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령이한테서 들어보니까, 그 천박한 것이 학생 때부터 더럽게 몸을 굴리고 다녔다더구나. 이미 더러운 몸이었으면서...”“그만 하세요!”유강후는 유난히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은 어디에 있죠?”최금영은 이렇듯 화를 내는 유강후의 모습은 처음이었던지라 어안이 벙벙했다. 이내 부아가 치밀었다.“지금 나한테 소리를 지른 거니? 그 천박한 것을 위해 나한테? 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기나 해? 피도 안 섞인 남을 위해 자신의 형한테도 예의 없이 굴고. 왜, 이젠 이 늙은 할미한테마저 그렇게 굴 거니?”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다시 유자성에게 시선을 돌렸다.“대체 뭐 하신 겁니까? 또 10년 전과 똑같은 짓을 반복하시려고요? 제 누나 유연서가 어떻게 죽은 건지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그 짓을 이번엔 온다연에게 또 똑같이 반복할 생각이신 거예요?”그는 이를 빠득 갈았다. 목과 이마엔 핏줄이 툭 튀어나와 있었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꿈 깨세요!”그의 말에 최금영과 유자성의 표정이 확 변했다.유연서는 유씨 집안의 아픔이자 비밀이었다. 그리고 유강후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유재성과 유강후에겐 엄청난 상처가 된 일이었다.어느 한번은 유씨 가문에서 20년 넘게 일한 사용인이 유재성의 앞에서 유연서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늘 말수가 없고 무뚝뚝하던 유재성은 바로 화를 내며 경호원을 불러 쫓아내 죽일 뻔했다.그랬기에 그 뒤로 누구도 유연서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강후가 유연서의 이름을 언급하자 최금영과 유자성의 안색이 변했다.최금영은 부아가 치밀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유강후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엄숙하게 말했다.“너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너도 네 아빠와 똑같구나. 다들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유강후는 차갑게 그녀를 보았다. 두 눈에 담긴 음험함에 최금영은 다소 멘탈이 무너지며 눈물을 흘렸다.“나도 알고 있다. 너와 네 아빠가 날 원망하고 있
유강후는 우뚝 멈추어 섰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그저 차갑게 말할 뿐이다.“형, 형은 본인만 잘 숨기고 있으면 아무도 형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지 모를 거로 생각해요? 형이 어떻게 지금 형수랑 결혼할 수 있었는지, 형이 더 잘 알겠죠!”유자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주먹을 꽉 쥔 그의 손등 위로 퍼런 핏줄이 드러났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음험해진 눈빛으로 떠나가는 유강후의 뒷모습만 빤히 보았다.유씨 가문 본가 물탱크 옆에 작은 창고가 있었다. 평소엔 장비들을 보관해두는 곳이었지만 가끔 사람을 벌하는 방으로 쓰기도 했다.온다연은 이곳에 한두 번 갇혀본 것이 아니었다.과거의 수많은 시간 동안 그녀는 수없이 이곳에 갇혔었다.제일 오래 갇혀 있었던 적은 유하령과 유민준이 밀어 넣은 그때였다. 그때 그녀는 이틀 꼬박 갇혀 있었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만약 물탱크에 문제가 생겨 관리인이 수리하러 오지 않았더라면 그때 아마도 탈수 증상으로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때 그 시절 아무리 이곳에 갇혀 있어도 그녀는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그런데 이번은 아니었다. 온다연은 얇은 니트 한 장만 입고 있었다.비록 여긴 밀폐된 공간이라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겨울이라 기온은 영하 10도 이상 내려갔고 그녀는 실내화를 신고 있었기에 보온 작용이 전혀 없었다.비닐 더미에 몸을 한껏 웅크린 그녀는 추위에 이미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고 얼른 유강후가 자신을 찾으러 와 주길 바랐다.비록 그가 유씨 집안사람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두 사람의 사이는 예전보다 많이 달라졌기에 그녀가 이곳에서 얼어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극한의 추위에서 사람의 체온이 빨리 떨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은 자신이 추위에 아이스크림이 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온몸이 아프면서도 간지러웠다.게다가 의식도 점점 흐릿해져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그녀는 절망에 빠지지 않
이런 통증에 온다연은 조금 의식을 되찾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말했다.“아저씨, 와줬네요.”유강후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목소리는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잘 나오지 않았다.가슴이 너무도 아파 목이 메어버린 것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는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왔네.”온다연이 작게 대답했다.“안 늦었어요. 이렇게 저 문을 열어준 사람도 아저씨가 처음인걸요. 그래도 여름보다 겨울이 더 버틸 만했어요.”유강후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말이다.그는 낮게 말했다.“내가 일찍 그 문을 열었어야 했어.”‘아니, 일찍 열었어도 소용이 없었을 거야. 애초에 10년 전에 내가 직접 옆에 두고 키웠어야 했어!'“다 내 잘못이야.”온다연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점차 체온이 돌아오면서 감각이 되살아나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아저씨, 저 너무 추워요.”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온다연은 그의 코트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아저씨는 안 추워요?”유강후는 그녀를 더욱 꽈악 끌어안았다.“안 추워. 다연이를 안고 있어서 하나도 안 추워.”온다연은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으며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우디향을 깊이들이 마셨다.