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현은 입술을 살짝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그는 김준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원철수에게 말했다.“너도 와서 한번 봐.”원철수는 의문이 가득한 상태로 손가락을 아이의 손목에 살짝 갖다 대었다.김준의 맥박은 아주 정상적이고 평온했으며, 아주 건강한, 정상인의 맥박이었다.아이의 맥박은 보통 어른보다 조금 빠르다. 이 또한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었다.원철수는 원청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원청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깊게 연구하고 싶은 열정이 가득했다.하지만 원청현은 그가 스스로 답을 찾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를 향해 웃기만 했다.원철수는 그런 원청현의 눈빛에 김준의 맥을 짚는것에 열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할아버지, 김준은 건강해요.”“그래, 그는 건강해.”원청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매우 흡족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건 그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다.“하지만.”원철수는 조금 망설였다. 김준이 건강하긴 하지만 그의 목덜미에 돋은 붉은 두드러기가 무슨 원인에서인지 알고 싶었다.“하지만 맥박만으로 그게 뭔지 판단할 수 없어. 그렇지?”원청현은 원철수 마음속의 의심과 걱정을 곧장 알아차렸다.원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맥박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무슨 말이예요?”잠자코 있던 김준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아직 어린 그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우리 준이 몸이 아주 건강하다고. 요즘도 밥 잘 먹고 있지?”원청현이 농담 섞인 말투로 김준에게 말했다.“아니요.”그러자 김준은 고개를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요즘 밥이 너무 맛이 없어서 잘 안 먹었어요.”김준의 투덜대는 말에 원청현은 껄껄 웃었다.“허허.”원철수는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원청현은 사실 원철수의 요리 솜씨가 얼마나 최악인지 잘
“이제 네 방에 가서 놀아. 할아버지는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김준의 작은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원청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김준은 어린 나이와 맞지 않게 철이 들었다. 전에는 원청현과 놀겠다며 자주 떼를 쓰곤 했지만 요즘 정원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눈치챈 듯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게다가 김서진이 떠나면서 꼭 원청현과 원철수의 말을 잘 들으라고 신신당부 했었기 때문에 김준은 그의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네, 그럼, 할아버지 푹 쉬세요. 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부르세요.”김준은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가려했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원철수는 얼른 김준을 품에 안아 원청현의 방에서 나갔다.김준의 방 앞까지 가서야 원철수는 그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김준의 눈높이에 맞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에게 말했다.“김준, 뭐가 먹고 싶어? 배달시켜 줄게.”원철수는 자신의 말에 김준이 한없이 기뻐하며 먹고 싶은 음식을 다 얘기할 줄 알았다.하지만 김준의 말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아니예요. 아빠가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할아버지 건강이 우선이니 할아버지에게 조금 더 신경 쓰세요.”앳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니 원철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그는 줄곧 아이를 돌보는 건 매우 귀찮은 일이라 생각하며 아이를 귀찮은 존재라고 여겼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사고를 치며 사람을 번거롭게 한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김준과 지내보면서 가끔 아이들이 어른의 마음을 치유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이렇게 유연하고 작은 몸속에 놀랍도록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원철수는 자기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아이가 그의 마음을 돌봐주고 있었다.“그래, 정말 착한 아이구나.”원철수는 어린 김준을 품에 꼭 안았다. 아이가 자기에게 조금 더 큰 에너지를 주기를 바랐다.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김준의 목덜미에 생긴 두드러기를 한 번 더 자세히 보았다.두드러기는 불규칙하게 여러 군데에 나 있었고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나누고 김준과 장난을 칠 수 있었던 건 다 원청현이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다.김준이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랄까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이다.원철수는 원청현이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정말 몸이 회복되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내가 너무 어리석었어.’원철수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미워했다. 자신이 신중하지 못하고 원청현의 상태를 잘 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그는 조심스럽게 원청현을 부축해 침대에 눕힌 다음, 손으로 원청현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맥박은 혼란스러웠고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생명이 위독할 수 있다.“둘째 할아버지.”원철수는 울음을 겨우 참으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괜찮아.”원청현은 깊게 숨을 한번 내쉬고 손을 내밀었다.“수건이나 줘.”