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자리를 옮겨 계속 밥을 먹었다.이때 이정남이 도시락을 들고 와서 웃으며 물었다."아까 저기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밥 먹고 있지 않았어? 왜 또 여기로 왔어?"소희가 대리석 난간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누가 나보고 평생 구석에 틀어박혀 도시락 먹을 운명이래요. 그래서 난 다른 곳에서도 도시락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왔죠."하마터면 밥에 사레들뻔한 이정남은 얼른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그러다 한참 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려 물었다."여민이지? 그 여인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정신과에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은데?"소희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속 밥을 먹었다. 지금 소희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아예 숨기지도 않는 여민은 고슴도치마냥 소희만 보면 마구 물고 뜯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적의 주먹도 소희를 다치게 할 수 없는데, 몇 마디 험담에 소희가 상처받고 마음에 담아둘 리가 없었다.......저녁, 소씨 가문요 며칠 소 어머님의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소정인이 아내 진연을 데리고 본가로 갔다. 그리고 마침 셋째네 가족들도 있어 다들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그러던 중 소 아버님이 휴대폰 속의 뉴스를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킹이라는 이 디자이너 정말 대단해. 또 우리나라를 위해 영예를 떨쳤네."셋째 부인 하순희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그분은 국제 일류 디자이너인걸요."그러다 또 진연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소동의 작업실도 2년 넘게 열렸는데, 지금은 어때요?"진연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그럭저럭이지, 뭐."이에 하순희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래요? 그런데 왜 다들 소동의 작업실이 밑 빠진 독마냥 퍼넣은 돈만 있고 벌어들이는 돈은 없다고 그러는 거죠? 두 분이서 소동이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망했다죠?"진연의 얼굴색이 더 어두워졌다. 분명 다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묻
진연이 듣더니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알고 있다고?"하순희가 입을 삐죽거렸다."시연이가 그러는데 소희가 지금 제작팀에서 복장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대요. 전에 엄청 대박 났던 주 감독의 영화 있잖아요? 소희가 그 제작팀에도 합류했었대요. 그래서 이번 드라마 찍을 때 주 감독이 직접 소희를 찾아가 부탁했다던데."물론 하순희가 말한 내용들은 전부 다 자신의 딸과 아들이 잡담하는 걸 엿들어서 알게 된 것들이었다.진연과 소정인이 순간 멍해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그들은 소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소정인이 두 번 정도 전화를 걸었었지만 받지 않아 소희가 고의로 안 받는 줄 알고 그 후에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그런데 소희가 이렇게 잘 살고 있을 줄이야.소 아버님이 이때 가볍게 마른기침을 한 번 했다. 전에 소희를 언급하기만 하면 하찮다는 표정을 드러냈던 그가 갑자기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정인아, 소희는 필경 우리 소씨 가문의 핏줄이라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긴 한 모양이구나. 반대로 그 소동은 아무런 천부적인 재능도 없어 보이는 게, 너희들도 너무 소동을 편애하지 마. 평소에 소희에게도 좀 관심을 가지고."진연은 내키지 않은 듯 소동의 편을 들어 말했다."소동이는 어릴 적부터 총명했어요. 다만 이번에 창업하면서 작은 좌절을 겪었을 뿐이죠."소 아버님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어렸을 때 총명했다고 커서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다!"이에 진연이 변명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지만 소정인이 그녀의 팔을 당기는 바람에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그리고 소정인이 대신 웃으며 대답했다."아버지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가 평소에 확실히 소희에게 너무 소홀했네요. 앞으로 꼭 더 자주 관심을 기울일게요.""아이가 하는 걸 봐서, 만약 표현이 괜찮다면 그 아이를 소씨 가문의 가족으로 인정하고 신분을 공개해."소 아버님이 너그러운 어조로 말했다.그러자 소정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소희에 대한 아버지의 큰 기대와 당부를 꼭 그대로 전하겠습니다!""그래.
