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밀물 마냥 밀려오는 무력감에 청아는 더 말할 힘도 없었다.“알았어요. 저 곧 내려야 하니까 이만 끊을 게요.”허홍연은 그제야 청아 말투 속의 냉담함을 눈치채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하루 종일 출근하느라 피곤하지? 어서 돌아가 쉬어.]“네.”통화가 끝난 후, 청아는 드디어 다시 평정심을 되찾게 되었다.사실 청아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점점 얼어가고 있을 뿐.……저녁에 조백림이 넘버 나인에서 파티를 주최했고, 장시원이 퇴근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미리 도착한 친구들은 이미 술을 마시며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장시원은 룸 안을 한번 둘러보고 홀로 소파에 앉아있는 임구택을 향해 직진했다.하지만 임구택은 다가오고 있는 장시원도 발견하지 못한 채 소파에 기대 열심히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이에 장시원이 눈썹을 올리고 임구택의 휴대폰 화면을 힐끗 쳐다보았다.휴대폰 속에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고,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커피 말고 또 뭘 만들어낼 수 있어?][뭘 가지고 싶은데?][흠, 딱히 가지고 싶은 건 없는데? 당신이 제일 아끼는 공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 정말로 나보다 더 예쁜지 보고 싶어.][당연히 당신보다 더 예쁘지. 그 아이는 내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봇이야.][그렇게 말로만 해서 누가 믿어? 나도 한번 보여줘 봐.]……소희의 목소리였다.장시원은 궁금한 마음에 임구택 쪽으로 바짝 붙어 물었다.“뭘 보고 있는 거야?”임구택은 그제야 장시원을 발견하고 바로 화면이 아래로 향하게 휴대폰을 뒤집고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언제 온 거야?”“한참 됐어. 네가 그 동영상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하지 못한 거고.”임구택이 듣더니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 후,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손에 든 라이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장시원도 그의 손
레저룸에서 카드 놀이를 하고 있던 조백림은 연속 몇 판을 이겨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반대로 오진수 등은 연이어 우는 소리를 내며 불만을 토했다.그런데 이때 마침 웨이터가 술 가져다주러 들어왔고, 조백림이 웨이터를 향해 분부했다.“90년 산 강제로 두 병 가져다줘요, 내 이름으로 적고.”오진수 등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역시 백림이 제일 통이 크다니까.”그렇게 몇 사람이 웃고 떠들며 카드 놀이를 다시 시작하는데, 한 웨이터가 술을 들고 와서는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조백림을 향해 말했다.“고객님, 고객님이 분부하셨던 90년 산 강제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이에 조백림이 고개를 돌려 예쁘게 웃고 있는 웨이터를 쳐다보았다.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그리고 조백림의 시선에 이선이 부끄러운 척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백림 씨 저 기억 안 나세요? 저 이선이잖아요.”조백림은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표정을 드러냈다.‘유정의 연적.’사실 이선은 물론이고, 조백림은 유정마저 여러 날 째 보지 못했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조백림이 맑은 눈동자에 웃음을 머금은 채 이선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이선이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깜찍한 말투로 대답했다.“저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밤 타임만.”“그래? 정말 열심히 사네.”조백림이 덤덤하게 칭찬했다.이에 이선은 순간 얼굴이 빨개져 부끄러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여자는 의지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잖아요. 특히 저처럼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여자는 더더욱 노력해야 하는 거고.”“맞는 말이지.”조백림이 계속해서 오진수 등과 카드 놀이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백림 씨, 술을 지금 따라 드릴가요?”이선이 더욱 빨개진 얼굴로 조심스레 조백림의 의향을 물었고, 조백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 지금 따. 내가 한잔 서비스로 줄게.”“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희 손님의 술을 마실 수 없거든요.
