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 저택에서. 김서진은 한쪽 귀에 꽂은 작은 이어폰을 빼며 원철수를 바라보았다.철수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물었다.“어때?”“말했어.”서진은 짧은 한마디에 결과를 담아냈다.고지호 교수가 새벽부터 수고스럽게 다녀간 것도 모두 이 판을 짜기 위해서였다. 임상언이 물어볼까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과연 예상대로였다.대화속에서 서진은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아이 때문에 상언이 주효영에게 타협한 것이었다.아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납득이 되지 않았다.대체 왜 지금 이런 상황에서 효영을 믿는 건지 말이 안 되었다. 대체 왜 효영이 임남을 찾을 거라고 확신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서진은 당장이라도 쫓아가 상언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이미 짜놓은 판에 상언이 그들의 잘못된 정보를 계속해서 그쪽으로 흘려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언에게 이유를 묻는다면 어렵게 짜놓은 판이 깨져버렸다.한숨을 내쉰 서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서진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낀 철수가 어깨를 두드렸다.“너무 속상해 마. 인간이라는 건 원래 복잡한 거야.”“그것 때문에 속상한 게 아니야. 다만 마음이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서진은 고개를 저었다.“대체 상언은 왜 이렇게 효영을 믿는 걸까?”“글쎄, 설마 콩깍지라도 씐 걸까?”철수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요즘 날씨도 우중충한데 상언의 일로 분위기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철수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지만, 서진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유지했다.“그래, 농담이라도 해본 거야. 상언이 효영처럼 악독한 여자를 마음에 품을 리가 없...”철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진이 갑자기 말했다.“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뭐라고?”철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서진의 말대로라면 상언이 효영을 마음에 품었다는 건데,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효영은 미모면 미모, 몸매면 몸매, 빠지는 게 없었다. 아이큐도 높은 여자였지만 속이 검은 사람이었다.그 어떤 미모도
“아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 그 가능성을 아예 배제해서는 안 될 것 같아.”김서진이 다급하게 원철수에게 말했다.“철수 네가 새로운 점을 발견한 것 같아!”“???”철수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서진을 바라보았다.“그러니까 콩깍지가 씌었다는 그 말에 일리가 있어.”철수의 의문에 서진이 설명을 보탰다.철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내 말 좀 들어봐요. 주효영이 진정기 부장님께 사용했던 약이 그때는 실패했지만 어쩌면 그 후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을 수도 있어. 그러니 손에 비슷한 약물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추측하던 서진이 감정에 북받쳐서 했다.그제야 철수도 서진의 가능성에 대해 이해했다.“그러게. 그렇다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철수도 점점 이해되었고 고개를 끄덕였다.“투명 약보다는 그게 더 가능성이 있긴 하지. 예전에도 비슷한 약물이 존재하기도 했었고.”“그뿐만 아니라, 역사 고서적에도 비슷한 약물에 대한 기재가 있어. 그러니 상언이 효영의 약물에 컨트롤 당한 게 분명해. 몸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가 없었던 거야!”말할수록 철수도 흥분에 겨워했다.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뱉어낸 말이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탄복했다.“그래. 바로 그거야.”서진도 말을 보탰다.“정신을 컨트롤했으니 효영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 투명 약 같은 건 그저 우리를 속이려고 지어낸 거고.”“맞아. 서둘러 고지호 교수님께 알려야겠어!”철수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이건 아주 큰 발견이었다. 투명 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이기도 했고 효영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또한 상언이 왜 효영의 말을 듣게 된 건지에 대한 의문도 풀리게 되었다.다만 상언의 컨트롤을 푸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진정기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고 또 여러 가지 상황에 있어 효영의 계획대로 넘어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효영이 성공을 했고 컨트롤 해제가 난제로 남았다.“그동안 상언이
“나야.”임상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원철수와 김서진은 서로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왔다.마치 다른 사람 몰래 나쁜 짓을 벌이다가 현장에서 들킨 기분이 들었다.비록 나쁜 짓은 아니었지만 몰래 상언에 대해 의논을 하는 건 맞았다.서진은 철수를 향해 긴장하지 말라며 눈짓을 줬고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야?”문 앞에 선 상언은 조금 피곤해 보였는데 눈에는 실핏줄이 서 있었고 잠을 설친 것 같았다.안을 들여다보며 상언이 물었다.“철수도 안에 있는 거지?”서진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그래.”“그럼 나 안으로 들어간다?”상언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상언을 서진은 되려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오늘 상언이 조금 이상해 보이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몸을 비켜주었다.“들어와!”두 사람이 나란히 방 안으로 들어서고 이제 문을 닫을 필요가 없었다. 서진이 의자를 하나 끌어오며 말했다.“앉아.”그러나 상언은 앉지 않고 테이블 옆으로 서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지금 내 얘기하고 있었던거지?”“...”두 사람의 침묵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큼큼...”주먹을 질끈 쥐던 철수가 연신 기침을 해댔다.그러자 서진은 솔직하게 말했다.“그래.”상언이 직접적으로 물어오는데 숨길 것도 없었다. 그리고 상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상언이 계속 물었고 오늘따라 이상하게 느껴졌다.“우리가 너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는 걸 너도 눈치챘잖아. 우리가 대체 무슨 얘기를 했을지는 너도 알 것 같은데.”서진은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다시 상언에게 돌렸다.상언은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그래, 넌 똑똑하니까 내 질문에 바로 넘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이 질문의 의도가 뭐야?”서진의 질문에 상언은 억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그게... 큼큼... 다들 진정하고.”철수가 분위기를 애써 돌리려고 노력했다.
