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서 환자의 설명도 매우 중요했다. 특히 난치병에 직면했을 때 몸은 어떤 상태였는지, 어떤 내부 손상이 이러한 고통을 일으켰는지, 상세한 설명과 인식을 통해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원철수는 물끄러미 어르신을 잠깐 바라보았다.어르신은 거기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고, 회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쉬는 것 같기도 하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천천히 내뱉었다. 얼굴색은 비록 창백했지만, 내뱉은 말은 여전히 매우 뚜렷했다.원철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펜을 들고 빠르게 적었다.한참이 지나자 어르신은 갑자기 멈추었다. 원철수는 어르신이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이야기하려는 줄 알고 고개를 돌려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르신의 머리는 한쪽으로 치우쳤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둘째 할아버지?”떠보려고 어르신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둘째 할아버지?”원철수는 다시 한번 불렀고, 이어서 약간 당황했다.“둘째 할아버지, 둘째 할아버지…….”여러 번 외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원철수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펜을 내려놓고 달려들어 어르신의 몸을 안았다.“둘째 할아버지…….”원철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을 흘렸고 심지어 어르신의 맥박을 짚어보는 것도조차 잊었다.“소리 지르기는…… X뿔!”어르신은 갑자기 짜증 나는 말투로 다시 말했다.비록 눈살을 찌푸리고 짜증 내는 모습이었지만 적어도 어르신이 말을 했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원철수는 손을 떼고 어르신을 바라보았는데 어르신이 반쯤 뜬 눈으로 초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울고 또 웃었다.“둘째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아직 죽지 않아서 너무 좋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직 죽지 않아서요!”“퉤-!”침을 한 번 뱉은 후 어르신이 말했다.“맥박 짚는 것도 모르겠어?”“저, 저…… 깜빡했어요!”원철수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방금은 확실히 너무 긴장하고 당황해서 맥박을 짚어보는 것을 완전히 잊었다.그러니 어르신이 꾸짖는 것도 맞았다.자신이 맥박을 한번 짚
당시, 원청현의 진맥만으로는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심했었다. 원철수에게 증상이 나타나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한소은은 남아시아에 파괴적인 재앙을 일으켰던 전염병 바이러스도 우리 몸 속 깊이 침투해 이상 반응을 찾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아마 이 두 가지 바이러스 모두 그 연구소에서 연구한 바이러스와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바이러스는 숨는 데 능숙했고 너무도 교활했다.그랬기 때문에 이상을 느끼지 못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원철수의 능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너무 교활했던 것이다.원철수는 원청현이 자기를 위로하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마지못해 웃으며 물었다.“둘째 할아버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원철수는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 경험이 풍부했다. 게다가 자기의 몸이니 그가 제일 잘 알 수밖에 없다.“사실 너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원청현은 가볍게 웃으며 원철수에게 되물었다.씁쓸하게 웃는 원청현의 표정에 원철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철수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는 원청현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바이러스에 감염되어서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원청현 앞에서 나약하게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적어도 지금은 괜찮아.”원청현은 원철수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지금은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 소도 통째로 잡아먹을 수 있겠어!”“그럼, 소고기 반찬을 해 드릴게요.”원청현의 말을 듣고 원철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자 원청현이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어이구! 이 멍청한 놈아! 지금 소고기 반찬을 해서 내게 바쳐도 못 먹어. 소고기 반찬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내말에 집중해.”“말씀하세요.”원철수는 곧장 자리에 다시 앉으며 말했다.“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건 고독이 아니라 그냥 바이러스인 것 같아. 전에 겉으로 보이는 증상에 속은 거야.”원청현은 잠긴
지금으로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고 심지어 이것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원청현의 말을 듣고서야 원철수는 이것이 고독이 아니라 바이러스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런데 바이러스를 어떻게 소멸하고 또 어떻게 몸을 회복을 해야 하는지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이 바이러스를 꼭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만약 자신도 그런 믿음이 없다면, 이번 연구는 실패한 것과 다름이 없다.“허허.”원청현은 가볍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사실 원청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 죽는다 해도 미련이 없었다.그는 평생 한의약 연구에 몸을 바쳤고, 만족스럽다 말할 수 없지만 연구에서 성과를 꽤 이루었다. 게다가 그의 제자는 하나하나 출중하니 그는 뿌듯하기 그지없을 것이다.그리고 원철수도…….원철수를 보면서 원청현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어리석은 일을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지금은 그래도 의술을 배우려는 마음가짐은 가지고 있었다.원청현은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걱정하지 마, 나 안 죽으니까.”원청현은 작게 투덜거렸다.“네 이놈 욕도 못다 했는데 지금 죽으면 안되지.”“얼마든지 욕 하세요. 둘째 할아버지가 욕하는 거면 얼마든지 다 들을 수 있어요. 얼마든지 하세요.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삼십 년이든 마음껏 욕하세요.”원철수는 다급히 대답했다.원청현은 그를 한번 노려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난 절대 죽으면 안돼. 아니, 설령 죽는다 해도 아직은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철수 이 자식이 평생 자책하며 살 거야.’그런 자책과 죄책감은 아마 원철수를 지옥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할지도 모른다.“이제 바이러스라는 걸 알았으니 고독을 해독하는 방법으로 치료해선 안돼.”원청현은 몸을 겨우 지탱하며 말을 이어갔다. 몸에 많이 무리가 갔지만, 언제 다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질지 모르니 원청현은 한시가 다급했다. 지금 이렇
