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못 믿겠어?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자.”말을 마치고, 우해민은 그의 팔을 끌어당겨 자리에서 일으켰다.“잠… 잠깐만.”김승엽은 우해민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왜? 나를 그렇게 못 믿겠어? ”우해민은 화가 났다.“옷은 갈아입고 가야지.”김승엽은 두 사람의 몸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현재 이 상태로 어떻게 밖을 나갈 수 있단 말인가?잠시 후, 김승엽은 우해민을 따라 우씨 가문 별장으로 갔다. 가는 길 내내 그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그는 우씨 가문 별장에 와본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매번 올때마다 우해영이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비굴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우씨 가문 전용 차에 앉아, 옆에는 우씨 가문 자녀를 앉힌 채 우씨 가문 별장으로 가고 있다.잠시 후, 그는 우해민을 따라 별장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고용인이 그들의 외투를 받아주었다.우씨 가문 별장 한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거 같았다. 사실 이 별장은 김승엽 가문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발 디딜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해민아,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김승엽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비볐다.그러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우해민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네 언니는…”“우리 언니?”그러자 우해민은 헛웃음을 지으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이제부터 언니는 더 이상 내 삶을 제한할 수 없어. 언니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은 내가 예전에 살던 날들, 아니. 아마 그것보다 더 나빠질 거니까.”“하지만, 해영 씨 무술은…”김승엽은 생각만 해도 아찔해났다. 우해영의 무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승엽과 우해민 두 사람. 아니, 스무 명이 한 번에 덤빈다고 해도 우해영은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하하, 무술…”아무리 무술 실력이 뛰어난다고 해도 독극물
방문이 열리자 이내 안에서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승엽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잠시 후,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희미한 불빛만 나풀거리는 어두운 방안에는 작은 침대 하나만 놓여져 있었다. 침대 위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빛이 그다지 좋지 않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김승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언니야?”그는 고개를 돌려 우해민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우해영은 바로 알아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누구야?”우해민은 김승엽을 힐끗 쳐다보고는 피식 웃으며 두 발짝 안으로 들어갔다.“언니, 당연히 나지 누구겠어? 지금 언니 꼴이 이런데 설마 누가 언니를 보러 올 줄 알았어?”“혹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야?”우해영은 냉소했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긴 거야. 맞잖아? 언니, 설마 지금 언니가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 바보같이 굴지 마. 언니가 이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는 나한테 달렸어.”“그럼 차라리 날 죽여. 그게 낫지 않아? 왜? 못하겠어?”우해영은 막다른 길에 놓여도 전혀 굴복하거나 자세를 낮추지 않고 계속 비아냥거렸다.“내가 어떻게 언니를 이렇게 쉽게 죽이겠어? 아직 제대로 괴롭히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내가 몇 년 동안 겪었던 고통을 언니도 똑같이 충분히 겪어봤으면 좋겠어. 언니도 내가 그동안 이런 나날을 어떻게 견뎌 왔는지 알아야지.”우해민이 말했다.그녀의 말에 우해영은 마른 기침을 두 번 했다. 그러더니 이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네가 스스로 그렇게 약해빠진 걸 지금 누굴 탓하는 거야? 내가 네 목숨을 지켜줬는데 넌 감히 이렇게 갚아줘?”“내 목숨을 지켜줬다고?”우해민은 그녀의 말에 크게 분노하여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기고 머리를 위로 치켜올렸다. “언니가 어떻게 뻔뻔하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다 같은 엄마 아빠의 자식인데 왜 나만 죽어야 하냐고. 나를
“내 초라함은 한순간일 뿐이야. 하지만 너희 둘은 처음부터 계속 패배자였어. 아니, 영원히 패배자야.”우해영은 그들을 조롱하듯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우해영은 지금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어도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마음이 동요했다.그렇다,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실패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총애를 받아왔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그렇게 좋게 봐주지 않았다. 예전에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사실 김승엽은 그의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었으며 김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그에게 가문을 넘겨줄 생각조차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처음부터 그는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할 자격조차 없었지만, 몇 년 동안 그는 끊임없이 이익을 쟁취하려 애썼다. 김승엽의 이런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얼마나 우스웠을까? 결국, 그를 가장 총애하던 어머니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는 이제 가진 것 없이 빈털털이가 된 채 남의 집 신세를 지고 있다. 아마 김승엽보다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김승엽은 안색이 한껏 어두워진채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 김승엽을 보고 우해민은 바로 그를 따랐다. “승엽아, 승엽아.”“보아하니 내가 당신 아픈 곳을 찌른 모양이군. 한 번 패배자는 영원한 패배자일 뿐이야. 아무리 비열한 수단을 써도 그저 일시적인 득에 지나지 않지. 조만간 큰 코를 다칠 거야. 하하하, 하하.”우해영의 웃음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우해민은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겨우 김승엽을 따라잡았다. “왜 그래?”우해민은 그의 팔을 덥석 잡아당기며 물었다. “설마 언니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픈 거야?”그녀는 불안했다. 이런 불안은 자신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어릴 적부터 남들이 지켜봤던 사람은 전부 우해영, 그녀의 언니였으니까 말이다.
