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은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문 앞에 도착하자, 대기 중이던 경호원이 즉시 다가와 휠체어 뒤를 잡았다. 여왕은 두 손을 휠체어 팔걸이에 얹고, 고개를 살짝 돌려 말했다. “소은과 원청현을 같은 방에 배치해. 방은 넓고, 쾌적하며, 편안해야 해. 절대로 소홀히 해선 안 돼!”“네!” 경호원은 즉시 명령을 받아들이며 빠르게 움직였다.여왕은 다시 한번 닫힌 문을 돌아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임상언이 대사관 문을 나서자 한 대의 차가 그의 옆에 천천히 다가와 멈춰섰다. 임상언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를 힐끗 본 뒤 차에 올랐다.차 안에서 김서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주효영에게 넘겼어.” 임상언은 표정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믿은 것 같아?” 임상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서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주효정은 의심이 많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 네가 직접 주면 분명 의심했을 거야. 하지만 네가 주지 않고 주효영이 스스로 얻어냈다면, 의심하지 않았을 거야.”그때 원철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맞아, 사람의 본성이란 게 참 복잡하지.”서진은 동의하며 말했다. “그렇지. 사람의 본성만큼 복잡한 게 없지.”“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복잡한 본성을 이용해 남을 해치기도 하지.” 서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프레드를 말하는 건가?” 원철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뿐만이 아니야. 세상엔 그런 사람이 많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임상언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서진은 그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아니...” 임상언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고 눈은 흐릿했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복잡해 보였다.서진은 점점 더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혹시 주효정이 뭐라고 했어? 아니면 대사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임상언은 한참 망설이다
“그래도 마음속으론 여전히 힘들겠지.”김서진은 그 감정을 이해했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그의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한다면, 그 역시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며칠 전 두 아이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때의 불안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걱정 마, 괜찮아. 그냥 마음이 좀 불편할 뿐이야. 하지만...”임상언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임남이를 직접 보지 않는 이상, 그 아이가 살아 있든... 그렇지 않든,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그래!” 서진도 힘주어 동의했다. “주효정은 너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거야. 임남이가 납치된 지 하루이틀도 아닌데, 왜 하필 지금 와서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겠어?”“맞아. 만약 정말 죽이려 했다면, 왜 이제 와서야 그랬겠어?”서진은 이성적으로 분석했다. 그저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임남이는 Y국 왕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당장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고, 임남이는 인질로 임상언을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동안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여전히 임상언에게 투명약의 제조법을 요구하고 있었다. 임상언이 필요하기에 임남이를 죽일 리가 없는데, 갑자기 그 아이를 죽였다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임상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역시 주효정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에게 임남이의 시신을 요구하면, 그녀는 내놓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충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래, 주효영의 말을 믿지 마. 주효정이 하는 말은 거의 다 거짓말이야. 그 여자는 지독히 교활한 사람이야.” 원철수도 서진의 분석을 동의하며 덧붙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임상언에게 물었다. “근데 주효영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지?”
