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가장 좋아해서 참지 못하고 그녀를 꼭 붙들어 찐하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말했다. “계약 세 가지 맺자고 했지? 남은 두 가지는?” 온다연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리고 저도 제 친구가 있는데 제가 친구들을 사귀는 걸 막지 말아 줘요.”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래.”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천만 가지 대책들이 떠올랐다. 각각의 계획이 그녀를 벗어날 수 없는 덫으로 가둘 생각이었다. “세 번째는 뭐지?” 온다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기가 좀 더 괜찮아지면 저도 정상적으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마치 유강후가 동의하지 않을까 두려운 듯 온다연은 얼른 덧붙였다. “만약 아저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기를 데리고 아저씨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갈 거예요.”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 거 허락할게.” 그에게는 친구 사귀는 문제보다 일이든 학교든 훨씬 통제하기 쉬운 일이었다. 특히나 임혜린 같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친구는 온다연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할 생각이었다. 온다연은 그가 너무 쉽게 동의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동의한다고요? 그렇게 빨리요?”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용이 있어? 어차피 몰래 할 거잖아.” 온다연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꼬며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다면 됐어요.” 그때 이권이 밖에서 들어왔다. “셋째 도련님, 주희 씨의 상태가 좀 나아졌습니다. 헌혈자도 몇 명 도착해서 이제 온다연 씨도 안심하셔도 됩니다. 또한, 혈액 전문의도 국내에 도착했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 정도면 경원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주희 씨도 운이 참 좋네요. 이 정도로도 살아남다니!” 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가슴에 걸려 있던 돌이 한순간에 내려앉았다.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안심됐어?” 온다연은 침대에 무릎
이날 밤 온다연은 깊이 잠들어 있어 유강후가 언제 떠났는지도 몰랐다. 동이 트기 직전,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병원 옥상에 요란하게 착륙했다. 유강후는 인큐베이터를 직접 안고 급히 헬기에서 내려 미리 대기하던 그웬에게 상자를 건넸다. 그웬을 제외하고는 병원의 모든 인원이 회의에 불려간 상태였기 때문에 작은 아기가 언제 무균실에 들어왔고 언제 구조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그웬뿐이었다. 사무실에서 로운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고 유강후를 보자마자 키가 190cm에 달하는 큰 체격의 로운이 즉시 무릎을 꿇었다. “셋째 도련님, 우리 어린 주인님은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유강후는 그를 일으켜 앉히고 상황을 물었다. 새벽에 유강후는 갑작스레 전화를 받았다. 양준구에게 사고가 발생하여 공항으로 사람을 맞이하러 와달라는 것이었다. 양준구는 유강후의 생사를 함께한 친구이자 동남아시아 최대 부동산 사업자이자 조직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이 전화가 오자마자 유강후는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것은 아기 인큐베이터를 품에 안은 양준구의 측근 로운뿐이었다. 로운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희 주인님께서 사촌 동생 양시안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부인 하이연 씨는 독을 먹고 위험에 처했으며 주인님께서는 그저 어린 주인님이라도 구하기 위해 아기를 조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어린 주인님을 당신께 맡기고 부인 곁으로 가셨습니다...” 로운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이어 말했다. “지금 양 씨 가문은 양시안이 장악했습니다. 그 자는 원래 주인님이 키운 사람이었는데 결국 악랄한 늑대를 키운 셈이 되었습니다. 저는 구 어르신을 대신해 반드시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그는 열쇠 모양의 옥패를 꺼내어 두 손으로 정중히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구 어르신과 부인께서 어린 주인님에게 남긴 유품입니다. 이는 양 씨 가문의 삼대에 걸친 재산이 보관된 금고의 열쇠이니 어린 주인님이 성인이 되면 꼭 전해주십시오.” “구 어르신께서 말
잠시 후 소형 헬리콥터 한 대가 병원 옥상에서 빠르게 이륙해 하늘로 사라졌다. 이곳은 유강후의 개인 병원이라 헬리콥터의 이착륙이 잦았기에 이번 이륙도 특별한 주목을 끌지 않았다. 헬리콥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이권이 말했다. “셋째 도련님, 그 조직은 십 년간 심혈을 기울여 쌓아 오신 것입니다. 그 가치는 말로 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유강후는 먼 하늘을 보며 말했다. “양준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준구가 이토록 나를 신뢰하며 아기를 맡겼으니 계정 하나쯤은 별것 아니야.” 이권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유강후가 가로막았다. “다연이는 깼어?” 이권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직 아닙니다. 장 집사가 막 만든 아침 식사를 가져왔으니 조금 드시죠.”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쪽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온다연이 침대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있는 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유강후를 보자 약간 더 정신이 들었는지 먼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어디 갔었어요?”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좀 일 있어서 회사에 갔었어. 왜? 나 보고 싶었어?” 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거든요.” 그녀는 유강후의 옷자락을 잡고 불안한 듯 물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 줘요. 아기 지금 어떻게 된 거예요?” 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많이 좋아졌어. 아까 가서 그웬 박사와 얘기했는데 아기도 조금 더 자랐고 상태도 훨씬 안정됐대.” 온다연은 금세 기운을 차리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문밖에서라도 아기를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요?” 유강후가 대답이 없자 급해져서 말했다. “한 번이면 돼요! 딱 한 번만!” 하지만 의외로 유강후는 바로 동의했다. 온다연은 믿을 수 없었다. “진짜요?”