너무도 옅어 거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아저씨, 아저씨는 왜 유씨 집안 사람인 거예요?”바람은 조금 세게 불었다. 유강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듣지 못했고 그녀를 안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계단 위에 있는 방은 문이 열려 있었다. 안은 난방해둔 것인지 따듯한 기운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 그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장화연이 다급하게 달려왔다.온다연의 모습에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도 안쓰러운 표정이 생겼다.몸은 추위에 이미 파랗게 되어 있었고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는 목을 타고 입고 있던 니트까지 빨갛게 물들였다.게다가 그 피마저도 얼어붙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유강후의 손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손에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온다연은 그의 손을 보며 천천히 잡아 자신의 입가에 가져간 뒤 가볍게 뽀뽀하며 말했다.“피가 나요.”유강후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온다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처음부터 그녀를 지켜주지 않은 것에 후회하고 있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온다연이 유씨 집안에서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지 말이다. 유하령 뿐만 아니라 유씨 집안 모두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괴롭힘을 당했는지 모르고 있었다.오늘 그들의 만행을 목격한 후에야 그녀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지 깨닫게 되었다.그들의 괴롭힘으로 그녀는 목숨마저 잃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 살아가는 것조차 문제가 되었다.심지어 이건 유씨 가문에서만 있을 때 당한 괴롭힘이었다.유씨 집안에서 나온 뒤에도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혔으니 그는 그녀를 더 깊은 심연 속에 밀어 넣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그녀는 이렇게 몇 년을 살아왔기에 괴롭힘을 당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울지도 않고 마음속에 담아두며 혼자 끙끙 앓는 사람이 되었다.어쩌면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 마음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눈물을 흘리면 더 심한 괴롭힘이 그녀를 맞이했다.그녀의 보드랍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만질 때마다 그에게 그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그 안에서 얼어 죽었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그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헬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찍 도착해 그녀를 구할 수 있지 않았는가.이때 유하령이 쳐들어오며 온다연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천박한 X, 어디서 감히 연기해? 네가 우리 가문에서 거저먹고 잔 세월만 해도 10년이야! 은혜를 갚지 못할망정 되려 복수를 해?! 너 때문에 우리 증조할머니가 지금 화병으로 쓰러지셨다고, 알아?”말을 하면서 유하령은 달려와 온다연을 또 때
하지만 아무리 닦으면 닦을수록 불쾌했다.온다연의 몸은 튀어버린 피 몇 방울로 점점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차가웠던 마음에 불에 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안 돼, 안 돼!”그녀는 정신줄을 놓은 사람처럼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멍하니 유강후를 보았다.무표정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는 유하령을 빤히 보고만 있는 유강후의 모습은 아주 음험했다.“내가 전에도 말했지, 건들지 말라고. 그런데 넌 내 말을 듣지 않았어, 유하령. 이건 시작이라는 걸 알려주지.”말을 마친 그는 물티슈를 뽑아 손과 옷에 묻은 피를 닦았다.그 모습은 고귀하면서도 깔끔해 보여 꼭 방금 본 폭력적인 장면은 그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눈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고통에 울고 있는 여자는 바로 그가 어릴 때부터 아꼈던 조카였다.모든 걸 목격한 심미진이 달려오며 당황한 기색으로 유하령을 잡아당겼다.그러나 유하령은 더욱 고통스러워 더 크게 울 뿐이다.심미진은 유강후를 보며 따져 물었다.“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하령이 작은 아빠잖아요.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거죠?”유강후는 피를 닦다가 들려오는 심미진의 질책에 고개를 확 들더니 차갑게 노려보았다.그의 눈빛에 담긴 살기에 심미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심장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안색은 하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목소리에선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그, 그런 뜻이 아니라...”유강후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그러는 형수는 온다연 친이모잖아요. 형수도 본인 친조카를 모함하는데 난 왜 이런 짓을 할 수 없는 거죠?”심미진의 눈이 커지며 그가 내뿜는 엄청난 한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분명 난방을 틀어놓은 방이었지만 그녀는 얼음 동굴에 있는 것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전, 전 모함한 적 없어요...”소란을 들은 유자성이 방으로 들어왔다.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그는 충격에 빠졌다.그는 얼른 유하령에게 달려가 나무 테이블에 박힌 칼을 빼내곤 사람을 시켜 병원에 보냈다.현장은 아수라장