“당연하지. 동료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고용주와의 관계도 잘 처리해야 하는 거잖아. 예를 들어 고용주와 말다툼이 일어났을 시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방법을 강구하여 화해해야 한다 거나? 안 그러면 고용주가 일부러 골탕 먹일 수도 있으니까.”임유민 말 속의 뜻을 눈치챈 소희가 바로 냉소를 드러냈다.“설마 나와 네 둘째 삼촌을 암시하는 건 아니겠지?”“뭐야, 너무 멍청한 건 아니잖아?”“싱겁긴. 내가 정말로 멍청했으면 네 선생님이 되었겠어?”“그래서 말 돌리지 말고, 둘째 삼촌이랑 계속 이렇게 서로 안 보고 지낼 거야?”“지금은 네 둘째 삼촌이 나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야.”“그럼 쌤이 뭘 잘못해서 둘째 삼촌을 화나게 했는지 반성해야지!”임유민의 질책에 소희가 정말로 자신의 잘못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곧 분개한 표정으로 임유민을 노려보며 물었다.“그 사람이 네 둘째 삼촌이긴 하지만, 난 네 선생님이잖아. 너무 네 둘째 삼촌의 편만 드는 거 아니야?”“이번엔 쌤이 먼저 잘못했잖아! 난 공정하게 잘못이 없는 사람을 돕는 거야.”“내 잘못이라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게다가 내가 주동적으로 화해한다고 해도 네 둘째 삼촌이 날 거들떠보지도 않을 걸?”“쳇!”임유민이 죽어도 믿지 않는다는 표정을 드러냈다.“쌤이 한번 주동적으로 화해하자고 해 봐, 둘째 삼촌이 틀림없이 바로 쌤을 용서할 거야.”“시간 됐어, 그 사람 얘기는 그만하고 수업이나 하자.”임유민이 타이를수록 이상하게 더욱 갑갑해진 소희는 손을 흔들며 화제를 끝내려 했고, 이에 임유민이 냉소를 드러내며 소희를 쳐다보았다.“외면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거 아니야.”책을 펼치던 소희의 손은 임유민의 말에 잠깐 멈추었다. 하지만 소희는 결국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강의를 시작했다.그렇게 첫 수업은 무사히 끝났고, 쉬는 시간에 임유민이 가방에서 시험지 몇 장을 꺼냈다.“자.”“뭐야, 월말 평가 성적이 벌써 나왔어?”소희가 시험지를 한 번 훑어보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둘째 삼촌이 바쁠 수도 있어, 그냥 방해하지 말고 수업하러나 가자.”소희가 포기하려 하자 조급해난 임유민은 바삐 앞으로 다가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둘째 삼촌! 둘째 삼촌! 소희 쌤이 볼 일이 있으시대요!”하지만 임유민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이에 임유민이 혹시나 해서 문 손잡이를 돌렸다.끼익-“쌤, 문이 열렸어!”임유민이 말하면서 바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고, 소희가 말리기엔 이미 늦었다.“둘째 삼촌!”“그만 불러, 집에 없을 거야.”소희의 말이 맞았다.방안 전체를 다 돌았지만 임구택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언제 나간 거지?”임유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또 옆방 서재로 갔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뭐야, 내가 어떻게 소희 쌤을 설득했는데! 둘째 삼촌 너무 해!’벽에 기댄 채 실망한 표정으로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임유민을 보며 소희는 지금의 자신도 실망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어떻게 만들어준 핑계인데, 쓰지도 못하고 낭비하게 생겼네?”소희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임유민은 이상하게 그 속에서 실망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하인을 찾아와 임구택의 행방을 물었고, 그제서야 임구택은 두 사람이 수업할 때 나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에 소희가 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말했다.“체념됐지? 수업하러 가자.”“그럼 내일에 다시 한번 올라오자. 내가 둘째 삼촌보고 절대 외출하지 말라고 할 게.”“분명 볼 일이 있어 외출한 걸 거야, 그러니까 괜히 그 사람 시간 낭비하지 말고. 우리 일에 더는 신경 쓰지 마.”“그럼 둘이 빨리 화해나 하든가. 나도 우리 둘째 삼촌이 하루 종일 우울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쳇, 역시 네 둘째 삼촌만 걱정하고 있었어.”“쌤도 당연히 걱정하고 있지.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쌤도 지금 기분이 안 좋잖아.”임유민의 말에 소희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흰색과 회색이 메인 컬러로 인테리어가 된 집은 단조로우면서도 또 의외로 고급져 보였다.소희가 사는 집과 대체로 같은 구조인 집.소희는 현관을 지나 바로 거실로 들어섰다.바닥에는 옅은 회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위를 걷고 있으니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거실에 들어선 소희는 한눈에 베란다에 서서 자신을 등진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다.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양복바지 차림을 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남다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검은색 옷차림을 한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가뜩이나 평소에도 차갑고 냉담한 기질을 풍기고 있던 사람이 검은색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왠지 더욱 차가워 보였다.