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당신은?”임구택이 다시 한번 물었다.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소희가 대답을 하지 않자 임구택이 순간 또 언짢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오래 생각할 일이야?”“아니, 내 답은 당신과 같아.”조느라 제때에 대답하지 못했던 소희는 화가 묻은 임구택의 어투에 그제야 눈을 반쯤 뜨고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임구택이 듣더니 바로 소희의 몸을 뒤집어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러고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소희의 두 눈을 주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당신이 심명에게 진 신세는 내가 대신 갚아 줄게. 하지만 나에게 속해야 하는 건 심명에게 털끝만큼이라도 나눠줘서는 안 돼.”“구택 씨……. 그동안 나랑 헤어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헤어지고 싶었던 적?”소희의 물음을 되뇌는 임구택의 입가에는 한기가 묻어 있었다.“당신 설마 날 포기할 생각이 있었던 거야?”“지금 내가 당신한테 묻고 있잖아.”“아니, 한 번도 없었어.”임구택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확고했다.그러면서 그는 소희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 건 당신을 일부러 무시한 것도, 포기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야, 단지 당신이 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어. 설마 아직도 당신에 대한 나의 진심을 의심하고 있는 거야?”“구택 씨,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어?”소희가 임구택의 품에 기대어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물었고, 임구택이 듣더니 묵묵히 소희를 더 꼭 껴안았다.“우리가 상대방을 너무 아껴서 그렇게 많은 문제들이 생겼던 거야.”임구택이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소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한번 맞추고는 낮은 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우리 다시는 헤어지자는 말도 하지 말고, 냉전도 하지 말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도 하지 말자.”“응.”“소희야.”부드러운 입맞춤은 다시 뜨거운 키스로 변해가고 있었다.이에 소희가 놀라 숨을 들이마시며 임구택을
“중요한 일.”[그래요. 그럼 내일 꼭 일찍 돌아와야 해요, 소희 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시름이 놓이지 않았는지 임유민이 재차 당부했다.그리고 임유민의 진심이 느껴진 임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알았어, 끊을 게.”통화가 끝난 후, 임구택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앉아 두 팔을 소희의 몸 양쪽에 지탱한 채 맑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소희를 쳐다보며 물었다.“오늘 나한테 사과하려고 내 방에 찾아 갔었어?”“유민이가 한 말도 믿어?”“응, 난 유민이를 믿어.”소희가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던 임구택은 덤덤하게 웃으며 침대에 올라 앉아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자, 말해봐. 어떻게 사과하려고 했어?”“…….”소희가 순간 난감한 표정을 드러내며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나 더 잘래, 방해하지 마.”그대로 소희를 자게 놔둘 리가 없었던 임구택은 바로 소희의 이불을 잡아당기고, 몸을 숙여 그녀의 귓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소 유감스러운 말투로 소희를 향해 말했다.“하루만 더 버틸 걸, 그러면 당신이 나한테 사과하는 걸 볼 수 있었을 텐데.”임구택이 말할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숨결은 소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찌릿찌릿하게 온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이에 소희가 조용히 얼굴을 옆으로 피하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꿈 꾸지 마.”“나 지금 정말로 꿈 꾸는 것 같아.”임구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희의 얼굴에 다시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다 소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임구택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향했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곧 벌어질 일을 예상한 소희는 급히 두 손으로 임구택의 어깨를 밀었다.“나 배고파.”“그래, 먼저 밥 먹으러 가자.”확실히 많이 늦은 시간이라 임구택은 욕정이 채 식지 않은 두 눈으로 소희를 뜨겁게 쳐다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소희가 입고 온 셔츠의 단추는 임구택의 거친 동작 때문에 두개나 떨어져 나가