임상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어떤 의문이 있었지만,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딱히 짚어낼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이 각자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차가 급정거하며 앞으로 쏠렸다.세 사람은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자세를 잡았다. 서진이 앞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대표님...” 운전기사는 머뭇거리며 앞쪽을 가리켰다.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차 바로 앞에 한 여자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여자 때문에 운전기사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여자는 재빠르게 차 쪽으로 다가와 문을 세게 두드렸다.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원철수는 놀라며 말했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지?”그 여자는 다름 아닌 주효정의 어머니, 유해나였다. 원철수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차를 막고 서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대표님?” 운전기사는 서진을 돌아보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서진은 차 문을 열며 차에서 내려섰다.“무슨 일입니까?” 서진이 차분히 물었다.유해나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들며 외쳤다. “내 딸은 어디 있죠? 당신들이 내 딸을 가뒀죠, 그렇죠?”서진은 유해나의 공격을 막아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주효영 씨는 우리 쪽에 있지 않습니다.”“거짓말 마세요! 분명 당신들이 데려간 거 내가 봤어요! 당신들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유해나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처음에는 주효영이 서진에게 넘겨져 경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경찰로부터 어떤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직접 경찰서에 찾아가 확인했지만, 주효영은 거기에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확신했다. 주효영은 여전히 김서진의 손에 있다는 것을.“주효영 씨는 도망쳤습니다.” 서진은 간결하게 사실을 전했다.유해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그게 말이 돼요? 당신들처럼 철저한 감시망을 뚫고 어떻게 도망칠 수 있겠어요?”“
“아니, 그럴 리 없어! 내 딸이 나를 보고 싶지 않다니 말도 안 돼.” 유해나는 그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히 무슨 위험에 처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찾지 않을 리가 없어!”원철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주효정 씨는 대사관의 보호를 받고 있어요. 외국 대사관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어요? 만약 위험이 있다면, 그건 주효영 씨가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위험일 겁니다. 주효영 씨는 안전해요.”“헛소리하지 마!”유해나는 눈이 충혈된 채로 소리쳤다. “우리 효정이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똑똑한 아이에요. 당신들이 그 아이를 질투해서 이런 짓을 벌인 거잖아요. 그래서 효정을 납치한 거예요!”원철수는 말문이 막힌 듯 서진을 바라보았고, 서진은 곤란한 표정으로 유해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에게서 예전의 우아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옷은 구겨져 있었다. 몇 날 며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듯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서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주효영 씨는 우리 쪽에 있지 않습니다.”유해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주효정은 유해나에게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고, 유해나는 그런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 유해나는 딸을 과하게 방임하며, 그 결과 상황은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다.“못 믿겠어요.” 잠시 침묵하던 유해나는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외쳤다. “당신들이 다 짜고 나를 속이려는 거잖아요. 내 딸은 분명 당신들이 어딘가에 숨겨논 거잖아요! 내 딸을 돌려줘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과 함께 죽어버릴 거예요!”유해나는 갑자기 식칼을 꺼내 들고 서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서진은 그런 공격에 당할 리 없었다. 그는 재빨리 유해나의 손목을 잡아 칼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칼은 바닥에 쨍그랑
유내하가 피곤한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원철수는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저 여자, 혹시 미친 거 아냐?”“그럴지도.” 서진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지 않았다. 미움도 없고, 그렇다고 연민도 없었다. 그저 불쌍한 여인일 뿐이었다.주씨 집안이 이렇게 망가진 데 유해나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의 잘못은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있었다. 서진은 그저 이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 잠시 위로해주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주효정이 자기 엄마가 이렇게 된 걸 알면 어떤 기분일까?” 원철수는 감탄하듯 중얼거렸다.“아마... 아무런 감정도 없을 거야.” 서진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차로 돌아갔다.그는 주효정이 유해나에게 냉정하고 무심하게 대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보통 모녀 사이에서 느껴지는 애정 같은 것은 그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주효정이 유해나가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봐도 별다른 감정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차가운 여자야.” 원철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기에도 주효정은 지나치게 차갑고 이기적인 여자였다. 그토록 냉정한 여자가 유해나를 보며 무슨 감정을 느낄 리 없다고 생각했다.차에 올라탄 서진은 옆자리에 앉은 임상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주효정과 연락했던 그 번호, 기억하고 있어?”임상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어.”상황이 특수했기 때문에 휴대폰을 잃어버리거나, 주효정과 연락이 끊길 경우를 대비해 그 번호를 외워둔 것이다. 지금은 휴대폰이 없어도 주효영의 번호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 번호를 적어줘.” 서진은 차 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며 말했다.결국 이 문제는 진정한 결정을 내릴 사람, 즉 친척인 진정기에게 알려야 했다.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그의 몫이었다....여왕은 원청현과의 만남 이후 방에 틀어박혀 누구도