한참 후, 통화가 끝난 남자가 휴대폰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돌려 소희를 쳐다보았다.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만 남자의 눈동자는 그렇게 그윽하게 소희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러는 남자를 똑같이 주시하고 있던 소희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밀려와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고, 눈물이 흘러나오기 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이에 임구택이 바로 성큼성큼 쫓아가 뒤에서 소희를 품에 꼭 껴안았다. 그러다 소희가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자 그는 소희와 함께 소파에 쓰러져서는 소희의 턱을 잡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소희의 두 다리를 짓누른 채 도망갈 여지도 주지 않는 임구택의 키스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고, 그대로 숨마저 빼앗겨 버린 소희는 임구택의 키스에 반응하며 공기를 조금씩 마시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너무 오랜만에 품에 안아보는 소희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주시하고 있는 임구택의 눈빛은 점점 뜨거워졌고, 결국 소희를 들어 안아 침실로 걸어갔다.커튼이 자동적으로 닫치면서 방안은 순간 어둠 속에 빠졌다.그리고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 두 사람의 거친 숨 소리는 서로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해져 전율을 일으켰다.……임구택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끝도 없이 소희에게 그를 사랑한
“그래서 당신은?”임구택이 다시 한번 물었다.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소희가 대답을 하지 않자 임구택이 순간 또 언짢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오래 생각할 일이야?”“아니, 내 답은 당신과 같아.”조느라 제때에 대답하지 못했던 소희는 화가 묻은 임구택의 어투에 그제야 눈을 반쯤 뜨고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임구택이 듣더니 바로 소희의 몸을 뒤집어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러고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소희의 두 눈을 주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당신이 심명에게 진 신세는 내가 대신 갚아 줄게. 하지만 나에게 속해야 하는 건 심명에게 털끝만큼이라도 나눠줘서는 안 돼.”“구택 씨……. 그동안 나랑 헤어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헤어지고 싶었던 적?”소희의 물음을 되뇌는 임구택의 입가에는 한기가 묻어 있었다.“당신 설마 날 포기할 생각이 있었던 거야?”“지금 내가 당신한테 묻고 있잖아.”“아니, 한 번도 없었어.”임구택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확고했다.그러면서 그는 소희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 건 당신을 일부러 무시한 것도, 포기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야, 단지 당신이 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어. 설마 아직도 당신에 대한 나의 진심을 의심하고 있는 거야?”“구택 씨,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어?”소희가 임구택의 품에 기대어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물었고, 임구택이 듣더니 묵묵히 소희를 더 꼭 껴안았다.“우리가 상대방을 너무 아껴서 그렇게 많은 문제들이 생겼던 거야.”임구택이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소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한번 맞추고는 낮은 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우리 다시는 헤어지자는 말도 하지 말고, 냉전도 하지 말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도 하지 말자.”“응.”“소희야.”부드러운 입맞춤은 다시 뜨거운 키스로 변해가고 있었다.이에 소희가 놀라 숨을 들이마시며 임구택을
