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변고로 인해 실험실에는 거의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가 없이는 이곳에 출입할 수 없었지만, 주효정은 예외였다. 그녀가 신속히 충성을 맹세한 덕분에 여왕은 그녀를 다르게 보았고, 몇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실험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실험을 할 수 있는 권리였다. 어떤 면에서 주효정은 여왕의 생각을 철저히 따랐고, 여왕의 마음을 완벽하게 꿰뚫었다고 볼 수 있었다.주효정은 아무런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실험실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스스로 찾아냈다. 비록 이곳이 크지 않았지만, 실험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프레드가 이 실험실을 얼마나 오래 준비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주효정은 실험에 완전히 몰두해 주변 환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주효영을 지배한 흥분감은 실험을 진행할수록 점점 더 격렬해졌다.문가에서 그녀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릭은, 그녀가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자 일부러 가볍게 기침을 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주효정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목소리의 출처를 확인했다. “너였어?”주효영은 소리의 주인이 릭임을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릭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실험 중이야.” 주효정은 릭을 확인하자 다시 실험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그러니까 너도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이곳은 더 이상 예전의 실험실이 아니었고, 주효정은 이제 자신이 누구에게 충성해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릭은 더 이상 그녀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릭이 여전히 프레드의 하수인처럼 보이는 것도 의아했다. 프레드의 부하라면 지금쯤 이미 체포됐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잡히지 않았을까?그러나 주효정은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나? 난 주인이 없어.” 주효정은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웃었다. “난 너희처럼 누구의 하수인이 아니야. 내게 있는 건 협력자들뿐이지. 나와 협력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위치에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첨단 기술을 손에 쥔 주효영에게는 누구의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여왕조차도 그녀를 부릴 수 없었다. 만약 투명약 개발에 성공한다면, 주효영은 더 이상 어떤 권력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가 되면, 누군가 그녀와 협력하고 싶어도 그녀의 기분에 따라야 할 것이다.“참, 큰소리를 치네.” 릭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여왕에게 불경한 태도를 보이는 자는 누구든 용납할 수 없었다.그러나 주효정은 릭의 감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니면, 그녀는 릭의 감정을 무시할 만큼 자신감에 넘치는 것 같았다.“큰소리를 치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주효정은 실험 중인 용기의 변화를 살피며 여유롭게 말했다. “됐어, 날 방해하지 말고 시간이 남으면 한소은이랑 놀아줘. 너희 둘은 서로 잘 알잖아.”“왜 소은을 언급하는 거지?”릭이 물었다.“왜 안 돼? 결국 너는 한소은을 이곳으로 데려온 장본인 아니었어?”주효정은 고개를 돌려 릭을 힐끗 쳐다보았다. “근데, 넌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내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지?”“프레드가 이미 실패했잖아. 프레드는 감옥에 갇혔는데, 너는 프레드의 부하였으면서도 멀쩡히 여기 있잖아?”주효정은 릭을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설마... 네가 프레드를 배신하고 살아남은 건가?”“뭐, 그건 나랑 상관없어.”주효정은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실험에 집중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실험이었다.“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 거지?” 릭은 주효정이 실험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가 그녀의 실험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주효정의 안전을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여왕과 관련된 모든 잠재적 위험
주효정은 메시지 창에 가득한 긴 문장을 보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더이상 메시지를 읽고 싶지 않았다. 위로 스크롤하며 유해나가 보낸 말을 하나하나 읽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가장 최근의 메시지만 눈으로 훑었다. 어제 유해나가 보낸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효정아, 정말 보고 싶어.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니? 집도, 모든 것도 사라졌지만, 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엄마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거야.] 주효정은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메시지를 닫아버렸다. 그녀는 짜증과 함께 묘한 감정이 스쳤다. 사실 주효영은 늘 유해나의 관심을 원했었다. 어릴 적부터 따뜻한 말을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한 번도 충족되지 않았다. 주효영이 아무리 기쁜 소식을 전해도 유해나의 관심은 언제나 딴 데로 향했다. 그리고 그 관심의 대상은 늘 진가연이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주효정은 침묵에 익숙해졌다. 어차피 유해나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자신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점차, 주효영은 어떤 것도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지냈고, 이제는 그 삶에 익숙해졌다.그런데 이제 와서 유해나가 모성애를 갑자기 터뜨리며 다가오다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주효정은 마음이 불편해졌고, 휴대폰을 내팽개치듯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실험에 몰두했다. 실험만이 주효영에게 즐거움과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누구의 기다림도, 그리움도 필요 없었다. 오직 성공만이 필요했다. 성공만이 주효영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것이다.실험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주효정의 실험과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한편, 김씨 집안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다시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한 대의 장치가 놓여 있었고, 방 안의 공기는
원철수는 답답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점점 더 초조해지는 기색을 드러냈다. “프레드는 계획에 실패해서 지금 갇혀 있는 상태야.”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진지했다.로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원철수를 바라보았다.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프레드가 실패했다고?” 로사는 눈썹이 찌푸려지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이미 실험이 시작된 거야? 어머니는?”그 순간, 김서진이 눈빛을 번뜩이며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날카로웠다. “여왕 폐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놈들의 대화에 따르면, 프레드가 무언가를 꾸미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현재는 여왕 폐하께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계십니다.”“어머니께서?” 로사는 놀라움과 의구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프레드에게 납치된 거 아니었어?”김서진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여왕 폐하께서는 그리 어리석은 분이 아니십니다. 어쩌면 프레드에게 납치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뭔가를 계획하고 계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로사의 마음속에 찬바람이 불어 닥친 듯했다. 이 모든 것이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단순해 보이는 대화였지만, 그 속에는 숨겨진 중요한 진실이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프레드가 아니라, 여왕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로사의 눈빛이 점차 달라졌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계획이었다는 거야? 프레드가 승리한 줄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어머니께서 모든 것을 조종하셨다는 거야?” 로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스로 상황을 깨닫고 감탄했다. “난 어머니가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어. 어머니를 과소평가한 건 내 오산이었어.”로사의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경외감과 혼란이 뒤섞이며,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겠