유강후는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숙여 붉어진 그녀의 귀 끝을 가볍게 깨물며 속삭였다. “더한 것도 이미 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그는 그녀를 들어 올려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정성껏 닦아주며 말했다. “그리고 네가 내 아기를 낳아주었으니 내가 직접 돌봐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아기가 언급되자 온다연의 눈에 작은 반짝임이 더해졌다. 그녀는 기쁜 듯이 말했다. “빨리 먹고 우리 가서 문밖에서라도 아기를 잠깐 봐요.” 그녀가 아기를 기대하는 모습이 어딘가 가슴 아팠던 유강후는 손을 그녀의 부드러운 뺨에 올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연아, 앞으로도 우리에겐 아기가 더 생길 거야.” 온다연은 그의 말이 어딘가 이상하게 들려 긴장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죠?” 유강후는 그녀를 바라봤고 눈빛에는 슬픔이 담겨있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나중에 아기가 더 많이 생길 거라고. 너도 아기를 무척 좋아하지 않아?”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아기들은 너무 귀여워요. 정말 착하고 사랑스러워요.” 유강후는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두 명 더 낳을까?” 그의 따뜻한 숨결이 온다연의 목덜미를 간지럽히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세 명은 너무 많지 않나요?” 유강후는 부드럽게 그녀를 유혹하듯 말했다. “아니야. 내 아기는 네가 낳아줘야만 해. 그러니까 몸을 잘 회복하고 우리 함께 노력하자.” 온다연은 얼굴이 더욱 빨개졌고 목까지 빨개졌으며 부끄러운 듯 작게 말했다. “제발 그만 말해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가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덮으며 깊은 키스를 나눴다. 공간 안은 속삭임과 그의 낮고 부드러운 유혹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한참 후 유강후의 품에 안겨 나온 온다연은 입술이 빨갛게 부풀고 한쪽이 살짝 트여 있었다. 죽을 한 입 마셨지만 아픈 듯이
그러면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병실 밖으로 나섰다. 온다연은 문 앞에서 간호사가 입을 가리고 몰래 웃고 있는 걸 보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몸부림쳤다. “내려줘요! 저 혼자 걸을 거예요!” 그러나 유강후는 온다연을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팔에 힘을 더 주며 차가운 눈길로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웃기나?” 간호사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저었다. 유강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얘기 소문내는 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들리면 다들 일하지 말고 나가요!” 간호사는 겁에 질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온다연은 작게 속삭이며 말했다. “너무 무섭게 굴어요!” 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내가 아무에게나 이렇게 참을성이 많을 거라 생각해?” 그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얼마 안 가 아이가 있는 병실 앞에 도착했다. 이번엔 그웬의 표정이 이전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그는 다소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온 아가씨, 아이 상태가 많이 나아졌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온다연을 바라보는 눈에 깊은 동정과 연민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유강후가 경고하는 눈빛을 보내자 다시 냉정을 찾았다. “오늘은 여기서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지만 안에 들어가지는 마세요. 아직 인큐베이터를 떠나기엔 이릅니다.” 온다연은 문에 기대어 거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인큐베이터 안을 들여다보았다. 인큐베이터가 커진 듯했고 특수 제작된 투명 덮개를 통해 안의 작은 존재가 제법 뚜렷하게 보였다. 정말 조금은 커진 것 같았다. 아직 빨갛고 몸에 여러 관이 꽂혀 있어서 구체적인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온다연은 그저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며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득 차 있었다. 온다연은 두려움과 긴장감에 휩싸였다. 두 번이나 꾼 악몽이 그녀를 절망의 끝으로 몰아넣었고 그동안 이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현대 의학
유강후의 눈동자에 잠시 고통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웬이 그러는데 이전 검사 결과가 약간 부정확했을 수도 있대. 아기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약간 더 컸던 것 같아. 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성장이 더뎠을 뿐이고 지금의 특별한 환경에서는 아기가 좀 더 빨리 자랄 수 있는 것 같아...” 유강후 본인도 이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온다연은 그의 말을 믿었다. 그렇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의문스러워했다. “병원 검사도 이렇게 부정확할 수 있나요?” 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건 그웬의 말을 따르자. 그는 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니까.” 온다연은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 후 그녀는 주희를 보러 갔다. 주희는 여전히 혼수상태에 있었고 의사에 따르면 내출혈이 심해서 최소 보름 정도는 지나야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제때 치료받아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온다연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점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며칠 뒤, 드디어 섣달그믐날이 찾아왔다. 유강후는 온다연을 데리고 전통 한옥으로 돌아갔다. 강해숙도 함께였다. 작은 전톡 한옥은 소란스럽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노란색 전등 불빛이 커다란 창문을 통해 흰 눈으로 덮인 마당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저녁 식사는 풍성하게 차려졌고 장화연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해왔다. 그녀는 또 직접 담근 과일주까지 꺼내놓았다. 온다연은 한 입 맛보자마자 과일 향이 가득한 달콤한 맛에 빠져들었고 그만 술잔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한 잔을 비우고는 장화연에게 술을 더 따라달라고 졸라댔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이 붉어지자 곧바로 그녀의 술잔을 빼앗아 더 이상 마시지 못하게 했다. 온다연은 아무 말 없이 촉촉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약간의 간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유강후의 얼굴을 차갑게 변했
