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길은 앞에 작은 충돌사고까지 나면서 교통경찰까지 출동했지만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기어가듯이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는 차를 보며 한소은도 조바심이 났다. 앞을 바라보니 아득하니 길게 줄 서 있는 차들이 보였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오이연에게 고개를 돌렸다.“조급할 건 없어. 너는 차 타고 천천히 와. 나는 일단 내려서 이 길만 지나가고 다시 생각해 볼게.”“차가 이렇게 많은데 위험하잖아!”오이연이 걱정스럽게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괜찮아. 길이 먼 것도 아니고 내가 알아서 조심할게. 지금 안 가면 늦어.”그녀는 전방을 힐끗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기억이 맞다면 근처에 호텔로 바로 갈 수 있는 골목길이 있었다. 그곳으로 걸어서 가는 게 더 빨랐다.“그럼… 조심해야 해.”오이연은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한소은이 이미 결정을 내렸기에 더 만류할 수도 없었다.차가 멈추자 한소은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길가로 뛰어갔다. 손에는 아까 그 박스가 들려 있었다. 이대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가능한 빨리 호텔에 도착해야 했다.기자회견장.조용하던 현장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과일과 디저트로 배도 불렸고 시간은 일분일초 흐르고 있었다.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이 다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주인공은 어디 있죠? 계속 이렇게 미루기만 할 건가요?”“맞습니다! 우리는 환아를 존중하고 믿었기에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저희를 가지고 놀면 안 되죠. 바보도 아니고. 지금 몇 신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겁니까!”“십분 더 기다려서 안 오면 철수하겠습니다!”“맞아요! 그냥 앞에 나설 용기가 없는 거잖아요!”날카로운 마이크 음이 이들의 소란을 잠재웠다.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무대에 이끌렸다. 검은색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김서진이 천천히 무대로 걸어 올라왔다.환아의 대표이자 강성을 쥐락펴락하는 존재의 등장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기자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다가 이런 질문을 했다.“오늘 오신 분들 중에 조향업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많은 거로 들었습니다. 조향사분들은 향수 제조 과정에서 독극물을 주입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향수의 본연의 향에 영향 주지 않고 제작이 가능한 겁니까?”기자들은 질문을 하러 온 자리에서 역으로 질문을 받을 줄 몰랐는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우리는 질문을 하러 왔지 질문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김서진이었기에 속으로만 외칠 뿐,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제 의혹을 풀어주실 분은 안 계신 건가요?”김서진이 다시 물었다.태도는 진솔했고 일부러 시비를 걸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부 조향사들은 김서진과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이 간질간질했다.환아는 뷰티 업계의 최강자이며 지금 안 좋은 스캔들에 휘말렸다고 해도 그 자체의 저력으로 얼마든지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다. 조향사는 당연히 더 좋은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더 높은 고지를 볼 수 있다.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김서진이 만족할만한 답변을 내놓을까 고민했다. 김서진의 신뢰를 얻을 수만 있다면 환아에 입성하고 더 나아가서 수석 조향사의 자리까지 갈 수도 있었다.“대표님이 꺼내신 질문에 대해서 저희도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솔직히 저도 시험해 본 적 있고요.”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하지만 지금의 기술과 조건으로 그건… 불가능합니다.”그의 말에 기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대놓고 한소은을 감싸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한소은 씨가 어떻게 하셨는지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향료의 성분 자체가 워낙 불안정하기에 자칫 잘못 배합하면 향이 휘발해 버립니다. 향수를 제작하려면 들어가는 성분 모두 정밀히 따져야 하고 제작 과정 또한 까다롭습니다. 온갖 재료를 한 번에 섞는 게 아니라 조금씩 주입하여야 하죠. 독성이 강한 물질을 향료에 배
“사실 한소은 씨는….”김서진은 자리에서 일어선 그 기자를 노려볼 뿐 말이 없자 답답해진 비서가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아한 목소리가 입구에서부터 울려 퍼졌다.“늦어서 죄송합니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급급히 사과부터 했다. 이마에 난 땀 때문에 앞머리가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옷차림도 캐주얼한 복장이었다.한껏 몸단장을 하느라 회견에 늦었다고 생각했던 기자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어쨌든 주인공이 등장했으니 헛걸음은 아니었다. 한소은이 왜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오기 싫어서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게 아닐까? 일부 기자들은 속으로 이런 상상을 했다.김서진은 자신의 아내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손에 박스 하나를 들고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급할 거 없어요.”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그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비서를 비롯한 환아 담당자들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기자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철옹성 같았던 김서진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다정한 모습이었다.줄곧 스캔들 하나 없었고 누군가는 그를 게이로 의심했다. 그랬던 환아 대표가 사람들이 가득 모인 공공장소에서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인다?비록 김서진의 등장 자체가 한소은을 감싸고 나선 것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저는 괜찮아요.”한소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저 잘할 수 있어요.”“알아요.”여전히 느긋한 말투. 그녀가 등장한 순간부터 그의 눈길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기자들, 그리고 담당자들 모두 안 중에도 없었다.그는 탁자에서 생수 한 병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일단 물부터 마시고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요. 내가 곁에 있을게요.”“네.”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건네는 생수를 받았다.