그의 말에 원철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물에 적셔 원청현에게 건네 주었다.그러고는 잊지 않고 마른 수건도 챙겼다.원철수가 젖은 수건을 먼저 건네 주고 손에 마른 수건도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원청현은 웃으며 말을 걸었다.“하여튼 눈치도 빠르다니까.”전에는 원청현이 알려 줘서야 마른 수건을 챙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챙기는 모습에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원청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런 원청현을 보면서 원철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원청현이 자기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날 리가 없다. 울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원철수는 원청현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까 봐 너무 걱정되었다.바이러스가 몸을 더 혹사하지 않는다 해도 나이 든 어르신이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계속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갑자기 피를 토하는 횟수도 늘었다.“둘째 할아버지. 계속 이래서는 나아질리가 없어요. 차라리 저도 그 연구소로 가는
원청현은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이틀 전처럼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다.원철수는 원청현이 잠든 사이 그의 맥박을 짚어보았다. 맥박은 여전히 약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적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원철수의 마음은 복잡했고 괴로웠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가도 아픈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떠날 수도 없었다.여기서 원철수만이 아픈 사람들을 돌볼 수 있다. 만약 그가 떠난다면 원청현, 김준, 그리고 가사도우미들의 상태를 봐줄 사람이 없게 된다.잠시 생각한 후, 원철수는 벌떡 일어서서 발코니로 가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큰 정원은 마치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전에는 생기발랄한 나무와 꽃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온통 회색 세상으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가사 도우미들은 모두 각자 방에서 쉬고 있었고 그가 정원을 지나갈 때는 간간이 기침 소리와 가벼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그들은 자신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저 모두가 독감에 걸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원청현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어디 가지 않고 정원에 남아 자기의 방에만 있었다.원래부터 이 정원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외진 곳이기도 했고 음식 또한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업체가 있었다.게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김서진의 사람들이 밖에서 지키고 있고 생필품을 정기적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생활에 아무런 지장은 없었다.짧은 시간 동안 이런 폐쇄된 환경에서 지내는 건 괜찮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아무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바이러스가 어떻게 변이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원철수는 몸을 돌려 원청현을 한번 쓱 보았다. 그래도 편안한 모습으로 잠에 든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원철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온통 한약 냄새로 가득했다.무슨 바이러스인지는 모르지만, 마냥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원철수는 되는 대로
한소은은 창문을 부수고 나가려고 시도도 했었다. 하지만 창문에 금도 나지 않았다.밖에 지키고 있는 경호원도 그녀가 이 창문을 부술 수 없다는 걸 아는지 방에서 아무리 소리가 크게 나도 한번도 들여다 보지 않았다.온갖 방법을 다 생각해 나가려 애썼지만 모두 헛수고였다.다행히 방안에는 시계가 있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사실 처음에 한소은은 이렇게 조급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찾아올 거라 확신해 잠자코 기다리려 했지만 벌써 3일이 지났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배 속의 아이들이 불안했는지 태동이 심해진 것 말고는 3일 동안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방을 나갈 수 없으니 한소은은 방안에서만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니 행동도 전보다 많이 느려졌다. 만약 이런 시기에 놈들과 싸우게 된다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당신들 보스를 만나게 해줘.”한소은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건 한소은이 진작 예상했던 일이다.보스의 지시를 받은 게 확실했다. “보스를 만나게 해줘.”한소은은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말을 이어갔다.“아기가 태어날 것 같아.”말을 마치고 그녀는 문에 몸을 기댔다.쌍둥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산처럼 부푼 배를 끌어잡고 제자리에서 고통스러워했다.이때가 되어서야, 로봇과도 같았던 경호들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쓱 바라보았다.한소은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고통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보였다.그 고통스러운 표정은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만약 한소은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두 사람은 재빨리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한 사람은 여기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보스에게 이 상황을 전하러 떠났다.사실 한소은도 그들이 어떤 연락 방식으로 서로와 연락할지 몰랐다.