드넓은 서재에서. 미래그룹의 대표, 인정머리 없이 잔인하기도 유명한 그 남자가 경건한 자태로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의자에 기댄 채 잠든 사람을 쓰다듬고 있었다. 집중하는 표정만 보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쓰다듬는 줄 알 것이다.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상대를 바라봤다. 꼼꼼히 바라보는 것이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않을 기세였다.곁에 있는 사람이 충격받을 수밖에 없는 집착이다. 더군다나 의자에서 잠든 사람은 다름 아닌 유씨 집안 모두가 싫어하는 고아였다.유자성은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따져 묻고 싶었다. 이때 장화연이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했다.“큰 도련님도 셋째 도련님의 성질을 잘 아시잖습니까. 일할 때는 방해받는 걸 싫어하십니다. 밖에서 기다려주십시오.”유자성은 유강후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강후 병이 또 도졌어요?”“네. 사모님이 가정의를 보내주셨으니 내일쯤 도착하실 겁니다.”“혹시 연서 물건을 온다연한테 주던가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연서 아가씨 물건은 셋째 도련님께서 직접 관리하십니다.”유자성은 미간을 찌푸렸다.“강후는 고아를 연서로 생각하고 있어요. 연서가 죽었을 때...”그는 말을 마저 하지 못했다. 유강후가 온다연을 안고 나왔기 때문이다. 유자성을 보고도 유강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는 그저 팔뚝에 힘을 주며 침실로 걸어갔다.유자성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유강후가 온다연을 유연서로 착각했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유강후의 침실로 들어간 것도 망각했다.그는 밖에서 한참이나 기다렸다. 유강후는 잠시 후 느긋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두 사람 모두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안색이 어두웠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유자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령이 말을 심하게 하는 건 나도 알아. 아무리 그대로 친조카잖아. 어릴 때부터 봐온 애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유하령이 언급되자
유자성의 말투는 마치 유강후가 효심이 없다고 탓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유강후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했다.“내가 가서 소용없어요.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아닌 아들이니까요.”유자성은 미간을 찌푸렸다.“할머니는 우리 중에서도 널 가장 좋아해. 네가 그런 짓을 했으니 화내는 것도 당연하지.”“좋아해요?”유강후는 피식 웃더니 비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강씨 가문의 산업이 가져다줄 이익만 노리는 거겠죠.”“유강후! 네 외할머니 되는 사람이야!”유강후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가능하면 아니길 바라고 있어요.”“너...!”유자성도 슬슬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해가 안 됐다. 말수 적고 차분하던 유강후가 왜 한낱 고아 때문에 이렇게 변했는지를 말이다.‘이렇게까지 죽은 연서가 그리웠던 건가?’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강후야, 너도 이제는 잊고 넘겨야지. 연서가 세상을 뜬 지도 수년이야.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서 살래?”“애초에 관심 없던 남들은 모르겠지만, 당사자한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에요.”“그렇다고 해서 온다연을 연서로 착각해?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냐고.”유자성이 말을 마친 순간 거실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숨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의 정적이었다.아무도 몰랐다. 복도의 한쪽 끝에 서 있던 온다연이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던 것을 말이다.물론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 못 했다. 강해숙이 입원하고 유재성이 유강후를 병원으로 부른다는 것만 이해했다.‘나를 연서로 착각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연서는 누구야? 누구길래 나를 통해 그리워해야 하는 거지?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은별이 아니었나?’이때 장화연이 지나가다가 온다연이 맨발로 문어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다연 씨, 바람이 찹니다. 들어가서 쉬세요.”온다연은 거실을 힐끗 보고 나서 방 안에 들어갔다.거실에서 유강후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말했다.“날 형이랑 똑같게 생각하지 마요. 난 아내가 우울증에
유강후는 안색이 변하며 온다연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턱을 잡으며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내가 언제 엿들어도 된다고 했지?”그의 힘에 온다연은 턱이 아팠다. 금방 녹기 시작한 마음도 다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일부러 들은 건 아니에요. 목말라서 물을 찾다가 듣게 됐어요.”그녀는 유강후의 손을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자꾸 이렇게 잡지 마요. 아파요. 입 안도 아프고...”유강후는 이제야 그녀를 풀어주고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그 이름 언급하지 마.”“...네.”유강후는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내려놓았다.“혼자서도 잘 수 있지? 난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다녀와야 해. 네가 깨어난 다음에 영원으로 돌아가자.”그는 이불까지 덮어주고 나서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잘 자.”