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현은 입술을 살짝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그는 김준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원철수에게 말했다.“너도 와서 한번 봐.”원철수는 의문이 가득한 상태로 손가락을 아이의 손목에 살짝 갖다 대었다.김준의 맥박은 아주 정상적이고 평온했으며, 아주 건강한, 정상인의 맥박이었다.아이의 맥박은 보통 어른보다 조금 빠르다. 이 또한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었다.원철수는 원청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원청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깊게 연구하고 싶은 열정이 가득했다.하지만 원청현은 그가 스스로 답을 찾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를 향해 웃기만 했다.원철수는 그런 원청현의 눈빛에 김준의 맥을 짚는것에 열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할아버지, 김준은 건강해요.”“그래, 그는 건강해.”원청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매우 흡족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건 그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다.“하지만.”원철수는 조금 망설였다. 김준이 건강하긴 하지만 그의 목덜미에 돋은 붉은 두드러기가 무슨 원인에서인지 알고 싶었다.“하지만 맥박만으로 그게 뭔지 판단할 수 없어. 그렇지?”원청현은 원철수 마음속의 의심과 걱정을 곧장 알아차렸다.원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맥박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무슨 말이예요?”잠자코 있던 김준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아직 어린 그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우리 준이 몸이 아주 건강하다고. 요즘도 밥 잘 먹고 있지?”원청현이 농담 섞인 말투로 김준에게 말했다.“아니요.”그러자 김준은 고개를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요즘 밥이 너무 맛이 없어서 잘 안 먹었어요.”김준의 투덜대는 말에 원청현은 껄껄 웃었다.“허허.”원철수는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원청현은 사실 원철수의 요리 솜씨가 얼마나 최악인지 잘
“이제 네 방에 가서 놀아. 할아버지는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김준의 작은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원청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김준은 어린 나이와 맞지 않게 철이 들었다. 전에는 원청현과 놀겠다며 자주 떼를 쓰곤 했지만 요즘 정원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눈치챈 듯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게다가 김서진이 떠나면서 꼭 원청현과 원철수의 말을 잘 들으라고 신신당부 했었기 때문에 김준은 그의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네, 그럼, 할아버지 푹 쉬세요. 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부르세요.”김준은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가려했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원철수는 얼른 김준을 품에 안아 원청현의 방에서 나갔다.김준의 방 앞까지 가서야 원철수는 그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김준의 눈높이에 맞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에게 말했다.“김준, 뭐가 먹고 싶어? 배달시켜 줄게.”원철수는 자신의 말에 김준이 한없이 기뻐하며 먹고 싶은 음식을 다 얘기할 줄 알았다.하지만 김준의 말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아니예요. 아빠가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할아버지 건강이 우선이니 할아버지에게 조금 더 신경 쓰세요.”앳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니 원철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그는 줄곧 아이를 돌보는 건 매우 귀찮은 일이라 생각하며 아이를 귀찮은 존재라고 여겼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사고를 치며 사람을 번거롭게 한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김준과 지내보면서 가끔 아이들이 어른의 마음을 치유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이렇게 유연하고 작은 몸속에 놀랍도록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원철수는 자기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아이가 그의 마음을 돌봐주고 있었다.“그래, 정말 착한 아이구나.”원철수는 어린 김준을 품에 꼭 안았다. 아이가 자기에게 조금 더 큰 에너지를 주기를 바랐다.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김준의 목덜미에 생긴 두드러기를 한 번 더 자세히 보았다.두드러기는 불규칙하게 여러 군데에 나 있었고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나누고 김준과 장난을 칠 수 있었던 건 다 원청현이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다.김준이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랄까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이다.원철수는 원청현이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정말 몸이 회복되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내가 너무 어리석었어.’원철수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미워했다. 자신이 신중하지 못하고 원청현의 상태를 잘 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그는 조심스럽게 원청현을 부축해 침대에 눕힌 다음, 손으로 원청현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맥박은 혼란스러웠고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생명이 위독할 수 있다.“둘째 할아버지.”원철수는 울음을 겨우 참으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괜찮아.”원청현은 깊게 숨을 한번 내쉬고 손을 내밀었다.“수건이나 줘.”