“서프라이즈 확실해?”“왜, 아니야?”소희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묻자 임구택이 발걸음을 멈추고 소희를 벽에 밀쳤다. 그러고는 미지근한 눈빛으로 소희를 쳐다보며 되물었다.“솔직히 말해 봐, 나를 본 순간 흥분되어 펄쩍펄쩍 뛰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어?”“만약 내가 진작에 이 집의 주인이 당신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면, 믿을 거야?”“어떻게 알아차렸는데?”“커피. 첫째, 지니가 마술사도 아니고 어떻게 정말로 커피를 만들어낼 수 있겠어? 그래서 그때 난 이미 집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지. 그리고 둘째, 커피에 넣은 우유와 설탕은 전부 내 입맛에 따라 추가되었어. 내 입맛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을 것 같아?”임구택이 듣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미 나라는 걸 알아맞혔으면서 왜 문을 두드려 확인하지 않았어?”“당신이 아직도 화 나 있을까 봐.”“자기야, 난 영원히 당신한테 화를 내지 않아. 화를 낸다고 해도 나 자신한테 화를 내겠지, 한계를 잃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한테. 아니면 심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한테 접근할 수 있어 화를 낸다거나. 아무튼 당신한테는 절대 화를 내지 않을 거야.”임구택의 눈빛은 대답처럼 다소 진지했고, 그 진지함에 마음속 깊은 곳이 뭉클거린 소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구택 씨, 앞으로 우리 다시는 싸우지 말자.”“싸워도 괜찮아, 오늘처럼 풀어나가면 되니까.”임구택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소희의 눈가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다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깜짝 놀란 소희는 바로 고개를 숙여 임구택의 품에 안겼다.“어서 밥 먹으러 가자, 나 진짜 너무 배고파.”임구택은 어쩔 수 없이 타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소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뭘 먹고 싶어? 남월정에 갈까?”“좋아!”주인 아줌마가 끓여줬던 밀크 티를 생각하니 소희는 더욱 배가 고파진 느낌이 들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남월정으로 가는 길에 소희는 청아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싫어, 그냥 각자 살자.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소희가 고개를 저으며 바로 거절했다. 그리고 소희의 확고한 대답에 임구택이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어차피 한 침대에서 잘 건데, 뭐 하러 왔다갔다해?”“누가 당신이랑 한 침대에서 잔대? 나 돌아가서 잘 거야.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난 이만 내 집으로 가야겠다. 잘 자.”소희가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자 임구택이 소파에 기댄 채 차가운 빛이 도는 눈동자로 소희를 쳐다보며 경고했다.“한 발작만 더 움직여 봐.”“움직이면 뭐 어쩔 건데?”임구택의 경고에 쉽게 쫄 리가 없었던 소희는 교활함이 묻은 눈빛으로 임구택을 향해 말하고는 바로 몸을 돌려 신속하게 문 쪽으로 달려갔다.하지만 현관문은 열리자마자 어느새 쫓아온 임구택에 의해 다시 굳게 닫혀버렸고, 임구택이 바로 소희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임구택의 뜻을 거스른 대가는 무서웠다.그렇게 임구택의 뜨거운 키스 속에서 의식이 점점 혼돈해질 무렵, 소희는 문득 임구택이 일부러 자신한테 복수하고 있는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그동안 한 번도 그를 찾아 해석하려 하지 않아서.……이튿날 아침, 외출하기 전 소희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임구택을 향해 물었다.“어제 그 약, 더 있어?”임구택이 듣더니 고개를 들어 소희를 쳐다보았다. 끝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까만 눈동자에는 아무런 정서도 담기지 않았다.“한달에 두 번만 먹으면 돼.”이에 소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임씨네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2층에서 헤어지기 전에 임구택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을 게.”“그래, 내가 갈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고 있어.”“…….”소희의 대답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는 듯했고, 그걸 눈치챈 임구택이 바로 소희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럼 내가 사과할 게, 아무튼 당신 꼭 내 방으로 올라와야 해.”소희는 하인이 보기라도 할까 봐