차라리 아까 조향사가 말했던 것처럼 장난이라고 말했더라면 조금은 나았을 것이다.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인정해 버리면 기자들만 살판 난 거 아닌가?‘멍청한 여자 맞네. 저런다고 기자들이 카리스마 있다고 칭찬 글이라도 써줄 줄 알았나?’비서는 다시 상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김서진은 한소은을 제지할 마음이 전혀 없고 오로지 그녀만이 자신의 세상이라는 듯이 한소은만 바라보고 있었다.‘미쳤어! 대표님도 미치고 다들 미쳤어!’비서는 절망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 소란을 또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이를 악물고 계속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한소은 씨, 그러니까 녹음 파일을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편집했다는 얘기입니까? 하지만 한소은 씨가 독을 넣었다고 한 얘기에서는 끊기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만 편집된 건 아니라고 봅니다만.”한 기자가 이의를 제기했다.허를 찌르는 질문에도 한소은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녹음 파일을 정말 반복 재생해서 들으셨네요. 솔직히 제가 그 말을 한 부분은 편집된 게 아닙니다. 이건 인정합니다.”“하지만 여러분이 간과하신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말은 쌍방 얘기를 다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죠. 가끔은 처한 상황에 따라 같은 말이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합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녀가 뭘 할지 궁금했던 기자들은 목을 길게 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유성펜이 들려 있었다. 한소은은 뒤돌아서서 보드에 큼지막하게 글자를 적었다.환아 관계자들도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쓴 것은 단 한 글자였다.독!환아 측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비서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환아라는 견고한 왕성이 한소은이라는 여자 때문에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그녀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김서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화이트보드를 바
순간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그러고 보면 앞뒤 상황을 보지 않고 독이라는 단어 자체로 섣부른 판단을 한 게 맞는 것 같았다.환아 관계자들조차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당사자인 한소은만 담담하지만 주눅 들지 않은 얼굴로 좌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도 입지 않고 화장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존재했다.“그렇다면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안에 넣은 게 독이 아니면 뭐라는 얘기죠? 몸에 좋은 영양제라도 넣었단 말씀입니까?”한소은은 예상했던 질문이 나오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영양제는 아니지만 비슷한 성분이긴 합니다. 영양제도 몸에 좋은 거고 제가 넣은 성분도 그러하니까요.”“말장난 그만하시죠. 어쨌든 향료에 다른 것을 추가한 건 사실이잖습니까? 조향 과정에서 첨가제를 넣은 거죠? 도대체 뭘 넣었단 겁니까?”하지만 그녀의 순조로운 답변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선동하듯 말하자 주변 사람들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한소은은 미소를 거두고 정색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았다.“향료에 어떤 첨가제를 넣었는지는 이따가 말씀드리고 제가 왜 그걸 넣어야 했는지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자리로 돌아갔다. 씁쓸하고 아픈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다.모두가 입을 다물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한참이 지나 그녀는 드디어 고개를 들고 기자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다들 소식 들어서 아실 겁니다. 지난달에 저의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외할아버지는 엄격하지만 선량한 분이셨어요. 줄곧 몸도 건강하셨고요. 하지만 노년이 되자 불면증이 찾아왔습니다.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밤을 새우는 일이 일쑤였죠.”낮고 슬픈 목소리에 대부분 사람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노인에게는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을 주무시지
그녀가 농담 식으로 말하자 기자들도 웃음을 터뜨리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환아 관계자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서렸다. 상황이 이렇게 역전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최초의 해결 방안대로라면 녹음파일의 진위 여부를 놓고 따지거나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인정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안은 급한 불은 끌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의심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인터넷이 발전한 이 시대에 그들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이 나타나서 더 심도 있는 분석을 한 뒤에 녹음파일 속 음성이 한소은 본인 입으로 말한 것이 맞다고 선동할 수도 있었다.환아도 강압적으로 여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미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고 자본의 힘으로 이걸 억누른다면 사람들은 소문이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하지만 한소은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상황을 유도리 있게 잘 설명했다. 만약 누군가가 음성 파일을 가지고 또 시비를 걸어도 이제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한소은 본인이 쿨하게 인정했고 안에 무슨 성분을 넣었는지 다 공개했기 때문에 두려울 것 없었다.“하지만 한소은 씨. 저도 전에 실험을 해본 적 있는데 향료는 다른 성분을 섞으면 휘발성이 더 강해져요. 