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병실 밖으로 나섰다. 온다연은 문 앞에서 간호사가 입을 가리고 몰래 웃고 있는 걸 보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몸부림쳤다. “내려줘요! 저 혼자 걸을 거예요!” 그러나 유강후는 온다연을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팔에 힘을 더 주며 차가운 눈길로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웃기나?” 간호사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저었다. 유강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얘기 소문내는 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들리면 다들 일하지 말고 나가요!” 간호사는 겁에 질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온다연은 작게 속삭이며 말했다. “너무 무섭게 굴어요!” 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내가 아무에게나 이렇게 참을성이 많을 거라 생각해?” 그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얼마 안 가 아이가 있는 병실 앞에 도착했다. 이번엔 그웬의 표정이 이전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그는 다소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온 아가씨, 아이 상태가 많이 나아졌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온다연을 바라보는 눈에 깊은 동정과 연민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유강후가 경고하는 눈빛을 보내자 다시 냉정을 찾았다. “오늘은 여기서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지만 안에 들어가지는 마세요. 아직 인큐베이터를 떠나기엔 이릅니다.” 온다연은 문에 기대어 거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인큐베이터 안을 들여다보았다. 인큐베이터가 커진 듯했고 특수 제작된 투명 덮개를 통해 안의 작은 존재가 제법 뚜렷하게 보였다. 정말 조금은 커진 것 같았다. 아직 빨갛고 몸에 여러 관이 꽂혀 있어서 구체적인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온다연은 그저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며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득 차 있었다. 온다연은 두려움과 긴장감에 휩싸였다. 두 번이나 꾼 악몽이 그녀를 절망의 끝으로 몰아넣었고 그동안 이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현대 의학
유강후의 눈동자에 잠시 고통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웬이 그러는데 이전 검사 결과가 약간 부정확했을 수도 있대. 아기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약간 더 컸던 것 같아. 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성장이 더뎠을 뿐이고 지금의 특별한 환경에서는 아기가 좀 더 빨리 자랄 수 있는 것 같아...” 유강후 본인도 이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온다연은 그의 말을 믿었다. 그렇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의문스러워했다. “병원 검사도 이렇게 부정확할 수 있나요?” 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건 그웬의 말을 따르자. 그는 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니까.” 온다연은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 후 그녀는 주희를 보러 갔다. 주희는 여전히 혼수상태에 있었고 의사에 따르면 내출혈이 심해서 최소 보름 정도는 지나야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제때 치료받아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온다연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점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며칠 뒤, 드디어 섣달그믐날이 찾아왔다. 유강후는 온다연을 데리고 전통 한옥으로 돌아갔다. 강해숙도 함께였다. 작은 전톡 한옥은 소란스럽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노란색 전등 불빛이 커다란 창문을 통해 흰 눈으로 덮인 마당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저녁 식사는 풍성하게 차려졌고 장화연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해왔다. 그녀는 또 직접 담근 과일주까지 꺼내놓았다. 온다연은 한 입 맛보자마자 과일 향이 가득한 달콤한 맛에 빠져들었고 그만 술잔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한 잔을 비우고는 장화연에게 술을 더 따라달라고 졸라댔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이 붉어지자 곧바로 그녀의 술잔을 빼앗아 더 이상 마시지 못하게 했다. 온다연은 아무 말 없이 촉촉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약간의 간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유강후의 얼굴을 차갑게 변했
이때 강해숙은 몇 개의 붉은 봉투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새해라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지만 대신 세뱃돈을 준비했어.” 그러고는 가장 큰 봉투 하나를 꺼내 장화연에게 내밀며 말했다. “장 집사, 이건 당신 거야. 강후와 온다연을 잘 보살펴줘서 고마워.” 장화연은 눈가가 살짝 붉어지며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강해숙은 다시 가장 두툼한 봉투를 뽑아 온다연에게 건넸다. “온다연, 이건 너한테 주는 거야.” 온다연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마음 깊은 곳에서 복잡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몇 년 동안 세뱃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뱃돈을 받은 건 아마도 십수 년 전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을 옷에 여러 번 닦아내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아 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강 대표님.” 봉투는 묵직했고 안에 무언가 꽉 찬 느낌이었다. 온다연은 살짝 열어보니 두툼한 현금 다발과 몇 장의 금색 신용카드가 들어 있었다. 온다연은 낮게 속삭였다. “강 대표님, 이건 너무 많아요.” 강해숙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많지 않아.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사. 난 요즘 젊은 사람들 취향을 잘 모르거든.”