하지만 소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네 둘째 삼촌보고 시험지를 찍어 네 부모님에게 보내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뭘 더 어떻게 잘 말해야 하는 건데? 설마 네 둘째 삼촌이 이렇게 쉬운 일도 거절하겠어?”‘뭐야,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어제와 달라진 소희의 태도에 임유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둘째 삼촌이 지금 쌤한테 화 나 있다는 걸 쌤이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다 둘째 삼촌이 만약 쌤을 무시하면 어쩌려고?”“무시하면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지.”“쌤, 우리 둘째 삼촌이 겉은 차가워 보여도 사실 마음은 또 엄청 약해. 쌤이 듣기 좋은 말로 잘 달래기만 하면 틀림없이 쌤을 용서해 줄 거라고.”“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야?”“둘째 삼촌의 도도함은 타고났으니까! 우리 할아버지랑 말다툼이 났어도 먼저 사과해본 적이 없어!”임유민의 대답에 소희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그래?”“그래! 그러니까 쌤이 먼저 져줘.”임유민이 간절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임유민의 모습에 소희는 차마 그를 놀릴 수가 없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노력해볼 게.”“역시 쌤은 우리 둘째 삼촌보다 아량이 훨씬 더 넓다니까. 쌤 같은 쌤을 만난 게 나의 영광이야!”임유민의 아부에 소희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갔다 올 게.”“응, 힘내!”임유민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진지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에 소희는 웃음이 담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러다 3층에 도착한 후, 입꼬리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간 소희는 임구택의 방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런데 의외로 문은 바로 열렸고, 임구택이 그윽하게 소희를 쳐다보며 미소를 드러냈다.“선생님이셨네요, 무슨 일이시죠?”“유민이의 성적에 대해 드릴 얘기가 있어서요.”소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용건을 제기했고, 임구택이 순순히 방문을 열었다.“들어
“안 돼! 난 유민이의 가정교사야, 당신이 지불해 주는 임금에 미안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소희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의 시험지를 챙겨 들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이에 임구택도 덩달아 일어나 소희의 손을 잡았다.“외로움은 돈을 내는 나의 몫인 거야?”“장난치지 마, 나 정말 수업하러 가야 해.”“그럼 당신의 오후와 저녁 시간은 전부 내 거인 거야.”소희가 눈썹을 찌푸리며 화를 내려 하자 임구택이 바로 조건을 제기했다. 이에 소희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점심에 우리 유민이랑 밥 먹고, 저녁에는 청아랑 밥 먹자.”예전에 소희는 임구택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청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임구택이 경원으로 이사 오게 되었고, 청아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시간의 문제였으니 소희는 차라리 밥을 먹으며 미리 청아에게 알려주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리고 소희의 의도를 눈치챈 임구택은 순간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소희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는 게 그 어떤 말보다 그를 더 기쁘게 했으니 임구택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그럼 나 먼저 내려 갈게.”“응, 기다리고 있을게.”……소희가 다시 임유민의 방으로 돌아오자 임유민이 즉시 긴장해하며 물었다.“어떻게 됐어?”“네 둘째 삼촌이 너의 부모님께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약속했어, 딱히 나를 난처하게 하지도 않았고.”“그게 다야?”“왜? 또 뭐가 있어야 하는 건데?”진심으로 의아해하는 소희의 표정에 임유민이 순간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물었다.“쌤과 둘째 삼촌 말이야! 화해했어?”“우리 아무 일도 없는데 뭘 화해해?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어서 수업이나 시작하자.”소희가 덤덤하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임유민은 무언가를 물으려고 다시 입을 여는데 마침 메시지가 들어왔다.임구택이었다.[열심히 강의 듣고, 소희한테 아무것도 묻지 마. 점심에 소희가 남아서 우
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꼭 잡고 청아를 향해 말했다.“그동안 소희를 챙겨줘서 고마워요.”“아, 아니에요! 소희가 저를 더 많이 챙겨줬는걸요.”청아가 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지금의 중점이 그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다시 미소를 지으며 소희를 향해 물었다.“두 사람, 정말 화해했어?”“응, 저녁에 밥 먹을 때 너에게 알려주려 했어.”“잘 됐다. 내가 다 기쁘네.”비록 전에 소희가 임구택 때문에 크게 상처를 받아 성연희가 임구택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고, 또 소희에게 더는 임구택과 화해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경고해왔지만 청아는 소희가 임구택을 잊지 못했다는 걸, 그래서 심명보다는 다시 임구택을 선택할 거는 걸 잘 알고 있었다.어떤 사람은 한 번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평생 가는 거니까.아무리 상처받아 몸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그 사랑은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게 되는 법이다.