“중요한 일.”[그래요. 그럼 내일 꼭 일찍 돌아와야 해요, 소희 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시름이 놓이지 않았는지 임유민이 재차 당부했다.그리고 임유민의 진심이 느껴진 임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알았어, 끊을 게.”통화가 끝난 후, 임구택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앉아 두 팔을 소희의 몸 양쪽에 지탱한 채 맑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소희를 쳐다보며 물었다.“오늘 나한테 사과하려고 내 방에 찾아 갔었어?”“유민이가 한 말도 믿어?”“응, 난 유민이를 믿어.”소희가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던 임구택은 덤덤하게 웃으며 침대에 올라 앉아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자, 말해봐. 어떻게 사과하려고 했어?”“…….”소희가 순간 난감한 표정을 드러내며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나 더 잘래, 방해하지 마.”그대로 소희를 자게 놔둘 리가 없었던 임구택은 바로 소희의 이불을 잡아당기고, 몸을 숙여 그녀의 귓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소 유감스러운 말투로 소희를 향해 말했다.“하루만 더 버틸 걸, 그러면 당신이 나한테 사과하는 걸 볼 수 있었을 텐데.”임구택이 말할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숨결은 소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찌릿찌릿하게 온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이에 소희가 조용히 얼굴을 옆으로 피하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꿈 꾸지 마.”“나 지금 정말로 꿈 꾸는 것 같아.”임구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희의 얼굴에 다시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다 소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임구택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향했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곧 벌어질 일을 예상한 소희는 급히 두 손으로 임구택의 어깨를 밀었다.“나 배고파.”“그래, 먼저 밥 먹으러 가자.”확실히 많이 늦은 시간이라 임구택은 욕정이 채 식지 않은 두 눈으로 소희를 뜨겁게 쳐다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소희가 입고 온 셔츠의 단추는 임구택의 거친 동작 때문에 두개나 떨어져 나가
“서프라이즈 확실해?”“왜, 아니야?”소희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묻자 임구택이 발걸음을 멈추고 소희를 벽에 밀쳤다. 그러고는 미지근한 눈빛으로 소희를 쳐다보며 되물었다.“솔직히 말해 봐, 나를 본 순간 흥분되어 펄쩍펄쩍 뛰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어?”“만약 내가 진작에 이 집의 주인이 당신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면, 믿을 거야?”“어떻게 알아차렸는데?”“커피. 첫째, 지니가 마술사도 아니고 어떻게 정말로 커피를 만들어낼 수 있겠어? 그래서 그때 난 이미 집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지. 그리고 둘째, 커피에 넣은 우유와 설탕은 전부 내 입맛에 따라 추가되었어. 내 입맛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을 것 같아?”임구택이 듣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미 나라는 걸 알아맞혔으면서 왜 문을 두드려 확인하지 않았어?”“당신이 아직도 화 나 있을까 봐.”“자기야, 난 영원히 당신한테 화를 내지 않아. 화를 낸다고 해도 나 자신한테 화를 내겠지, 한계를 잃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한테. 아니면 심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한테 접근할 수 있어 화를 낸다거나. 아무튼 당신한테는 절대 화를 내지 않을 거야.”임구택의 눈빛은 대답처럼 다소 진지했고, 그 진지함에 마음속 깊은 곳이 뭉클거린 소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구택 씨, 앞으로 우리 다시는 싸우지 말자.”“싸워도 괜찮아, 오늘처럼 풀어나가면 되니까.”임구택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소희의 눈가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다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깜짝 놀란 소희는 바로 고개를 숙여 임구택의 품에 안겼다.“어서 밥 먹으러 가자, 나 진짜 너무 배고파.”임구택은 어쩔 수 없이 타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소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뭘 먹고 싶어? 남월정에 갈까?”“좋아!”주인 아줌마가 끓여줬던 밀크 티를 생각하니 소희는 더욱 배가 고파진 느낌이 들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남월정으로 가는 길에 소희는 청아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흥성.”흥성은 강성의 옆도시로, 관광 도시였다. 이에 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나도 같이 갈게요!”꽤 발랄하게 말하는 유진에 서인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가겠다고?”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뭘 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도 갈 거니까요!”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오늘 돌아오지 못할 거야. 거기서 이틀은 머물러야 하는데, 네가 따라오면 불편해.”“그냥 여행 가는 셈 치면 되잖아요!”