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데리러 오지 않았더라니, 약속이 있었네.’임구택은 이곳에서 소희를 만난 줄 생각지도 못했다.사실 그가 이곳에 나타나게 된 건 와서 누굴 한 번 만나보라며 걸려온 형수의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그러다 룸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형수가 그를 대신해 맞선을 주선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그와 소희 사이의 일은 임씨네 가족들이 아직까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그가 한 번도 집으로 여인을 들인 적이 없었으니 가족들은 그가 그쪽 방면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몰래 이번 맞선을 준비했던 것이다.물론, 방금 룸 안에서 그는 이미 오늘 맞선 보러 온 임 아가씨에게 제대로 의사를 표했고, 기왕 거절한 이상 밥도 먹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마침 소희를 만나게 되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온 후 임구택은 임 아가씨를 먼저 보내고 소희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그러고는 소희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덤덤한 표정의 소녀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소희는 임구택이 맞은편에 앉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녀는 디자인 원고에만 전념할 뿐 남자의 시선을 외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지만 낯선 사람마냥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종업원이 와서 레몬물 한 잔을 내려놓으며 임구택에게 주문할 거냐고 물었고, 임구택이 그제야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초콜릿 케이크요.""네."종업원이 공손하게 물러나고는 곧 케이크를 올려왔다.임구택은 그 케이크 접시를 소희 앞으로 밀어주고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보기 시작했다.대략 30분 후,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연희야."[길이 너무 막혀서 방금 도착했어, 너 어디야?]성연희의 우렁찬 목소리가 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이에 소희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성연희가 빨간색 스포츠카에서 내려 식당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들어와, 네가 보여."소희가 전화를 끊고는 바로 물건을 정리
화요일휴식시간에 류 조감독이 휴식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대사를 외우고 있는 이현을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갔다."현이 씨 참 부지런하다니까. 역시 잘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이현이 듣더니 고개를 들고 깜찍하게 웃었다."다들 노력하고 있는데, 제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죠.""역시 현이 씨는 너무 겸손해!"류 조감독이 말하면서 이현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신은 딴 곳으로 가출해 있는 게 분명했다.이에 이현이 반짝이고 있는 두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방금 소희 씨가 촬영장에 있던데, 왜 남아 소희 씨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이쪽으로 오셨어요?""소희는 고집이 너무 세. 꽃도 주고 돈도 쓸 만큼 다 썼는데도 여전히 나를 받아주지 않아."류 조감독이 눈썹을 찌푸린 채 대답하고는 눈알을 한 번 굴렸다. 그러고는 이현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듣자니 현이 씨 예전에 소희와 사이가 좋았다던데, 현이 씨가 날 좀 알려줘, 어떻게 해야 소희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이현이 듣더니 대본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주 간단해요. 아무리 좋은 여자라고 해도 끈질긴 구애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자들은 원래 내숭 떠는 걸 좋아하니, 류 조감독도 조금만 더 견지해 보세요. 분명 소희 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하지만 내가 산 물건은 하나도 받지 않아.""제작팀에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소희 씨가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잖아요. 게다가 소희 씨는 북극 작업실에서 파견된 디자이너인데 어떻게 대놓고 받겠어요? 그러니 집으로 한 번 보내봐요."이현의 건의에 류 조감독이 순간 깨달았다는 표정을 드러냈다."내가 바보짓을 했네! 현이 씨, 역시 현이 씨가 똑똑해.""류 조감독님이 바보짓을 한 게 아니라, 제가 여자의 심리를 더 잘 아는 것뿐입니다.""그럼 소희가 어디에 사는지 좀 물어봐줄래?""물어볼 필요 있나요? 제가 소희 씨 친구인데 주소를 모를 리가 있겠어요? 바로 보내줄게
소희가 듣더니 입술을 오므리고는 다시 쓰레기통을 향해 걸어갔다.임구택이 소희의 손에 들린 가방을 보더니 눈동자가 순간 어두워졌다.그러다 소희가 가방을 던지고 건물로 돌아가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임 대표님, 무슨 볼 일이라도 있습니까?"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하늘에 남긴 노을은 임구택의 잘생긴 얼굴에 황금빛 그림자를 드리워 이목구비를 더욱 입체적이고 조각지게 만들었다.임구택이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집으로 초대하지 않을 거야?""죄송합니다만 그건 많이 불편할 것 같네요.""그럼 가장의 신분으로 임유민의 성적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데."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간 임구택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던 소희가 한참 후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올라와요."임구택이 순간 목적을 달성한 사람마냥 입꼬리를 올린 채 소희의 뒤를 따라 복도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 임구택이 소희 먼저 층수를 눌렀고 뒤에서 전해 오는 누군가의 눈빛을 감지하고 자기도 모르게 다시 빙그레 웃었다.