하지만 릭은 음식을 들고 나가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돌아서서 쟁반을 옆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여왕 폐하, 음식을 드시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지십니다.”릭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그의 거대한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여왕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먹지 않겠다는데,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 너도 내 명령을 거역하려는 거냐?”릭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앞에 섰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달빛마저 가렸다. 원래 불도 꺼져 있던 방은 더욱 어둡게 변했다.여왕은 불쾌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릭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여왕 폐하, 저는 절대 폐하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음식을 드실 때까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릭은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서 있는 한, 여왕이 음식을 먹지 않는 이상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여왕은 릭을 올려다보며 눈을 부릅떴지만, 릭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모은 채 평온한 얼굴로 여왕을 지켜보고 있었다.잠시 릭을 노려보던 여왕은 결국 피로해진 눈을 비비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나가. 지금은 먹고 싶지 않다.”그러나 릭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으며 말했다. “여왕 폐하께서 음식을 드셔야 제가 이 쟁반을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즉, 그녀가 음식을 먹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여왕은 화가 치밀었다. “너, 지금 나를 감시하려는 거냐? 내가 이제 네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야?”릭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은 여왕 폐하의 건강이 우선입니다.”“릭, 내가 너에게 특권을 줬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네가 프레드를 감시했다고 해서 내가 너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고 믿는 거냐?”여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쾌감이 깃들어 있었다.릭
원청현의 말은 여왕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가 매일 밤 얼마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를. 때로는 업무를 처리하다 밤을 새우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잠들 수 없어서였다.잠을 자고 싶은데도 잠들지 못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왕은 항상 긴장하고 경계해야만 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자리를 노리고 있지 않은지, 음모를 꾸미고 있지는 않은지, 매 순간 조심스럽게 살아야 했다. 그런 아슬아슬한 삶은 여왕을 끝없이 소모시키고 있었다.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그 고통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여왕은 모든 것을 홀로 견뎌야만 했다.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하던 여왕을 보며 릭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잠시 후, 여왕은 고개를 들어 릭을 바라보며 물었다. “릭, 넌 죽음이 두렵지 않니?”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됐어, 물어봐서 뭐해. 당연히 두렵지 않다고 하겠지.” 여왕은 씁쓸하게 웃으며 스스로 대답했다.릭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여왕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이 제 영광입니다.”“그런 말은 프레드도 했어.” 여왕은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이제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결국 사람은 모두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법이었다.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프레드가 여왕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프레드는 이미 여왕의 감시 아래 있었고, 그의 행동은 철저히 통제되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릭은 그때를 떠올렸다. 처음 여왕이 프레드를 감시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놀랐지만 그대로 따랐다. 그는 차근차근 증거를 모아 여왕에게 보고했는데, 여왕은 처음엔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무덤덤해졌다. 그 변화는 릭의 눈에도 깊이 남아 있었다.처음의 분노는 배신에 대한 상처였고,
이전의 변고로 인해 실험실에는 거의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가 없이는 이곳에 출입할 수 없었지만, 주효정은 예외였다. 그녀가 신속히 충성을 맹세한 덕분에 여왕은 그녀를 다르게 보았고, 몇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실험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실험을 할 수 있는 권리였다. 어떤 면에서 주효정은 여왕의 생각을 철저히 따랐고, 여왕의 마음을 완벽하게 꿰뚫었다고 볼 수 있었다.주효정은 아무런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실험실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스스로 찾아냈다. 비록 이곳이 크지 않았지만, 실험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프레드가 이 실험실을 얼마나 오래 준비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주효정은 실험에 완전히 몰두해 주변 환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주효영을 지배한 흥분감은 실험을 진행할수록 점점 더 격렬해졌다.문가에서 그녀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릭은, 그녀가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자 일부러 가볍게 기침을 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주효정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목소리의 출처를 확인했다. “너였어?”주효영은 소리의 주인이 릭임을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릭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실험 중이야.” 주효정은 릭을 확인하자 다시 실험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그러니까 너도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이곳은 더 이상 예전의 실험실이 아니었고, 주효정은 이제 자신이 누구에게 충성해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릭은 더 이상 그녀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릭이 여전히 프레드의 하수인처럼 보이는 것도 의아했다. 프레드의 부하라면 지금쯤 이미 체포됐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잡히지 않았을까?그러나 주효정은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