김승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 아주 기쁘지. 근데… 난 그저 우해영 씨 말이 맞다고 생각할 뿐이야. 난 정말 확실한 패배자야. 내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실패했어.”김승엽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느낌은 처음이었다.“헛소리. 언니 허튼소리는 한 귀로 흘려.”우해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언니는 지금 입으로만 잘난 척 하고 있어. 네가 왜 패배자야? 적어도 지금은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앉아있는 너와 비교하면 그저 방안에 누워만 있는 언니가 인생의 패배자 아니겠어?”“난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너를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싫어해. 이런 내가 패배자가 아니고 뭐란 말이야?”김승엽이 말했다.“누가 네가 가진 게 없다고 했어? 너한텐 내가 있잖아.”우해민은 김승엽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사과를 한 입 베어물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우해민은 사과를 계속 뜯어먹으며 말했다.“나는 태어나서부터 내 목숨조차 내 것이 아니었어. 하지만 지금의 나를 봐.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반드시 너를 도와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되찾아 줄 거니까.”우해민은 진심으로 그를 위로했다.“그래, 그래. 역시 우리 해민이가 최고야.”순간, 김승엽은 문득 궁금했다. 그는 무술 실력이 만만치 않던 우해영이 갑자기 무력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아, 맞다. 보니까 네 언니는 무력이 아예 없어진 것 같던데…”김승엽은 슬쩍 우해민을 떠봤다.그러자 우해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잃어버린 건 아니야. 언니는 지금 독에 중독됐어. 지금 언니 몸은 극도로 쇠약하고 나약한 상태지.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할 걸?”“뭐? 중독?”김승엽은 깜짝 놀라 몸을 꼿꼿이 세웠다.“왜? 그런 것 같지 않아?”우해민은 김승엽을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그런데 독을 넣었는데, 어떻게 눈치채지 못할 수 있
김승엽은 오랜만에 깊이 푹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우씨 가문은 김서진이 보낸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들어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계속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한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곤히 잠든 우해민을 빤히 바라보았다.아름다운 얼굴에, 잠자는 자태마저 달콤한 우해민은 더 이상 한때 그가 생각했던 순하고 어린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늘 우해영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상하기 어려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김승엽은 자신이 우해영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우해민조차도 쉽게 꿰뚫어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자매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번갈아 떠올라 그는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가서 담배를 피우는데, 그는 순간 우해민과 함께라면 어쩌면, 자신이 다시 재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피워올랐다. 어쨌든 우씨 가문의 재산은 전부 우해민 것이고, 그런 우해민이 김승엽의 여자였기 때문이다.——밤잠을 설친 김승엽은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다.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보니 우해민은 어디로 갔는지 방에 없었다.대충 옷을 걸쳐 입은 김승엽은 계단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계단 입구에 이르자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우해민 씨도 제가 이번에 온 의도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김서진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김승엽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는 우씨 가문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내밀고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거실에는 편한 옷차림의 우해민이 소파에 앉아있었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김서진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듯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표정에서 긴장이 역력하다.우해민은 김서진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서슴없이 말을 이어갔다.“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네요. 승엽이는 지금 저한테 있어요. 어떻게 할 생각
“물론이죠.”우해민이 자신있게 소리쳤다.“전 약속을 정말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감정에도 충실한 편이죠. 누구와는 달리, 가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상처주는 짓은 하지 않아요.”그녀는 차갑게 김서진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이미 승엽이를 김씨 가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은 거 아닌가요? 그럼 저와 승엽이 혼사도 당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일로 다시는 저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 전 아주 바쁜 사람이니까요.”우해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김서진은 가만히 앉아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그 일은 당사자가 얘기하는 게 더 적절한 일 아닌가요?”“그이는 당신들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해요. 그러니까 당신들도 그와 이야기할 자격 없어요. 얼른 돌아가세요.”“에이, 그럴 마음이 없었으면 이렇게 오래 숨어서 대화를 엿듣고 있지 않겠죠, 안 그래요? 