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덧붙였다. “이 카드는 내가 따로 준비한 거야. 유강후가 막으려 해도 소용없으니 마음껏 써.” 유강후는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온다연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주시는 거예요?” 강해숙은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약간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모든 걸 준비해도 온다연에게 필요한 게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온다연을 한 번 바라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다연아, 강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이 카드는 강후와 무관해.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사. 너는 우리 강 씨 가문의 며느리야. 건물 하나 사는 것도 별일 아니니까.” 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눈가가 살짝 붉어지며 작게 속삭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강해숙이 다시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아들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나와 보겠니?” 유강후는 온다연을 조심스럽게 옆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녀가 여전히 손에 꼭 쥐고 있는 세뱃돈을 빼내려 했으나 온다연이 너무나 단단히 쥐고 있어서 몇 번을 시도해도 안 되자 결국 포기했다. 아들이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보는 모습을 본 강해숙은 가늘게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얘기하자.” “아이의 일은 언제 온다연에게 말할 생각이니?” 유강후는 온다연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생엔 절대 알지 못할 거예요.” 강해숙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양준구의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아라. 그쪽은 상황이 복잡해서 한 번 발을 들이면 무사히 빠져나오기가 힘들어.” 유강후는 담담하게 답했다. “저는 제 선을 지킬 겁니다.” 강해숙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네가 뭘 하든 내가 간섭할 순 없지만 절대로 강 씨 가문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네 외할아버지도 이젠 연세가 꽤 되셔서 너더러 빨리 손주를 안겨달라고 하시니...” 그녀는 잠들어 있는 온다연을 한번 흘끗 바라보고는 말을 멈췄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시 물었다. “결혼 날짜는 정해졌니?” 유강후는 짧게 답했다. “다연이가 퇴원하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고 이후에 결혼식을 할 예정입니다.” 강해숙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 쪽으로 가더니 길고 가느다란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불을 붙였다. 한참 후, 그녀는 낮게 속삭였다. “미래 그룹 본사를 북아메리카로 옮기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온다연의 등을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 강해숙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네가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라면 서둘러 계획해야 해.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너를 많이 도와줄 수는 없
온다연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안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조용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그 강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이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이게 정말인가요?”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얼음 같은 세상에 오래 머물다가 갑자기 따뜻한 방으로 들어와 따끈한 음식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에겐 마치 한낱 환상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으로 유강후의 허리를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말 오랫동안 누구와 함께 새해를 보내본 적도 같이 불꽃놀이를 본 적도 없어요. 설날에 세뱃돈을 받아본 것도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이 안 나요. 마지막으로 받은 건 아마도 주...” “아저씨, 저 정말 행복해요. 오늘이 참 좋아요.” 그녀의 말은 마치 작은 바늘들이 그의 가슴에 하나씩 박히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그는 온다연에게 자유로운 삶을 준다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그녀를 지독한 악몽 속으로 떠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그녀의 곁에 머물러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다른 남자였다. 그 남자는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아 유강후조차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는 온다연을 더 강하게 끌어안고는 그녀를 꼭 안은 채 다급하게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그녀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온다연은 손을 입술 위에 대며 막았다. “안 돼요. 양치도 안 했는데!” 그때, 밖에서 또다시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온다연이 고개를 들어 다시 불꽃을 보려 하자 유강후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만 봐. 우리 방에 가자.” 그는 불꽃놀이 따위는 이제 보이지 않길 바랐다. 더 이상 주한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안 돼요, 조금만 더 보고 싶어요!” “안 돼. 착하지. 방에 가서 양치하자!” “아저씨, 안 돼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도망칠 틈을 절대 주지 않았다. 그녀를 단단히 무릎 위에 고정하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다시 한번 깊게 물었다. 고통에 온다연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으... 조금만 부드럽게... 너무 아파요…”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힘껏 감싸며 가빠진 숨소리로 속삭였다. “다연아, 내가 누군지 말해봐.” 