“뭐가 아쉽다는 거예요?”원철수는 호기심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애석하게도 한소은은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지만, 의학 대신 조향에 꽂혀서 의학은 포기하고 조향을 배우러 갔다는 말이지. 계속 의학 공부를 했다면 지금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도 안 가.”원청현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시, 그는 한소은이 조향을 배우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뜻을 결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조향따위는 별로 쓸모가 없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조향에 빠질대로 빠진 한소은은 조향에만 집착했고 원청현도 그런 그녀를 더는 말릴 수 없었다.게다가 한소은은 조향 방면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조향 사업에 뛰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조향계에서 이름을 날렸다.원청현은 자신도 의술을 배우긴 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일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한소은을 말리지 않았다.나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보니 의술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사람의 심보는 고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많은 일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집념을 내려놓으니 의학 대신 조향을 택한 한소은을 탓하지 않게 되었다.다만, 집념은 내려놓았으나 체면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한소은과 연락을 끊고 지냈었다. 그러다 그녀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었다. 나중에 그녀가 원래 연인과 헤어지고 갑자기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소식은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소은은 모든 걸 스스로 혼자 해결하려 했다.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원청현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그녀는 항상 이를 악물고 혼자 헤쳐 나가려 했다.이런 점은 원청현과 많이 비슷했다. 어쩌면 한소은의 이런 성격이 마음에 들어 그녀를 마지막 제자로 삼고 그렇게 그녀를 아꼈는지도 모른다.원철수는 침묵했다.‘둘째 할아버지의 뜻은, 만약 한소은이 의학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뛰어날 수 있었다는
원철수는 자기를 노려보는 원청현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그는 그저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김준을 타일렀다.“김준, 아저씨 말 들어야지. 이 방에는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할아버지가 지금 아프셔서 그래. 다른 방에 가서 혼자 놀아.”김준은 원청현에게 더 다가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을 나가지도 않았다.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이며 원청현을 바라보았다.“할아버지.”마음이 약해진 원청현은 김준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이리 오렴.”“할아버지.”그 모습을 보고 원철수가 급히 그를 제지했다.마음이 약해졌다고 해서 아이를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러자 원청현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사실 한 지붕 아래에 함께 지내는데 감염될 거면 진작에 감염되었을 거야. 가사 도우미들은 나와 접촉하지 않았는데도 감염 되었잖아. 이건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애초에 준이를 다른 곳에 보내지 않고 이곳에 남겨두었으니,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같이 한다는 뜻이기도 해.”원철수는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그래, 둘째 할아버지 말이 맞아. 감염될 거라면 진작에 감염되었겠지.’바이러스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간염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원철수도 더 이상 원청현을 막지 않았다.원청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김준은 그제야 미소를 띠며 원청현에게로 달려갔다.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원청현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침대 옆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기의 입과 코를 막았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원철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그는 이렇게라도 아이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아이고 이놈아. 또 할아버지 물건을 부순 거야?”원청현은 아주 피곤했지만 그런데도 정신을 애써 붙들고 김준에게 장난삼아 말했다.“안 부쉈어요.”김준은 작은 손을 흔들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아파요?”“그래, 할아버지 지금 아파. 할아버지가 아프다고 그 틈을 타 할아버지 물건을 막 부