삼촌?”김서진은 고개를 들고 계단을 향해 소리쳤다.김서진의 말에 김승엽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와 꽤 멀리 떨어져있고 들키지 않게 잘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들킬 줄이야…김승엽은 지금 바로 내려갈지, 아니면 계속 없는 척할지 망설였다.우해민도 어안이 벙벙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김승엽이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바라보았지만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숨결이 이렇게 뚜렷한데,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니… 무력이 많이 떨어졌나봐요?”그의 한마디에 우해민은 숨을 죽였다.우해민은 우해영처럼 무술을 할 줄 모르니 당연히 사람의 숨결을 그렇게 예리하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우해민이 집 구석에 숨어 있을 때도 우해영은 한 번에 눈치채곤 했는데 이게 바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의 특이점인 건가?바로 그때, 김승엽이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왔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천
“그래, 내 집을 내가 불태우는데 뭐가 문제야?”김승엽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지금도 그 부동산들은 내 명의로 되어 있어. 너희가 아무리 몰수하려고 해도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해.”버럭 화를 내는 모습에 김서진은 가볍게 웃었다. “자기가 자기 명의로 된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해도 고의 방화는 불법인 거 아시죠?”“무슨 증거로 그가 고의로 불을 질렀는지 증명할 수 있죠? 집에 우연히 불이 나는 바람에 그의 재산마저 몽땅 불타버려서 이 사람도 지금 마음이 아프다고요.”어찌된 일인지 우해민은 오늘 유달리 말주변이 뛰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말주변이 좋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지는 못했다.“우해민 씨, 기어코 저희 가문 일에 끼어드려는 겁니까?”김서진은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아주 위험해 보였다.우해민은 살짝 몸을 떨었다.“당신들의 집안 싸움에는 관심없지만, 제 약혼자에 관한 일이라면 제가 직접 나서야겠는데요?”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온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낄 때, 우해민은 확고하게 그의 곁에 서서 이렇게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그는 살아갈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느꼈다.“아까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하셨죠?”김서진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정말 법적 절차를 밟고 싶으신 겁니까? 정식으로 법적 절차를 밟게 되면 삼촌이 직면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그는 김승엽을 쳐다보며 말했다.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김승엽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를 꼭 궁지로 몰아가야만 속이 시원해?”“아무도 삼촌을 궁지로 몰지 않았어요. 길은 삼촌 스스로 선택한 거예요. 삼촌이 어떻게 가느냐에 달려 있어요.”오랫동안 우씨 가문에 있으면서 할 말은 다 한 김서진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저랑 같이 가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여기에서 평생 숨어 살 수는 없어요. 삼촌은 아직도 제 삼촌이에요. 만약 삼촌이 계속 제 삼촌이
그는 앞으로의 나날을 상상할 수 없었다.김서진이 떠나기 전에 한 말을 김승엽은 확실히 이해했다. 삼촌으로 남고 싶냐던 그 말… 김씨 가문에 가서 직접 상의하라는 건가? 혹시,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란 말인가? 김승엽은 믿기지 않았지만 한 번 실험해보고 싶었다. “본가에 좀 다녀올게.”김승엽은 우해민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한창 기쁨에 겨워 행복해하던 우해민은 그의 말에 두 눈을 부릅떴다.“미쳤어? 그들은 너를 집에서 쫓아냈다고. 심지어 어머니조차 너를 원하지 않는데 왜 돌아가려고 하는 거야? 스스로 모욕을 자초하려고 그래?”“아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그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대체 뭘 확인하겠다는 거야? 어머니가 직접 당신을 낳은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거야? 아니면 어머니가 당신을 배신하고 지금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거야?”우해민은 뒤에서 김승엽을 꼭 껴안았다.“난 당신 이해해. 가족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도 이해하고. 하지만, 이익 앞에서 가족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딸도 죽일 수 있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바로 사람이야. 그러니까 가지마. 당신한텐 내가 있잖아. 나 하나만으로 부족해? 오직 나만이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나만이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그녀는 김승엽을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놓으려 하지 않았다.김승엽은 그녀의 압박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우해민의 손을 살며시 풀며 그녀를 달래주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그는 어쩔 수 없이 우해민이 자신을 안고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도 잘 알아.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나를 관심하고, 나한테 잘해준다는 거… 당신은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 둘만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왜 안 되는데?”우해민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언니가 죽으면 우리 부모님한테는 딸이 나 하나밖에 없어. 두 분도 그렇게 많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