게다가 청아는 자신의 눈과 직감을 믿었다.‘임구택 씨는 소희를 엄청 사랑하고 있는 거야.’스모그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처럼 오해도 언젠가는 풀릴 거고, 사랑도 결국 모든 어려움을 뚫고 더 좋은 앞날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그럼 저녁에 우리 외식하지 말고 집에서 먹자, 내가 할 게. 두 사람의 화해를 축하해줄 겸.”청아가 흥분되어 소희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소희가 고개를 돌려 임구택의 의견을 물었다.“난 어디서 먹어도 다 괜찮아.”그렇게 집에서 밥 먹기로 합의 본 후, 청아는 요요랑 놀러 가고 소희는 임구택과 부근의 슈퍼에 가서 식재료를 구매하기로 했다.그러다 슈퍼로 가는 길에서 임구택이 갑자기 소희에게 물었다.“한 사람 더 불러도 돼?”“장시원?”“응. 난 그 두 사람의 관계가 한걸음 더 나아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로 청아 씨 혼자서 요요를 키우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낼 수는 없잖아?”임구택의 대답에 소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장시원에 대해 백프로의 확신이 들지 않는 건 여전했다.“장시원은 무슨
소희가 임구택을 한번 흘겨보고는 딜을 하기 시작했다.“그럼 작은 걸로 두 개, 어때?”“그래.”“…….”딜이 분명 성사되었지만 소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앞으로 아이스크림도 마음대로 못 먹겠네.’마지못해 쇼핑 카트의 큰 아이스크림을 돌려놓고 작은 걸로 바꾸는 소희는 속으로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다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다시 임구택을 향해 물었다.“그래서 장시원이 대체 뭐라고 했는데?”“걔가 뭐라고 더 하겠어? 당연히 엄청 기뻐하며 승낙했지.”소희가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청아가 장시원과 잘 되는 게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새로운 국면이 이루어질지도 몰라.’장을 다 보고 청아네 집으로 돌아온 후, 임구택은 식재료를 주방으로 옮겼고, 소희가 과자를 요요에게 건네주며 청아를 향해 말했다.“이따가 장시원도 온대.”청아가 듣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희를 쳐다보았다.“뭐?”“미안, 내가 네 의견도 묻지 않고 혼자서 결정했어. 난 그냥 네가 매일 장시원의 밑에서 일하는데, 상사와의 관계를 잘 처리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랬어.”“하지만 그 사람만 보면 나 너무 긴장돼.”“그럼 몇 번 더 만나면서 그 긴장감을 이겨내.”소희의 말에 청아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 하루 종일 그 사람과 같은 건물에서 근무해야 하는데 계속 이럴 수는 없지. 반드시 평정심을 되찾고, 예전처럼 그 사람을 다시 친구로 여겨야 해.”‘설령 그 사람이 살가운 표정을 드러낸 적이 없고, 또 자주 나를 꾸짖는다 하더라도 난 반드시 습관해야 해.’“잘 생각했어.”소희의 진심 어린 눈빛에 청아가 웃으며 되물었다.“너와 임 대표님의 일이나 말해 봐,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사실 우리 이미 여러 번 만났었어.”“그럼 임 대표님이 정말로 너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된 거야?”“응, 나도 어제 알았어.”“임 대표님이 확실히 너한테 마음을 많이 쓰는 것 같아. 저
강아심은 그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살짝 빛났다. 아심은 가능한 시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벽 구석에 깨진 도자기 조각이 보여. 우리가 어떻게든 가서 그걸 손에 넣어야 해.”깨진 도자기 조각은 절반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고, 아마도 산에 올라온 사람들이 여기서 밥을 먹다 그릇을 깨뜨리고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여자의 숨결이 부드럽게 시언의 귀를 간질이며 퍼졌다. 아심의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다 닫히며 그의 귀밑 민감한 피부를 살짝 스쳤다. 시언은 몸이 순간 굳어졌다가 늦게서야 대답했다.“소용없어.”“뭐?” 아심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이 줄엔 합금 섬유가 섞여 있어. 칼로도 자를 수 없으니 도자기 조각으로는 더더욱 불가능해.”시언이 낮게 말하자, 아심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정말 당신을 특별대우해 주긴 하네요!”이번엔 시언이 이해하지 못했다.“응?”“아니, 그런 거지! 일부러 합금 줄까지 써서 묶어놨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분명 이런 대접 못 받을걸요!” 아심이 말하자, 시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느새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들을 감시하던 사람들이 교대로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마지막 교대 때는 가면을 쓴 남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모두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텅 비었던 방은 순식간에 꽉 찼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인상에,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방 안 공기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웠다.