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게 닫혀 있던 커다란 철문이 눈앞에서 열리는 것을 보고 김승엽은 잠시 머뭇거렸다.‘이건 들어오라는 뜻인가?’문이 열리자,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욕하던 김승엽이 약간 주저했다. 그렇게 오래 그녀를 욕했는데 막상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주니 그녀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겁이 났지만, 체면을 잃을 수 없어서 감시카메라를 보며 비웃었다.“뭐, 당신이 문을 열었다고 해서 내가 들어갈 줄 알고? 난 들어가지 않을 거야! 내가 말했잖아, 우해영. 난 충분히 참았다고! 당신이 우씨 가문의 아가씨니까 당신을 존경하고 잘해준 거지, 더 이상 날 농락하는 건 참아줄 수 없어! 이래 봬도 난 김씨 가문의 아들이라고. 당신 요즘 정말 너무했어! 더 이상 잘해줄 거란 기대하지도 마!”그렇게 말한 후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거실에서 그가 돌아서 자기의 차가 세워진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데일이 고개를 살짝 수그리며 우해영에게 물었다.“아가씨, 제가 가서 잡아 올까요?”우해영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데일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김승엽을 잡으러 갔다.곧이어 오토바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일은 빠르게 김승엽의 차가 세워진 곳으로 갔다.그 시각, 김승엽은 정말 이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그가 대문 밖에서 우해영을 이렇게 오래 욕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문을 열어준 것에 대해 그는 분명 좋은 뜻으로 문을 열어준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항상 그가 먼저 사과하고 그녀를 달랬었기에 이번에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들어가라고 문 열어줘도 안 들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거야!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자고!’김승엽은 자기가 떠나면 우해영이 참지 못하고 주동적으로 자기를 찾아올 거로 생각했다. 한번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인다면 분명 두 번, 세 번이 더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조금 떨어진 곳
김승엽을 끌고 들어가는 내내 데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오토바이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김승엽을 밧줄에 매달고 딱 그가 죽지 않을 만큼까지 끌고 오다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저택 입구 계단에 서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우해영을 보고 김승엽은 한마디 욕도 할 수 없었다.그는 진흙 덩어리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입었던 고급 양복은 너덜너덜해져 곧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누군가 했더니, 그 유명한 김씨 가문의 아들이잖아. 왜, 더 욕하지, 그래?”그의 이런 보습을 보고 우해영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았다.그 누구도 그녀를 옥하고 도망칠 수 없었다. 누구나 다 그녀를 쉽게 욕할 수 있다면 그녀의 체면이 서지 않으니깐.김승엽은 여전히 그녀를 욕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듯 아파졌고 끌려오면서 피부도 바닥에 쓸려 피가 나고 있었다. 혹시 뼈가 부러진 것 일지도 모른다. 아픔보다 더욱 그를 미치게 만드는 건 눈앞의 이 여자가 자기에게 이런 모욕을 줬다는 사실이다.김씨 가문의 막내아들로서, 아버지의 편애를 받지 못하고 가주의 자리까지 조카에게 뺏겨버렸지만 자기를 목숨보다 아껴주는 어머니 밑에서 상처 하나 없이 곱게 자랐다.오랜 시간 동안 김서진이 본래 자신이 가졌어야 할 것들을 빼앗아 갔다고 불평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고난과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제아무리 김서진이 그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고 해도 작은아버지라는 신분을 고려해 최소한의 존중은 해주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는 그를 개처럼 끌고 들어왔다. 게다가 높은 데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다.‘이 여자가 정말 어제 부끄러워하며 내 청혼을 받아들인 그 여자란 말인가?’김승엽은 겨우 일어나 앉으며 팔과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는지 움직여 보았다. 다행도 부러지진 않았고 그저 피부가 땅에 스쳐 피가 나고 있었다.우해영은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거만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김승엽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우해영이 방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들어와!”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던 김승엽은 그녀의 옆에 큰 얼음덩이처럼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말없이 따라 들어갔다.발을 들자, 온몸이 아파왔다. 김승엽은 이를 악물고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무표정으로 서 있는 데일의 옆을 지나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오늘 겪은 수모를 갚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그가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해영은 이미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타고 있었다.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김승엽은 자기 옷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면서도 그대로 소파에 풀썩 앉았다.그런 그를 한번 보던 우해영이 입을 열었다.“데일, 김승엽 씨 데려가서 씻게 하고 깨끗한 옷 한 벌 내어줘.”데일이 그녀의 지시를 받고 한발 다가 가자 김승엽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필요 없어요! 난 지금, 이 상태가 좋아요. 얼마나 특별해요. 다른 사람이 하고 싶어도 못 할 스타일인데! 당신 집 옷은 내가 감히 입지도 못하겠어요.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말해요!”