서인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다음 사거리에서 임씨 저택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이에 유진은 여유롭게 말했다.“그러면 집에 데려다줘요. 집에 가서 짐 챙기고 내 차로 흥성으로 갈게요. 어쩌면 거기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는데요?”“임유진.”서인은 얼굴을 굳히자,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동료들은 다 놀러 갔는데, 난 너 때문에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나를 두고 혼자 나가겠다고요? 그게 맞는 거예요?”서인은 설명했다.“나는 노는 게 아니라, 일이 생겨서 가는 거야.”“몰라요. 어쨌든 따라갈 거예요. 나 어린애 아니니까 방해 안 할게요. 그냥 나 없는 셈 치면 되잖아요!”유진은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사장님은 일 보러 다니고, 난 혼자 놀러 다닐게요. 절대 방해 안 할 거예요. 됐죠?”서인은 시간을 확인했는데, 더 미루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럼 말 잘 들어야 해.”서인이 신신당부했다.“약속할게요!”유진은 신나서 손까지 들며 맹세할 기세였다.서인은 고속도로에 올라탄 뒤 오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를 잘 봐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유진도 노정순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설명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만 말했다. 노정순은 오전에 여진구가 찾아와 회사 워크숍을 언급했던 걸 기억하고, 그녀가 회사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줄 알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전화를 끊
강성의 한 묘지.홍복과 표용을 비롯한 전우들의 묘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우들은 이제 백랑의 곁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었다.서인은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씩 놓았고, 임유진도 묘지 밖에서 사 온 꽃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돌계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유진도 서인의 곁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이야기 좀 더 해 주세요!”서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 얘기했잖아.”유진은 묘지를 찾을 때마다 늘 삼각주에서의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서인이 기억하는 건 이미 다 말해 준 상태였다. 그러나 유진은 질세라 다시 말했다.“이번에 전우들 묘지가 새로 생겼잖아요.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없어.”서인은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느슨하게 앉아 있었고, 말투 역시 어딘가 귀찮아 보였다.이에 유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러면 다음에 소희한테 물어봐야겠네!”그제야 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노려봤다.“진짜 듣고 싶어?”“당연하죠!”유진은 활짝 웃으며 턱을 괴고, 이야기 들을 준비를 했다. 유진은 과거가 늘 궁금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맨날 말하는 내 229명의 여자친구들 얘기, 하나씩 다 해 줄까?”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옆에 있던 꽃을 집어 들어 서인에게 던졌다.서인은 피식 웃으며, 거친 목소리 속에 장난기가 묻어났다.“이야기 듣고 싶다며? 229개의 이야기가 있지. 아마 내년까지도 다 못 들을걸.”“아직도 그 말을 해요?”유진은 씩씩거리며 서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서인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밀어낼 수 없었다.마치 큰 회색 늑대 앞에 선 어린 토끼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버둥거릴 뿐이었다.잠시 후,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겠네요!”문신 남자는 점점 짜증이 났다.“겨우 서빙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내가 맞팔 달라는 것도 네 급을 봐준 거라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사장님! 여기서 행패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다부진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주변 공기마저도 서늘하게 만들었다.서인의 싸늘한 눈빛이 문신 남자를 향하자, 그는 마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찔린 듯 등골이 서늘해져,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유진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 돈을 내기 전에 제 SNS 맞팔하라고 요구했어요.”그제야 문신 남자의 일행이 이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하나둘 일어나 힐끗거리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고,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 오현빈과 이문이 후원에서 걸어 나왔다.