시언과 아심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섰다. 시언은 벽에 몸을 대고 서서 손으로 아심의 등을 감싸며 가면 남자를 주시했다.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는 방 한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용병들은 방 안에 나무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방금 비가 내린 터라 산속은 밤이 되면서 습기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강아심은 용병에게 조하루네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용병은 냉랭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기억해두었고, 하루가 망설이자 바로 그를 들어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걸어갔다. 이에 하루는 몸부림치며 울먹이며 외쳤다.“삼촌, 누나!”점점 그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아심은 목이 메었지만, 하루를 떠나보내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임을 잘 알고 있었다.오두막 바깥에서는 시언에게 맞아 쓰러진 자들이 동료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부상이 심한 자들은 땅에 누워 쉬고, 가벼운 부상자들은 안으로 들어와 명령을 기다렸다.가면을 쓴 남자는 밖에 나가 전화를 걸고, 돌아와 자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저들을 잘 지켜보고 있어. 윗선의 지시를 기다려.”“예!” 몇몇 용병들이 대답했다.가면 남자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다른 용병들도 따라 나갔다. 오두막 안에는 두 명의 용병만이 남아 시언과 아심을 감시하고 있었다.잠시 후, 시언은 갑자기 아심을 들어 올려 돌며 옆에 있던 대나무 침대에 넘어졌다. 손발이 묶여 있어 힘 조절이 어려웠고, 그가 아심 위에 넘어지며 아심은 깜짝 놀랐다. 시언은 바로 몸을 뒤집어 아심이 자신의 위에 있도록 했다.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감시 중이던 용병들은 깜짝 놀라 총을 겨누었지만, 두 사람이 단순히 침대에 누워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천천히 총을 내렸다.아심은 약간 고개를 들어 아래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언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 줄에 묶여서 뻣뻣하게 서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그나마 나아.”아심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그러자 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도 겪어봤어. 걱정하지 마, 난 쉽게 죽지 않아.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도 절대 죽지 않을 거야.”아심은 그들을 감시하는 용병들을 한 번 흘깃 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를 바로 죽여 노도를
시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노도를 위해 복수하러 온 건가?”가면을 쓴 남자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변성기를 사용한 탓에 그 웃음소리는 거칠고 듣기 거북했다. 마치 산속에서 이빨을 드러낸 야수가 내는 소리 같았다.“진언이 설마 노도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남자가 손짓하자, 바로 누군가가 하루를 그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하루의 목을 쓰다듬으며 냉소를 지었다.“이게 진언의 아들인가?”“아니!” 시언이 차갑게 응수했다.“보기엔 아닌 것 같지만, 진언은 무고한 아이가 본인 앞에서 죽는 걸 원하지 않겠지?”가면을 쓴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하루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몸이 떨렸다. 하루는 고개를 돌려 시언을 바라보며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지만, 도움을 청하거나 가면 남자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다.이때 아심이 차갑게 말했다.“그 아이는 마을에 사는 평범한 농가의 아이야. 내가 인질이 될 테니 그를 풀어주고 집으로 돌려보내.”가면을 쓴 남자가 시언을 보며 물었다.“진언의 생각은 어때?”시언은 들고 있던 총을 내던졌다.“우리 조직에는 조직만의 규칙이 있어. 여성이나 아이를 인질로 잡는 건 가장 비열한 용병들만 하는 짓이야.”“너희들이 원하는 건 나니까 나를 마음대로 처리해. 하지만 여자와 아이는 산 아래로 보내.”아심이 시언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젓자, 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고 깊은 눈빛을 보냈다.“내 말을 들어.”아심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때, 가면을 쓴 남자가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아이는 풀어줄 수 있어. 하지만 이 여자는 안 돼. 이름은 넘버세븐. 진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지? 내가 틀리지 않았군!”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면 남자를 노려봤다. 그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그럼 아이부터 풀어줘!”“서두르지 마. 그 아이가 내 손 안에 없으면, 이 사람들로는 진언을 막아낼 수 없어. 내가 그 정도는 알고