김승엽은 한껏 비꼬듯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여생을 함께 할 결혼 상대가 아닌 그저 비즈니스 상대로만 생각하니 그녀 앞에서 잘 보이려 하고 싶지도 않았다.그의 무례한 태도에 데일은 못마땅했다. 하지만 우해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데일, 넌 나가있어.”“......”우해영의 말에도 데일은 여전히 눈앞의 남자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아가씨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나가야만 했다.방에는 우해영과 김승엽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우해영은 느릿하게 차를 두 잔 따라 김승엽에게 한잔 건네주며 말했다.“차 한잔 마시면서 목부터 축여요.”그러자 김승엽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사양하지 않고 찻잔을 받아 들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반면, 우해영은 찻잔을 들고 있기만 할 뿐, 차를 마시지 않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당신네 김씨 가문에 무술 비적이 있다는
“하지만 어제...”김승엽은 어제 그녀가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일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가 뱉은 말을 번복하는 일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니 다시 말을 삼켰다.그러자 우해영이 그의 생각이라도 읽은듯 그가 예상했던 대답을 해주었다.“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에요. 어제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지만, 오늘은 아니죠. 그리고 당신이 그런 쪽팔린 일을 하니 지금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내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공개 프러포즈라니, 지금 난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고요.”다시 생각해도 우해영은 화가 났다. 어제의 그 장면, 제일 중요한 건 우해민 그 계집애가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거지 자기가 받아들인 게 아니다.“???”김승엽은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놓고 오늘 그 일 때문에 화가 나다니!“그래서 다른 사람이 구경한 게 화가 난 거예요?”김승엽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화날 이유가 이것밖에 없었다.“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김서진 손에서 그 비적을 뺏어 올 수 있는지 없는지예요!”우해영은 김승엽과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 비적을 자기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지 없는지만 확실하게 대답해 주길 원했다.“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까 말했던 우씨 가문의 지분은...”만약 우해영이 정말 자기에게 우씨 가문의 지분을 준다면 실권을 가지지 못했어도 김서진과 맞설 밑천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매달 조금씩 받아먹는 김씨 가문의 배당금과는 달리 이건 오직 자기의 자산이 된다. 솔직히 자기가 얼마만큼의 배당금을 가질 수 있는지는 김서진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다.하지만 우씨 가문 30%의 지분을 가지게 되면 우씨 가문의 주주가 되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우씨 가문에 가문을 이을 자식이 적어 우해영의 손에만 70%의 지분이 있다. 나머지 30% 중 15%는 가문 장로들의 손에 있고 남은 15
“만약 나도 안된다면 이 일을 맡길만한 사람이 더 없을 거 같네요.”김승엽이 일어서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비적을 꼭 찾을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그를 제외하고 김서진의 가까이에서 비적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없을 것이다. 사실 우해영이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 이런 조건까지 내걸면서 자기에게 부탁을 한 것이라고 확신했다.이렇게 생각하니 우씨 가문 30% 지분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쉽게 30%를 주겠다고 하는 건 그 비적이 결코 이 정도의 가격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하지만 김승엽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비적을 손에 넣은 후 다시 그녀와 협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때가 되면 오늘 당한 부상, 그리고 그녀가 지금껏 자기에게 준 멸시와 모욕을 모두 돌려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얘기가 끝나고 자리를 뜨려던 김승엽이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려 우해영을 바라보았다.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 보더니 찻잔을 쥔 그녀의 손에 시선이 멈추었다.김승엽이 말없이 자기를 바라보니 소름이 돋은 우해영이 조금 언짢은 말투로 물었다.“또 왜 그러는데요?”“내가 어제 준 프러포즈 반지는요?”반지가 얼마나 비싼 건 아니었지만 그건 그가 나름대로 신경 써서 고른 반지였다. 지금 보니 그녀가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역시 이 여자의 마음을 알 수가 없네. 내가 손에 쥐고 주무를만한 여자가 아니야’“아...”우해영이 자기의 손을 한번 보더니 자기가 꾸겨버린 반지를 보물처럼 아끼던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너무 싸구려라 잃어버렸나 봐요. 왜요, 쪼잔하게 반지 돌려달라는 건 아니죠? 똑같은 걸로 배상이라도 할까요?”“......”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이를 악물더니 주먹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확실히 비싼 반지는 아니었어요. 잃어버렸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이제 얘기가 다 끝났으니, 잃어버린 것도 어쩌면 잘된 일일 수 있겠네요.”그러고는 뒤도 돌아