그러다 엘리베이터 문이 반쯤 닫혔을 때 갑자기 한 여연이 달려왔다."잠깐만요, 잠깐만요!"임구택이 신속히 열림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하지만 의외로 여자가 개 한 마리도 끌고 있었다. 사람 무릎 높이까지 큰 골든 레트리버가 여자 앞서 엘리베이터로 들어섰고, 소희를 보자마자 소희의 몸에 뛰어오르려 했다.소희는 순간 안색이 크게 변해 뒤로 물러났다.마침 소희의 뒤쪽에 서 있던 임구택이 팔을 뻗어 소희를 품에 안고는 차가운 눈동자로 개를 끈 여자에게 말했다."줄을 잘 잡으시죠."여자가 임구택의 위세에 깜짝 놀라 멋쩍게 말했다."우리 집 강아지는 사람을 안 물어요.""하지만 제 아내를 놀라게 했습니다."임구택의 목소리도 엄청 차가웠다.이에 여자가 황급히 골든 레트리버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비록 골든 레트리버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지만 소희는 여전히 몸에 힘을 준 채 아무것도
사실 임구택은 얼마나 그 무더운 여름에 소희 곁에 나타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개들이 소희에게 달려들기 전에 그녀를 뒤쪽으로 감싸고 그녀에게 이 세상에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데.소희는 임구택의 품에 가만히 선 채 천천히 평정심을 되찾은 표정으로 그의 호의를 거부했다. 그의 호의는 뒤쪽에 있는 골든 레트리버보다 더욱 그녀에게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주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16층에서 멈춰 섰고, 개를 끈 여자가 함께 안고 있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개를 끌고 나갔다.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소희는 즉시 임구택의 품에서 나와 몸을 돌려 문쪽을 마주해 섰다.임구택은 그렇게 뒤쪽 엘리베이터 벽에 기댄 채 무거운 눈빛으로 소희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다 한참 후 엘리베이터가 다시 멈추었고, 임구택이 소희의 뒤를 바짝 따랐다.소희는 집 문 앞에 서서 천천히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문이 열린 순간 신속히 집으로 들어가서 문을 세게 닫았다."......"집안에 들어 선 소희가 천천히 긴 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화가 드디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이때 문밖에 선 임구택이 문을 두드렸다."자기야, 문 열어 봐. 우리 얘기 좀 해.""얘기할 것도 없어."소희가 문에 기대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신 주위에는 여자가 끊긴 적이 없었잖아. 그러니 나한테 와서 이렇게 억울한 척할 필요 없어.""여자라니?"임구택이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날은 형수님이 나 몰래 맞선을 주선해서 간 거였어. 나도 사전에는 그런 자리일 줄 몰랐다고.""나한테 해석할 필요 없어, 가서 네 여자친구한테나 해석해."소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이에 임구택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난 여자친구 없어, 아내 한 명만 있지.""곧 그 아내도 없어질 거야.""......"*장시원이 다시 아래층으
청아가 다가가 케이크를 흔들었다."엄마가 뭘 사 왔을까요?"요요가 보더니 순간 눈빛이 밝아져서는 케이크를 향해 달려들었다.청아가 소파에 앉아 케이크를 높이 들고 웃으며 물었다."엄마 보고 싶었어?""응! 보고 싶었어요!"요요가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청아가 그제야 케이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 옆에 놓여 있는 공주성을 발경하고 요요에게 물었다."소희가 또 장난감을 사줬어?"요요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투명 상자 안의 케이크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아저씨가 사줬어요!"청아가 잠깐 멍해 있더니 고개를 돌려 이씨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그분이 또 왔어요?"요요가 병이 난 후로 ‘조백림’이 자주 와서 요요와 함께 놀아줬다는 걸 청아도 알고 있었다.이씨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그 선생님이 아까 요요에게 새 장난감을 사주고 잠깐 앉아있다가 가셨어요."청아가 듣더니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조백림이 왜 요요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비록 예전에 조백림이 나에게 호감을 표시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이미 오래된 일이고, 그도 약혼했으니 나한테 다른 뜻을 품고 있을 리는 없을 거고.’‘그럼 대체 뭐 하려는 거지?’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아주 몽환적이면서도 고급적이게 디자인이 된 장난감은 요즘 제일 잘 팔리는 한 유명 브랜드의 세트로 가격이 십만 대를 훌쩍 넘었다.비록 조백림에게 있어서는 몇 십만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이렇게 시간과 돈을 써가면서 요요와 놀아줬다는 것만 생각하면 청아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려 공주성을 바라보았다. 순간 한 사람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아파왔다.소희가 내려와 요요와 함께 케이크를 먹고 있을 때 청아가 입을 열었다."소희야, 조 도련님의 휴대폰 번호 좀 알려줘. 휴대폰을 바꾼 후 예전 친구들의 번호가 전부 지워졌어."소희가 듣더니 의아해서 물었다."그 사람 번호는 왜?""조 도련님이 자주 와서 요요랑 놀아주고 또 요요에게 장난
