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은 눈을 비비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엄마…….”“왜 또 일어났어?”한소은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김준을 안았고, 아이를 자기 몸 옆으로 끌어당겨 앉혔다.요즘 그녀의 배가 좀 더 나와 그를 안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밀쳐내지는 않았다.“엄마가 다시 간 줄 알았어요.”김준은 엄마의 품에 폭 안겼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는 마음속의 불안함을 들어냈다.한소은은 마음속으로 약간 미안해 했다. 최근 확실히 아들을 소홀했다.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헤어졌으니, 아이는 틀림없이 자기를 매우 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그러나 김준은 철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 가! 엄마 이제 어디도 안 갈 거야. 우리 같이 집에 가자.”김준의 머리를 비비며 한소은이 부드럽게 말했다.집에 가자라는 말을 듣자, 녀석의 눈이 번쩍 뜨였다.“정말? 우리 집에 가는 거예요?”“물론이지.”김준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한소은도 기뻐서 말했다.“네 아빠도 돌아왔으니 드디어 우리 가족이 모일 수 있어.”“좋아요!”이 말을 들은 김준은 더는 참을 수 없이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이를 본 원청현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김준을 막으며 말했다.“아이고, 이 놈아! 조심해!”간신히 뛰어다니려는 아이를 막아 다시 자신의 품에 안으며 원청현은 한소은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정말 준이를 데려갈 거야?”‘참 나, 이 영감 탱이. 지금 준이가 아쉬워서 이러는 건가?’“아님, 준이를 몇 달 더 보살펴 주실래요?”한소은은 농담조로 말했다.그러자 원청현은 또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됐어 됐어, 네가 그냥 데려가!”한소은은 웃기 시작했다.“사부, 아직도 그렇게 삐치는 걸 좋아하시네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일어서서 위층 방향으로 걸어갔다.“어휴…….”원청현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김준은 한소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녀가 갈까 봐 서둘러 쫓아가려 했다.그러자 한소은은 몸을 돌려 입술 앞에 손가락을 대
하지만 이 큰 방은 텅 비어 있었다.임상언이 방안을 둘러보며 남자의 모습을 찾고 있을 때 책상 뒤의 의자에서 왜소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임상언의 앞으로 걸어갔다.“무슨 일이야?”“주효영이 죽었답니다!”임상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 소식을 받았을 때 임상언도 충격을 받았다.심지어 이것이 가짜 소식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속이려는 속임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가지 소식의 출처와 현재 밝혀진 정황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나도 알아.”남자가 고개를 들어 임상언을 바라보았다.가면 뒤의 눈은 약간 실눈을 뜨고 있었고 약간 불쾌해 보였다.임상언은 곧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몸을 웅크려 그보다 한 계단 낮게 앉았다.그제야 남자의 눈이 만족스러운 눈빛을 드러내었다.“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왜 멀쩡하던 공장이 폭발한 것일까요? 그동안 그렇게 많은 실험을 했는데도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데, 그 여자가…… 거짓말하는 거 아닐까요?”임상언이 남자를 떠보며 물었다. 그는 이것이 남자와 주효영이 함께 짠 판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남자는 임상언을 깊이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뒤의 의자에 올라가 앉아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죽었는지 아닌지는 경찰서에서 부검 결과가 나오면 다 알 수 있을 거야. 나도 이런 사고가 날 줄은 몰랐어.”“그렇다면 보스가 계획한 게 아니라는 건가요?”의심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며 임상언은 여전히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내가?”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소리를 내며 웃었다.“내가 왜 그런 짓을 하지? 주효영은 너와 같아. 내게 유능한 사람이야. 그녀가 죽으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잠시 동안 임상언도 보스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지 대답하지 못했다.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고 불가사의하다고 느꼈다.주효영처럼 날뛰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다니?게다가 실험하다가 폭발한 것이니 그녀로서는 정말 저급한 실수였다.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나는 네가 어떤 이유로
보스가 아들을 언급하자 임상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그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아니요, 당연히 아니죠! 내게 약속했던 걸 잊지 마세요. 만약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의 이 실험을 망칠 거예요!”협박을 당했는데도 남자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입을 벌리고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좋아! 이런 각오가 있다니 다행이네. 임상언, 나 몰래 아들을 수십 번 이상 찾았었지? 그런데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했을 거야.”인상언은 묵묵히 두 손을 주먹 쥐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그는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물론, 남자는 그가 대답하든 하지 않든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내 실력과 이 조직의 실력을 잘 알겠지? 너 같은 작은 상인이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도. 너뿐만 아니라 그 김서진이라는 사람도 아무런 방법이 없어. 그래서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네 귀한 아들이 언제까지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어.”“내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는 거 알았으면 해. 