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엽은 차에서 내려온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우해영 옆에서 일하는 개인 비서다. 차도 우해영집의 차가 확실했다. 그렇다는 건 그녀를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하지만 김승엽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고 싶지 않은 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김승엽은 그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너희 아가씨는 내가 이따가 잘 모시고 갈 테니 너희는 먼저 돌아가서 기다려!”말을 마치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려던 손이 텅 비었다.우해민은 입술을 꼭 물고 앞으로 한발 섰다. 그녀의 어깨에 걸쳤던 김승엽의 옷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해민 씨...”김승엽이 작게 그녀를 불렀다. 놀란 표정으로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우해민은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애써 웃어 보였다.“먼저 가요. 오늘은 정말 가봐야 해요. 우리... 또 연락해요!”말을 마치고 우해민은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그가 더 이상 붙잡지 못하게 차 문을 세게 닫았다.“해민 씨, 해민 씨!”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김승엽은 차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비서에 가로막혀 버렸다.“김승엽 씨, 자중하세요!”그러고는 조수석에 올라타고는 그녀를 태운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가만히 서 있던 김승엽은 한참 동안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차는 이미 그의 시선에서 사라진 뒤였다.그는 우씨 가문의 아가씨가 고작 비서에게 납치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그녀의 표정에서 두려움을 보았던 거 같다. 하지만, 그녀를 데려간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비서였다. 우씨 가문의 아가씨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김승엽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다 된 밥에 재 뿌린 격이니 분노에 겨워 발만 동동 굴렀다. --차 안에서 우해민은 두 다리를 모으고 양손을 무릎에 얹은 채 고분고분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다.그녀는 앞좌석을 뚫어지게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데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데일은 언니의
김서진은 원래 아내와 특별한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이 두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자리에 앉자마자 사전 주문한 음식이 빠르게 제공되었고, 두 사람은 배고픈 듯 조용히 식사했다.두 사람 모두 느릿하게 식사만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한소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우해영 씨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나요?”“당신도 이상한 걸 느꼈군요?”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던 김서진의 얼굴에는 조금도 놀란 모습이 없었다.한소은의 통찰력은 매우 높았다. 자기가 알아차렸다면 그녀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이상한 것은 이번에 본 우해영이 왜 저번과 완전히 다른 것인지 의문이었다.“내가 잘못 본건 아니군요.”그의 확인을 받은 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해영과 몇 번밖에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김서진까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지난번처럼 위협적인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한소은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갔다."기습해서 그런 건 아니고, 무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기라는 게 있는데,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난 느낄 수 있어요, 이번에 그 기운이 사라진 것 같아요.""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김서진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무술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무술의 기운이 있으며, 아무리 그것을 감추려 해도 기운이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방금 우해영을 보았을 때 그녀가 일부러 기를 숨기려 하는 게 아니라 전혀 없는 것 같았다."당신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조금 겁먹은 것 같았는데, 전혀 그녀답지 않았어요."소문에 의하면 우해영은 매우 오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방금 그 여자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뼛속 깊이서부터 나오는 두려움은 숨길 수 없었다.처음에는 김서진도 자기가 그녀를 다치게 해서 자기를 무서워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혹시 우해영에게 쌍둥이 자매가