강아심이 몸을 드러내는 순간,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두 개의 창문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던 아심은 결국 한 사람과 몸싸움을 벌이게 되었다.아심은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한 빠르고 강력하게 상대의 약점을 노려 공격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창문을 통해 밀려들었고, 하루가 숨던 곳에서 고개를 내밀자 한 고용병이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들어가!” 아심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발로 근처에 있던 나무 의자를 걷어차 상대의 어깨를 가격해 총을 떨어뜨렸다.“탕!” 총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방아쇠가 당겨졌고, 총알이 벽을 뚫고 나갔다.아심은 두 명을 밀어내며 하루가 숨은 대나무 침상으로 다가가 그를 보호했다. 그 순간 또 다른 고용병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하루가 숨은 침상 밑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아심은 몸을 날려 고용병의 총을 걷어차며 떨어뜨렸고, 다시 그 총을 잡으려는 찰나 또 다른 고용병 두 명이 그녀를 공격해 왔다.아심은 한 남자의 팔을 비틀어 탈골 시키고, 몸을 회전시켜 다른 남자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아심의 힘은 이 고용병들보다 약했지만 몸놀림이 민첩하고 공격이 매끄러워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러나 그 순간, 대나무 침상 위로 한 남자가 뛰어올라 침상을 들어 올리며 하루를 붙잡아 칼을 그의 여린 목에 들이댔다.“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이 아이를 죽일 거야!”이와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언이 지나온 길에는 이미 쓰러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언의 등장에 방 안의 고용병들은 더욱 경계하며 총을 모두 그에게 겨누었다.가장 가까이 있던 고용병이 아심의 머리에 총을 겨누자 시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총으로 겨누지 마.”고용병은 시언의 서늘한 시선을 받자 손이 떨렸지만,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시언은 천천히 아심 쪽으로 걸어갔다. 고용병의 눈빛은 두려움이 엿보였고, 본
조하루가 즉시 과일 주스를 시언에게 내밀며 말했다.“삼촌, 이거 드세요. 저를 그렇게 오랫동안 업어 주셨잖아요. 고마워요!”시언은 얇게 입가를 올리며 주스를 다시 돌려주었다.“난 누나와 장난친 거야.”“아...”시언은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효과는 없었다. 조하루는 멍하게 대답하며 다시는 시언을 쳐다보지 못했다.아심은 입술을 꽉 다물며 웃음을 참았고, 차마 대놓고 웃을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빵을 베어 물었다.숲속에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창가에 앉아 방 안을 들여다보며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쭈쭈 하고 소리를 내면서. 아직 인간에게 위협을 느껴본 적 없는 새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아심은 빵 부스러기를 조금 떼어 창가에 놓았다. 새는 신나게 부리로 쪼아먹었지만 다 먹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시언은 창 아래에 서 있는 아심을 보며 반쪽 남은 빵을 들어 올렸다.“천천히 먹어, 난 밖에 좀 보고 올게.”아심은 시언이 문을 나가는 걸 보고 하루에게 속삭였다.“볼일 보러 가야 해? 삼촌이랑 같이 가면 돼!”하루는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갔다. 아심은 천천히 빵을 다 먹고 물병을 집어 들고 막 마시려던 순간, 밖에서 탕! 하고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아심의 얼굴이 굳어졌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시언이 떨고 있는 하루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는, 곧바로 따라오던 한 남자를 발로 차서 밖으로 날려 보냈다.그는 고개를 돌려 매우 빠르게 말했다.“지켜, 절대 나오지 마. 창문도 다 잠가!”문이 열리는 그 순간, 아심은 이미 상황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미 포위당한 상태였다. 나무집 주위는 전부 위장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용병들로 가득했고, 적어도 스무 명이 넘었다.문이 닫히고 난 뒤, 바깥에서는 치열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아심은 조하루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두 개의 창문을 빠르게 닫은 뒤, 창을 야생 동물로부터