한소은 씨가 만든 향료가 정말 안정적인 향을 낸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실험에 성공하신 겁니까?”질문을 내놓은 사람은 가장 먼저 김서진의 질문에 대답했던 조향사였다.그는 딱 봐도 한소은의 성과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자신이 직접 여러 번의 실험을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나이도 어린 한소은의 실력이 자신보다 위라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한소은이 말한 것처럼 라벤더로 향초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라벤더 자체가 신경 안정 성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약 성분을 배합해서 향기로운 향료를 만드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도 놀라운데 그 실험이 성공했다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여기 샘플이 있습니다.”자리로 돌아간 한소은은 가져온 박스를 내놓았다. 안에는
“어떻습니까?”그가 움직임이 없자 답답해진 다른 조향사가 물었다.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소은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테스트 용지를 코에 가져갔다.그리고 말없이 티슈로 코끝을 닦고는 주저 없이 다른 유리병을 집어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그의 흥미로운 반응에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테스트 용지를 내려놓은 남자는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한소은에게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해낸 겁니까?”“반복 실험이죠.”한소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요! 나도 여러 번 실험했지만 매번 실패했어요. 그런데 한소은 씨는 강성에 돌아온 뒤에 그 짧은 시간 안에 두 병이나 만들었다고 했잖습니까! 그건 더 말도 안 되죠!”남자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유리병을 바라보았다.“강성에 돌아온 뒤에 실험을 시작했다면 당연히 불가능하죠. 하지만 예전부터 반복적인 실험을 했습니다. 성분과 향료, 그리고 필요한 용량까지 모두 제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회사에 돌아온 뒤에는 레시피대로 준비하고 조수를 시켜 제작만 하게 했으니 당연히 빠르죠.”한소은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빼앗아서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많이 늦어버렸네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한번 기자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이미 대부분 기자들은 그녀의 말에 공감하고 그녀의 편으로 돌아선 뒤였다. 조금 전까지 이 여자는 김서진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한소은은 멍청하고 겁 많은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대범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게다가 향료에 한약 성분을 배합하면서 향에 영향 주지 않는 샘플은 일반인이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도 독특하고 제조법도 대단했다.“이제 자리로 돌아가 주시죠.”한소은은 아직도 자신의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조향사에게 한마디 귀띔했다.그 사람은 아직도 넋이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멍
환아 담당자가 마무리 멘트를 하는데 누군가가 그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렇게 정성을 들여 약까지 만들었는데 외조부께서는 돌아가셨지 않습니까?”그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한소은의 가슴을 찔렀고 현장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식어버렸다.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조소 섞인 미소를 지으며 한소은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저 사람은 누구죠?”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당사자에게 저렇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 있죠?”다른 사람의 상처를 파헤치는 게 기자들 일이지만 그들도 상대를 봐가면서 말을 한다.환아의 체면도 세워줘야 하고 중요한 건 오늘 김서진 대표까지 자리했다. 차씨 가문 어르신의 죽음은 아무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남자의 말은 좋게 해석하면 어떤 약을 써도 외조부의 죽음을 막지 못했으니 소용없다는 뜻이었고 나쁘게 해석하면 그 향초가 있어서 외조부가 사망하신 게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들릴 수 있었다.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상황에 누군가는 남자가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누군가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동조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재미난 구경을 보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도대체 목숨이 몇 개이기에 김서진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여자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일까?기자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남자와 한소은,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김서진을 번갈아 보았다.한소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노려보았다.남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옷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내듯이 옷을 털었다. 그러고는 전혀 두려움 없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돌아가려던 기자들도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한소은 씨, 또 만났네요.”그녀의 앞에 다가간 그가 고개를 한껏 쳐들고 말했다.“정하진 씨가 여긴 무슨 일이시죠?”한소은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악수조차 청하지 않았으니 굳이 먼저 악수를 청할 필요도 없었다.정하진은 야비한 미소를 머금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들을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