현빈은 본래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손에 주방칼까지 들고 있었다.문신 남자의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때, 서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문신 남자를 향해 말했다.“좋아. 내꺼를 추가해요. 나랑 얘기 좀 하자고요.”문신 남자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결제를 마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동료들을 불러 가게를 빠져나갔다.사람들이 나가자, 현빈이 비웃으며 말했다.“이런 겁쟁이 녀석들. 다음에 또 이런 쓰레기들이 나타나면 말도 필요 없어. 바로 나를 불러.”유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알겠어요!”서인은 유진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문은 그를 따라가며 넌지시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임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 찻주전자를 훔쳐 가겠어요? 안심하세요!”서인은 유진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손님이 너 찾으러 왔으면, 할 얘기 끝났으면 나가라. 가게 바쁘다.”유진은 서인의 표정이 더 이상 좋지 않자, 정말로 화를 낼까 봐 서둘러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먼저 보낼게요!”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황급히 돌아서서 여진구를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구가 서인의 찻주전자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그거 내려놔요!”유진은 깜짝 놀라 뛰어가며 소리쳤다. 놀란 진구는 손을 헛디뎌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왜 그래?”유진은 재빨리 찻주전자를 낚아채듯 빼앗았다.“이거 사장님이 2,00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깨지면 감당할 수 있어요?”“뭐? 2,000만 원?”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2,000만 원짜리 골동품 같지는 않은데?”유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선배 골동품에 대해 알아요?”“아니?”“그럼 됐죠!”유진은 찻주전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2,000만 원인데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어요. 그만큼 애착이 있다는 거죠. 깨지면 당연히 화내겠죠!”진구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난 잘 모르지만, 우리 작은아버지는 골동품 전문가야. 가져가서 감정받아 볼까?”그리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혹시라도 바가지를 썼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이 찻주전자가 아무리 봐도 2,000만 원짜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찻주전자를 내려놓더니, 진구를 밖으로 밀어냈다.“무슨 바가지요? 마음에 들면 2,000만 원이든 2억이든 가치가 있는 거고, 마음에 안들면 2천원도 아까운 거죠.”“그러니까 선배도 선배 할 일 하러 가요! 내 일 방해하지 말고요!”진구는 서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마지못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진아, 연애
여진구는 바로 문을 나가려 했다. 임유진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따라붙으며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선배 지금 우리 엄마한테 말하러 가는 거예요?”진구는 붉어진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어린애들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안 될 이유가 뭐야?”“안 돼요! 절대 가면 안 돼요!”유진은 온 힘을 다해 진구를 붙잡았다. 그러나 진구는 유진의 손목을 잡고 힘을 줘서 떼어내려 했다.“손 놔!”“안 놔요! 선배, 선배가 뭔데 내 일에 참견죠?”“너희 가족은 전부 내가 너를 회사에서 관리한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 난 너에 대한 책임이 있고!”“뭐요? 지금 미쳤어요? 선배 회사가 무슨 어린이집이에요? 선배는 그냥 내 상사죠,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상관없잖아요!”“너 내 부서 사람이잖아. 내 책임이야!”“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요!”“넌 너무 철이 없어!”“뭐요? 철이 없다고요?”유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순식간에 진구의 팔을 붙잡고 발을 들어 그의 엉덩이를 차려 했다. 진구는 황급히 몸을 피하면서도, 유진이 중심을 잃고 넘어질까 봐 신경을 썼다....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서인이 커다란 뼈다귀가 담긴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무뚝뚝했고, 목소리에도 차가움이 묻어 있었다.