강시언이 앞서 걸었고, 중간에는 조하루, 뒤에는 강아심이 따라갔다.비에 젖어 미끄러운 산길을 걸으며, 아심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조하루에게 지팡이 삼아 주었다. 세 사람은 고요하고 습한 산림 속을 조용히 지나갔다.겨우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뿐인데, 하루는 이미 지쳐 헉헉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아이라 무리가 있는 듯했다.아심은 걸음을 멈추고 하루의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자, 내가 업어줄게!”시언이 돌아서더니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아심에게 넘기며 말했다.“내가 업을게!”하루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겁먹은 듯 시언을 올려다보았다.“저, 저 아직 괜찮아요.”“아직 한참 남았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어? 올라와!” 이번에는 시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냉정하고 단호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하루는 아심을 바라보았다. 아심의 격려하는 눈빛을 본 후에야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며시 시언의 등에 올라탔다.시언이 일어서자 조하루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시언의 넓고 든든한 등에 안겨, 하루는 안전감을 느꼈다. 시언은 고개를 돌려 아심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아심도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 열몇 개의 계단을 더 오르던 중, 하루는 손에 쥐고 있던 비타민 젤리를 시언의 입가에 내밀었다.“아저씨, 이거 드세요!”시언은 원래 거절하려 했으나, 아심이 늘 이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 한 손을 뻗어 젤리를 받아 입에 넣었다.하루의 검게 빛나는 눈이 환하게 반짝였고, 시언이 자기가 준 젤리를 먹자 무척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시언이 젤리를 씹으며 물었다.“더 있어?”하루는 허둥지둥 젤리 통을 꺼내 다시 시언에게 주려 했지만, 그가 말했다.“뒤에 있는 누나한테 두 알 줘.”하루는 그제야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에 다섯 여섯 개의 젤리를 쥐고 아심에게 내밀었다.“누나!”아심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하나를 집었다.“고마워!”하루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아
“네!” 하루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였다. “정말 맛있어요, 우리 다들 엄청나게 좋아해요.”“하루에 두 알만 먹어야 해,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아심은 자연스럽게 하루와 대화를 이어갔다.“알아요, 선생님이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어요.” 하루의 미소는 순수하고 귀여웠다.시언은 그들이 뒤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룸미러로 아심을 흘깃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아심을 데리고 오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이 작은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어둡고 흐린 날씨에,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차창이 물안개로 덮여 바깥 풍경이 희미하게 변해 있었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아심과 하루의 대화와 빗소리, 그리고 쉼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차가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시언은 뒷좌석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심은 이마를 차창에 대고 잠이 들어 있었다.하루는 창문에 성에 낀 자국을 손가락으로 그리다가, 시언이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자 얼른 손을 내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시언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자기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건넸다.“이거 좀 도와줘. 누나에게 덮어줘.”아심은 얇은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그녀가 운성에 왔을 때 날씨가 더워서 두꺼운 옷은 가져오지 않았다. 하루는 외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아심의 몸에 덮어주었다.시언은 아심을 한 번 더 보자,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에 시언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차는 산길을 따라 다시 30분가량을 달렸고, 드디어 앞쪽에 무너진 도로가 보였다. 더는 차로 갈 수 없었다.“네 물건 잘 챙기고, 여기서 내려야 해.” 시언이 하루에게 말했다. “산을 돌아서 넘어가야 하거든.”“네!” 하루는 대답하며 자신의 가방을 메고, 안에 들어 있는 옷과 책을 잘 챙겼다.“삼촌, 누나를 깨울까요?” 하루가 묻자, 시언은 표정을 굳히며 뒤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시언은 이미 아침을 먹었을 거라 생각한 아심은 따로 묻지 않고 혼자 아침을 먹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아심은 평소처럼 전화를 걸어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오늘은 아이들이 다시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라 아심은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가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갔다.