장시원이 별장 모형을 보며 놀라서 물었다."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응! 엄마가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선물을 주고 싶다고 했어요!"모형을 건네받은 장시원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너희 엄마께선 아저씨도 아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우리 모두 착한 아이예요!"요요의 대답에 장시원이 더욱 활짝 웃었다.그러다 손에 든 모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위의 작은 그네를 만지작거리니 그네가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감 나면서도 재미있어 보였다.보면 볼수록 모형이 마음에 들었던 장시원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라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너 청원 쪽 산 맞은편에 땅이 있지 않았어? 나에게 줘."임구택이 듣더니 담담하게 물었다.[그 땅은 상업용에 쓸 수 없어. 뭘 하려고 그러는데?]장시원이 손에 든 별장 모형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별장 지으려고."[왜, 여자 숨기려고? 얼마나 사랑하는 여인이기에 있는 별장들을 놔두고 새로 지으려는 거야?]"나 혼자 살려고 그런다, 왜?"장시원이 무심코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임구택이 뭐가 생각났는지 더 이상 농담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알았어. 요 며칠 수속 자료들을 보내줄게.]"그래, 고마워!"[고맙긴.]임구택과의 통화가 끝난 후 장시원이 또 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별장을 지으려고 그러는데 효율이 높은 시공팀으로 찾아주세요. 디자인은 내가 이따가 보내줄게요."전화를 끊은 후 장시원은 모형을 탁자 위에 놓고 앞뒤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비서에게 보냈다.[이것과 똑같게 지으라고 하세요.]요요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아저씨, 집 지으려고요?"장시원이 요요를 다리에 앉히고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이제 집이 다 지어지면 아저씨랑 한번 놀러 갈래?""좋아요!"요요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전에 소희가 국제 패션쇼에서 보내온 초청장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오즈카와 패션위크 잡지사에서 연합하여 개최한 영화 패션아트쇼라 소희는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했고 한 달
소희의 농담 섞인 대답에 진석은 갑자기 처음 강성으로 왔을 때의 소희가 생각났다.10여 년간의 용병생활은 그녀를 시시각각 경각 상태에 처해 있게 했다. 그래서 그런 환경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일반적인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한 번은 그가 소희를 데리고 밥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도중에 소희는 화장실에 가게 되었고 한 남자가 소희를 꼬시려고 복도에서 여러 번이나 소희를 ‘예쁜 아가씨’라고 불렀다.하지만 당시의 소희는 ‘예쁜 아가씨'라는 단어가 모든 여인에게 통용되는 단어인 줄 몰랐기에 자신을 부르는 줄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분명 그냥 그렇게 끝냈으면 되는 일을, 그 남자는 앞으로 다가가 소희의 어깨를 쳤다.그리고 입을 열기도 전에 소희가 그의 팔을 잡고 어깨 너머로 벽에 던졌고, 또 곧바로 그의 목을 조른 채 힘껏 벽에 밀어붙였다.순간 그 남자는 두 눈을 뒤집고 고개를 푹 숙였다.기절했던 것이다.그 일이 있은 후 그 남자는 아마 트라우마가 생겨 다시는 여인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을 것이다.어느 여인이 또 소희처럼 무술을 배웠을지 모르니까.그런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진석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그리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진석의 소리에 소희가 의아해서 물었다."왜 웃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여전히 담담하기만 한 진석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아가씨께서 상 받은 일은 빠른 시일 내로 작업실 공식 계정에 올릴게요.]"알아서 해요."그러나 북극 작업실에서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도 전에 패션과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일부 팬들은 이미 킹의 수상 소식을 국내에 퍼뜨렸다.모델의 런웨이 사진까지 인터넷에서 돌기 시작했다.국풍을 패션에 융합시킨 킹의 작품에는 그만이 고유하고 있는 색채가 묻어나면서도 또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어 항상 관중들에게 남다른 시적 감각을 가져다주었다.그렇게 국풍은 다시 한번 그로 인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고 국내의 전통문화가 미친 듯이 수출되면서 전 세계에 한 나라의
소희는 자리를 옮겨 계속 밥을 먹었다.이때 이정남이 도시락을 들고 와서 웃으며 물었다."아까 저기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밥 먹고 있지 않았어? 왜 또 여기로 왔어?"소희가 대리석 난간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누가 나보고 평생 구석에 틀어박혀 도시락 먹을 운명이래요. 그래서 난 다른 곳에서도 도시락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왔죠."하마터면 밥에 사레들뻔한 이정남은 얼른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그러다 한참 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려 물었다."여민이지? 그 여인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정신과에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은데?"소희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속 밥을 먹었다. 지금 소희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아예 숨기지도 않는 여민은 고슴도치마냥 소희만 보면 마구 물고 뜯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적의 주먹도 소희를 다치게 할 수 없는데, 몇 마디 험담에 소희가 상처받고 마음에 담아둘 리가 없었다.......저녁, 소씨 가문요 며칠 소 어머님의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소정인이 아내 진연을 데리고 본가로 갔다. 그리고 마침 셋째네 가족들도 있어 다들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그러던 중 소 아버님이 휴대폰 속의 뉴스를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킹이라는 이 디자이너 정말 대단해. 또 우리나라를 위해 영예를 떨쳤네."셋째 부인 하순희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그분은 국제 일류 디자이너인걸요."그러다 또 진연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소동의 작업실도 2년 넘게 열렸는데, 지금은 어때요?"진연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그럭저럭이지, 뭐."이에 하순희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래요? 그런데 왜 다들 소동의 작업실이 밑 빠진 독마냥 퍼넣은 돈만 있고 벌어들이는 돈은 없다고 그러는 거죠? 두 분이서 소동이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망했다죠?"진연의 얼굴색이 더 어두워졌다. 분명 다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묻
