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은은 웃으며 답했다. “눈속임이에요.”“눈속임?”“사실 엄청 간단해요. 전에 향료에 다른 성분을 넣으면 불안정해지는지에 대한 논의를 했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단지 차성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정말 안정된 완성품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김서진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 “다시 말하자면 향수에 넣든 안 넣든 상관없단 얘기군요.”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향수에 넣지 않았어요. 단지 그가 마시던 차에 수면유도제를 조금 넣었을 뿐이고 그 시간에 맞게 약효가 있었을 거예요. 저는 제 손목에도 수면 유도 효과가 있는 향수를 조금 뿌렸어요. 게다가 그 사람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놀랐던 점은 그 사람은 정말로 향료에 독이 들어 그의 정신이 혼미 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예요.”“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뭘 하지 않아도 그 시간에 졸리고 어지러웠을 거예요.”당연히 차성호가 자신감이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조향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그가 모함하는 이유도 권력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그날 그는 정말 한소은이 환각작용이 있는 약물을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도 놀랐을 것이다.“아, 그렇게 된 거군요.” 김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저까지 속였네요.”그는 그날의 일을 알게 된 후에도 좀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성호가 약에 중독된 건지, 어떻게 중독 의심 증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건지.풀어놓고 보면 정말 간단했지만, 사람들은 가끔 눈앞에 나타난 겉모습에 현혹될 때가 있다.“제가 어떻게 당신을 속일 수 있겠어요. 당신 그때 현장에 있지도 않았잖아요. 만약에 그때 당신이 현장에 있었더라면 당신의 지혜로 허점을 찾아냈을 거예요.” 그녀는 두 손을 그의 목에 걸친 채 달콤한 말로 그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하지만 사실이었다. 김서진의 안목과 식견으로는 잠시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분명 다른 오묘함을 느낄 수 있었
“당신도 알다시피 내일 밤 경매에서 새 드레스를 사려고 했어요. 오늘 그 카드는 이미 쓸 수 없으니 만약 사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없었을 거예요.”그 순간 하인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주었고 그녀는 위에 있는 찻잎을 호호 불며 남편을 흘겨보았다.“도난이라니! 그건 고은이의...” 그는 곧 이 집에서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는 비록 진고은을 이 집에 데려오고 싶었지만 단계가 필요했다. 이제 막 아들을 데려왔는데 바로 여자까지 들여온다면 아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신의 체면도 구겨질 것이고 회사의 평판과 주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윤중성은 그런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됐어요, 잠시 설아한테도 카드가 있다는 것을 깜빡했어요.” 그는 손을 흔들며 윤설아를 바라보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설아야, 네 카드 아빠에게 주렴.”“뭐 하려고?” 윤설아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 엄마가 카드를 다 정지시켰잖아? 지금 내 카드도 쓰기 불편하니 카드 좀 줘, 쓸 일이 있어.” 윤중성이 말했다.윤설아는 눈을 반짝이며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가 정지시킨 건 다른 카드들이잖아. 아빠가 원래 쓰던 카드는 상관없을걸.”“항상 영향이 있었어. 내 카드는 지금 다른 곳에 쓰고 있어. 가져오라면 가져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일단 현금 좀 빼서 아빠에게 줄 수 없겠니? 지금 아빠 말은 아예 안 듣겠다는 거니?” 그는 침울한 얼굴로 화를 냈다.그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자 윤설아는 내키지 않지만 가방을 가져온 뒤 카드를 꺼냈다. “내껀 한도가 있어. 드리기 싫은 게 아니라 부족할까 봐 그런 거야.”“됐어, 내가 네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를까봐? 네게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잠시 급한 곳에 쓰려고 한 거다. 어차피 아빠가 어련히 알아서 돌려줄건데, 그렇게 치사하게 구는 거야!” 그는 그녀의 손에서 잽싸게 카드를 가져간 뒤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드를 가져간 후 여전히 그녀에게 치사하
요영 여사는 그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놀라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말하려고 할 때는 그는 이미 떠난 후였다.“사모님...” 그녀가 화상을 입은 것을 보고 하인은 급히 구급상자를 가져와 약을 발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지기도 전에 요영 여사는 갑자기 컵을 바닥으로 던졌다.“퍽!” 컵이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하인은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윤설아는 멍하니 있다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간 뒤 부드럽게 말했다. “파편 깨끗이 치워주신 다음에 내려가 주세요”하인은 명령을 받고 재빨리 청소를 하러 갔다.윤설아는 요영 여사 옆에 앉아 구급상자에서 화상 연고를 꺼낸 뒤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 후 연고를 빨갛게 달아오른 곳에 발랐다.“엄마, 화내지 마.” 그녀가 말했다.“어떻게 네가 나한테 화내지 말라고 할 수 있어?!” 요영 여사는 화가 나서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뿌리치지 못했다. 윤설아는 그녀의 손을 계속 잡은 채 연고를 발랐다.요영 여사는 말을 하자마자 쉬지 않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네 아빠 좀 봐라, 이미 밖에 정신 팔려서 돌아오지도 않고 심지어 내게 말도 하고 싶어 하지 않잖아!”“그동안 내가 이 집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시집왔을 때도, 네 아빠는 윤 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라는 곳 외에 아무것도 없었어!”“네 아빠는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회사에서 몇 년 동안 큰아버지 덕에 이름만 걸고 있었고, 약간의 지분 말고는 실권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내가 여기저기서 점수를 따오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다고!”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했고 윤설아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할 뿐,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해결해 줄 필요는 없었다.“이젠 경매에도 못 가게 해! 왜, 내가 돈 쓸까 봐 두려운 거야?!”윤설아는 손가락으로 손등