위의 사람들은 나보다 더 인내심이 없지.”남자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임상언은 보스의 위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다. 하지만 이건 보스가 처음으로 자기 위에 더 높은 신분의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보스의 말을 듣고 임상언은 조금 의아해했다.“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의심하지 마.”남자는 두 손을 의자 양옆의 팔걸이에 올려놓고 무심코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네가 알아야 하는 건 천천히 알려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이제 주효영이 죽었으니 넌 내 유일한 유능한 조력자야.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 너와 네 아들 모두 무사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이 세상의 사람이 절반 이상 죽어도 너와 네 아들은 무사할 거라고 약속하지.”“네!”임상언은 꼭 쥐었던 주먹을 풀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남자는 느릿하게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학술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고고한 척한단 말이지. 이런 사소한 명예를 얻으려 서로 싸우다니! 난 달라. 내 목표는 이 세계란 말이야!’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문 앞으로 걸어가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이렇게 큰 실험 기지 안의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그의 생각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다.그때가 되면 여기뿐만 아니라 제성 전체, 심지어 전 세계가 모두 그의 발 밑에서 기어 다니게 될 것이다.……극히 드물게 김서진과 한소은 그리고 그들의 아들이 모여 행복을 누리고 있다.김서진이 아들을 품에 안고 방을 한 개 또 한 개 지나오며 아들의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니, 한소은은 순간 한 세기가 지난 것 같았다.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고 너무 많은 경험을 했다.한 실험기지에서 다른 한 실험에 이르기까지 각종 바이러스와 실험은 그녀의 생활을 가득 채웠다.비록 한소은이 원청현을 따라 의학을 오랜 시간 배웠다고 하지만, 이렇게 의학 실험과 바이러스와의 대결에 빠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한소은은 방향을 바꾸고 향수를 만드는 데에 흥미를 느꼈었다.이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하지만 최근에 접촉한 것은 이 세계의 어두운 면을 보이게 했다.전염병,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발생한 일들은 모두 좋지 않은 일이었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재난이었다.일어난 모든 일들은 한시도 숨돌릴 수 없게 했다.한소은은 소파에 앉아 김서진과 김준의 조화로운 모습을 보며 벌써 볼록하게 올라온 배를 만져 보았다.지금, 이 순간의 평화와 안일함이 얼마나 어렵게 얻어진 것인지 느꼈다.“엄마, 엄마…… 우리 집에 예쁜 누나가 오시는 거예요?”아이의 어린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한소은을 깨웠다.한소은은 정신을 차리고 김준의 작은 얼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래! 우리 준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한소은은 이상하다 생각되어 먼저 말을 걸었다.“여보세요?”그럼에도 답이 없자 한소은은 핸드폰의 문제라 생각되어 전화를 끊으려 했다.그 찰나, 전화기 너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사람이 말하는 목소리가 아닌 난잡한 환경 소리였다.바람 소리와 은은하게 경적 소리가 뒤섞여 신경질이 날 정도로 시끄러웠다.한소은은 멍해져서 핸드폰을 가져와 다시 전화번호를 확인했다.확실히 그녀가 모르는 낯선 전화였다. 다시 전화를 귓가에 가져가 한 번 더 물었다.“여보세요? 말씀하세요!”전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옆에 있던 김서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한소은에게 물었다.“왜 그래요?”한소은은 핸드폰을 그대로 들고 김서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1분이 되어서도 대답을 듣지 못하면 그대로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다.한소은이 곧 인내심을 잃으려 할 때, 전화기 너머에서 마침내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은 언니!”“가연이니?”여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한소은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곧 진가연이 지금 말하기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너 왜 그래? 지금 어디야? 말하기 불편한 거야? 이 번호, 네 번호가 맞아? 이따가 다시 전화 걸까?”“아, 아니…….”진가연은 급히 한소은의 말을 끊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었는지 조심조심 말하고 있었다.“소은 언니, 나 지금 집에 있어. 이 핸드폰은 가시 도우미 아주머니 것인데 숨겨둔 거 내가 찾아낸 거야. 언니, 내 아빠가 정말 이상해진 거 같아. 내 사촌 언니에게 컨트롤 당하고 있는 거 같아.”“주효영이 컨트롤하고 있다고?”한소은은 이렇게 되물었지만 말하고 나서 주효영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이어서 말했다.“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 지금 어떤 상황이야? 위험한 거야? 네 아버지가 너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만약…….”“난 괜찮아. 요즘은 괜찮아졌어. 아빠가 날 신
