대하기엔 매우 불쾌한 존재입니다.”유강후는 자료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안윤희는 여기서
유강후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차갑고 무심한 시선으로 안윤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성염 조직, 너랑 무슨 관계야?”안윤희는 고개를 확 들어 올리며 눈빛에 불안함을 담고 대답했다.“무, 무슨 성염이요?”성염 조직은 국제적인 테러 집단으로 극단주의자들로만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그들은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악으로 간주한 대상은 무엇이든 태워 세계를 정화하려 했다.그들의 활동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았고 그들의 눈에 악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정화의 대상이 되었다.이로 인해 암흑가뿐만 아니라 정계에서도 성염 조직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유강후는 안윤희를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히 말했다.“네가 어떤 조직에서 왔든 상관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둬. 만약 네가 온다연에게 손이라도 대려 한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너희 안씨 가문과 성염 조직 모두 비참하게 끝날 테니까.”안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꽉 쥐고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유강후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 나갔다.안윤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천천히 일어섰다.방금 발에 차여 바닥에 나가떨어진 그녀는 무릎이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통증을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사라져가는 유강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난 분명히 널 선택했어. 그런데 날 거부하고 그 재수 없는 여자만 원한 대가가 뭔지 제대로 보게 될 거야. 다연이가 그렇게 좋다면 두 사람 다 함께 끝장내주지.”“이모, 이모부. 저는 다연이를 해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애가 먼저 제 선택을 빼앗았어요. 뻔뻔한 사람은 다연이지 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저를 탓하지 마세요.”안윤희의 낮은 혼잣말은 복도를 스치는 바람 속에 흩어졌다. 그러나 그중 일부가 안심의 귀에 닿았다.안심은 다친 채 서 있는 안윤희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니? 왜 이렇게 엉망이야?”안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제가 실수로 넘어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한 연인처럼 자연스러운 호흡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들만의 공간은 다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유강후가 온다연 앞에서 이렇게까지 낮은 자세를 보일 줄은.유강후는 온다연을 마치 손바닥 위에서 소중히 감싸 보호하는 것 같았다. 유강후는 모든 일을 직접 나서서 처리하며 온다연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보살폈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정성과 인내를 아끼지 않았다.그리고 온다연은 그런 그의 행동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러다 부모님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서야 온다연은 자신이 유강후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는 것과 방금 그 소매로 입을 닦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황급히 손을 놓고 어쩔 줄 몰라 했다.방 안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안윤희만 질투 어린 눈빛으로 온다연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유강후는 이 어색한 분위기에 개의치 않는 듯 즉시 사람을 시켜 과일을 준비하게 했다.게다가 그가 준비한 과일은 전부 온다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과일이 준비되고 나서 진수현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강 대표, 당장 나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제가 너무 오래 있었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일을 준비했으니 다연이가 다 먹는 걸 보고 나가겠습니다.”진수현은 조금의 인내도 없이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다연이 부모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우리가 충분히 지켜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지금 당장 나가!”유강후는 움직이지 않고 과일 접시를 들어 올려 깎은 과일 하나하나에 이쑤시개를 꽂았다. 심지어 샤인머스캣조차도 빠뜨리지 않았다.그는 과일을 다 준비한 뒤 온다연 앞에 과일 접시를 내밀며 낮게 말했다.“먹어.”온다연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과일 접시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왜 딸기까지 반으로 잘랐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안윤희는 눈가가 붉어진 채 무언가 말하려다 문득 들어오는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지만 강렬한 분위기와 또렷한 외모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는 방 안에 있는 안윤희를 힐끗 바라봤고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안윤희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이 퍼졌다.그의 눈빛은 차갑고 어두웠으며, 마치 독을 품은 칼날처럼 사람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안윤희는 자신이 수많은 남자를 만나봤다고 자부했지만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가진 이는 유강후가 유일했다.안윤희의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고 유강후가 뭔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으며 관련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으니 불안할 필요가 없었다.죽은 사람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법이다.안윤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머리를 매만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 안녕하세요.”유강후는 더 이상 안윤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온다연 앞으로 다가가 작은 약병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곽 의사가 방금 보내준 약이야. 먹어봐.”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마치 세상에 수많은 아름다움이 있어도 그의 눈에는 온다연만이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인 듯했다온다연은 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특이한 향이 풍겼고 어딘가 피 냄새와도 비슷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온다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강후는 병을 다시 가져가 약을 꺼내 직접 하나 삼켰다.“봐, 문제없어. 이 약 총 20알이야. 곽 의사가 그러는데, 재료가 워낙 귀해서 자기한테도 40알밖에 없었대. 그중 절반을 나한테 준 거거든. 이거 먹으면 건강 진짜 좋아질 거야. 어쩌면 앞으로 약 안 먹어도 될지도 몰라.”그가 말을 마치자 진수현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약이 20알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하나를 먹었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유강후는 아무 대꾸 없이 옆에 있던 곶감을 집어 온다연의 입가로