“비키지?”유진은 순간 당황해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서인은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쳐 야옹이에게 가서 음식을 내려놓았다. 애옹이는 음식 냄새를 맡고 서인의 어깨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서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살짝 밀어냈다.서인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애옹이는 몸이 가볍고 재빠른 덕분에 부드럽게 착지했다.야옹이는 그 광경을 보고는 마치 동정을 하듯, 입에 물고 있던 뼈 하나를 작은 애옹이 쪽으로 던졌다.그리고 유진은 이 장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서인이 애옹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이런 태도일 줄은 몰랐다.그때
가끔 서인이 몇 마디 맞장구를 쳤지만, 대부분은 임유진이 혼자 말하는 시간이었다.“옆 부서에 새로 들어온 인턴이 있는데, 자꾸 우리 사무실에 와요. 꼭 진구 선배가 있을 때 찾아와서, 다들 걔가 짝사랑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그런데 문제는 진구 선배가 그 애를 네 번이나 봤는데도 아직 이름을 기억 못 한다는 거죠.”“이번 워크숍에 그 부서도 같이 가는데, 혹시 이번 기회에 좀 더 가까워질지도 모르죠!”“우리 동료 중 한 명이 집에서 페르시안 고양이를 키우는데, 벌써 한 살이 넘었대요. 내가 애옹이 사진 보여줬더니 완전 반하더라고요.”“나중에 둘이 고양이 맞선 한 번 보자더라고요. 물론, 이건 사장님 허락이 필요하죠!”...그렇게 신나게 이야기하던 유진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서인을 바라보았다. 이에 서인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유진은 입술을 앙다물다가,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결혼하면, 매일 이렇게 같이 있는 거잖아요. 꽤 괜찮지 않아요?”서인은 눈썹을 찌푸리고는 무심한 듯 말했다.“도대체 네 머릿속에는 맨날 무슨 생각이 돌아가는 거야?”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사장님 생각이죠!”유진은 서인의 등 뒤에서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서인의 어깨가 살짝 경직되었고, 발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그러나 서인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안으로 사라졌다.유진은 애옹이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중얼거렸다.“너 말해 봐. 저 사람,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 맞지?”“냐옹.”애옹이는 맑은 크리스탈 같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울었다.잠시 후, 오현빈이 다가와 유진을 불렀다.“유진아, 수박 가져왔어. 먹고 가!”유진은 애옹이를 내려놓고, 마당을 정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달콤한 수박을 먹으며 쉬던 중, 손님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어서 오세요.”그러나 바로, 유진의 표정이 굳어졌고, 눈앞에
소희는 우청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고,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이제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금요일, 샤부샤부 가게아침에는 영업하지 않기 때문에, 오현빈과 직원들은 늦게 일어났다. 아침을 먹고 가게 청소하며 테이블을 정리하고, 식재료를 구매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그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오전 10시. 막 가게 문을 연 순간, 임유진이 커다란 상자를 안고 들어왔다.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자 안에는 애옹이를 위한 사료, 간식, 모래 등이 잔뜩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현빈이 의아한 듯 물었다.“오늘 평일인데, 너 출근 안 했어?”유진은 흰색 티셔츠를 입고 반묶음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회사 단체 워크숍이 있는데 안 갔어요.”이문이 다가와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워크숍 좋잖아. 맛있는 것도 먹고, 놀기도 하고.”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뭐가 좋아요? 차라리 집에서 푹 쉬는 게 낫죠.”현빈은 이문과 눈을 맞추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주된 이유는 워크숍에 사장님이 없어서겠지?”“사장님이랑 무슨 상관이죠?”유진은 턱을 치켜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위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사장님, 아직 안 일어났어요?”현빈과 이문을 비롯한 직원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서인이랑 상관없다고 하더니, 바로 그의 일정을 묻다니!유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상자 안에서 작은 공을 꺼내 현빈에게 던졌다.“뭘 웃어요?”“아직도 웃어요?”오현빈은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두 손을 들었다.“알겠어, 알겠어! 내가 잘못했어!”한바탕 장난을 친 후, 유진은 후원으로 가서 애옹이를 보러 갔다.한편, 서인은 아침 운동으로 샌드백을 몇 번 친 뒤, 아래층 주방에서 야옹이의 밥그릇을 챙겼다. 그리고 후원으로 가려고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작은 나무집