이때 강해숙은 몇 개의 붉은 봉투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새해라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지만 대신 세뱃돈을 준비했어.” 그러고는 가장 큰 봉투 하나를 꺼내 장화연에게 내밀며 말했다. “장 집사, 이건 당신 거야. 강후와 온다연을 잘 보살펴줘서 고마워.” 장화연은 눈가가 살짝 붉어지며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강해숙은 다시 가장 두툼한 봉투를 뽑아 온다연에게 건넸다. “온다연, 이건 너한테 주는 거야.” 온다연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마음 깊은 곳에서 복잡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몇 년 동안 세뱃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뱃돈을 받은 건 아마도 십수 년 전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을 옷에 여러 번 닦아내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아 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강 대표님.” 봉투는 묵직했고 안에 무언가 꽉 찬 느낌이었다. 온다연은 살짝 열어보니 두툼한 현금 다발과 몇 장의 금색 신용카드가 들어 있었다. 온다연은 낮게 속삭였다. “강 대표님, 이건 너무 많아요.” 강해숙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많지 않아.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사. 난 요즘 젊은 사람들 취향을 잘 모르거든.”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덧붙였다. “이 카드는 내가 따로 준비한 거야. 유강후가 막으려 해도 소용없으니 마음껏 써.” 유강후는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온다연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주시는 거예요?” 강해숙은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약간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모든 걸 준비해도 온다연에게 필요한 게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온다연을 한 번 바라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다연아, 강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이 카드는 강후와 무관해.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사. 너는 우리 강 씨 가문의 며느리야. 건물 하나 사는 것도 별일 아니니까.” 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눈가가 살짝 붉어지며 작게 속삭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강해숙이 다시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아들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나와 보겠니?” 유강후는 온다연을 조심스럽게 옆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녀가 여전히 손에 꼭 쥐고 있는 세뱃돈을 빼내려 했으나 온다연이 너무나 단단히 쥐고 있어서 몇 번을 시도해도 안 되자 결국 포기했다. 아들이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보는 모습을 본 강해숙은 가늘게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얘기하자.” “아이의 일은 언제 온다연에게 말할 생각이니?” 유강후는 온다연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생엔 절대 알지 못할 거예요.” 강해숙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양준구의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아라. 그쪽은 상황이 복잡해서 한 번 발을 들이면 무사히 빠져나오기가 힘들어.” 유강후는 담담하게 답했다. “저는 제 선을 지킬 겁니다.” 강해숙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네가 뭘 하든 내가 간섭할 순 없지만 절대로 강 씨 가문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네 외할아버지도 이젠 연세가 꽤 되셔서 너더러 빨리 손주를 안겨달라고 하시니...” 그녀는 잠들어 있는 온다연을 한번 흘끗 바라보고는 말을 멈췄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시 물었다. “결혼 날짜는 정해졌니?” 유강후는 짧게 답했다. “다연이가 퇴원하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고 이후에 결혼식을 할 예정입니다.” 강해숙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 쪽으로 가더니 길고 가느다란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불을 붙였다. 한참 후, 그녀는 낮게 속삭였다. “미래 그룹 본사를 북아메리카로 옮기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온다연의 등을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 강해숙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네가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라면 서둘러 계획해야 해.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너를 많이 도와줄 수는 없
온다연은 영상 속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러다 또 다른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장화연을 바라보았다.장화연은 벽에 기대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온다연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다가가 추궁하고 싶었다.‘대체 강후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숨겨왔어요?’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장화연은 유강후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봤자 장화연은 끝까지 그를 감싸기만 할 것이다.온다연은 알고 있었다.만약 장화연이 정말 자신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은 진실을 털어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하지만 장화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마음속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온다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장화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창백하게 질린 온다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장화연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다연이 먼저 일어섰다.