후원에는 벽에 걸린 벽등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온 마당은 은은한 황금빛에 감싸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장미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고, 애옹이는 작은 집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야옹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앞발로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고 있었다.서인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 있었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서인은 오늘 많은 술을 마셨다. 기분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유진 대신 술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유진은 조용히 다가가, 서인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그가 정말 잠든 건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넋을 잃고 말았다.서인의 짙고 선명한 눈썹은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선명했다. 책에서 묘사하는 ‘긴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그 눈썹만 봐도, 서인의 차갑고 오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눈은 길고 날렵했으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콧날은 오뚝하고 반듯해, 본래부터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턱선에는 거칠게 자란 수염이 덮여 있어, 평소보다 다섯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상관없었다.서인이 어떤 모습이든, 유진은 다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그의 수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유진은 거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서인의 턱에 닿기 직전 갑자기 서인이 눈을 번쩍 떴다.서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경계와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산길에서 적들의 포위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살기가 감돌았다.유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뒤에 있던 탁자에 걸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낡은 탁자는 이미 몇 번이나 수리를 거쳤던 터라, 유진의 몸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쾅! 순식간에 탁자가 부서졌다. 몸을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그 순간 굵은 손이 유진의 팔을 붙잡
이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고, 갑자기 가게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뛰어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생일 축하해요!”이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웃었다.“내 생일이었어?”“자기 생일도 모르다니!”임유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케이크를 그 앞에 내밀었다.“자, 촛불 끄고 소원 빌어요!”이문은 굳은 얼굴로 기계적으로 촛불을 불어 끄자 유진이 곧장 말했다.“소원도 안 빌고 그냥 끄면 어떡해요!”이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긴장해서 깜빡했어!”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긴장할 게 뭐 있어요?”그때, 오현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묻힌 생크림을 이문의 얼굴에 문질렀다. 이문은 한순간 얼어붙더니, 이내 손을 뻗어 현빈을 쫓기 시작했다.조용하고 따뜻했던 생일 파티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유진은 한가운데에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녀의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서인은 카운터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의 장난을 바라보았다.평소의 냉랭한 표정과는 달리, 이날만큼은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한 직원이 장난을 치려다 유진에게 다가갔다.그러나 유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긴 팔이 앞으로 뻗어져 나가, 상대의 손을 막아섰다.서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너한테 묻히면, 그대로 돌려줘. 괜히 억울해하지 말고.”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서인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사람들의 난장판을 피해 도망쳤다.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거의 서인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유진은 새로운 케이크를 꺼내며 작게 으쓱했다.“다행히도, 저는 항상 대비책을 준비하죠!”유진은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자르고 원래는 서인에게 주려 했지만,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살짝 묻혀 서인의 얼굴에 바르려 했다. 