이현이 특별히 그녀를 위해 제공한 물을 조수의 손에서 받아 소희에게 건네주며 부드럽게 웃었다."날씨도 더운데 좀 쉬어요. 이 물은 스폰서 측에서 제공한 고급 물이라 엄청 달아요.""넣어둬."소희가 냉담한 표정으로 사양했다.그러자 이현이 겸연쩍게 손을 거두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여기는 너무 더운데, 내 휴게실로 가서 좀 쉬지 않을래요?""할 말이 있어?"소희가 밤하늘의 별마냥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두 눈으로 이현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물었다.이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희가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소희 씨, 킹을 알아요?""몰라."이현의 조수 나나가 소희의 태도에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전체 제작진 중 그 누구도 감히 이런 태도로 이현한테 말할 자격이 없는데 소희가 줄곧 차가운 태도를 보였으니.그래서 바로 소희한테 화를 내려고 입을 벌렸지만 이현의 눈짓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현이 여전히 부드럽게 웃었다."소희 씨, 내가 지금 공적인 일 때문에 그러는데, 우리 잠시 개인적인 원한을 한쪽에 내려놓는 건 어때요?"소희가 계속 자신의 일에 전념하며 담담하게 말했다."용건이나 말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이현의 얼굴에 순간 어색함이 스쳤다. 하지만 곧 또 더욱 친절한 웃음을 드러냈다."며칠 후에 나 자선 파티에 참가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킹에게 드레스 한 벌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소희 씨가 어떻게 중간에서 도와줄 수 없을까요? 걱정 마요, 소희 씨가 킹에게 연락만 해주면 이 일이 성사되든 안 되든, 매니저가 소희 씨에게 보수를 섭섭지 않게 챙겨줄 거예요.""나 작업실에 가 있는 시간이 길지도 않고 또 줄곧 밖에서 일하고 있어 킹과 친하지 않아. 그러니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거야.""그럼 킹 연락처를 줘도 돼요, 내가 직접 연락할게요!""없어."소희의 대답에 이현의 얼굴색이 약간 가라앉자 옆에 있던 조수 나나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소리쳤다."소희 씨, 지금 무슨 태도야 그게? 우리 현
세 시간 후에야 겨우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된 이현은 매니저한테서 걸려 온 네 통의 전화를 확인하고 다시 매니저한테 연락했다."미연 언니, 저를 찾으셨어요?"[킹과 연락이 되었는지 묻고 싶어서 전화를 했지, 그런데 네가 계속 안 받더라고. 방금 파티 측에서 연락이 왔어. 파티의 스폰서 측에서 제공해 주는 드레스가 필요하냐고. 그래서 내가 필요 없다고 했어, 네 드레스는 킹이 직접 디자인할 거라고. 그들이 듣더니 깜짝 놀란 거 있지? 그러면서 그때 너의 단독샷만 몇 장을 더 찍어주겠대.]이현이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나 아직 킹과 연락이 되지도 않았는데 왜 미리 스포 해요?"[네 친구가 북극 디자이너라고 하지 않았어? 그 친구가 있으면 쉽게 연락이 되는 거 아니야?]매니저의 가벼운 대답에 이현의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다음부터는 제발 내 허락을 받고 결정하면 안 돼요?”미연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물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자선 파티 쪽에서 이일로 홍보할지도 모르는데. 그때 가서 기자들도 틀림없이 물어 볼거야.]이때 나나가 물을 들고 다가왔다. 하지만 초조해난 이현은 단번에 물을 밀어버리고 화 나서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게요."이현이 밀쳐버린 물에 옷이 젖었지만 나나는 감히 이현한테 화도 못 내고 오히려 소희를 욕했다."다 소희 때문이야. 소희가 너를 질투하고 있어서 도와주려 하지 않은 걸 거야!"이현은 더 이상 소희에게 부탁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눈알을 몇 번 굴리고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다 연결되자마자 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하영 총감독님이신가요?"[이현 씨?]하영의 목소리는 온화하면서도 덤덤했다.[무슨 일 있어요?]"제가 이번에 자선 파티에 초대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마침 이 기회를 빌려 브랜드 홍보도 하려고 하는데 예전의 드레스는 전부 다 입어봤던 거라 새로운 드레스가 필요해요. 전에 제가 촬영할 때 입었던 그 드레스를 다시 보내줄
토요일 저녁, 자선 파티 현장.GK 고급 드레스를 입고 모습을 드러낸 이현은 아니나 다를까 모두를 놀라게 했다.이현은 레드카펫에 한참 서서 각종 포즈를 취했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제일 중간자리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이현이 아시 자선 파티에 참석했다는 소식은 실검 3위권에 올랐다.이현의 팬들은 더욱 이현이 몇 천년만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절세미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패션 블로거들도 이현의 드레스가 너무 완벽하다며 이현의 패션 감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다른 스타들의 기세는 그렇게 삽시간에 이현에게 밀리고 말았다.인터뷰할 때에도 기자들은 전부 이현 앞으로 모여들었다."이현 씨, 이 감독님과의 드라마가 언제 방영하는지에 대해 조금만 스포 해줄 수 있을까요?""이현 씨, 얼마 전 임 대표님과 동시에 병원에 나타났었잖아요. 다들 임 대표님이 이현 씨 때문에 다쳤다고 하던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이현 씨, 곧 있으면 임 대표님과 약혼한다고 들었는데, 소문입니까, 사실입니까?"전부 다 이현이 천백번 이상 받았던 질문들이라 이현은 공식적인 답변으로 빈틈없이 대처해 나갔다.그리고 마침내 누군가가 드레스에 대해 물었다."이현 씨,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가 방금 국제 패션쇼에서 대상을 받은 킹이 디자인한 거라던데, 사실입니까?"드레스 얘기가 나오자 다른 사람들도 순간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기 시작했다."킹이 직접 이현 씨를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인가요?""킹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죠?""킹은 한 번도 공식적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떤 사람인지 이현 씨께서 조금만이라도 알려줄 수 있을까요?"이현이 부드럽고 단아하게 웃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건 킹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거라 저도 여기서 대답해 드리기 불편하네요. 저희 개인적으로 친분이 꽤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이 드레스가 킹이 직접 저를 위해 디자인한 것도 맞고요."이현이 킹과