김서진은 임상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했다.‘일부러 방까지 찾아와 자신이 주효영을 풀어준 게 맞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약물 컨트롤 당한 게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효영의 말을 들은 거지?’‘혹시 우리의 추측이 틀린 건가? 진심으로 효영과 협력하고 싶었던 거야? 그럼, 지금은 무슨 상황인 거지? 면전에 대고 관계 파열을 신청하는 건가?’이해가 가지 않는 서진과 원철수를 두고 상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내가 일부러 효영을 풀어준 게 맞아.”“효영은 나한테 최면을 걸었어.”상언이 말을 이었다.“최면이라고?”이건 두 사람 모두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약물이라는 추측을 했어도 최면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고 이 단어를 들은 순간 철수는 모든 게 아귀가 맞아떨어짐을 느꼈다. 약물보다도 최면이 더 가능성이 컸다.“그래 최면이야.”상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약물도 함께 사용했을지는 모르겠어. 약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최면은 맞아. 그래서... 그냥 풀어줬어.”철수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그래서 다급하게 상언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잠깐만,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는 거야? 효영이 너에게 최면으로 컨트롤하려고 했는데 넌 그냥 풀어준 거라고?”철수가 상언의 말을 되풀이해 다시 물었고 상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말이야 방귀야? 대체 제어 당했다는 거야, 아니야? 아니 혹시 지금도 최면 상태인 거야?”철수는 말하면서 상언의 면전에 대고 핑거 스냅을 했다.영화나 책에서는 이렇게 최면을 풀었다. 설마 이것도 소용이 없는 건가?서진이 빠르게 철수의 손을 당겨오며 상언에게 물었다.“그러니 최면에 성공한 게 아니란 말이지?”서진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지금 상언의 상태를 보며 확신했다.상언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래.”“그런데 넌...”철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진이 입을 열었다.“상언은 일부러 그런 거야!”“?”상언이 착잡
“왜 내가 주효영의 최면에 넘어가지 않았는지 묻고 싶은 거지?”임상언은 김서진의 물음을 눈치채고 먼저 말을 꺼냈다.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원철수도 이게 궁금했었다.상언이 최면에 걸린 게 아니라 연기를 한 거였다면, 대체 효영은 왜 제 최면이 성공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을까?“우연이 겹쳤다고 할 수 있지. 평소 내가 불면증에 시달린 걸 다들 알고는 있지? 요즘이 일이 바빠 잠자는 시간도 규칙적이지 않고 잠에 든다고 해도 얕은 잠을 잤었어. 이제 시중의 수면제는 모두 먹히지 않는다고.”잠시 숨을 고른 상언이 말을 이었다.“많은 의사과 최면사를 만나봤었어. 처음에는 최면이 조금 먹히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최면에도 항체가 생긴 건지 아니면 무의식에서 저항하는 건지 잠을 잘 수 없게 되었어.”“임남이 옆에 있는 동안에는 잠을 잘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통...”끝말을 맺지 않아도 두 사람은 상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아들이 실종된 지 오래되었고 위험한 사람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일반인들도 잠을 설칠 텐데 예민한 상언은 아예 잠에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쩐지 그동안 안색이 초췌하고 눈에는 실핏줄이 많아졌다.이제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특이한 체질로 효영의 최면이 먹히지 않았다는 건 이해가 되었어. 하지만 효영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공한 거로 착각한 거지? 그래서 효영의 의도대로 움직인 거고.”“그래!”상언이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에는 효영도 의심하더라고. 그래서 물건을 가지고 오라는 둥 작은 테스트를 해보았어. 효영은 점점 최면에 성공한 줄로 확신했고 나는 효영의 말이면 모두 들어줬어.”“그랬던 거였어!”철수가 무릎을 내리치며 말했다. 예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너무 사소한 일이라 의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알려주는 거야? 정말 너무해!”철수가 상언을 향해 말했다.“우리가 사실을 알고 효영을 찾지 않아 의심을 불러올까 알리지 않았다는 건 이
임상언은 김서진과 원철수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원망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두 사람이 잘못한 건 없었다. 다만 의심을 받고 배척되는 기분이 별로였다.상언이 바보도 아니고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두 사람에게 털어놓고 진실을 밝혔다.“화나지 않았다면 다행이고!”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서진은 최근 들어 상언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감정에 치우쳐 판단이 흐려지지는 않았다.“고 교수에게 주효영의 일을...”철수는 말하다가 점점 이상한 점을 느꼈다.상언이 철수의 말을 잘랐다.“일단 고 교수가 투명 약이 실제 존재한다며 여기까지 찾아온 건 나 들으라고 한 말이잖아. 내 반응을 테스트해 보려고 안 그래?”“그렇지.”철수가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상언이 트집을 잡지도 않았고 두 사람은 잘못한 것도 없었으나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니 이 정보를 효영에게 흘린 것도 잘못된 건 아니네!”상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리고 고 교수의 신분은 비밀로 유지해야 해. 우리가 고 교수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그게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할 거야. 아마도 의사거나 연구자이겠거니 생각하겠지.”“각 나라에 비밀 부서가 있고 비밀 유지를 아주 잘한다고 해도, 지금 이 시대에 비밀 부서가 있다는 걸 모르는 나라가 어디 있겠어? 그러한 비밀은 그저 일반인들에게 숨길뿐이지.”그 말은 조금 일리가 있었다.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상의 없이 진행된 일이지만 이번엔 네가 한 일이 옳았다고 생각해.”“정보를 흘려 효영의 의심을 풀게 하고 나를 여전히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으며, 우리 쪽에서 의심하지 않고 있으니 되려 자신에 대한 의문이 들 거야.”“뭐 투명 약?”철수가 고개를 저었다.“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의약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가 그런 소리를 믿겠어?”“그럴지도 모르지!”상언은 그 의견에 반대표를 던졌다.“주효영은