“어디 감히!” 그녀는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화상 입은 곳을 잡고 이를 꽉 물었지만 그녀의 입은 여전히 쉬지 않았다. “아무리 경매라고 한들 다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갈 텐데 그 여자를 데려가서 스스로 체면을 구긴다고? 이미 체면을 포기한 건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고, 나를 어떻게 보고, 윤 씨 가문을 어떻게 볼 줄 알고?”“엄마, 내가 지금 하는 얘기 듣기 싫을 수도 있어.” 윤설아는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본 적 있어. 남자가 자신의 셋째 첩을 데려온 적도 있고, 어떤 집안은 부인이 없는 곳도 있고, 예전에 데려왔던 부인과 다른 부인을 데려온 사람도 있었어. 우리 가문이 그런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 전에는 그런 마음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아빠가 전에는 그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왜,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요영 여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했다.“엄마 생각은?” 윤설아는 그녀에게 반문하며 조용히 말했다.“내 생각엔...”요영 여사는 그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에서는 그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의 윤중성은 할 수 있다는 것을!오랜 기간 동안 윤 씨 가문의 기반은 이미 다져졌고 큰 집은 더 이상 미래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윤중성이 윤 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 받을거다. 게다가 이미 그의 아들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다음 단계로 그의 아들의 어머니까지 들여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뭐가 두렵겠는가!그런 이해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도 조바심이 나고 불안했다.“그래서 네 아빠가 정말 그 여자를 데리고 경매에 간다고? 정말... 날 버리고 우리 가정을 버린다고?”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막상 이런 문제에 부딪히니 나약해졌다.“그렇게 심각해지지는 않을 거야.” 윤설아는 엄마를 달래며 말했다. “엄마가 이 가문에 기여한
“그럴 리가!” 윤설아는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의 팔에 얼굴을 갖다 댔다. “난 가짜 윤설아가 아니야. 못 믿겠다면 내 얼굴 만져봐. 성형인지 아닌지!”요영 여사도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볼을 만지며 일부러 농담을 했다. “어, 진짜 성형 안 했네, 그럼 가짜 아니다.”두 모녀는 모든 의심과 의혹이 풀린 듯 함께 웃었다.요영 여사는 한바탕 웃고 난 뒤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나도 다른 뜻이 아니라 갑자기 정말 큰 것 같아서 그래. 엄마 아빠 말도 잘 들어주고, 네 생각도 말하고, 엄마에게도 아이디어를 줄 수 있는 아이가 되었구나.”“정말 잘 컸어!” 요영 여사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보더니 탄식을 하며 말했다.아이가 컸다는 것은 자신도 늙었다는 뜻이고 얼굴도 많이 흘러내린다. 내키지 않아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나 벌써 26살이야. 당연히 컸지!” 윤설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그래, 벌써 26살이야!” 요영 여사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중요한 일이 생각난 듯했다. “엄마가 그동안 소홀히 했는데, 이제 결혼에 대해서 결정해야 할 것 같아.”“...” 윤설아는 애교 반, 성질 반을 내면서 말을 했다. “내가 얘기했잖아. 이미 남자친구 있다고, 결혼 걱정할 필요 없어.”“무슨 소리야!” 요영 여사는 믿지 못했다. “내 앞에서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거야? 네가 남자친구 있는지 없는지 내가 모를까 봐? 남자친구가 있는데 데이트하러 가는 거 본 적도 없고 전화하는 거 본 적도 없는데? 무슨 남자친구야, 그냥 둘러대는 거지, 안 그래?”“진짜 아니야...” 윤설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김서진을 생각하며 정말 아쉬워했다.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원해야 하는 것과 원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다른 여자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며 공주의 꿈을 꾸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이 공주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겐 이미 매우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