[대부분은 스킨케어 제품이야. 그리고 메이크업 브랜드도 있고. 내가 괜찮은 브랜드 몇 개 골라서 상의해 볼게. 모델료에 관해서는 무조건 장미보다 더 많이 받을 거야. 아무래도 지금 네 인기가 장미보다 더 높으니까.]이현이 웃으며 말했다."네, 언니가 알아서 해줘요. 난 언니를 믿어요."이현의 대답에 미연은 더욱 기뻤다.[그래. 너도 하루 종일 피곤했으니 일찍 쉬어라. 내일 아침 일찍 또 촬영장으로 가야잖아.]"괜찮아요. 내일은 점심에야 제 씬이 있으니까 좀 늦게 가도 돼요."[그래도 일찍 자.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지.]"네, 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휴대폰을 내려놓은 이현은 자신을 위해 술 한 잔을 따랐다.만족감과 허영심이 순간 최고조로 달했다.그리고 오늘의 기쁨을 참을 수가 없어 이현은 모든 사진 중에서 가장 예쁘게 나온 걸 한 장 골라 임구택에게 보냈다.그 후 그녀는 술잔에 든 술을 한 번에 다 마시고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연예계에서 가장 핫한 스타가 되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다.‘소희가 얻었던 것들과 얻지 못했던 것들, 내가 전부 다 가질 거야.’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잠이 든 이현은 꿈속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었고, 임구택이 갑자기 시상무대로 올라와 손에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고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모든 사람이 일어서서 그들을 위해 손뼉 치며 환호했고, 이현은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띤 채 임구택의 청혼에 승낙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다급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몸을 돌리니 임구택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주위의 사람들도 사라졌다.그러다 놀라 눈을 뜨니 그녀는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날은 이미 밝았다. 그리고 옆에 놓인 휴대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이현이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들었다."여보세요?"[현이야, 너 어디야? 지금 큰일이 났어!]미연의 초조함이 섞인 목소리가 휴대폰 맞은편에서
가장 심하게 이현을 욕하고 있는 무리 중에는 기타 스타들의 팬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이현이 많은 스타들의 기세를 짓누른 것도 모라자 기자들이 있는 말 없는 말까지 보태가면서 이현을 칭찬하고 심지어 이현을 돋보이기 위해 죄 없는 스타들까지 비하했는데도 이현이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으니 많은 스타들의 미움을 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그리고 지금은 이현의 팬들만 제자리를 지키면서 이현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반드시 팬들에게 해명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미지가 진짜 제대로 무너질 거야.]스타는 이미지가 목숨이었다. 일단 이미지가 무너지게 되면 팬들마저 등을 돌리게 될 거고, 다시 일어서기도 힘들게 될 것이다."어떻게요?"미연이 평정심을 되찾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한참 후에 대답했다.[드레스가 GK 측에서 제공해 준 거고, 확실히 킹이 디자인한 것이 맞으니 우린 팬과 기자들을 속인 적이 없다고 해명하는 거야.]이현이 듣더니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렇게 공식입장을 밝혀줘요."대략 한 시간 후, 미연은 이현의 말투로 인터넷에 퍼진 댓글과 여론을 이제야 보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드레스는 전속 모델 계약을 맺은 GK브랜드 측에서 제공해준 거고, GK 측에서도 분명 자신에게 그 드레스가 킹이 디자인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면서 공식계정에 입장을 밝혔다.이현을 욕하는 댓글이 그제야 많이 줄어들었다. 드레스는 확실히 킹이 디자인한 거라 이현이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으니까.그러나 일부 네티즌들은 드레스가 분명 킹이 특별히 이현을 위해 디자인한 것이 아닌데 왜 그런 대답을 했냐면서 이현의 허영심이 너무 과했다고 질책했다.비록 질책하는 네티즌들이 줄어들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이현의 팬들은 여전히 그녀를 지지하고 있었고 게다가 회사에서 홍보팀을 긴급 동원한 덕분에 국면은 잠시 통제되었다.하지만 이현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GK 측에서 다시 한번 이 일을 실검으로 밀어버렸다.GK도 드레스는 확실히 킹이 디자인한 게 맞지만
결국 마땅한 해결책을 얻지 못한 미연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마음이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인터넷에 접속할 엄두가 나지 않은 이현은 조용히 미연의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후 미연은 회사의 홍보팀과 긴급회를 열어 더는 아무런 공식입장도 밝히지 말자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비록 GK의 공식입장이 이현에게 불리하긴 했지만 드레스는 확실히 킹이 디자인한 것이었으니 기껏해야 이현이 킹의 인기를 이용했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을 뿐 거짓말을 했다고 모함할 수는 없을 것이다.여론을 공제하고 있는 일부 네티즌들에 대해서는 홍보팀이 적당히 간섭할 거고, 이현의 팬들도 이현을 지켜주고 있으니 금방이면 잔잔해질 것이다.그러나 어쨌든 이현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무너질 건 분명했다.밖에 기자들이 모여 있어 감히 외출도 못하게 된 이현은 결국 미연에게 한바탕 화를 냈다. 미연이 그녀와 킹을 함께 엮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GK 측에 그 드레스를 요구하지 않았을 거고,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면서.