“장 집사님,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어요.”장화연은 그녀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줄 알고 조용히 말했다.“우림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열이 떨어지기만 하면 곧 그룹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그쪽이 장비도 더 좋고, 의사들도 더 뛰어나니까요.”그럴듯한 위로를 들으며, 온다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화장실에 도착한 온다연은 손을 떨며 그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근데, 유 대표님이 온다연이랑 이미 혼인신고 했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혼인신고? 진짜인지 누가 알아? 나도 들은 얘긴데,
두 시간이 지났다.아이에게 열이 났다는 걸 유강후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는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심지어 메시지 한 줄조차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 무슨 회의가 그렇게 바빠서, 전화 한 통조차 걸 시간이 없는 걸까?그는 항상 말해왔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그녀와 아이라고.하지만 지금 온다연의 머릿속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과 더불어, 전화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로 어지러웠다.그녀는 과연 그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들은 것을 믿어야 할까?유강후의 전화를 대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비서이거나 이권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남자였다.그녀가 혼란 속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휴대전화의 알림음이 울렸다.‘틀림없이 강후 씨가 보낸 메시지일 거야!’그녀는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하며 초조함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낯선 번호에서 온 친구 추가 요청이었다.검은색 프로필 사진에는 두 개의 눈만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어둠 속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악몽 같았다.친구 요청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네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어.]온다연은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친구 요청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여러 개의 영상과 사진을 보냈다.온다연은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하나 눌러봤고, 곧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영상 속에는 유강후가 어떤 여자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영상은 꽤 먼 거리에서 찍힌 듯했지만, 그가 유강후라는 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여자를 품에 안고,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스치는 다정함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담하고 온화한 실루엣은 뚜렷했다.흰색 홈웨어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 온다연이 입
“그 빨간 점은 딱 심장을 겨냥한 위치였어요. 만약 그대로 맞았다면 분명 심장에 명중했을 겁니다. 설령 나은별 씨가 총알을 대신 맞았다고 해도, 그분의 키를 고려하면 그 상처는 턱 아래에 있어야 해요. 하지만 지금 그분의 상처는 왼쪽 가슴에서 어깨 쪽으로 치우쳐 있죠.”진시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판단으로는, 암살자가 나은별 씨가 나타난 걸 보고 즉시 무기의 위치를 조정한 겁니다.”그녀는 응급실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암살범이 왜 나은별 씨를 보고 갑자기 위치를 바꿨을까요? 대표님, 그 이유는 직접 조사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수술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로운이 다가와 진시현을 안아 들고 수술실로 향했다.진시현은 몸을 살짝 비틀며 저항했다.“팀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걸어갈 수 있어요.”하지만 로운은 무표정하게 단호히 말했다.“움직이지 마.”결국 진시현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품에 안겨 수술실로 들어갔다.그 시각, 대형 주택 내부에서는 온다연이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우림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오후 두세 시쯤 갑작스럽게 미열이 났다.처음에는 단순히 소화 문제일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설명하고 소화제를 조금 먹였다.그러나 저녁 여섯 시가 되자 아이의 열이 갑자기 급상승했다.다급히 달려온 주 박사가 진찰한 결과, 폐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하지만 주 박사는 서양의학 전문의가 아닌 데다 전문 장비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병원으로 즉시 데려가야 한다고 권했다.문제는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집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출몰해 장화연은 이 주택도 감시당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그래서 병원에서 의사와 장비를 호출하려고 논의했지만, 전문 장비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소란이 클 것 같았다.게다가 이 건