유강후는 해가 지고 밤이 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잘 만큼 자고 일어난 온다연은 구월이를 안고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유강후의 서재에는 책이 아주 많았다. 서재의 벽면을 전부 채우고도 모자라서 창고까지 있었다. 이곳에는 주로 경제학에 관한 책이 있었다. 같은 책도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된 버전이 있었다.온다연은 영어로 된 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렇게 몇 장 펼치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그녀는 사진을 주워들었다. 약간 색이 바랜 사진은 비닐까지 씌워져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이젤 앞에 앉아서 환하게 웃었다.순진한 미소는 한없이 아름다웠다. 이젤에는 그리다 만 해바라기가 있었다. 이 사진을 본 순간 온다연은 손을 흠칫 떨었다. 사진의 모퉁이에는 자그마한 글씨가 있었다.[사랑하는 연서.]수려한 글씨체는 전문가의 교육을 받은 적 있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심장이 너무 아팠다. 호흡도 서서히 가빠졌다.‘이 사람이 연서... 인 거지? 그래서 그런 말이 나왔던 거구나. 아저씨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건가? 그래서 나은별도 나도 비
온다연이 너무 안쓰러워 덩달아 괴로움이 밀려온 유강후는 끊임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니야. 다연이는 최고의 엄마야.”“우리 아이는 다연이를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꿈에 나타나잖아.”“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않아도 돼.”온다연은 울먹였다.“꼭 돌아오겠죠? 강후 씨, 아이는 다시 절 찾아올 거예요. 맞죠?”“그런데 꿈속에는 신발 한 켤레도 없이 맨발이었어요. 너무 불쌍해요.”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온다연은 가슴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그곳이 너무 춥대요. 왜 데리러 안 오냐고 원망하는데...”“강후 씨, 아이가 추워하나 봐요.”“나 너무 힘들어요.”“괴로워요.”...극심한 괴로움과 고통은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유강후의 옷자락을 적셨다.그는 온다연의 피와 살에 녹아들듯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돌아올 거야. 무조건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다연아, 이제 그만 아파해.”...한참 동안 울다가 지쳐버린 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안방 문을 열려 있었는데 침대는 깨끗이 치워졌고 도우미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찾고 있었다.그에게 안겨있던 온다연은 발버둥 치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팔찌가 부러진 곳에 무릎을 꿇더니 나무판자 틈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며 찾았다.온다연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마침내 호박석은 바닥과 벽이 맞닿은 틈새에서 발견됐다.온다연은 그것을 손에 쥔 채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예 몰랐던 도우미들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나지 않아 푹 숙인 채 입을 닫았다.유강후는 그녀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품에 안았다.“다연아, 이제 찾았으니까 좀 쉴래?”온다연은 호박석에 담긴 아이의 체온이라도 느끼려는듯 손에 꽉 쥔채 놓지 않았다.“강후 씨, 아이가 잠든 곳에 가고 싶어요.”온다연은 몸이 너무
‘호박석에 들어있는 게 정말 아이의 머리카락이라고?’온다연이 차고 있던 팔찌는 엊그제 영문도 모른 채 끊어졌고 그때 호박석을 잃어버렸다.그걸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를 잃어버렸으니 죄책감이 밀려왔고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 다짐했다.‘찾아야 돼. 아직 그 방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갔다.이를 본 장화연도 얼른 뒤따라가며 그녀를 말렸다.“다연 씨,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지 아이를 만날 수 있어요.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이대로 나가면 다칠 겁니다.”온다연은 주저 없이 장화연을 밀어냈다.“비켜요. 장 집사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요.”장화연은 경호원에게 눈치를 주고선 여전히 온다연을 부축했다.“그럼 뭐라도 좀 먹고 가세요. 엄마가 힘없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속상해할 겁니다.”그 말을 듣고 멈칫한 온다연은 곧바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내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싫어하겠지?’‘하긴 이런 엄마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온다연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죽 먹을게요. 줘요.”장화연은 그녀를 작은 식탁으로 부축해 갔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온다연은 죽을 필사적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너무 급하게 먹은 탓에 속이 안 좋은지 곧바로 심한 기침을 이어갔다.장화연을 다급하게 죽그릇을 옆으로 치웠다.“이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때마침 병실로 돌아온 유강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기침하고 있는 온다연을 발견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다급하게 달려오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유강후는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단호하게 호통쳤다.“사람이 몇인데 이런 일도 똑바로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한 명을 케어하는 게 어려워?”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때 온다연이 유강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러고선 팔찌를 뚫어져라 쳐