“왜, 아직도 불만이야?”우해영이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어제 그렇게 혼냈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이지?’우해영은 줄곧 우해민이 지금껏 살아있는 건 모두 자기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기의 그림자가 아닌 그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우씨 가문의 다른 아가씨로 살아갔다면 벌써 죽임을 당했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하지만 지금, 우해민은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자기에게 대들고 심지어는 이런 모습까지 보이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우해영은 이런 그녀가 분명 김승엽 그 자식에게 현혹된 것이고 미친것이라고 확신했다.우해영의 물음에 우해민은 대답은커녕 말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넋 나간 사람처럼 바닥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그녀가 이럴수록 우해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젠 내 말도 들은 체 만 체한다. 이거지?’우해민의 말 없는 반항에 우해영은 더 이상 그녀가 자기의 그림자로서 자기의 대체품으로서 일을 잘 해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지금 네 꼴을 봐! 나를 위협하려고 이러는 거야? 너 없으면 내 안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웅크리고 있는 우해민의 앞에 서자, 우해영이 이룬 거대한 그림자는 우해민을 집어삼켰다.여전히 말 없는 그녀에 화가 치밀어 오른 우해영이 손을 뻗어 우해민을 힘껏 잡아당기며 지하실에서 그녀를 끌어냈다.몇 번 발버둥 치다 우해영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걸 느낀 우해민이 포기한 듯 발버둥을 멈추었다. 우해영의 손에 끌려서 환하게 불이 켜진 거실 바닥에 내팽개쳐졌다.우해영은 거울을 가져와 그녀를 비추었다.“네 꼴을 봐봐. 어떤 모습인지 잘 보란 말이야! 지금 네 모습이 이 모양인데 앞으로 어떻게 내 그림자 역할을 하려고 그래? 지금 네 모습이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지 보란 말이야!”“난, 원래부터 언니를 닮지 않았어.”우해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녀는 거울에 비친 창백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질 것 같은 하얀 피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흐린 두 눈, 게다가 날이 갈
우해민의 말에 놀란 우해영은 그 자리에서 멍해져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우해민이 방에 하루 꼬박 갇혀 있으면서 충분히 반성하고 후회하며 자기에게 사과할 줄 알았다. 방에서 나오면 울면서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빌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우해민이 더 이상 자기의 그림자가 아닌 우해민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해? 미친 거야?”우해영은 놀라움이 가시지 않는지 그녀에게 되물었다.“미치지 않았어. 난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알아!”바닥에 내팽개쳐졌던 우해민이 천천히 일어서며 우해영 앞에 우뚝 섰다. 지금 보니 자기의 키가 우해영보다 조금 더 컸다.아주 조금이었지만 이것이 자기와 언니의 차이이다. 두 사람은 어떻게 해도 한 사람이 될 수 없다.“언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난 언니의 말만 들었어. 언니가 뭘 하라 하면 뭘 했었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 나 그냥 우해민으로 살면 안 돼? 언니, 난 단지 우씨 가문에 우해민이라는 딸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우린 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이잖아. 우린 친자매잖아.”이런 말을 하면서 우해민은 우해영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우해영은 마치 뜨거운 무언가에 손이 닿은 듯 획 손을 뿌리쳤다.“너 정말 미쳤구나!”“난 미치지 않았어! 언니, 제발! 우린 친자매잖아, 그저 우해민으로서 살게 해줘. 언니의 동생으로도 언니를 도울 수 있잖아. 더 이상 언니인 척하고 싶지 않아. 제발...”우해민이 애원하듯 우해영에게 말했다.하루 꼬박 방에 갇혔던 우해민은 꾸겨진 반지를 꼭 쥐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해민이라는 신분으로 김승엽에게 찾아가고 싶었다. 김승엽이 이런 자기를 받아주지 않아도 매번 그의 앞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그 입 닥쳐!”우해영은 있는 힘껏 우해민의 뺨을 내리쳤다. 그러자 우해민의
나중에는 행운이었는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몇 번의 위기를 모면하고 나서 마침내 살아갈 자격이 생겼다. 하지만 그날부로 그녀는 자기의 삶을 잃었다.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닌, 우해민이 아닌 우씨 가문의 유일한 아가씨, 우해영의 그림자가 되어버렸다.우해영이 필요할 때만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 그녀를 대신하고 그녀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영원히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 있어야만 했다.한때 우해민은 이런 삶을 만족해했다. 그림자로 살면 적어도 죽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때는 섬에 살았었고 활동 범위가 넓지않아 구속된 삶을 살아도 크게 영향이 없었다.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많은 곳을 다니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점차 이런 생활을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다.우해민은 다른 여자애들처럼 치마를 입고 거리에서 깡충깡충 뛰어보고 싶었고, 진정한 연애를 해보고 싶었고, 몸매 걱정 없이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것조차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우해영이 하지 않는 일은 모두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우해민이 아닌 우해영이란 이름으로 살아가야 했다.“그건 그냥 저주일 뿐이야. 그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잖아. 그 저주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그런 것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려는 거야?”우해영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저주가 가짜였다면 이렇게 이야기가 전해질 리가 없잖아! 자기의 형제를 잃은 엄마의 삶을 보고도 모르겠어? 이건 우리 가문의 운명이야. 네가 지금껏 살아있고, 지금 내 앞에서 네 삶을 망쳤다고 한탄할 수 있는 건 다 내가 널 가엽게 여겨서 그럴 수 있는 거야. 네가 내 그림자가 되지 않았다면 진작에 이 세상에 없었어!”우해영이 차가운 목소리도 쏘아붙였다.두 자매에서 한 사람만 남을 수 있다면 분명 강한 우해영이 남았을 것이다.어린 시절의 우해영은 이렇게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