말을 마친 유강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은별을 안아 들고, 거침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옆에서 소이섭도 서둘러 따라붙었다. 가는 내내 나은별의 피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소이섭이 간단히 응급 처치를 해보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의식을 잃은 나은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강후, 은별 씨는 이런 사람이야. 널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그는 차갑게 비꼬듯 말했다.“그 고아 출신 여자애 때문에 네가 은별 씨를 몇 번이나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지? 앞으로도 계속 몰아세울 거야?”유강후는 이를 악물며 낮게 소리쳤다.“닥쳐. 내가 뭘 하든 네가 훈계할 자격은 없어!”소이섭은 냉소를 지었다.“그래도 말해야겠어. 넌 은별 씨한테 너무나 많은 빚을 졌어. 어떻게 갚을 건데? 돈으로? 네가 가진 돈이 만능이라도 된다고 생각해?”그 순간,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온다연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떨려 있었다.“강후 씨,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있어요. 너무 높아서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어디예요?”유강후가 대답하려는 찰나, 소이섭이 낮게 속삭였다.“설마 은별 씨를 내버려두고, 그 고아 출신 여자애를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네 아들은 단순히 열이 나는 거고, 은별 씨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그다음 순간, 차갑고 무거운 총구가 소이섭의 머리 뒤에 닿았다.유강후는 전화를 손으로 가린 채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마디만 더 하면 네 목숨은 끝이다.”소이섭은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총구를 치우고 나서 유강후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다연아, 걱정하지 마. 지금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못 가. 장 집사랑 병원으로 먼저 가 있어. 내가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하지만 온다연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배어 있었다.“주 박사님께서 진찰했는데, 대엽성 폐렴일 가능성이 크대요. 해열제도 소용이 없어서 아까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어요. 빨리
술이 준비된 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사람이 조금 뜸했다.진시현은 유강후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사모님께서 보시고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해.”그는 방금 전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들 쪽을 아주 잠깐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덧붙였다.“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 찍어서 이권에게 보내서 처리하게 해.”진시현은 즉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며 긴장된 표정을 띠었다.“김원도가 왔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시 유강후의 팔을 친밀하게 잡고, 그의 몸에 기댔다.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강후 씨, 저 조금 추워요.”유강후는 손짓하자마자 누군가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가져왔다.그는 직접 숄을 집어 들고 진시현의 어깨에 다정하게 걸쳐주었다.그리고 숄을 걸쳐주며 살짝 몸을 기울여, 마치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조심해. 저 근처에도 몇 명이 있어.”진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때 김원도가 다가왔다.그는 진시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유 대표, 이분은 누구지?”유강후는 진시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김씨 집안 사람이라면 강씨 집안의 휘장을 모를 리가 없겠지. 내 약혼녀야.”김원도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유 대표는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으니 오늘 밤에도 많은 여성분들이 마음 아파하겠어.”유강후는 김원도의 말을 무시한 채, 시선을 그에게서 돌려 방금 막 들어온 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김원도와 닮았지만, 그의 음험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그는 유강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원도에게 다가갔다.“형, 형도 여기 있었어?”김원도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김원혁, 네가 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문은 새어 나갔고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해 질 무렵, 유강후와 진시현이 뉴월드 호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그 자리는 단숨에 술렁거렸다.유강후는 말할 것도 없이 경원시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의 출현은 곧바로 주목을 끌었다. 연회 주최자인 주경한은 유강후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 대표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제 연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유강후의 옆에 서 있는 진시현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가슴 위에 달린 블루 사파이어 브로치를 알아차렸다.조명 아래에서, 브로치 가장자리의 Y 모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주경한은 이 바닥에서 감각이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그는 한눈에 이것이 강씨 집안의 여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이분이 바로 사모님이시군요!”그러나 유강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주경한은 이미 소문으로 유강후가 요즘 한 아가씨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녀가 강씨 집안 여주인의 물건을 사용할 정도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혹시 유 대표님, 곧 결혼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유강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곧 합니다.”주경한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빨리 축의금을 준비해야겠네요.”그는 진시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진시현은 유강후를 살짝 바라보았다.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주경한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화연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을 믿으셔야 합니다.”그 말은 온다연의 추측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꽉 조여들었고, 마치 뒤틀려버린 밧줄처럼 고통스러워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그래서, 정말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거네요.”