김준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젖히며 원청현의 팔에 머리를 살포시 얹었다. 그는 두 눈을 깜빡이며 원청현을 바라보았다.원청현은 김준이 자기의 팔에 기대는 걸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옆에 서있던 원철수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문득,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원철수가 빠른 걸음으로 김준에게 다가갔다.“으응.”원철수가 자기를 끌어낼까 봐 김준은 뒤로 피하며 원청현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갑자기 김준을 제지하려 손을 뻗은 원철수의 모습을 보고 원청현이 그를 말리려 했다. 그 순간, 의혹에 둘러싸인 원철수의 표정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원청현은 멈칫했다. 하지만 그를 말리지 않았다.원철수는 한 손으로 김준의 목을 살짝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준, 움직이지 마. 아저씨가 잠깐 확인할 게 있어.”이윽고 김준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헤집더니 옷깃을 내려 아이의 목을 확인했다. 원청현과 김준 모두 숨을 죽이며 움직이지 않았다.자기를 방에서 데리고 나가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김준은 반항하지 않고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원철수는 김준의 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이의 부드러운 피부에는 빨갛게 두드러기가 생겼다. 습진인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습진과는 사뭇 달랐다.고열이 내린 후 나타난 증상 같아 보이기도 했다.원철수는 바로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왜 그래?”원철수가 말이 없자 원청현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이것 좀 보세요.”원철수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원청현에게 보여 주어야 더욱 확신이 들 것 같았다.원철수는 아이의 몸을 살짝 원청현에게로 돌렸다.원청현은 김준의 목덜미에 난 두드러기를 쓱 보더니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이건…….”“항체 반응 같지 않나요?”원철수가 긴가민가한 말투로 원청현에게 물었다.김준의 두드러기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원철수는 100% 확신할 수 없었다.의학은 자고로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했고, 게다가 김준의 몸에서 발견된 것이니 더욱 신중해야만 했다.원청현
원청현은 입술을 살짝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그는 김준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원철수에게 말했다.“너도 와서 한번 봐.”원철수는 의문이 가득한 상태로 손가락을 아이의 손목에 살짝 갖다 대었다.김준의 맥박은 아주 정상적이고 평온했으며, 아주 건강한, 정상인의 맥박이었다.아이의 맥박은 보통 어른보다 조금 빠르다. 이 또한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었다.원철수는 원청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원청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깊게 연구하고 싶은 열정이 가득했다.하지만 원청현은 그가 스스로 답을 찾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를 향해 웃기만 했다.원철수는 그런 원청현의 눈빛에 김준의 맥을 짚는것에 열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할아버지, 김준은 건강해요.”“그래, 그는 건강해.”원청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매우 흡족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건 그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다.“하지만.”원철수는 조금 망설였다. 김준이 건강하긴 하지만 그의 목덜미에 돋은 붉은 두드러기가 무슨 원인에서인지 알고 싶었다.“하지만 맥박만으로 그게 뭔지 판단할 수 없어. 그렇지?”원청현은 원철수 마음속의 의심과 걱정을 곧장 알아차렸다.원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맥박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무슨 말이예요?”잠자코 있던 김준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아직 어린 그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우리 준이 몸이 아주 건강하다고. 요즘도 밥 잘 먹고 있지?”원청현이 농담 섞인 말투로 김준에게 말했다.“아니요.”그러자 김준은 고개를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요즘 밥이 너무 맛이 없어서 잘 안 먹었어요.”김준의 투덜대는 말에 원청현은 껄껄 웃었다.“허허.”원철수는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원청현은 사실 원철수의 요리 솜씨가 얼마나 최악인지 잘
“이제 네 방에 가서 놀아. 할아버지는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김준의 작은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원청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김준은 어린 나이와 맞지 않게 철이 들었다. 전에는 원청현과 놀겠다며 자주 떼를 쓰곤 했지만 요즘 정원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눈치챈 듯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게다가 김서진이 떠나면서 꼭 원청현과 원철수의 말을 잘 들으라고 신신당부 했었기 때문에 김준은 그의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네, 그럼, 할아버지 푹 쉬세요. 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부르세요.”김준은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가려했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원철수는 얼른 김준을 품에 안아 원청현의 방에서 나갔다.김준의 방 앞까지 가서야 원철수는 그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김준의 눈높이에 맞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에게 말했다.“김준, 뭐가 먹고 싶어? 배달시켜 줄게.”원철수는 자신의 말에 김준이 한없이 기뻐하며 먹고 싶은 음식을 다 얘기할 줄 알았다.하지만 김준의 말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아니예요. 아빠가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할아버지 건강이 우선이니 할아버지에게 조금 더 신경 쓰세요.”앳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니 원철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그는 줄곧 아이를 돌보는 건 매우 귀찮은 일이라 생각하며 아이를 귀찮은 존재라고 여겼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사고를 치며 사람을 번거롭게 한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김준과 지내보면서 가끔 아이들이 어른의 마음을 치유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이렇게 유연하고 작은 몸속에 놀랍도록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원철수는 자기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아이가 그의 마음을 돌봐주고 있었다.“그래, 정말 착한 아이구나.”원철수는 어린 김준을 품에 꼭 안았다. 아이가 자기에게 조금 더 큰 에너지를 주기를 바랐다.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김준의 목덜미에 생긴 두드러기를 한 번 더 자세히 보았다.두드러기는 불규칙하게 여러 군데에 나 있었고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