장화연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답했다.“다연 씨는 가족이 없잖아요. 아이가 유일한 희망인데 지금은...”“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도련님은 무조건 다연 씨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망설임 없는 확고한 모습을 보여줘야 다연 씨는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잠드신 것 같은데 침대로 옮기시죠.”유강후는 신생아를 안은 듯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침대로 옮겼다.온다연의 연약함은 깃털과도 같아서 그가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찢어질 게 틀림없다.하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유강후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이렇게 하면 온다연이 그에게 잡혀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어느새 유강후도 잠이 들었다.꿈속에는 그는 온다연과 두 아이를 낳았다.아들은 유강후를 닮고 딸은 온다연을 닮았는데 두 아이가 유강후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그들은 평범한 부부처럼 밤에는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아침에는 달콤한 입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했다.유강후는 매일 그녀에게 해바라기 한 송이를 선물했고, 온다연은 늘 밝은 미소와 부드러운 포옹으로 그에게 보답했다.그러던 어느 날 온다연이 선물이라며 그림을 주었다. 그림에는 해바라기로 가득한 꽃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이 그림의 이름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얘기했다.심장이 터질듯한 행복감이 밀려온 유강후는 이대로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자존심만 세우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귀함을 벗어던지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은 여생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생겼다.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가질 수 없는 게 제일 비참하다.그 시각 온다연도 꿈을 꾸고 있었다.꿈속의 온다연은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고 누군가에게 손을 밟혔다.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이건 벌이야.”나은별은 그의 곁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강후 씨, 벌이 너무 가벼운데? 말 잘
하지만 이제 온다연에게 아이는 없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미 없었을 수도 있다.온다연은 더 이상 유강후가 본인을 속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그와 따지려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이미 모든 것에 실망했으니 다시 누군가는 사랑할 능력과 용기조차 없었다.따스한 햇볕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이 세상은 온다연에게 너무 각박했고 살고픈 희망을 가질때 쯤 잔인하게 짓밟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온다연의 손을 어루만지더니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며 말했다.“아침 바람은 쌀쌀하니까 여기에 앉아 있지 마.”그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온다연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나은별을 만나고 왔겠지?’‘이 향기는... 나은별에게서 나는 건가?’‘역시나 나보다는 나은별이 더 중요하구나. 전화 한 통에 밤새도록 자리를 비운 걸 보면...’‘됐다. 누굴 좋아하든 마음대로 해.’온다연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이때 장화연이 죽과 함께 아침밥을 챙겨왔다.“도련님, 이쪽에서 드세요. 제가 다연 씨를 돌볼게요.”“내가 할게. 죽 이리 줘.”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 한 후 푹신한 쿠션을 그녀의 허리 뒤에 놓아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줬다.그럼에도 온다연은 힘이 없는 듯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쿠션 두 개를 더 가져와 그녀를 지탱했고 모든 걸 마친 후 그는 죽을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마침 장화연은 죽을 그릇에 옮겨 닮고 있었다.유강후는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위가 안 좋으니까 앞으로 이것보다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줘.”“알겠습니다. 이것도 2시간이나 고아서 만든 죽입니다.”“다연이 언제 깨어났어?”장화연은 온다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깨어난 지 여섯시간쯤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지금껏 계속 말이 없었고 아침부터 저쪽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합니다.”그녀는