“......”김서진 그녀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질투하는 건가?’하지만 미소 짓는 그녀의 눈을 보면 진심으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김서진은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잘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말했다.“그 여자가 어떤 유행이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지금 당신을 배불리 먹이지 않으면 이따 집으로 돌아갈 때 배고프다고 칭얼댈 건 잘 알겠어요.”“내가 많이 먹는다고 돌려 말하는 거예요?”한소은은 김서진을 한번 쓱 보고는 고분고분하게 고기를 받아먹었다.고기는 육즙이 풍부하고 부드러우며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그럴 리가요, 난 당신이 많이 먹었으면 좋겠는 걸요.”김서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두 사람은 서로에게 미소를 지었고 분위기는 더없이 따뜻했다.그래도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만약…. 만약 우해영이 정말 당신이 말한 대로 그런 상황에 부닥쳐 있다면 정말 곤란할 것 같아요."“그게 무슨 말이에요?”"만약 그녀가 정말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가 한 일을 다른 인격이 알지 못하는 것이잖아요. 또한 우리가 어느 시점에서 어떤 인격을 상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예를 들어, 그녀가 나를 공격했을 때는 오늘 본 인격이 아닐 거예요. 하지만 그 인격이 언제 나타나고 또 무엇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통제할 수 없는 사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은 정말 무서운 존재다.그녀의 말에 김서진은 잠시 침묵했다.“그녀의 어느 인격이 나오든, 상황이 어떻든, 다시는 당신을 해치지 못하게 할게요. 내가 약속할게요!"“당신이 이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유리로 만들어진 인형 같잖아요. 잊지 마요. 난 무술을 할 줄 아는 여자예요!”마음속으로는 그의 말에 감동했지만, 한소은은 작은 투정을 부렸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여전히 무술을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그래요, 그래요, 당신은 보호가 필요하지 않아요. 보호가 필요한 건 나예요. 그러니
거의 조건반사처럼 우해민는 사고도 거치지 않고 다리에 힘이 빠지며 무릎을 꿇었다.우해영은 일어서서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머리를 들지 않아도 그녀는 위에서 풍겨오는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우해민는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입술을 꽉 다무는 채로 있었다.사실 그녀와 김승엽이 회사를 떠나 식사를 하러 갈 때부터 벌을 받을 준비를 이미 마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은 좀처럼 특별히 긴장되지 않았고 오히려 평온해졌다.“너도 인젠 다 컸구나!” 우해영은 차분하게 말하며 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날개도 단단해졌구나!”어깨로부터 오는 통증은 완전히 힘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언니를 닮았다 하더라도 힘과 완전히 비교할 수 없다.자신 어릴 때 무술을 연습했지만 언니처럼 튼튼한 마법을 취할 수는 없었고 근력도 언니만큼 강하지 않았다. 얼마나 노력해도 선천적인 기반은 후천적인 노력으로는 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재능이 없었고 언니처럼 강한 힘과 깨달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그동안 지하실에 있었고 밤에만 잠시 나와서 바람을 쐬니까 더욱 약해져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어깨 뼈가 찢어질 듯이 아프다고 느꼈다. 언니의 손은 점점 더 세게 조여오고 마치 그녀의 뼈를 깨뜨리고자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만약 진짜로 뼈를 깨뜨린다면 그래도 괜찮다. 그냥 죽어버리면 되고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도 괜찮다. 어차피 그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어차피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쓸데없는 사람이고 어차피 이 세상에는 간직해야 할 가치가 별로 없으니까.근데…….왜 조금 섭섭하지? 그냥 아쉬울 뿐이다. 방금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아직 그와 함께 나아갈 기회가 없었을 뿐.우해민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입술도 혈색이 전혀 없었다. 고통으로 얼굴 전체가 비틀린 채였으며 이를 꽉 깨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아픔을 외치지 않고 구걸하지도 않았다. 오
우해영의 얼굴빛도 순간 변했다.그녀는 무예를 익히 배운 사람으로서 역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방금 그녀의 한 방으로 놈의 뼈를 부러뜨린걸 본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분노로 가득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이건 실상 그녀에게 있어서 좋은 일은 아니었다."아가씨." 이때 옆에 있던 데일이 입을 열었다.그는 평온하고 냉담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든지 죽든 말든 그와는 상관 없었다. 설령 누군가가 아가씨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그러다가 바닥에 누워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얼굴이 자신과 정말 비슷했던 우해영은 좀 짜증이 났다. "얘를 들어내......"소녀를 방안으로 들어서 옮기라고 말하려던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번쩍이더니 마치 무엇에 눈이 부신 듯 했다.눈을 똑바로 뜨고 확인해보니 우해민의 손에는 뜻밖에도 다이아몬드 반지가 하나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빛이 굴절되면서 그녀에게 번쩍였던 것이었다.그나마 조금 꺼져가던 마음 속 화는 다시 사르르 타올랐고 그녀는 곧이어 허리를 굽혀 반지를 슥 뽑으려 했다.우해민의 손가락은 가늘었다. 하지만 둥근 모양에, 관절로 인해 막혀버려 겨우 두번을 시도하고 나서야 뽑아냈다.그런데 이 계집애는 분명히 기절은 했지만, 뜻밖에도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구부리는 등 내키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우해영의 화를 더욱 돋구었다. 그녀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다시 말을 바꿨다. "찬물로 얘를 깨워 !나 아직 얘한테 물어볼게 있어. 이렇게 기절하면 정말 허무한거 아니냐고!”"네!" 데일은 대답하며 몸을 돌려 나가더니 곧 찬물 한 통을 들고 들어왔다. 이어서 무표정한 얼굴로 우해민의 몸에 끼얹었다.그 물 한 통은 밖에서 들고온 것이라 매우 차가워서 갑자기 몸에 물을 끼얹힌 우해민은 격렬하게 몸서리를 치고는 바들바들 떨면서 깨어났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우해민의 한마디에 우해영은 정말 놀라 멍해졌다.자신의 손에 들어있는 물건을 우해민이 직접 이렇게 요구한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태까지 언제든지 뭘 빼앗아도 감히 돌려달라고 말 못하던 그녀가, 뜻밖에도 자신에게 반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보아하니 이 반지, 아니, 이 남자, 정말 얘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건가?