이에 미연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나도 너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 게다가 북극 작업실이 갑자기 튀어나와 공공연히 우리를 디스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마치 우리가 그들의 원수인 것마냥!]무심하게 내뱉은 미연의 말에 이현은 갑자기 소희가 생각났다.이현은 북극 작업실과 왕래가 없었으니 원한을 품을 일도 없었다. 유일하게 그녀와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희뿐이고, 소희는 북극 작업실의 직원이었다.‘설마 소희가 이간질을 해서 북극 작업실이 나를 노린 건가?’그런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니 더는 억제할 수가 없었다.이현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그녀는 소희가 아량이 넓은 사람이라 그녀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 똑같은 사람이었다니.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상대방을 물고 뜯을 생각만 하고.‘두고 봐, 이 일이 지나가기만 하면 넌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4~5일이 지나니 이현의 드레스 사건은 서서히 식기 시작했고, 마침 한
후원에는 벽에 걸린 벽등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온 마당은 은은한 황금빛에 감싸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장미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고, 애옹이는 작은 집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야옹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앞발로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고 있었다.서인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 있었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서인은 오늘 많은 술을 마셨다. 기분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유진 대신 술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유진은 조용히 다가가, 서인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그가 정말 잠든 건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넋을 잃고 말았다.서인의 짙고 선명한 눈썹은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선명했다. 책에서 묘사하는 ‘긴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그 눈썹만 봐도, 서인의 차갑고 오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눈은 길고 날렵했으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콧날은 오뚝하고 반듯해, 본래부터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턱선에는 거칠게 자란 수염이 덮여 있어, 평소보다 다섯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상관없었다.서인이 어떤 모습이든, 유진은 다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그의 수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유진은 거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서인의 턱에 닿기 직전 갑자기 서인이 눈을 번쩍 떴다.서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경계와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산길에서 적들의 포위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살기가 감돌았다.유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뒤에 있던 탁자에 걸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낡은 탁자는 이미 몇 번이나 수리를 거쳤던 터라, 유진의 몸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쾅! 순식간에 탁자가 부서졌다. 몸을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그 순간 굵은 손이 유진의 팔을 붙잡
이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고, 갑자기 가게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뛰어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생일 축하해요!”이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웃었다.“내 생일이었어?”“자기 생일도 모르다니!”임유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케이크를 그 앞에 내밀었다.“자, 촛불 끄고 소원 빌어요!”이문은 굳은 얼굴로 기계적으로 촛불을 불어 끄자 유진이 곧장 말했다.“소원도 안 빌고 그냥 끄면 어떡해요!”이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긴장해서 깜빡했어!”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긴장할 게 뭐 있어요?”그때, 오현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묻힌 생크림을 이문의 얼굴에 문질렀다. 이문은 한순간 얼어붙더니, 이내 손을 뻗어 현빈을 쫓기 시작했다.조용하고 따뜻했던 생일 파티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유진은 한가운데에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녀의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서인은 카운터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의 장난을 바라보았다.평소의 냉랭한 표정과는 달리, 이날만큼은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한 직원이 장난을 치려다 유진에게 다가갔다.그러나 유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긴 팔이 앞으로 뻗어져 나가, 상대의 손을 막아섰다.서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너한테 묻히면, 그대로 돌려줘. 괜히 억울해하지 말고.”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서인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사람들의 난장판을 피해 도망쳤다.