한소은은 거절하지 않았다.확실히 김서진이 함께 간다면 많은 일이 편리해진다.두 사람은 이튿날 아침이 밝자 마자 바로 진정기의 집으로 향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문전 박대를 당했다.“죄송합니다. 집주인께서 몸이 편치 않으십니다. 다음에 다시 오세요!”가사 도우미가 좋은 태도로 두 사람의 방문을 거절했다.김서진은 처음으로 진정기의 집에서 문전박대 당한 것이다. 많이 방문을 한 건 아니었지만, 항상 순조롭게 진정기를 만날 수 있었다.주현철네 식구 보다도 더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김서진과 한소은은 서로를 한번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은 이렇게 문전박대 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오늘날의 진정기는 예전의 그들이 알던 진정기가 아니다.진정기가 그들의 방문을 거절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몸이 편치 않다면 더욱 만나 봐야죠. 제 아내는 유명한 한의사예요. 진 부장의 병을 치료할 수 있으니 들여보내 주세요.”김서진이 가사 도우미에게 말했다.“진 부장에게 전해주세요. 백신 프로젝트에 관해서 할 예기가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가사 도우미는 잠시 머뭇거렸다.하지만 김서진은 아는 얼굴이었기에 머뭇거리다 말했다.“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집주인에게 물어보고 답변 드릴게요.”“네, 부탁합니다!”가사 도우미가 몸을 돌려 다시 들어가려 할 때 한소은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시만요. 제가 주효영 씨와 함께 일 했었다고도 말해주세요. 그 여자가 아는 건 나도 다 알고 그 여자가 할 줄 아는 것도 다 안다고.”한소은의 말에 가사 도우미는 어리둥절 해졌다.그러자 한소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전해주시기만 하면 돼요.”의문이 가득했지만 가사 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전하러 갔다.가사 도우미가 한소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김서진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진정기가 주효영의 약을 원하는 것을 이용하려는 거죠? 당신에게도 그 약이 있다고 믿게 하려고?”“지금의 진정기가 예전의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가 원하는 것을 주려고
두 사람은 서로 한 번 마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이건 확실히 두 사람의 예상을 벗어났다.솔직히 말해서 지금 진정기가 가장 필요한 건 주효영이 그를 컨트롤하는 약이다.하지만 주효영이 죽은 지금, 다른 사람이 그 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연하게 그들을 찾을 것이다.그런데 오히려 그들을 쫓다니. 이건 조금 말이 안되었다.“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물어봐 주세요. 김서진이 왔다고 알려 준 거 맞나요?”한소은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한번 당부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사 도우미는 안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사실 당부하지 않아도 김서진은 그들에게 있어서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그럼에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건 일부러 열어주지 않는 것이다.“어휴…….”한소은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 할 때 김서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옆을 보라고 눈짓했다.이상하다 느낀 한소은은 김서진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주택 이층 서쪽에서 진가연이 옷을 흔들며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입 모양을 보면 이쪽으로 오라는 것 같았다.한소은과 김서진은 진가연이 손짓하는 곳을 따라 뒷문 방향으로 갔다.정원 뒤에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듯한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진가연은 그곳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어주었다.그러고는 한소은의 목을 확 끌어안았다.“소은 언니! 드디어 왔네요!”그녀의 열정에 한소은도 마지못해 그녀를 안아주었다.“여기서 말하지 말고 일단 들어가자!”“응, 언니 말이 맞아!”진가연은 주위를 한번 둘러 보고는 한소은에게 말했다.“일단 내 방으로 가자.”한소은은 아무런 의심 없이 진가연을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뒤에 서 있던 김서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뭐해요? 빨리 들어오지 않고? 그러다 아빠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요?”진가연이 작은 목소리로 김서진에게 말했다.“그게…….”김서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누가 봐도 이런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았다.자기의 집에서 마치 도둑이라도 된 듯 말소리를 낮춰야 한다니.“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한소은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주효영이 죽은 거 알아?”그녀의 말에 진가연 얼굴에 걸렸던 웃음이 굳어져 버렸다.“응, 들었어.”“이 소식을 들었을 때, 네 아버지는 어떤 반응이었어?”“그날 밖에서 돌아오시고 부터 계속 분노에 가득 찬 거처럼 보였어. 아무도 방에 들이지 않고 물건은 부수는 소리만 들렸고, 나중에는…….”진가연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그날의 소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한소은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나중에는 가사 도우미가 들어가서 한참이나 부서진 물건들을 정리했어. 아빠는 이렇게 한바탕 물건을 부수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되었고. 나중에는 그렇게 이상한 거 같지도 않던데.”“물건을 부수는 거 외에 다른 일은 없었어?”한소은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네가 말한 대로면 주효영이 약으로 네 아버지를 컨트롤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주효영은 죽었고 이제 약이 없으니 네 아버지가 회복되었거나 그럴 기미가 보인다 거나 하지 않았어?”진가연은 한참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아니! 예전과 다를게 없었어.”“그럼, 너 한테는? 전에 널 방에 가두었다고 했었잖아. 밖의 사람들과 연락도 하지 못하게 하면서.”“내 핸드폰을 압수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지만 그때처럼 엄격하게 날 가두지는 않아. 어딘가 이상하다면…….”진가연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머뭇거렸다.“어디가 이상한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김서진이 문득 물었다.그러자 진가연은 김서진을 한번 쓱 보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아빠의 반응 속도가 조금 느려진 거 같아요.”“반응 속도가 느려졌다고?”이런 증상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한 한소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예를 들면 어떤 방면에서?”“나 하고 말 할 때 가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다 한참 지나서 방금 뭘 말했냐고 묻기도 하고. 방금 가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