그녀가 한숨을 쉬고 침묵을 하며 마음이 무거운 듯한 모습을 보이자 요영 여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됐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얘기 안 해도 돼. 뭐가 됐든 엄마는 네 결정을 지지할 거야.” 한손으로 그녀의 손을 매만지는 순간, 소파에 두었던 다른 한 손에 무언가가 만져졌다. 꺼내보니 TV 리모콘이었다.그녀는 꺼낸 김에 TV 리모컨에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에 같이 앉아서 TV 보자, 엄마랑 시간 좀 보내자.”딸이 곁에 있으니 기분이 좀 괜찮아졌다. 혼자 있거나 특히 침실에 있을 때는 정말 화를 참기 힘들었다.윤설아는 이에 올라가고 싶다는 말을 삼키고 자리에 앉았다. “좋아.”그녀는 상관없었다. 이틀 정도 시간이 비었고 양쪽에서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오랫동안 TV를 보지 않았고 별로 볼 만한 것도 없었다. 요영 여사는 몇 개의 채널을 돌렸지만 모두 흥미가 떨어졌고 심지어 약간 졸려 왔다. 고개를 돌려 윤설아를 힐끗 보았다. 딸의 상태도 비슷했다. 그녀는 채널을 돌리면서 말했다. “아니면 그냥 자러 갈...”말이 끝나기도 전에 TV에서 나오는 소리에 주의가 끌렸다.“여기 두 샘플은...”목소리가 익숙해서 무의식적으로 TV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말하고 있는 사람은 한소은이었다.오늘 무슨 기자회견이 있다고 들었는데 한소은이 노형원과의 교집합이 없어진 이후로는 한소은 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한소은은 며느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적이 아니라면 별 상관 없었다. 이건...기자회견 생중계?자신도 모르게 버튼을 눌렀고 채널이 돌아가자 윤설아가 말했다. “엄마, 채널 돌리지 마!”그녀는 원래 소식이 보고되기를 기다렸지만 생방송이 있다면 그것을 직접 보는 것이 훨씬 나았다.“잘못 누른 거야.” 요영 여사는 자신의 딸도 관심 있게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채널을 돌려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소은의 능력이 더 뛰어나네. 향수에 독 성분을 넣는다고? 이걸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니.” 요영
윤설아는 텔레비전 속 그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외모가 출중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그가 감히 이런 자리에서, 그리고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김서진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그의 태도는 지금 대담한 걸 넘어서 너무 자신만만한 것이 아닌가. 하긴, 그는 이미 충분한 능력과 자본이 있기 때문에 김서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긴 하다.“아니…저 사람은…” 옆에 있던 요영 여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그녀는 텔레비전 속 저 남자가 매우 낯이 익었다.요영 여사는 평소에 인맥이 넓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녀는 자신의 넓은 인맥으로 인해 윤씨 가문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다. 비록 이렇게 직접적으로 함께 촬영은 한 적은 없지만, 때때로 윤씨 집안의 상업적 관계 때문에 얼굴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사실상 그녀의 인맥은 윤설아보다 넓은 셈이다.“엄마, 저 남자 알아?” 윤설아는 요영에게 물었다요영은 도무지 저 남자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디서 본 적이 있어…그런데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엄마, 잘 생각해봐!”윤설아는 요영을 계속해서 재촉했다. “이런 큰 자리에서 김서진을 도발할 정도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야! 엄마가 분명 아는 사람일 거야!”요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그런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방금 자신을 조향 업계 협회의 회장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아, 부회장이었나? 아무튼 둘 중 하나였어!”윤설아가 말했다.한 협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이렇게 큰 배짱을 가질 수는 없었다.“아니야!” 요영이 말했다. “조향 업계 협회의 회장은 나이가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어. 부회장도 아닐 텐데…아니면 최근 2년 사이에 새로 발탁된 사람일 수도 있어…”그녀는 도무지 저 사람의 정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생각을 깊게 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됐어, 그만 생각하자. 좀 쉬어야겠어.”그
‘하진…’‘저 남자, 내가 반드시 가지고 말 테야!’——방 안에 가득 쌓여 있는 쇼핑백 더미들을 보고 진고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하였다.옆에 있던 윤중성은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어때, 이제 만족하지?”“흥!”그녀는 윤중성을 살짝 노려보았다.“자기야, 오늘 자기가 얼마를 썼는지는 알고 있지? 내 성의를 봐서라도 화 좀 풀어.” 그는 계속해서 그 여자를 달래주기 바빴다. 몇억 원어치 쇼핑을 한 후에야 그녀의 화를 풀 수 있었다.“성의? 내가 당신을 20여 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 정도로 내 몇 년간의 고생을 보상받을 수는 없어.” “아이를 데리고 얼마나 널 따라다녔는데. 얼마나 내가 남의 눈치를 봐왔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많은 누명을 썼었는데!”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예전에 경매에 참석했을 때도, 내가 당신 체면 세워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내 체면이 구겨지는 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어!” “지금 이제 아들도 어엿하게 회사에 있는데, 엄마인 내가 다른 사람한테 빌붙어 살 수는 없잖아! 그런데 지금 이게 뭐야? 카드는 다 동결되고. 회사 사람들이 날 뭘로 보겠어?”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윤중성은 그런 그녀를 얼른 품에 안았다. 그녀의 몸부림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알아. 당신이 얼마나 억울했는지 나는 알아. 자기야, 울지 마. 당신이 몇 년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다 알아!”그녀는 그제야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하면 뭐해! 당신은 그 여자랑 이혼도 못할 텐데.”“이혼…” 윤중성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는 몇 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날 위해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들을 했는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당신의 수중에 윤씨 그룹의 주식이 있다 해도, 소겸이가 아직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