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거의 서인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유진은 새로운 케이크를 꺼내며 작게 으쓱했다.“다행히도, 저는 항상 대비책을 준비하죠!”유진은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자르고 원래는 서인에게 주려 했지만,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살짝 묻혀 서인의 얼굴에 바르려 했다. 그러나 서인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피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서인이 보였다. 임유진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사장님!”“응.”그러나 서인은 무심한 듯 가볍게 대답했을 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유진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가게 안 손님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우선 앞치마를 두르고 일손을 거들기로 했다.주방에서 음식을 나르던 중, 이문이 유진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너랑 사장님이 산에서 가져온 산나물로 끓인 버섯 갈비탕이야. 갓 끓였으니까 맛 좀 봐.”유진은 국물에 떠 있는 버섯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깊고 진한 풍미에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와, 너무 맛있어요!”“나도 좀 먹어볼까?”오현빈이 다가와서는 직접 손으로 갈비 하나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현빈은 음미하듯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향이 진하네. 이게 진짜 자연산 버섯이지!”그는 유진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런데 오늘은 왜 저녁까지 여기 있어?”유진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오빠들이 보고 싶어서요. 마침 오늘 일찍 끝나기도 했고요.”현빈은 히죽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우리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어떤 사람 보고 싶었던 거야?”이에 유진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다 알면서 왜 물어요?”현빈은 유진에게 더욱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어제 형님 집에 갔더니, 밤늦도록 방에 불이 켜져 있더라. 아무래도 너 생각하느라 잠 못 잔 거 같은데?”유진의 볼이 붉어지며 눈을 굴렸다.“어떻게 그렇게 단정해요? 혹시 그냥 잠이 안 온 걸 수도 있잖아요.”“딱히 다른 이유가 있겠어?”현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유진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고마워요, 오빠!”“고맙긴, 우린 그저 축하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유진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결혼식 날은 사흘 동안 파티 열어드릴게요!”현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바로 그때, 서인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차가운 목
“그 토끼도 내 거잖아요? 내 물건으로 내 토끼 먹인 건데, 돈을 받을 수 없죠!”박민란은 단호하게 임유진의 손에 돈을 쥐여주었다.“그리고...”박민란은 다른 바구니에서 화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화분 속에는 난초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이 난초는 꽤 좋은 품종이에요. 기념 삼아 드릴 테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산에 놀러 오세요.”임유진은 난초를 받으며 말했다.“감사해요!”박민란은 손사래를 쳤다.“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죠.”서인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유진과 함께 강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다.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달렸다. 유진은 창문을 내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정말 잔뜩 챙겨서 돌아가네요!”서인은 어젯밤 자신이 한숨도 못 자고 뒤척였던 걸 떠올리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정작 그녀는 마냥 즐거운 얼굴이라니. 하지만, 어쨌든 이 여행도 끝났다.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차가 샤부샤부 가게 앞에 멈추자, 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뛰어나왔다.서인이 차에서 내리고, 유진과 함께 가게로 들어가려던 순간, 서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어느새 서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린 듯했다.현빈은 서인과 유진의 맞잡은 손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인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조금 어색한 듯 유진의 손을 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어서 일하러 가자.”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놀았더니 다시 일하러 가기가 싫어지네요.”서인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며칠은 단지 예외일 뿐이야.”서인의 차분한 눈빛을 마주하자, 유진의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고 있던 난초를 바라보았다.“난 애옹이 보러 갈게요. 난초도 마당에 놓고 와야 하고요.”그렇게 말한 후, 유진은 뒷마당으로 향했다.한편, 현빈과 직원들은 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현빈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서인에게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서인은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이불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몸속을 타고 도는 술기운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올라오는 듯했고, 유진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술기운을 더욱 자극했다.