한참을 생각하던 우해영의 눈빛은 깊어졌고, 반지를 보다가 우해민을 쳐다봤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제대로 못 들었어."그녀의 표정을 본 우해민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이렇게 나댈 수는 없었다. 언니는 이미 단단히 화가 났고, 어깨뼈에서 전해지는 통증도 그녀에게 이런 죽음을 차조하는 짓은 하지 말라고 일깨워 주고 있었다.그러나 그 반지를 보던 그녀의 머릿속에는 김승엽의 얼굴과 그녀가 한 맹세가 떠올랐다. 일생동안 함께 있어주겠다고.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누군가를 원하고 사랑했다. 어차피 이 지경이 된 이상 더이상 무서울 것도 없는데 뭘 더 바래? 우해민은 입술을 깨물고, 비록 연약하지만 확고하게 말했다. "언니, 화난 것도 알고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도 알아. 하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언니한테 부탁한 적도 없고, 말대꾸한 적도 없고, 언니의 뜻을 거스른 적도 없어. 지금도, 난 다른건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그 반지는 내거야. 그 사람이 나한테 준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얼른 돌려줘. 더이상도 바라지 않을테니까 딱 그 반지만큼은 내가 가져야겠어. 그것만 있으면 난 만족해.”만족한다고? 그녀는 사실 더 많은 것을 원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애초에 알고있었다. 아예 이렇게 마음을 비우면 약간의 위안이라도 있어 좋지 않을가 싶었다.그리하여 그 반지가 더더욱 소중해진 우해민은 굳게 말했다.그러나 우해영은 차갑게 웃었다. "그래? 네거라고?"그녀의 얼굴은 차분한게 거의 얼굴색이 변하지도 않았지만, 반지를 쥐고 있는 손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우해민은 전혀 몰랐다. 자신이 방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무언가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듯이 말하면서 통곡했다.그러나 눈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본 우해영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얘가 언제 이렇게 운적이 있었지? 전에 우해민을 때리고 꼬박 반년 동안 가둘때도 그녀는 종래로 울고 떠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인 주제에, 대역인 주제에 자신만의 사상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동생이 지금 뜻밖에도 이딴 낡은 반지를 위해 자신과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니.어깨 뼈가 찢어지고 팔도 못 드는 상황에 손까지 끌어안고 뺏으려고 하네, 이게 어디서 나온 힘이래?우해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단걸 깨달았다. 그녀는 이 여동생이 김승엽에 대한 사랑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하나의 나쁜 남자일 뿐인데, 뜻밖에도 여동생이 몇 년 동안 이렇게 정성껏 내조를 하다니. 그로 인해 자신이 순종해오던 사람에게 이렇게 반항심을 품다니.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생각이 확실해진 우해영의 눈빛은 매섭게 변하여, 팔을 힘껏 휘두르더니 곧이어 우해민을 발로 걷어찼다. "꺼져!"강한 충격으로 인해 우해민의 몸은 공중으로 뛰여올라 뒤에 있던 의자에 세게 부딪쳤고 곧이어 땅에 떨어져 피를 토해냈다.오장육부는 마치 뒤틀어진 듯 했다. 숨을 쉬는 것 조차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녀가 눈을 다시 떴을 때에는, 그녀의 마음은 더욱 애 탔다. 보물처럼 여기던 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어느새 손에서 이미 너덜너덜하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우해영은 이미 반지 전체의 모양을 바꾸어 작은 덩어리로 만들었고, 위의 다이아몬드는 이미 어디로 떨어졌는지도 모른 채 결국 이렇게 작은 덩어리가 우해민의 앞에 툭 던져졌다.우해영은 여동생을 흘겨보며 냉소하였다. "네 꺼라며? 돌려줄게!""너..." 우해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우해민은 난생 처음으로 이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분노와 미움, 증오로 가득했다.그 매서운 눈빛은 우해영의 마음을 흔들었다.
부상을 입은데다 우해민 때문에 화가 나서 우해영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은은히 전해져 오는 두통과 가슴 통증으로 기분이 더더욱 언짢아졌다.우해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핸드폰을 찾으려 했지만, 어제 자기가 핸드폰을 박살 낸 것이 생각났다.‘하... 핸드폰하나 새로 사야겠네.’마침 이틀 동안 집에서 몸을 회복하느라 지루했던 우해영은 밖으로 나가 바람도 좀 쐬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김서진이 자기에 대한 경계심을 보여준 이상 무술 비적을 손에 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비적은 아마 김씨 가문에 있을 리가 없기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하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 비적만을 쫓아왔는데 지금 포기하라는 건 말이 안 되었다.‘아... 머리아파.’우해영은 아픈 머리를 문지르며 진통제를 한 알 삼켰다. 그러고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보다 마른 체형인 우해민에게 맞춰주게 된 것이다.우해민을 생각하니 우해영은 기분이 더욱 언짢아졌다.“데일!”방문을 열고 나가며 우해영이 비서를 불렀다.곧, 데일이 그녀의 방문 앞에 나타났다.“네, 아가씨.”“그 계집애는 어떻게 되었어?”그녀가 헛웃음을 한번 삼키며 물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데일은 단번에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상처들은 다 얕아서 금방 나을 겁니다. 다만 어깨뼈에 살짝 금이 가 고정하고 붕대를 감아 두었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만큼의 힘을 썼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우해민의 목숨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상처가 괜찮은지 물어본 게 아니고 감정적으로 괜찬은지 물어본 거잖아. 방에 가서 난리를 피우거나 하지 않았어?”우해영의 말에 데일은 놀랍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우해민의 감정에 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물었기 때문에 데일은 곧이곧대로 대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