장화연은 말했다.“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모님과 우림 도련님의 안전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도련님께서는 사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저는 사모님께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더 무서워질 만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본 장화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군가 사모님의 안전을 담보로 도련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도련님은 밖에 나가 사모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일부러 꾸며냈어요. 그렇게라도 설명해 드리면 조금은 나아지실까요?”장화연은 유강후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의 모든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은 묵직한 신뢰를 주었고, 때로는 유강후를 대신해 발언하는 권위도 있었다.온다연은 그런 그녀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전화.그녀가 그렇게 오래 들었던 그 전화가 정말 거짓일 수 있을까?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후 씨의 휴대폰을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나요?”장화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사모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건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워낙 복잡하니, 타인들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우림 도련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오늘 밤은 사모님께서 아이와 함께 주무세요.”곧 예쁜 아기가 방으로 안겨 들어왔다.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온다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곤히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부드럽게
그는 수년 동안 유강후의 곁에서 그의 냉혹한 수완을 지켜보며 살아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난히 매섭고 강렬했다.김씨 집안은 동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몰락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과 수단, 그리고 상업계에 불어닥친 폭풍우 같은 소란은 평범한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번 사건은 그가 유강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히 깨닫게 했다.앞으로는 정말로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면, 온다연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을.온다연의 방.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온다연이 침대 모서리에 웅크린 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장화연은 우유를 내려놓고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사모님, 도련님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가 왜 오늘 오지 않는 거죠? 정말 회사에서 회의 중인 걸까요?”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악몽을 꾸셨죠?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온다연은 우유를 받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오늘 너무 심했어요. 저한테 한 달간 휴학하라고 했어요. 이유는 단지 염지훈이 제 선생님이라는 것뿐인데, 저랑 상의도 없이 제 수업을 멋대로 중단시켰어요.”“원래는 그 사람과 크게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결혼도 했고, 아기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모든 일을 잘 상의하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참았어요. 그런데 강후 씨는...”온다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요? 강후 씨는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다른 재벌 자제들과 다를 게 없었네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악몽에 시달린 줄 알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다연아, 악몽 꿨어?”온다연은 가볍게 답하고선 말을 이었다.“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꿈을 꿨어요.”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던 유강후는 온다연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다른 여자랑 있을까 봐 걱정됐어? 꿈에서도 내 생각뿐이네?”온다연이 물었다.“어디에 있는지 왜 대답 안 해요?”“회사에서 미팅 중이었어. 아마 이틀 동안 바빠서 못 갈 거야. 아이랑 같이 잘 지낼...”“강후 씨.”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고 곧바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옆에 다른 여자 있죠?”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온다연의 흐느끼는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들었어요. 다른 여자랑...”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그녀가 또 악몽을 꾼 줄 알고 걱정된 마음으로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유강후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지금 당장 다연이가 있는 방으로 가봐. 방금 통화했는데 악몽을 꿨는지 울고 있었어.”장화연이 답했다.“지금 바로 가볼게요.”“일이 복잡해져서 당분간은 못갈지도 몰라. 다연이랑 우림이 잘 돌봐줘. 절대 밖에 나가게 해서는 안 돼.”“알겠습니다.”“차라리 우림이를 옆에 데려다줘. 아이랑 같이 자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그럴게요.”장화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경호원을 통해서 들었는데 다연 씨가 나은별 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다연 씨는 힘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분입니다. 도련님께 대한 오해가 생겼다면 그 마음을 달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모릅니다. 두 분 어렵게 여기까지 온 만큼 서로에게 그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나은별 씨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