그러나 서인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피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서인이 보였다. 임유진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사장님!”“응.”그러나 서인은 무심한 듯 가볍게 대답했을 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유진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가게 안 손님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우선 앞치마를 두르고 일손을 거들기로 했다.주방에서 음식을 나르던 중, 이문이 유진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너랑 사장님이 산에서 가져온 산나물로 끓인 버섯 갈비탕이야. 갓 끓였으니까 맛 좀 봐.”유진은 국물에 떠 있는 버섯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깊고 진한 풍미에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와, 너무 맛있어요!”“나도 좀 먹어볼까?”오현빈이 다가와서는 직접 손으로 갈비 하나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현빈은 음미하듯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향이 진하네. 이게 진짜 자연산 버섯이지!”그는 유진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런데 오늘은 왜 저녁까지 여기 있어?”유진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오빠들이 보고 싶어서요. 마침 오늘 일찍 끝나기도 했고요.”현빈은 히죽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우리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어떤 사람 보고 싶었던 거야?”이에 유진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다 알면서 왜 물어요?”현빈은 유진에게 더욱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어제 형님 집에 갔더니, 밤늦도록 방에 불이 켜져 있더라. 아무래도 너 생각하느라 잠 못 잔 거 같은데?”유진의 볼이 붉어지며 눈을 굴렸다.“어떻게 그렇게 단정해요? 혹시 그냥 잠이 안 온 걸 수도 있잖아요.”“딱히 다른 이유가 있겠어?”현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유진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고마워요, 오빠!”“고맙긴, 우린 그저 축하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유진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결혼식 날은 사흘 동안 파티 열어드릴게요!”현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바로 그때, 서인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차가운 목
“그 토끼도 내 거잖아요? 내 물건으로 내 토끼 먹인 건데, 돈을 받을 수 없죠!”박민란은 단호하게 임유진의 손에 돈을 쥐여주었다.“그리고...”박민란은 다른 바구니에서 화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화분 속에는 난초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이 난초는 꽤 좋은 품종이에요. 기념 삼아 드릴 테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산에 놀러 오세요.”임유진은 난초를 받으며 말했다.“감사해요!”박민란은 손사래를 쳤다.“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죠.”서인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유진과 함께 강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다.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달렸다. 유진은 창문을 내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정말 잔뜩 챙겨서 돌아가네요!”서인은 어젯밤 자신이 한숨도 못 자고 뒤척였던 걸 떠올리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정작 그녀는 마냥 즐거운 얼굴이라니. 하지만, 어쨌든 이 여행도 끝났다.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차가 샤부샤부 가게 앞에 멈추자, 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뛰어나왔다.서인이 차에서 내리고, 유진과 함께 가게로 들어가려던 순간, 서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어느새 서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린 듯했다.현빈은 서인과 유진의 맞잡은 손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인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조금 어색한 듯 유진의 손을 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어서 일하러 가자.”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놀았더니 다시 일하러 가기가 싫어지네요.”서인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며칠은 단지 예외일 뿐이야.”서인의 차분한 눈빛을 마주하자, 유진의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고 있던 난초를 바라보았다.“난 애옹이 보러 갈게요. 난초도 마당에 놓고 와야 하고요.”그렇게 말한 후, 유진은 뒷마당으로 향했다.한편, 현빈과 직원들은 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현빈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서인에게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서인은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이불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몸속을 타고 도는 술기운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올라오는 듯했고, 유진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술기운을 더욱 자극했다.