곧이어 경호원 뒤를 따라온 사람을 확인하고 한소은은 깜짝 놀랐다.그녀가 예상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정체를 숨긴 인물도 아니었다.경호원을 따라온 사람은 흰색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비슷한 옷차림을 한 두 사람이 더 서 있었다. 그들은 손에 약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소은은 할 말을 잃었다. 직접 나서지 않고 의사만 보내올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아기가 태어날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정말 아기가 태어난다면 의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보다.그렇지 않다면 아마 한소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의사를 보냈을 수도 있다.의사와 간호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한소은은 고민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의사는 한소은에게 다가가 두말없이 검사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두 간호사도 구급상자를 내려놓고 의사의 지시를 기다렸다.의사는 구급상자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한소은은 구급상자를 슬쩍 보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상자 안에서 주사기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의사의 어깨를 꾹 눌러 잡고 주사기를 의사의 목에 갖다댔다.그녀의 행동이 워낙 빠른 탓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의사는 필요 없어. 당신들 보스 데려와.”의사와 두 명의 간호사는 비명을 질렀지만, 두 경호원은 오히려 덤덤한 반응이었다.“No,No,No.”의사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을 표시했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생명의 위협을 받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가서 당신들 보스한테 전해. 날 만나러 오라고.”한소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3일간 관찰한 것에 따르면 한소은과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어떤 특수한 교육을 받았든, 아니면 그녀를 위해 특별히 안배한 사람이든 한소은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조차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
한소은이 고개를 들어 보니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그녀를 향해 살짝 웃고 있었다.금색 곱슬머리에 파란색 눈, 대충 30대 정도로 보였다.우아한 그의 모습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분명 예의 바른 신사로 여겼을 것이다.그가 온 것을 보고 두 경호원은 즉시 똑바로 서서 인사를 했다.아무도 의사의 생사나 현재의 어수선한 광경을 신경 쓰지 않았다.이 남자가 나타남으로 인해 순간, 모든 상황이 변해버렸다.한소은에게 납치된 의사조차도 더 이상 놀라서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한소은 씨. 안녕하세요. 전 알렉스라고 해요”알렉스는 놀랍게도 한국어를 할 줄 알았고, 생각보다 능숙했다.한소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당신이 이 사람들 보스인가요? 이 조직의 보스?”알렉스는 살짝 미소를 짓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손을 흔들어 경호원을 방에서 내보냈다.“한소은 씨, 당신도 그냥 저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잖아요. 무고한 사람들은 그만 놔주죠.”한소은은 어이가 없었다.“당신도 무고라는 단어의 뜻을 알긴 아는군요.”한소은은 의사를 놔주고 주사기를 구급상자에 툭 던졌다.구급상자에 던져진 주사기를 보고 의사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무의식적으로 자기 목을 만졌다.인내심이 다한 듯한 알렉스는 손을 흔들어 의사와 간호사들도 내보냈다.그들은 1초라도 늦으면 목숨을 잃을까 겁나 허둥지둥 물건을 챙겨 방에서 나갔다.한소은과 알렉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밖으로 부랴부랴 나갔다. 하지만 방문은 닫지 않았다. 두 경호원들은 여전히 방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행여나 한소은이 알렉스에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올 기세였다.알렉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소은의 시선은 문밖의 사람들에게 고정되었다.그녀와 밖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던 알렉스가 다시 손을 흔들며 경호원에게 방문을 닫으라 손짓했다.하지만 알렉스의 안전이 걱정된 경호원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실 이것들은 모두 한소은의 추측일 뿐이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정말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고 무엇을 하려는 건지 예측조차 할 수 없게 했다.이 점에 대해선 임상언이 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조직의 배후 세력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고 그들이 쉽게 손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대항하기 어렵고 적이 너무 강하다고 해서 손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반항과 몸부림을 포기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한소은의 성격이 아니다. 개미가 아무리 작아도 힘을 합치면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알렉스는 손가락으로 지팡이를 탁탁 치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조금도 급하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순간, 한소은은 자신이 너무 조급했던 것은 아닌지, 후회되었다.원래, 그녀는 이렇게 조급해하지 말았어야 했었다.다만 3일간의 감금 같은 생활은 한소은의 인내심을 점점 잃게 했고, 평소의 냉정함을 잃게 했다.게다가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외부에 대한 소식은 조금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한소은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앞의 탁자 위에 놓인 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두 사람은 침묵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겨루어 보는 것 같았다.그렇게 십여 분이 더 지나서야 알렉스는 지팡이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몸을 자연스럽게 뒤로 기댄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한소은 씨, 사실 저는 당신과 오래전부터 약속을 잡았었어요. 다만 당신이 약속을 미루고 또 미루었죠. 그러니 당신이 여기에서 이틀을 더 기다린 것도 공평한 셈이에요.”한소은은 뭔가 이상하다 싶어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알렉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만약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그들의 첫 만남이다.그녀는 알렉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웃는 듯 마는 듯 옅은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