그의 단단한 손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온다연은 그의 강렬한 시선과 동작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숨이 가빴다. 그녀는 입을 열어 힘겹게 대답했다. “유강후... 아저씨 유강후잖아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에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른 사람은 절대 생각하지 마. 오직 나만 생각해, 알겠어?” 온다연은 그의 강한 손길에 놀라 손을 재빨리 빼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고 부드럽게 그녀의 귀를 물었다. “다연아, 내가 누구라고?” 몸이 자연스레 떨리며 온다연은 대답했다. “유강후!” “틀렸어!”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귓불을 살짝 물고 속삭였다. “그게 아니야. 넌 ‘내 남자’라고 해야지.” “다시 대답해 봐. 내가 누구라고?” 그녀는 그 몇 글자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입술을 세게 물었다. 유강후의 손아귀 힘은 더욱 거세졌고 그녀의 허리를 잡아 아래로 눌렀다. 몸에 닿는 온도에 그녀는 두려워졌고 유강후에게 애원했다. “안돼요. 아저씨, 이러지 마요.” 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착하지? 얼른 얘기해 봐, 내가 네 남자라고. 말하면 안 할게.” 그녀는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앞이 흐릿한 게 곧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유강후는 그녀의 표정에 잠시 흔들렸지만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그때, 온다연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마음속에 자신의 존재를 깊이 새기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인지할 수
그는 해열제를 가져와 그녀에게 먹이고 뜨거운 물과 우유도 마시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열이 올라 분홍빛이 돌았고 눈빛은 흐릿했지만 그는 결코 그녀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아래에 눕히고 나직하게 계속 그녀에게 물었다. “다연아, 내가 누구라고?” 온다연은 열로 인해 몸이 불편하고 졸리기도 했지만 그가 계속 강요하는 바람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몇 마디 말도 여러 번 반복하니 점점 더 쉽게 대답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희미한 의식으로 답했다. “유강후...” 그는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며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유강후는 누구지? 너한테 어떤 사람이야?” 온다연은 몸을 살짝 떨며 대답했다. “남자... 내 남자…” 그러나 유강후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녀를 유혹했다. “너의 남자는 누구야?” 온다연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답했다. “유강후…” 유강후는 마치 보상이라도 하듯 그녀에게 가볍게 입 맞추며 말했다. “다시 말해봐. 너의 남자는 누구야?” “유강후…” 마치 의도적인 훈련처럼 여러 번 반복하며 연습을 계속했다. 결국 그 답이 그녀의 영혼에 각인된 듯이 익숙하게 되었다. 밤이 거의 밝을 때까지 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온다연은 오후까지 푹 잠을 자고 나서 전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강후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고개를 숙이며 한쪽으로 숨기 바빴다.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그가 너무 몰아붙일 때만 방으로 숨어버렸다. 유강후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전날 밤에 너무 강하게 몰아붙여서 이런 반응이 나온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가 여전히 주한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그의 흔적만으로 가득 채워지고 그의 낙인이 찍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밤 같은 훈련을 반복해서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영혼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 “다연아, 착하지?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데리러 갈게.” 온다연은 여전히 침묵했다. 유강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연, 벌써 저녁이야. 어디에 있는지 말해줘. 데리러 갈게.” 드디어 저편에서 온다연의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는 항상 저를 강요해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고 다시 전화를 걸자 이미 꺼져 있었다. 이때 개를 산책시키는 이웃 아주머니 두 분이 지나갔다. 그중 한 분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옆 단지에서 어제 사람이 죽었대요. 어떤 어린 아가씨가 남자친구랑 싸웠는데 화가 나서 싸우고 나서 바로 뛰쳐나갔대요. 남자는 화가 나서 쫓아가지 않았다잖아요. 그 아가씨는 아픈 와중에 얇게 입고 나갔는데 결국 단지 뒷문에서 쓰러졌대요.” “요 며칠 날씨가 추웠잖아요. 밤에는 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쓰러진 아가씨를 아무도 못 봤던 거지. 하룻밤 동안 그렇게 있었다가 얼어 죽었대요. 남자는 그걸 보고 후회해서 바로 기절하고 정신을 차려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기절하고...” 골목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 유강후의 가슴이 싸늘해졌고 손발까지 점점 차가워졌다. 그는 즉시 이권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이권, 온다연의 휴대폰 위치를 확인해 줘.” “온다연 씨는 병원에 있어요. 왜 위치를 확인하려고 하시죠?” 유강후는 그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온다연을 잘 지켜봐. 밖에 못 나가게 해. 바로 갈게.” 병원에 도착한 그는 온다연을 찾으려 이곳저곳 돌아다닌 끝에 아기 병실 옆에 있는 장비 보관실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유강후를 보자마자 그녀는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의 품에 붙잡혔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부어있는 것을 본 유강후는 살짝 가슴이 아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를 보러 오려면 나에게 말해줘야지. 밖은 이렇게 추운데 혼자 걸어온 거야?” 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지며 전날 밤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