잠시 후,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창가에 서서 한동안 밤바람을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서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그 사이, 유진은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는 두 개의 베개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꽤 얌전해 보였다. 그러나 서인이 자리에 눕자마자, 유진이 몸을 뒤척이며 다시 그의 품으로 굴러들어 왔다.‘오늘 밤, 잠은 포기해야겠군.’다음 날 아침, 유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훤히 떠 있었는데, 침대에는 유진 혼자뿐이었고, 서인은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 내다보니, 서인과 안토니가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서인은 검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아침 햇살이 서인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으며, 평소의 거친 분위기를 감싸 안았다.서인에게서 풍기는 느슨한 여유가 사라지고, 더없이 당당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창틀에 두 팔을 올려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맑고 영롱한 유진의 눈동자에는 오직 서인만 담겨 있었고,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둘이 가까이 다가오자, 유진이 소리쳤다.“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서인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향할 때, 그 안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유진 또한 서인을 향해 눈길을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얇은 아침 안개 너머에서 조용히 마주쳤다.산속의 안개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었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방 안의 두 개의 침대를 보고는 임유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렇게 자요. 밤에 쥐라도 나오면 또 사장님을 깨우러 갈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호텔에서도 이렇게 잤잖아요.”서인은 문득 예전에 유진이 쥐를 보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네가 먼저 씻어. 난 나가서 담배 좀 피우고 올게.”그렇게 말한 뒤, 서인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유진은 두 다리를 툭 튕기며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감싼 채 웃음이 터졌다.샤워를 마친 유진이 침대에 누웠을 때쯤, 서인이 돌아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옷을 챙겨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내 샤워기의 물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물이 흐르는 소리에 유진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알 수 없는 상상이 떠오르고,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서인은 유진이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한 듯 조용히 침대로 가서 누웠고, 방의 불을 껐다.방 안이 암흑으로 변하자, 유진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자기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호텔에서도 같은 방을 썼는데, 왜 이번엔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게다가 묘하게 기대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아마도 이 방이 좁아서 서로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오늘이 서인과 함께하는 마지막 밤일지도 몰라서일까?어둠에 익숙해질수록, 달빛에 비친 방 안의 야경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산속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풀숲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숲속을 스쳐 지나가는 밤새의 날갯짓 소리, 심지어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마저 들려왔다.달빛이 창살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운치를 자아냈다. 서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유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
안토니의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서인이 입을 열었다.“받아.”토니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갔다. 이에 유진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안주설이에요?”사실 주설이 토니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눈에 보였다. 다만, 주설에게는 계산이 많을 뿐이었다.서인은 입에 들풀 한 가닥을 물고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아니잖아.”“참 관대하시네요?”임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바위 위에 앉아 두 다리를 살랑거렸다.서인은 멀리 산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안주설과 사귀는 건 토니지, 내가 아니잖아.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지.”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만약 당신이라면? 용서할 수 있어요?”서인은 깊은 눈빛을 드리우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럴 일은 없어.”“그렇겠죠.”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적어도 당신한테 해가 되는 선택은 안 할 테니까.”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유진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가, 코웃음을 쳤다.“점점 뻔뻔해지네.”