방 안의 침묵은 무거운 공기처럼 짓눌러졌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로사만은 그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듯 보였다.사실, 로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로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손을 책상 위에 세게 내리쳤다. 그의 눈에는 불안이 서려 있었다. 마치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가 믿고 싶은 것은 여왕이 그런 끔찍한 일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로사는 이 바이러스와 관련된 실험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남아시아에서 퍼진 바이러스로 인해 Y국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로사는 그 참혹한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병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들었고, 무력함 속에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그 사건을 통해 그녀는 프레드가 진행하고 있던 연구와 이 바이러스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이 바이러스가 Y국 내에서 유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제기되었을 때, 그는 이 모든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자신의 어머니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니, 로사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다.여왕은 언제나 위대한 존재였다. 비록 로사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Y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없는 진실이었다. 로사는 여왕의 책임과 역할을 충분히 이해했고, 그것이 바로 그녀를 존경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국민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로사는 벌써 불혹의 나이가 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여왕이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수군거렸지만, 로사는 그런
김서진의 말은 맞았다. 아무리 애써도 그들은 왕자의 결심을 막을 수 없었다. 로사는 마음을 굳힌 뒤, 곧바로 차에 올라 대사관을 향해 질주했다.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차 안에서 그의 생각은 혼란스러웠지만, 발걸음은 그만큼 더 빨라지고 있었다.차가 출발한 지 약 20여 분이 지났을 무렵, 임상언이 갑자기 다리를 치며 소리쳤다.“큰일 났어!”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그의 외침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뭐가 큰일 났다는 거야?”김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임상언은 불안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로사가 대사관에 가면 주효영은 자기 최면이 통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지 않겠어?”그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방 안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잠시 후, 원철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사실,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아.”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기대나 불안이 섞여 있지 않았다.“만약 주효영이 조금이라도 똑똑했다면, 자신이 실패했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거야. 최면 같은 건 결국 불완전한 도박이었으니까.”원철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려고 한 걸까?”원철수는 그 생각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주효영이 정신을 통제하려고 한 사실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양 교육을 받은 그녀가 그러한 방식에 의존하려 했다는 점은 충격적이었다.인간의 정신과 의지는 복잡하고도 신비로운 영역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의학조차도 그 복잡성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에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려 했던 방법들은 대부분 신화로 남아 있었고, 실제로 성공한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그나마 성공했다고 알려진 것도 부작용이 상당했다.그런데 주효영은 어떻게 그런 비현실적인 방법에 매달리게 되었을까? 그는 그런 위험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일까?김서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금 와서는 그게 중요한 문제
이제 상황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해졌다. 로사는 릭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그래, 좋아. 내가 생각하지 못했군.”로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여왕 폐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신가?”릭은 뒤를 잠깐 돌아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는 늦은 시간까지 바쁘셨으니 아마 조금 늦게 일어나실 것입니다. 왕자 폐하께서는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로사는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기다리지.”그러나 돌아서려던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프레드는 지금 어디 있지?”릭은 잠시 침묵에 빠졌고, 그 침묵 속에서 많은 의미가 느껴졌다. 잠시 후,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프레드는 이미 감금되었습니다.”로사의 눈이 빛나며 재차 물었다.“어디에 있는지 나에게 보여줘. 물어볼 것이 많아.”하지만 릭은 움직이지 않고, 이전보다 더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왕 폐하께서는 아무도 프레드에게 접근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지금 그는 국가적으로 중범죄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나조차도 안 되는 건가?” 로사의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지며 분노가 깃들었다.릭은 고개를 숙이며 존경을 담은 말투로 답했다.“왕자 폐하께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것은 여왕 폐하의 명령입니다.”릭의 말에는 강한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여왕의 명령이라면 누구도 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상기시켜 주었다.로사는 릭을 깊이 응시하며 그 차가운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고, 조용히 말했다.“알았어.”그러고 나서 천천히 발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층수를 가리키는 숫자들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또 다른 생각에 잠겼다.“한소은은 어디에 갇혀 있지?”로사는 이를 확실히 알고 싶었다. 동행하던 경비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머뭇거리며 대답했다.“모, 모르겠습니다. 왕자 폐하, 그걸 왜 물으시는
릭이 말한 내용은 로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만약 릭이 이렇게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 곁에 있는 것일까? 로사는 생각에 잠기며 릭을 응시했다.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른 릭은 버튼을 누르며 몸을 약간 옆으로 돌려 로사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왕자 폐하,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릭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의 말투에서 더 이상 논의할 여지가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로사는 릭이 그렇게 직접적인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릭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그래.”로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넌 프레드처럼 되지 말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길 바란다.”릭은 그 말을 들었지만, 얼굴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치 로사의 말이 전혀 그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했다. 그저 차분하게 그의 직무를 다할 뿐이었다.곧 릭은 로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로사는 그를 따라 들어가면서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응접실?”그의 목소리에는 예상치 못한 장소에 대한 당혹감과 미묘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렇습니다. 왕자 폐하께서는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로사는 릭의 말에 불만을 표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릭이 방을 떠난 후, 응접실은 조용해졌다. 곧이어 커피가 나왔고, 로사는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혼자 남은 채 다시 생각에 잠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휠체어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사는 그 소리만으로도 여왕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문이 열리고, 여왕의 휠체어가 천천히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러나 로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더 마시며,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