“너도 명색에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가문이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지만, 여전히 명문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좋은 물건이 부족할 리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거니...”안심은 말을 멈추고 온다연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다연아, 그저 한 세트의 장신구일 뿐이야. 너무 기분 상하지 말고, 엄마가 더 좋은 걸로 새로 준비해 줄게.”온다연은 안윤희 눈에 잠깐 스친 뚜렷한 분노를 보고는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배은망덕하다는 말이 딱 적합했다.“엄마, 더 큰 금고를 하나 마련해 주세요. 귀중한 물건들은 거기 보관하고 제가 직접 관리할게요.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안심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물건은 네가 직접 챙기는 게 맞지.”안윤희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이건 분명 안윤희를 경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안윤희는 개의치 않았다. 고작 몇 개의 장신구일 뿐이었고 갚지 못할 정도의 거금도 아니었다. 대진 그룹의 부대표가 된다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온다연은 바보처럼 자신의 손에 놀아나게 되어 있을 것이다.안윤희의 눈에 스친 냉소는 온다연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지난 3년간 아버지 진수현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운 온다연은 속으로 생각했다.회사 관리를 원하지 않는 것과 관리 능력이 없는 건 엄연히 다른 거라고.비록 회사를 직접 관리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사업을 결코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온다연은 진수현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했다.“아빠, 이제 제 신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대진 그룹을 정식으로 이어받아 앞길을 열어가고 싶습니다.”온다연의 말에 안윤희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윤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했다.“다연아, 아직 몸이 좋지 않잖아. 건강을 회복한 뒤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 회사 일은 우리한테 맡겨도 되잖아.”온다연은 안윤희의 말을 무시한 채 진수현을 향해 말했다.“아빠, 언제까지 아빠 뒤에만 숨을 수는 없어요. 이
안씨 가문도 명문가이긴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할 뿐 이미 속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만약 진씨 가문이 뒤에서 받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안윤희는 제대로 된 옷 한 벌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예전에 온다연에게서 가져간 물건 중 상당수는 이미 팔아버려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었다.그때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윤희의 눈빛이 잠시 차갑게 빛나더니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다연아, 이러지 마. 예전에 네가 선물로 줬던 물건들을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 말이 돼? 난 우리를 자매처럼 생각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일 줄은 몰랐어...”온다연은 아무 말 없이 안윤희를 차갑게 바라보았고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잠시 후, 진씨 부부가 방으로 들어왔다.안심은 안윤희가 온다연의 병상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곤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윤희가 먼저 말했다.“이모, 다연이가 제가 예전에 받았던 장신구들을 다 돌려달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뭘 받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일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줬어요... 어젯밤에 제가 다연이를 제대로 따라다니지 않고 혼자 둔 걸로 저를 원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제 일이 있었는데 말이에요...”안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심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연아, 정말 그런 거야?”온다연은 상체를 일으키며 안윤희를 차갑게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언니, 연기 그만해. 그동안 언니가 내 물건 가져간 건 전부 언니 멋대로였잖아. 빌린다고 말했지만, 내가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어제 언니가 가져간 건 내가 결혼식 때 쓰려고 준비해 둔 장신구였어.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건데, 그냥 가져가더라. 난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아니면 진씨 가문 물건은 언니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이야?”온다연의 말투에는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언제부터 진씨 가문이 안씨 가문과 한 식구가 됐는데?”
그때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면에 표시된 번호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몇 분 후, 안윤희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안윤희는 연한 하늘색 발목 길이 드레스를 입고 하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러나 침대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온다연의 모습이 훨씬 더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안윤희의 마음속에 묘한 질투심이 피어올랐다.안윤희는 방 안을 둘러보고는 유강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안윤희는 장미꽃을 창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다연아, 몸은 좀 괜찮아졌어?”하지만 온다연은 원래부터 백장미를 싫어했다. 온다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윤희를 쏘아보며 물었다.“왜 왔어?”안윤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깨어났다고 해서 와봤어. 그런데 아직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누가 진씨 가문을 노리기라도 했어?”온다연은 이번 일에 안윤희가 직접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내가 깨어난 게 언니랑 무슨 상관인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언니가 더 잘 알지 않아?”안윤희는 순간 당황했다.온순했던 온다연이 요즘은 마치 가시가 돋은 듯 상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다연아, 혹시 어제 내가 목걸이를 빌려 간 것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야?”안윤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급해서 미처 말 못 했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빌린 거라고? 그럼 어제 가져간 장신구 다시 돌려줄래? 내가 다시 쓸 일은 없겠지만, 그건 어머니가 내 혼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거라 남에게 줄 수는 없어.”안윤희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돌려달라고 요구하다니, 감히!원래 그 장신구는 안윤희,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온다연이 중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