이번에도 원철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철수는 마른기침을 한번 하고 임상언을 바라보았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우린 계속 모르는 척하고 넌 계속 제어 당한 척하려고?”철수는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을 굴렸으나 정답을 찾지 못했다.지금 상황이 너무 꼬여버려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랐다.일단 의학적으로 본다면, 그 어떤 병도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하면 해결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 무슨 상황인 건가? 모든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하나를 손대면 나머지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래서 이 질문은 김서진에게로 넘어갔다.서진은 조금 앓는 소리를 냈다.“당분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게. 넌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우린 널 의심하고 있으며... 주효영은 널 제어하고 있는 거야.”서진의 의도는 아주 분명했다.그 말에 상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역시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자신이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사건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계획을 망칠까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다.오늘 이 자리를 빌려 사건이 아직 그렇게 엉망인 건 아니며 또한 자신도 둘의 생각만큼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밝혔다.하지만 자신의 계획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효영이 최면이 실패했다는 걸 알아차릴 리는 없겠지?”서진은 조금 걱정이 되어 재차 물었다.상언의 표정이 아주 굳건했다.“그건 걱정하지 마. 절대 들켰을 리가 없어. 약물이랑 최면을 같이 진행한 거라...”말을 끝내기도 전에 철수가 얼굴을 굳히더니 손목을 덥석 잡았다.철수가 한껏 긴장한 모습에 서진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다만 상언 본인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맥이 조금 이상해. 이틀 전 맥을 잡겠다고 했을 때 피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철수는 바로 며칠 전 상언의 이상 증세를 떠올렸다.상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부정은 하지 않았다.“네가 너무 예민하게 굴어서 애써 자연스레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는데 그래도 들켜버렸네.”“그땐 이미 널
“중독인 것 같지 않지만, 맥이 정상은 아니야. 몸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그 실험실에 나온 물건이 정상일 리가 없잖아. 조금 이상한 건 맞지만 다행인 건 목숨에 영향을 끼칠 건 아니야.”잠시 뜸을 들이고 원철수가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당분간은 너 안 죽어.”철수는 솔직하고 숨기는 것 없이 말을 뱉었다.“그러면 됐어.”임상언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 같았다.“당분간 안 죽으면 됐지, 뭐.”“뭐가 됐다는 거야? 당분간이 괜찮다고 앞으로 멀쩡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많은 약물은 천천히 발작해. 특히 실험실에서 나온 약물이 정체가 뭔지 알고?”철수가 조금 화를 내며 말했다. 철수는 약물 중독을 몸소 느껴본 적이 있었다.그러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는 산업을 보며 화가 났다.상언은 약물 중독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동안 부작용을 겪은 사람이 본인이 아니니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철수의 생각과는 달리 상언은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었다.상언은 미소를 지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 비록 얼굴에는 피곤함이 많이 묻어났지만, 여전히 굳세어 보였다.“난 죽는 게 두렵지 않아. 당분간 괜찮으면 됐다는 말은, 요즘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다고 생각한 거야. 우리 임남이만 구해낸다면 약물이 발작한다고 해도 괜찮아.”“정말이야, 난 괜찮아!”상언의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 마치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철수는 이런 산업을 보며 코끝이 시려왔다.그제야 상언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들을 구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너 바보야? 이렇게 한다고 해도...”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철수는 입 밖으로 뱉을 수 없었다.상언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얼마나 많이 무너졌는지 다 곁에서 지켜봤었기에 구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다 큰 성인이 이성을 잃고 통곡을 한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