그의 말에 원철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물에 적셔 원청현에게 건네 주었다.그러고는 잊지 않고 마른 수건도 챙겼다.원철수가 젖은 수건을 먼저 건네 주고 손에 마른 수건도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원청현은 웃으며 말을 걸었다.“하여튼 눈치도 빠르다니까.”전에는 원청현이 알려 줘서야 마른 수건을 챙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챙기는 모습에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원청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런 원청현을 보면서 원철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원청현이 자기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날 리가 없다. 울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원철수는 원청현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까 봐 너무 걱정되었다.바이러스가 몸을 더 혹사하지 않는다 해도 나이 든 어르신이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계속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갑자기 피를 토하는 횟수도 늘었다.“둘째 할아버지. 계속 이래서는 나아질리가 없어요. 차라리 저도 그 연구소로 가는
원청현은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이틀 전처럼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다.원철수는 원청현이 잠든 사이 그의 맥박을 짚어보았다. 맥박은 여전히 약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적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원철수의 마음은 복잡했고 괴로웠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가도 아픈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떠날 수도 없었다.여기서 원철수만이 아픈 사람들을 돌볼 수 있다. 만약 그가 떠난다면 원청현, 김준, 그리고 가사도우미들의 상태를 봐줄 사람이 없게 된다.잠시 생각한 후, 원철수는 벌떡 일어서서 발코니로 가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큰 정원은 마치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전에는 생기발랄한 나무와 꽃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온통 회색 세상으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가사 도우미들은 모두 각자 방에서 쉬고 있었고 그가 정원을 지나갈 때는 간간이 기침 소리와 가벼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그들은 자신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저 모두가 독감에 걸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원청현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어디 가지 않고 정원에 남아 자기의 방에만 있었다.원래부터 이 정원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외진 곳이기도 했고 음식 또한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업체가 있었다.게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김서진의 사람들이 밖에서 지키고 있고 생필품을 정기적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생활에 아무런 지장은 없었다.짧은 시간 동안 이런 폐쇄된 환경에서 지내는 건 괜찮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아무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바이러스가 어떻게 변이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원철수는 몸을 돌려 원청현을 한번 쓱 보았다. 그래도 편안한 모습으로 잠에 든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원철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온통 한약 냄새로 가득했다.무슨 바이러스인지는 모르지만, 마냥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원철수는 되는 대로
한소은은 창문을 부수고 나가려고 시도도 했었다. 하지만 창문에 금도 나지 않았다.밖에 지키고 있는 경호원도 그녀가 이 창문을 부술 수 없다는 걸 아는지 방에서 아무리 소리가 크게 나도 한번도 들여다 보지 않았다.온갖 방법을 다 생각해 나가려 애썼지만 모두 헛수고였다.다행히 방안에는 시계가 있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사실 처음에 한소은은 이렇게 조급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찾아올 거라 확신해 잠자코 기다리려 했지만 벌써 3일이 지났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배 속의 아이들이 불안했는지 태동이 심해진 것 말고는 3일 동안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방을 나갈 수 없으니 한소은은 방안에서만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니 행동도 전보다 많이 느려졌다. 만약 이런 시기에 놈들과 싸우게 된다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당신들 보스를 만나게 해줘.”한소은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건 한소은이 진작 예상했던 일이다.보스의 지시를 받은 게 확실했다. “보스를 만나게 해줘.”한소은은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말을 이어갔다.“아기가 태어날 것 같아.”말을 마치고 그녀는 문에 몸을 기댔다.쌍둥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산처럼 부푼 배를 끌어잡고 제자리에서 고통스러워했다.이때가 되어서야, 로봇과도 같았던 경호들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쓱 바라보았다.한소은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고통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보였다.그 고통스러운 표정은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만약 한소은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두 사람은 재빨리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한 사람은 여기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보스에게 이 상황을 전하러 떠났다.사실 한소은도 그들이 어떤 연락 방식으로 서로와 연락할지 몰랐다.
