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그러고 보면 앞뒤 상황을 보지 않고 독이라는 단어 자체로 섣부른 판단을 한 게 맞는 것 같았다.환아 관계자들조차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당사자인 한소은만 담담하지만 주눅 들지 않은 얼굴로 좌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도 입지 않고 화장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존재했다.“그렇다면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안에 넣은 게 독이 아니면 뭐라는 얘기죠? 몸에 좋은 영양제라도 넣었단 말씀입니까?”한소은은 예상했던 질문이 나오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영양제는 아니지만 비슷한 성분이긴 합니다. 영양제도 몸에 좋은 거고 제가 넣은 성분도 그러하니까요.”“말장난 그만하시죠. 어쨌든 향료에 다른 것을 추가한 건 사실이잖습니까? 조향 과정에서 첨가제를 넣은 거죠? 도대체 뭘 넣었단 겁니까?”하지만 그녀의 순조로운 답변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선동하듯 말하자 주변 사람들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한소은은 미소를 거두고 정색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았다.“향료에 어떤 첨가제를 넣었는지는 이따가 말씀드리고 제가 왜 그걸 넣어야 했는지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자리로 돌아갔다. 씁쓸하고 아픈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다.모두가 입을 다물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한참이 지나 그녀는 드디어 고개를 들고 기자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다들 소식 들어서 아실 겁니다. 지난달에 저의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외할아버지는 엄격하지만 선량한 분이셨어요. 줄곧 몸도 건강하셨고요. 하지만 노년이 되자 불면증이 찾아왔습니다.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밤을 새우는 일이 일쑤였죠.”낮고 슬픈 목소리에 대부분 사람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노인에게는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을 주무시지
그녀가 농담 식으로 말하자 기자들도 웃음을 터뜨리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환아 관계자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서렸다. 상황이 이렇게 역전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최초의 해결 방안대로라면 녹음파일의 진위 여부를 놓고 따지거나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인정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안은 급한 불은 끌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의심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인터넷이 발전한 이 시대에 그들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이 나타나서 더 심도 있는 분석을 한 뒤에 녹음파일 속 음성이 한소은 본인 입으로 말한 것이 맞다고 선동할 수도 있었다.환아도 강압적으로 여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미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고 자본의 힘으로 이걸 억누른다면 사람들은 소문이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하지만 한소은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상황을 유도리 있게 잘 설명했다. 만약 누군가가 음성 파일을 가지고 또 시비를 걸어도 이제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한소은 본인이 쿨하게 인정했고 안에 무슨 성분을 넣었는지 다 공개했기 때문에 두려울 것 없었다.“하지만 한소은 씨. 저도 전에 실험을 해본 적 있는데 향료는 다른 성분을 섞으면 휘발성이 더 강해져요. 한소은 씨가 만든 향료가 정말 안정적인 향을 낸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실험에 성공하신 겁니까?”질문을 내놓은 사람은 가장 먼저 김서진의 질문에 대답했던 조향사였다.그는 딱 봐도 한소은의 성과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자신이 직접 여러 번의 실험을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나이도 어린 한소은의 실력이 자신보다 위라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한소은이 말한 것처럼 라벤더로 향초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라벤더 자체가 신경 안정 성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약 성분을 배합해서 향기로운 향료를 만드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도 놀라운데 그 실험이 성공했다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여기 샘플이 있습니다.”자리로 돌아간 한소은은 가져온 박스를 내놓았다. 안에는
“어떻습니까?”그가 움직임이 없자 답답해진 다른 조향사가 물었다.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소은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테스트 용지를 코에 가져갔다.그리고 말없이 티슈로 코끝을 닦고는 주저 없이 다른 유리병을 집어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그의 흥미로운 반응에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테스트 용지를 내려놓은 남자는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한소은에게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해낸 겁니까?”“반복 실험이죠.”한소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요! 나도 여러 번 실험했지만 매번 실패했어요. 그런데 한소은 씨는 강성에 돌아온 뒤에 그 짧은 시간 안에 두 병이나 만들었다고 했잖습니까! 그건 더 말도 안 되죠!”남자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유리병을 바라보았다.“강성에 돌아온 뒤에 실험을 시작했다면 당연히 불가능하죠. 하지만 예전부터 반복적인 실험을 했습니다. 성분과 향료, 그리고 필요한 용량까지 모두 제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회사에 돌아온 뒤에는 레시피대로 준비하고 조수를 시켜 제작만 하게 했으니 당연히 빠르죠.”한소은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빼앗아서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많이 늦어버렸네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한번 기자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이미 대부분 기자들은 그녀의 말에 공감하고 그녀의 편으로 돌아선 뒤였다. 조금 전까지 이 여자는 김서진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한소은은 멍청하고 겁 많은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대범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게다가 향료에 한약 성분을 배합하면서 향에 영향 주지 않는 샘플은 일반인이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도 독특하고 제조법도 대단했다.“이제 자리로 돌아가 주시죠.”한소은은 아직도 자신의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조향사에게 한마디 귀띔했다.그 사람은 아직도 넋이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멍