한바탕 난리 후 의사도 진땀을 뺐다.다행히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었다.보름이 넘도록 쉬지 못한 데다가 온다연이 걱정되어 줄곧 긴장한 상태였으니 몸이 지쳐 쓰러진 게 틀림없다.이런 상황에서도 온다연의 곁을 지키려고 하자 의사는 안된다며 강제로 수면제 한 알을 먹였다.곧이어 이권과 장화연도 들어왔다.장화연은 초췌한 모습의 유강후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지만 표정만은 담담했다.“오늘은 푹 쉬세요. 다연 씨의 곁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유강후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눈뜨면 바로 불러.”이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아무 생각 말고 얼른 주무세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어르신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온다연이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수면제를 먹은 탓에 잠이 쏟아졌다.곧이어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약병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간호사가 시야가 들어왔다.간호사는 잠에서 깬 유강후를 보더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에센스 하나를 깨뜨려서 제 몸에 향이 배었습니다.”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으니까 나가봐.”그렇게 말하고 그는 일어나 침대에서 나왔다.그래도 억지로라도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유강후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아홉시간 정도 잤다는 걸 알아챘다.바깥은 이미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권, 들어와.”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이권은 안색이 많이 좋아진 유강후를 보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어제는 정말 표정이 않았는데...”“왜 안 깨웠어?”유강후의 말투에서는 언짢음이 담겨있었다.“깊이 자고 계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습니다. 도련님, 거의 1년 넘게 맘 편히 잠을 못 주무셨잖아요. 다연 씨는 장 집사님이 지키고 있으니...”“이권!”유강후는 싸늘했다.“이제 제멋대로 행동하는구나? 이번 달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네 말은 배에 탄 사람 들중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유강후는 단 한 번도 탑승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다.그 배는 유강후의 소유였기에 당시 초청을 받은 사람들도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굳이 꼽자면 소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사이가 어색한 것 빼고는 거의 다 유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집안이다.집안의 뿌리까지 서로 얽혀있는 사이랄까?아무리 소씨 가문과 관계가 어색하다고 한들 가문 후계자가 유강후의 소꿉친구이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능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책임감이 있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니까.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는 단지 수상쩍은 생각이 들 뿐입니다. 도련님이 물에 들어갔을 때 마침 상어 떼가 나타났잖아요. 배에 타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 한재민 씨만 도련님을 발견한 것도 뭔가 좀 걸립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계획 살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타깃은 도련님이 아닌 한재민 씨죠...”“듣기로는 그날 한재민 씨가 나은별 씨와 엄청 크게 다퉜다고 합니다.”유강후는 눈빛이 반짝였다.“이 일이 나은별이랑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이권이 답했다.“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그 답을 들은 유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은별이 성격이 더러운 건 사실이야. 우리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건 알지? 내가 아는 나은별은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이 아니야. 재민이의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그는 잠시 망설였다.“권아, 앞으로 이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내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만에 하나 정말 크게 싸웠다 해도 상대를 죽일 만큼은 아닐 거야.”이권은 말문이 막혔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나은별이 걸어온 전화였기에 이권은 자연스레 스피커폰으로 돌렸다.통화가 연결되자 곧이어 연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보러 와줘. 응?”“어제 꿈꿨는데 계속 그 장면이 떠올라서 너무 괴로워.”“재민 씨
이권은 재빨리 입을 닫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유강후는 자고 있는 온다연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자리 좀 지켜줘. 다연이 눈뜨면 바로 연락하고.”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답했다.“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지는 마세요. 다연 씨는 지금 대표님이 필요합니다.”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장화연은 그들을 배웅했다.그 시각 침대 위의 온다연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권은 유강후가 나오자 재빨리 옆에서 다가갔다.“도련님, 헬기는 준비했습니다.”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통보하는 거야? 제멋대로 결정하는 거 보니까 미래 그룹의 대표를 해도 되겠어.”“그래도 도련님을 대신해 총을 막았으니 적어도 한번은 찾아가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유강후는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피우지 않고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경원은 매우 컸고 반짝이는 네온 불빛과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했다.한때 유강후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도시마저 그의 발밑에 있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실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온다연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다.