유진은 서인을 흘긋 쳐다보았다. 귀끝이 살짝 뜨거워졌지만, 동시에 서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말이 점점 거리낌 없이 나오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토니가 돌아왔다. 그는 화가 난 듯하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주설이 전화를 걸어와서 자기 잘못을 인정했어요.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요.”유진이 물었다.“그래서 뭐라고 했어요?”토니는 맥주 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벌컥 들이켰다.“해성에서 일을 그만두고 흥성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그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그랬더니, 헤어지지만 않는다면 자기도 따라와서 같이 살겠대요.”서인은 덤덤하게 말했다.“잊지 못하겠으면 다시 만나는 것도 방법이지.”토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젖히고 술을 들이켰다.이야기
“이번 일은 서인 형 덕분이에요. 이 잔은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거예요!”서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울 것까지야, 그냥 네 형이 집안을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동안, 임유진도 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입안에 퍼지는 매실 향이 은은했지만, 마실 때는 생각보다 강한 알코올 향이 확 올라왔다. 이에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인은 그녀를 흘끗 바라보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조금 맛이라도 보게 해야지. 괜히 못 마시게 하면 자꾸 마시고 싶어질 테니까. 직접 마셔보고 얼마나 독한지 알면 다시는 손대지 않겠지.’동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동혁의 가족들은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윤석경은 계속해서 유진과 서인에게 반찬을 집어 주며 말했다.“만약 너희가 우리 동혁이를 만나게 되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우리 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그리고 매달 그렇게 많은 돈을 부치지 않아도 돼. 자기 몫도 좀 남겨두라고 해.”서인은 목이 메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유진은 그런 서인을 한 번 바라보고는 윤석경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서인 오빠도 동혁 오빠를 자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만날 기회가 생기면 꼭 전할게요. 동혁 오빠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윤석경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그래, 다들 잘 지내면 그걸로 된 거야!”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동혁이 돌아올 순 없지만, 저는 계속 강성에 있을 거예요. 언제든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안토니가 말을 받으며 말했다.“우리 집에는 아직 나도 있어요. 이번에 해성에서 일을 정리하고 흥성으로 돌아가려고요. 부모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이제 곁에서 모시려고 해요.”서인은 그런 토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동혁은 이미...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직감한 거겠지.’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오석준은 결국 해고되었고, 정휘현도 부하 직원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징계받았다. 그리고 안토니네 민박집은 철거되지 않기로 확정되었으며, 주변의 다른 민박들도 철거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이 소식을 들은 박민란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모든 일이 해결되자, 서인은 마심호에게 먼저 강성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뒤, 직접 차를 몰아 안토니네 가족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토니의 부모와 박민란은 서인의 차에 타고, 토니는 다른 차를 탔다. 돌아가는 길에, 오직 박민란만이 계속 떠들었다.“윤석경 씨, 솔직히 작은 안주설 같은 여자는 절대 며느리로 받아들이면 안 돼요. 헤어진 게 잘된 일이죠. 저런 애는 속이 너무 안 좋아요!”“그 애가 저도 속이려고 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서인 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이번 일은 정말 서인 씨 덕분이에요. 덕분에 우리 집도 철거되지 않게 됐고요. 그런데 서인 씨, 그 오석준이 왜 당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거예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유진이 뒤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도련님은 말 그대로 뜻하는 거죠!”박민란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가씨, 나를 속이려는 거 아니죠? 난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러면 왜 물어보셨나요?”박민란은 순간 말문이 막히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서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한 듯, 태도는 더욱 공손해졌다.“아가씨도 참 대단해요!”유진은 여전히 밝은 미소로 말했다.“칭찬은 됐고요. 제가 선생님네 난초를 꺾은 걸 용서해 주시기만 하면 돼요!”박민란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민망하게 웃었다. 토니네 집에 도착한 후, 가족들은 모두 서인에게 미안해했다.비록 주설이 가족은 아니지만, 그녀는 약혼자나 다름없었기에 그녀의 행동이 곧 가족의 잘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어차피 주설이 사진 몇 장으로 나를 모함하려고 했을 때도, 여러분은 저를 의심하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