잠시 후,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창가에 서서 한동안 밤바람을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서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그 사이, 유진은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는 두 개의 베개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꽤 얌전해 보였다. 그러나 서인이 자리에 눕자마자, 유진이 몸을 뒤척이며 다시 그의 품으로 굴러들어 왔다.‘오늘 밤, 잠은 포기해야겠군.’다음 날 아침, 유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훤히 떠 있었는데, 침대에는 유진 혼자뿐이었고, 서인은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 내다보니, 서인과 안토니가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서인은 검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아침 햇살이 서인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으며, 평소의 거친 분위기를 감싸 안았다.서인에게서 풍기는 느슨한 여유가 사라지고, 더없이 당당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창틀에 두 팔을 올려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맑고 영롱한 유진의 눈동자에는 오직 서인만 담겨 있었고,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둘이 가까이 다가오자, 유진이 소리쳤다.“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서인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향할 때, 그 안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유진 또한 서인을 향해 눈길을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얇은 아침 안개 너머에서 조용히 마주쳤다.산속의 안개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었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방 안의 두 개의 침대를 보고는 임유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렇게 자요. 밤에 쥐라도 나오면 또 사장님을 깨우러 갈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호텔에서도 이렇게 잤잖아요.”서인은 문득 예전에 유진이 쥐를 보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네가 먼저 씻어. 난 나가서 담배 좀 피우고 올게.”그렇게 말한 뒤, 서인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유진은 두 다리를 툭 튕기며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감싼 채 웃음이 터졌다.샤워를 마친 유진이 침대에 누웠을 때쯤, 서인이 돌아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옷을 챙겨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내 샤워기의 물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물이 흐르는 소리에 유진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알 수 없는 상상이 떠오르고,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서인은 유진이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한 듯 조용히 침대로 가서 누웠고, 방의 불을 껐다.방 안이 암흑으로 변하자, 유진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자기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호텔에서도 같은 방을 썼는데, 왜 이번엔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게다가 묘하게 기대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아마도 이 방이 좁아서 서로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오늘이 서인과 함께하는 마지막 밤일지도 몰라서일까?어둠에 익숙해질수록, 달빛에 비친 방 안의 야경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산속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풀숲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숲속을 스쳐 지나가는 밤새의 날갯짓 소리, 심지어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마저 들려왔다.달빛이 창살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운치를 자아냈다. 서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유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
안토니의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서인이 입을 열었다.“받아.”토니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갔다. 이에 유진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안주설이에요?”사실 주설이 토니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눈에 보였다. 다만, 주설에게는 계산이 많을 뿐이었다.서인은 입에 들풀 한 가닥을 물고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아니잖아.”“참 관대하시네요?”임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바위 위에 앉아 두 다리를 살랑거렸다.서인은 멀리 산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안주설과 사귀는 건 토니지, 내가 아니잖아.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지.”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만약 당신이라면? 용서할 수 있어요?”서인은 깊은 눈빛을 드리우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럴 일은 없어.”“그렇겠죠.”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적어도 당신한테 해가 되는 선택은 안 할 테니까.”