만약 지금 가진 모든 것으로 아이의 생명을 바꾸고 온다연의 마음과 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내놓을 준비도 되어있다.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은 없다.담배 연기가 가라앉고 불꽃이 반쯤 꺼졌을 때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권아, 넌 와이프랑 사이가 좋아?”“성격이 예민한 것 말고는 괜찮아요.”“와이프 임신했다며? 몇 개월이야?”이권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3개월이요. 임신해서 그런지 더 예민하더라고요.”유강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아이가 태어나면 큰 선물을 줄게. 권아,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밝은 불빛과 달리 유강후는 오히려 밤의 어둠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울고
“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아이는 다시 생길 거야. 너만 건강하다면 반드시 선물처럼 찾아올 거야.”...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온다연은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급성 위경련으로 이미 약했던 위가 강한 자극을 받아 대량의 출혈을 일으켜 피를 토해낸 것이다.곧이어 응급 처치 및 수혈이 시작됐다.장장 두 시간 정도 지속되었다.그 후 온다연은 병실로 옮겨졌지만 밤이 될 때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의사도 이런 상황이 의외인 듯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진찰을 마친 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위출혈로 찾아오는 환자는 지금도 많습니다. 다만 그 심각도에 따라서 상황이 나뉘죠. 대량의 피를 토해낸 심각한 경우라면 30분 이내에 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다연 씨의 경우 이미 심한 위궤양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절대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보통 출혈이 끝나고 상태가 점차 호전되면 5시간 안에 의식을 되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열 시간이 지나도록 눈을 감고 있네요.”“대표님, 제 생각에 다연 씨는 스스로 코마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거죠.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시죠.”의사가 떠난 후 유강후는 오랫동안 온다연의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그는 손으로 온다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온다연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말랐고 성격도 많이 변해 있었다.어쩌면 아이가 바뀐 걸 알아채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해 육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진 것 같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대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말자. 우리 함께 맞서 싸우자.”...얼마 후 장화연이 들어왔다.유강후는 외로운 조각상처럼 홀로 온다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세 시간 전에 봤던 모습과 똑같이 자세조차 바꾸지 않은 그를 보며 장화연은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유
그 말과 함께 온다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아이를 다른 사람한테 주지마요. 안 그러면 확 죽어버릴 거예요.”“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아이만...”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온다연을 일으켰다.“다연아, 거짓말이 아니야. 저 아이는 우리 아들이 아니라니까?”온다연은 그를 바라봤다.“말했잖아요. 우림이랑 유전자 검사해 봤다고요. 혈연관계가 없다는 결과를 이미 확인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거예요?”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저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진짜 아들은요? 누구한테 줬어요?”유강후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고 점점 더 과격해졌다.“말하라고요. 내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요.”어느새 유강후의 눈에도 슬픔이 차올랐지만 입을 꾹 닫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왜 대답을 못 해요? 말해줘요. 내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말하라고!”이때 뒤에 서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제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권을 쳐다보며 물었다.“이권 씨는 알고 있죠?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이권, 입 닫아.”유강후가 단호하게 호통을 쳤지만 이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다연 씨, 아이는 죽었어요.”“그 작은 아이가 5개월 동안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요.”“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련님의 손바닥 위에서 마지막 숨이 끊겼습니다.”그 말은 날벼락처럼 날아가 온다연의 가슴을 후벼 찧었다.‘죽었다고?’‘내 아들이 죽었다고?’그녀의 눈빛은 서서히 생기를 잃었고 마치 영혼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것처럼 공허하고 슬퍼졌다.‘아니야. 분명히 건강을 되찾고 있었어.’‘거짓말하는 게 분명해. 세상이 지금 날 속이고 있는 거야.’심장이 멎은 듯 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몸을 떨면서 중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