도서관 입구에 들어서자, 그녀는 도도희와 시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하고 있었고, 그 대화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산길이 비에 무너져서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어. 차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산길을 올라가야 해서 너무 위험해.”도도희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시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비가 많이 오진 않으니까 시도해 볼 만해요.” 이때, 아심은 다가가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생겼나요?”시언은 아심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분명히 옷 따뜻하게 입으라고 한 것 같은데.”오늘 아심은 얇은 검은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시언의 지적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도도희 앞이라 반박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곧 가서 갈아입을게요.”도도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아심에게 설명했다.“한 학생의 할아버지가 병이 너무 위중해서 의식이 흐려졌대.”“그런데 할아버지가 계속 손자를 찾고 계셔서 가족들이 전화로 아이를 데려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어.”도도희는 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언은 아이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산길이 위험할까 봐 걱정돼.”“위험할 게 뭐 있어요?” 시언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요. 아이한테 준비하라고 전해주고, 곧 출발할게요.”시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고, 아심도 뒤따라가며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요.”시언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안 돼.”“왜 안 돼요?” 아심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언을 따라붙었다.“그 애들이 얼마나 당신을 무서워하는지 모르죠? 혼자 데려가
차에 올라탄 지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큰어머니, 이제야 제가 한 말 믿으시겠죠?”권수영은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였다.“저 아가씨, 혹시 남자친구 없나?”“물론 없죠!”“그럼 기다릴 필요 없겠네. 빨리 승현이와 만나게 해야겠어.” 권수영은 이미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제가 재아에게 말만 하면 분명히 승낙할 거예요.” 아윤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할머니의 혼수품도 되찾고, 오빠에게 좋은 여자친구까지 소개해 드렸으니, 큰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권수영은 속으로 이익을 따져 보며 생각했다. 만약 도씨 집안과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네가 승현이와 저 아가씨를 이어준다면, 내가 할머니의 혼수품을 되찾아도 그중 절반은 네 몫으로 줄게.”“정말 약속하신 거죠?” 아윤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내가 직접 약속했는데 속이겠니?”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반드시 최선을 다할게요!”...집에 돌아온 아윤은 바로 재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권수영과의 만남 이유를 은근히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지승현을 칭찬하며 그와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재아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 상대자로 몰래 계획된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현재 중간급인 지씨 집안과 연결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재아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야, 그런 얘기를 진작해주지 그랬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 아마 큰어머니께서 실망하실 거야.”아윤은 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재아야. 정말로 큰어머니께서 그냥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거야. 괜한 부담은 갖지 마.]아윤이 이렇게 간곡히 사과하자, 재아는 약간 기분이 풀리며 말했다.“괜찮아. 나 화난 건 아니야. 그냥 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어. 외할아버지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치 않으셔.”아윤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