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유진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가, 코웃음을 쳤다.“점점 뻔뻔해지네.”유진은 서인을 흘긋 쳐다보았다. 귀끝이 살짝 뜨거워졌지만, 동시에 서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말이 점점 거리낌 없이 나오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토니가 돌아왔다. 그는 화가 난 듯하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주설이 전화를 걸어와서 자기 잘못을 인정했어요.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요.”유진이 물었다.“그래서 뭐라고 했어요?”토니는 맥주 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벌컥 들이켰다.“해성에서 일을 그만두고 흥성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그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그랬더니, 헤어지지만 않는다면 자기도 따라와서 같이 살겠대요.”서인은 덤덤하게 말했다.“잊지 못하겠으면 다시 만나는 것도 방법이지.”토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젖히고 술을 들이켰다.이야기
“이번 일은 서인 형 덕분이에요. 이 잔은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거예요!”서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울 것까지야, 그냥 네 형이 집안을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동안, 임유진도 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입안에 퍼지는 매실 향이 은은했지만, 마실 때는 생각보다 강한 알코올 향이 확 올라왔다. 이에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인은 그녀를 흘끗 바라보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조금 맛이라도 보게 해야지. 괜히 못 마시게 하면 자꾸 마시고 싶어질 테니까. 직접 마셔보고 얼마나 독한지 알면 다시는 손대지 않겠지.’동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동혁의 가족들은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윤석경은 계속해서 유진과 서인에게 반찬을 집어 주며 말했다.“만약 너희가 우리 동혁이를 만나게 되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우리 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그리고 매달 그렇게 많은 돈을 부치지 않아도 돼. 자기 몫도 좀 남겨두라고 해.”서인은 목이 메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유진은 그런 서인을 한 번 바라보고는 윤석경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서인 오빠도 동혁 오빠를 자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만날 기회가 생기면 꼭 전할게요. 동혁 오빠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윤석경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그래, 다들 잘 지내면 그걸로 된 거야!”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동혁이 돌아올 순 없지만, 저는 계속 강성에 있을 거예요. 언제든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안토니가 말을 받으며 말했다.“우리 집에는 아직 나도 있어요. 이번에 해성에서 일을 정리하고 흥성으로 돌아가려고요. 부모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이제 곁에서 모시려고 해요.”서인은 그런 토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동혁은 이미...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직감한 거겠지.’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오석준은 결국 해고되었고, 정휘현도 부하 직원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징계받았다. 그리고 안토니네 민박집은 철거되지 않기로 확정되었으며, 주변의 다른 민박들도 철거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이 소식을 들은 박민란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모든 일이 해결되자, 서인은 마심호에게 먼저 강성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뒤, 직접 차를 몰아 안토니네 가족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토니의 부모와 박민란은 서인의 차에 타고, 토니는 다른 차를 탔다. 돌아가는 길에, 오직 박민란만이 계속 떠들었다.“윤석경 씨, 솔직히 작은 안주설 같은 여자는 절대 며느리로 받아들이면 안 돼요. 헤어진 게 잘된 일이죠. 저런 애는 속이 너무 안 좋아요!”“그 애가 저도 속이려고 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서인 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이번 일은 정말 서인 씨 덕분이에요. 덕분에 우리 집도 철거되지 않게 됐고요. 그런데 서인 씨, 그 오석준이 왜 당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거예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유진이 뒤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도련님은 말 그대로 뜻하는 거죠!”박민란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가씨, 나를 속이려는 거 아니죠? 난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러면 왜 물어보셨나요?”박민란은 순간 말문이 막히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서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한 듯, 태도는 더욱 공손해졌다.“아가씨도 참 대단해요!”유진은 여전히 밝은 미소로 말했다.“칭찬은 됐고요. 제가 선생님네 난초를 꺾은 걸 용서해 주시기만 하면 돼요!”박민란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민망하게 웃었다. 토니네 집에 도착한 후, 가족들은 모두 서인에게 미안해했다.비록 주설이 가족은 아니지만, 그녀는 약혼자나 다름없었기에 그녀의 행동이 곧 가족의 잘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어차피 주설이 사진 몇 장으로 나를 모함하려고 했을 때도, 여러분은 저를 의심하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