환아 담당자가 마무리 멘트를 하는데 누군가가 그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렇게 정성을 들여 약까지 만들었는데 외조부께서는 돌아가셨지 않습니까?”그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한소은의 가슴을 찔렀고 현장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식어버렸다.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조소 섞인 미소를 지으며 한소은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저 사람은 누구죠?”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당사자에게 저렇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 있죠?”다른 사람의 상처를 파헤치는 게 기자들 일이지만 그들도 상대를 봐가면서 말을 한다.환아의 체면도 세워줘야 하고 중요한 건 오늘 김서진 대표까지 자리했다. 차씨 가문 어르신의 죽음은 아무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남자의 말은 좋게 해석하면 어떤 약을 써도 외조부의 죽음을 막지 못했으니 소용없다는 뜻이었고 나쁘게 해석하면 그 향초가 있어서 외조부가 사망하신 게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들릴 수 있었다.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상황에 누군가는 남자가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누군가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동조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재미난 구경을 보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도대체 목숨이 몇 개이기에 김서진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여자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일까?기자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남자와 한소은,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김서진을 번갈아 보았다.한소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노려보았다.남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옷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내듯이 옷을 털었다. 그러고는 전혀 두려움 없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돌아가려던 기자들도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한소은 씨, 또 만났네요.”그녀의 앞에 다가간 그가 고개를 한껏 쳐들고 말했다.“정하진 씨가 여긴 무슨 일이시죠?”한소은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악수조차 청하지 않았으니 굳이 먼저 악수를 청할 필요도 없었다.정하진은 야비한 미소를 머금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들을
한소은이 말하려고 할 때 김서진이 한 발 앞으로 나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정하진 씨, 무슨 문제가 있으시면 환아의 법무팀과 얘기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기로는 조향 협회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큰 권한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후 한소은의 허리를 감싸고 돌아서서 무대 뒤 통로 방향 쪽으로 향했다.정하진은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환아 사람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정하진 씨, 거기까지 하시죠.”정하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더 이상 쫓지 않았다. 그는 선 채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조향 협회에서 그 사람을 보낼 줄은 몰랐어요.” 한소은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매우 놀란 듯이 말했다.전화도 받았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정하진도 찾아오고 기자회견도 했다.방금 그의 말은 그녀를 난처하게 하였고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누구를 보내도 결과는 똑같아요!” 김서진은 단호하게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 씨 가문의 세력은 제성에 불과해요. 여기는 강성이에요. 그들의 힘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우리 김 씨 가문과 정 씨 가문은 친분이 있어요. 정하진 한 사람 때문에 두 가문이 얼굴을 붉힐 일은 없을 거예요.”그는 그녀가 정 씨 가문이 개입하여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을 걱정할까 봐 그녀를 위로했다. “게다가 이 일은 정하진 개인의 뜻이기 때문에 정 씨 가문이 개입하진 않을 거예요.”“전 정 씨 가문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조사하러 온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요! 게다가 조향사 자격증은 국내 조향 협회가 자체적으로 만든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요. 어느 쪽에도 쓸모없어요.”사실 국제적으로도 조향사 등급 심사만 있을 뿐이다. 그녀는 처음 시험을 봤던 초급 조향사, 중고급 조향사의 두 번의 시험 이후로는 시험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이상 이런 형식적인 시험을 위해 시간을 허비