곧이어 경호원 뒤를 따라온 사람을 확인하고 한소은은 깜짝 놀랐다.그녀가 예상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정체를 숨긴 인물도 아니었다.경호원을 따라온 사람은 흰색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비슷한 옷차림을 한 두 사람이 더 서 있었다. 그들은 손에 약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소은은 할 말을 잃었다. 직접 나서지 않고 의사만 보내올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아기가 태어날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정말 아기가 태어난다면 의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보다.그렇지 않다면 아마 한소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의사를 보냈을 수도 있다.의사와 간호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한소은은 고민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의사는 한소은에게 다가가 두말없이 검사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두 간호사도 구급상자를 내려놓고 의사의 지시를 기다렸다.의사는 구급상자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한소은은 구급상자를 슬쩍 보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상자 안에서 주사기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의사의 어깨를 꾹 눌러 잡고 주사기를 의사의 목에 갖다댔다.그녀의 행동이 워낙 빠른 탓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의사는 필요 없어. 당신들 보스 데려와.”의사와 두 명의 간호사는 비명을 질렀지만, 두 경호원은 오히려 덤덤한 반응이었다.“No,No,No.”의사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을 표시했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생명의 위협을 받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가서 당신들 보스한테 전해. 날 만나러 오라고.”한소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3일간 관찰한 것에 따르면 한소은과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어떤 특수한 교육을 받았든, 아니면 그녀를 위해 특별히 안배한 사람이든 한소은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조차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
한소은이 고개를 들어 보니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그녀를 향해 살짝 웃고 있었다.금색 곱슬머리에 파란색 눈, 대충 30대 정도로 보였다.우아한 그의 모습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분명 예의 바른 신사로 여겼을 것이다.그가 온 것을 보고 두 경호원은 즉시 똑바로 서서 인사를 했다.아무도 의사의 생사나 현재의 어수선한 광경을 신경 쓰지 않았다.이 남자가 나타남으로 인해 순간, 모든 상황이 변해버렸다.한소은에게 납치된 의사조차도 더 이상 놀라서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한소은 씨. 안녕하세요. 전 알렉스라고 해요”알렉스는 놀랍게도 한국어를 할 줄 알았고, 생각보다 능숙했다.한소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당신이 이 사람들 보스인가요? 이 조직의 보스?”알렉스는 살짝 미소를 짓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손을 흔들어 경호원을 방에서 내보냈다.“한소은 씨, 당신도 그냥 저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잖아요. 무고한 사람들은 그만 놔주죠.”한소은은 어이가 없었다.“당신도 무고라는 단어의 뜻을 알긴 아는군요.”한소은은 의사를 놔주고 주사기를 구급상자에 툭 던졌다.구급상자에 던져진 주사기를 보고 의사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무의식적으로 자기 목을 만졌다.인내심이 다한 듯한 알렉스는 손을 흔들어 의사와 간호사들도 내보냈다.그들은 1초라도 늦으면 목숨을 잃을까 겁나 허둥지둥 물건을 챙겨 방에서 나갔다.한소은과 알렉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밖으로 부랴부랴 나갔다. 하지만 방문은 닫지 않았다. 두 경호원들은 여전히 방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행여나 한소은이 알렉스에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올 기세였다.알렉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소은의 시선은 문밖의 사람들에게 고정되었다.그녀와 밖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던 알렉스가 다시 손을 흔들며 경호원에게 방문을 닫으라 손짓했다.하지만 알렉스의 안전이 걱정된 경호원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실 이것들은 모두 한소은의 추측일 뿐이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정말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고 무엇을 하려는 건지 예측조차 할 수 없게 했다.이 점에 대해선 임상언이 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조직의 배후 세력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고 그들이 쉽게 손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대항하기 어렵고 적이 너무 강하다고 해서 손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반항과 몸부림을 포기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한소은의 성격이 아니다. 개미가 아무리 작아도 힘을 합치면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알렉스는 손가락으로 지팡이를 탁탁 치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조금도 급하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순간, 한소은은 자신이 너무 조급했던 것은 아닌지, 후회되었다.원래, 그녀는 이렇게 조급해하지 말았어야 했었다.다만 3일간의 감금 같은 생활은 한소은의 인내심을 점점 잃게 했고, 평소의 냉정함을 잃게 했다.게다가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외부에 대한 소식은 조금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한소은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앞의 탁자 위에 놓인 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두 사람은 침묵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겨루어 보는 것 같았다.그렇게 십여 분이 더 지나서야 알렉스는 지팡이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몸을 자연스럽게 뒤로 기댄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한소은 씨, 사실 저는 당신과 오래전부터 약속을 잡았었어요. 다만 당신이 약속을 미루고 또 미루었죠. 그러니 당신이 여기에서 이틀을 더 기다린 것도 공평한 셈이에요.”한소은은 뭔가 이상하다 싶어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알렉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만약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그들의 첫 만남이다.그녀는 알렉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웃는 듯 마는 듯 옅은 미소를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