도설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어졌다.“지금 나를 일부러 모욕하는 거예요?”심명의 얼굴에서는 이미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차갑고 무심한 눈빛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내가 준 거울은 가져가고, 이제 꺼져요. 그 따위로 소희에게 덤비다니, 집에 거울이 부족했나 보군.”설유는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그래서 이 모든 게 일부러였다는 거네요!”설유는 심명의 말을 곱씹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설마, 당신도 임구택을 좋아하는 거예요?”‘그래서 자신이 임구택에게 접근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약혼식장에서 데려왔던 거라면?’콜록! 상상을 초월하는 말에 심명은 담배 연기에 기침이 나왔다. 그러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설유를 노려보았다.“다시 한번 말하는데, 당장 꺼져요.”‘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거야?’설유는 계속 차에서 내리길 거부하며 버텼다. 그러자 심명은 그대로 차 문을 열어 설유를 밀어냈다.마침 밖에 있던 남자가 설유가 다치지 않게 잡아주려 했지만, 설유는 격분하며 그를 마구 밀쳤다.“건방지게 어디 감히 날 만져?”남자는 설유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곧바로 손을 놓아버렸다.쿵! 그리고 설유는 땅바닥에 세게 내팽개쳐졌다. 그녀는 아파서 이를 악물었지만, 제대로 화를 낼 틈도 없이, 앞에서 스포츠카가 급가속하며 떠났다. 그리고 자동차 배기가스가 설유의 얼굴을 향해 뿜어졌다....연회장에서 소희와 우청아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희는 심명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소희야, 너 때문에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까지 들었어!]뒤에는 벽에 숨어 우는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소희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어이가 없었다.[그 여자가 나한테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어?]심명은 단호하게 답장을 보냈다.[안 돼, 네가 조금이라도 기분 나쁘면 안 돼.]소희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그래서, 무슨 짓을 했어?]심명은 여전히 장난스러
소희는 임구택의 넓고 단단한 어깨에 몸을 기댔다. 소희의 섬세한 눈매에는 부드러움이 깃들었고, 손가락은 그의 어깨선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나 그 순간, 구택의 손이 소희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가슴으로 끌어안았고, 따뜻하고 촉촉한 입맞춤이 소희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도설유는 화원으로 돌아와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물었다.“아까 장시원 사장 옆에 있던 남자, 키 크고 잘생긴 사람 누구야?”설유의 질문에 몇 명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짐작했다.“장시원 사장이랑 친한 사람이라면, 임구택, 조백림, 장명원 정도인데, 누구 말하는 거야?”설유는 직감적으로 대답했다.“임구택? 임씨 그룹의 사장?”“맞아, 임구택!”도설유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그 사람, 결혼했어?”그 말을 듣자 상대방은 흥분한 듯 대답했다.“당연하지! 엄청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어. 그때 인터넷에서도 라이브로 방송됐었는데!”설유는 곧바로 호텔 복도에서 마주쳤던 여자를 떠올리고는 비웃듯이 말했다.“그 사람 와이프, 성격 엄청 안 좋아 보이던데? 그런 남자가 왜 그렇게 무서운 와이프를 골랐을까?”그때, 옆에서 부드럽고도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임구택에 대해 알고 싶으면 나한테 물어보지 그래요? 난 그의 모든 걸 알고 있는데요?”도설유가 뒤를 돌아보자, 순간적으로 눈이 커졌다. 베이지 캐주얼 슈트를 입고, 귓가에는 흑요석 귀걸이가 반짝이는 남자.그는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미남이었고, 요염한 매력까지 풍기자, 설유의 눈빛이 흔들렸다.“당신 임구택 사장을 알아요?”그 남자는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당연하죠!”남자는 입꼬리를 날렵하게 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도발적인 눈길은 상대를 본능적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설유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나 나눌까요? 궁금한 거, 다 알려줄게요. 심지어 네가 임구택을 쫓아다니게 도와줄 수도 있어요.”설유는 살짝 당황한 듯 입술을 깨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