그녀는 이미 이 집을 자신의 집처럼 그리워하고 있었다. 여기는 그와 그녀만의 작은 보금자리다.“먼저 샤워하고 와요.” 김서진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감기 걸리면 안 돼요!”“네.” 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위층으로 샤워를 하러 갔다.며칠 동안 괴롭고 피곤했다. 기자회견 이후 온몸의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고 잠도 오고 있었기에 재빨리 샤워를 하고 나왔다. 김서진이 아직 올라오지 않아 방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내려가 그에게 가려고 했다.침대에 앉으니 온몸의 근육이 이완되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매우 편안해졌다.김서진은 아래층에서 서류를 마무리하고 회사 측과 함께 오늘 했던 기자회견의 후속 조치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일을 전부 마무리하니 이미 밤이 깊었다.김서진은 목을 푼 뒤 기지개를 켜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의 아내는 여전히 내려오지 않았다.불을 끄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더니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눈을 돌리자 큰 침대 위에 가냘픈 몸을 가진 여성이 가로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 ...”김서진은 웃으며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아내는 눈을 감은 채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머리는 드라이 헤어캡으로 감싸고 있었지만 자면서 많이 뒤척였기 때문인지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마르지 않은 머리가 반쯤 튀어나와 있었다.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자고 있는 모습이 정말 피곤해 보였다.김서진은 허리를 숙여 그녀를 안아 올린 뒤 그녀를 침대 가운데로 옮겼다. 그녀는 잠시 움직이며 잠꼬대를 했다. 그녀는 누가 방해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은 듯 발을 마구 찼다.그는 그녀를 다시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으로 옮긴 뒤 다시 자리를 옮겨 이불을 약간 잡아당겼다. 그 후 다음 동작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그녀가 몸을 뒤집었다.원래 있던 자리보다도 더 가까워졌다.침대 옆이라면 몰라도 그녀는 이미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김
김서진이 어이없어 한 이유는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말하면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의 허리를 껴안고 그의 아랫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 너무 피곤해요!”이게 말로만 듣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건가?!그는 바지를 벗지 않은 채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에 순응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말에 따라 그녀를 푹 쉬게 해줘야 하는지.곧바로 그녀의 양손이 그의 복근 위로 미끄러졌다. “엄청 딱딱해요!” “...”그래, 그녀가 저지른 행동이니 그녀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해!더 생각할 필요 없이, 호르몬이 그의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있었고 그의 복근 위에 있던 그녀의 두 손을 눌렀다. “여기 더 딱딱...”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얼굴색도 변했다.그녀가 왜 갑자기 다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꿇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힘에 의해 치명적인 상태에 다다랐다.그 순간 호르몬, 충동, 모든 것이 사라졌다. 김서진의 안색은 어두워졌고 눈 감은 채 다시 자고 있는 이 여인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어떻게 이렇게 죽은 듯이 잘 수 있는 거지!그는 일어나면서 그녀의 몸을 자신의 몸에서 천천히 떨어뜨린 뒤 먼저 옷과 바지를 벗었다. 그 뒤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조금 화가 났는지 이번에는 그녀를 그렇게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지는 않았다. 심지어 조금 그녀를 거칠게 안아서 그녀가 자주 누워 있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아마 이번엔 동작이 조금 컸던 것 같다. 한소은은 갑자기 잠에서 깬 뒤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있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몸이 한순간에 순간 이동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잠든 건가?!“저 잠들었어요?” 그녀가 물었다.“정말 깬 거 맞아요?” 김서진은 그녀의 눈을 보면서 정말 깬 건지 아까처럼 깨지 않은 건지 의심하고 있었다.“저 정말 잠들었어요?”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 잠들었던 모양이다.그러나 그녀는 정말 기억이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서 아래층으로
하품을 하고 나니 아까보다는 덜 졸린 것 같기도 하고 김서진이 자지 말라고 해서 그녀는 아예 일어났다. 그 후 침대에서 내려와 헤어드라이기를 들고 스스로 천천히 머리를 말렸다.전에 그녀에겐 이런 습관이 없었다. 차 씨 가문에 있을 때는 집에 남자가 많아서 그녀의 머리를 땋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훈련할 때 편하려고 단발로 잘랐다.후에 대학에 진학한 뒤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노형원은 긴 머리를 어깨너머로 넘기는 모습을 좋아했었기에 한소은은 머리를 자르지 않았고 그 후로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김서진과 함께 한 후, 그는 머리를 말리지 않고 자면 안 된다며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었다.정말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떤 헤어스타일, 어떤 모습이 예쁜지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신경 써준다.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를 말리는 동안에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김서진은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했다.한소은은 의자에 앉아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드라이기를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은은한 향기를 풍겨왔다.정말 아름답다!방금 차인 덕분에 아까 전의 분위기는 다 사라졌지만 여전히 자신의 아내에겐 사랑한다는 말 밖에 해줄 말이 없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있던 드라이기를 잡았다. “제가 할게요.”한소은도 반항 없이 그에게 건네주었고 그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게 내버려 두었다.“저 머리 자르고 싶어요.”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갑자기 머리 자르고 싶어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르고 싶으면 자르면 되죠.”“머리가 너무 길어요. 머리 감고 말릴 때도 귀찮고, 짧게 자르는 게 나을 것 같아요.”“만약 그것 때문이라면 제가 감겨주고 말려줄게요.” 이것은 별일 아니었고 게다가 김서진은 이 일 또한 즐기고 있었다.“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실험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