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화제를 돌렸다. 다빈도 계속 추궁하지 않고, 태경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남자들은 정말 감정이 없는 건가? 한 여자랑 같이 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다른 건 잘 모르지만, 태경은 확실히 그랬다. 생리적으로 만족을 느끼면, 언제나 그 차분하고 도도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사랑은 자신을 위로했다.“괜찮아, 나도 손해를 보지 않았어.”다빈은 마음이 아팠다.[넌 몸은 좀 괜찮아?]사랑은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럼. 그냥 좀 피곤할 뿐이야. 이틀 쉬면 괜찮아질 거야.”다빈은 또 전화로 세영과 태경을 한바탕 욕했고, 목이 탈 때 결론을 내렸다.[남자는 필요 없어. 특히 감정이 없는 남자는 더 멀리 꺼지라고 해.]사랑은 이 말에 매우 찬성했다.“네 말이 맞아.”다빈은 사랑이 태경의 곁에서 계속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를 위해 불평했다.[너 계속 그 사람의 곁에 있을 거야?]사랑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말했다.“나도 어쩔 수 없어.”태경이 매달 남청연의 병원비를 지불했기 때문이다.다빈도 사랑의 상황을 알고 있었는데, 그냥 그녀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았다.태경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그럴 가치가 없었다.[내일 너 보러 갈게.]“그래.”...잠시 회사에 들렀다가 집에 도착한 태경은 보신탕을 들고 내려오는 윤미숙을 보았다. 거의 먹지 않은 음식을 보며, 그는 미간을 찌푸렸고, 말투가 매우 냉담했다.“그 사람 좀 먹었어요?”윤미숙은 말이 없는 태경을 무척 두려워했는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욱 무서웠다.그녀도 감히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아가씨는 보신탕만 절반 마신 것 같아요.”태경은 양복 외투를 소파에 걸치며 차가운 눈빛으로 윤미숙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이 자신의 몸을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이모님도 그렇게 할 작정인가요?”윤미숙은 태경이 화났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전전긍긍하며 황급히 설명했다.“아가씨께서 입맛이 없어셔서요. 저희더러 가져가
태경은 지금처럼 감정이 이렇게 요동친 적이 거의 없었다.그는 한참을 참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사랑의 손목을 힘껏 잡으며, 손에 핏줄이 하나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로 했다.“내가 밥 먹으라고 한 게 널 해치는 거야 뭐야?”진짜 화가 났는지, 태경의 눈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사랑은 자신의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그녀는 태경의 손을 떼어냈다.“그래요, 내 잘못이에요.”태경은 사랑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마음속의 분노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녀가 한 말은 마치 망치처럼 태경의 심장을 심하게 두드리고 있었다.그는 가만히 당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조금이라도 열을 받았다면 열 배로 돌려주어야 했다.이번에 태경은 뜻밖에도 억지로 참았다.‘됐어, 이럴 때 강 비서와 뭘 다투는 거야?’태경은 점점 냉정해지더니, 나타나지 말아야 할 감정을 억지로 억눌렀다. 그는 진정을 되찾고 담담하게 말했다.“미안.”사랑은 태경의 사과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이 남에게 사과하는 것을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도도하고 존귀한 존재였는데, 오늘 모처럼 고개를 숙였다.사랑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토하고 나니 속이 많이 편해졌다. 그녀는 세면대를 짚고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했다.태경은 사랑을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가 뒤로 피하는 것을 보고 묵묵히 손을 거두었다.“앞으로 음식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먹고 싶으면 먹고, 네 마음대로 해.”사랑은 가볍게 응답했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좀 나가줄래요?”태경은 한참 동안 생각했다.“밖에서 기다릴게.”“네.”태경이 화장실에서 나가자, 사랑은 그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거울에 비친 여자를 쳐다보며, 사랑은 생각에 잠겼다.‘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득실을 따지고, 망설이며 과감하게 결정을 하지 못하다니. 난 이러면 안 되는데.’태경의 말이 옳았다. 거래는 거래, 감정은 감정.‘나도 그 사람처럼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선을 그어야지.’눈
사랑은 태경의 이런 따분한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담요를 젖히며 일어났지만, 태경은 다시 사랑을 소파에 앉혔다.태경은 자신의 위엄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고, 석양은 그의 아름답고 매서운 미간을 곱게 비추었다.“어딜 가려고?”사랑은 억지로 일어나려 했지만, 태경의 힘이 무척 셌다. 차갑고 딱딱한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있으니, 사랑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위층에 올라가서 쉬고 싶어요.”태경은 사랑의 머리카락을 잡으며, 그녀의 살짝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위층은 너무 답답하니까 그냥 거실에서 쉬어.”사랑은 화가 났지만, 반박할 말이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이 손 가져가요.”태경은 건성으로 사과를 했고, 조금도 놓아줄 뜻이 없었다.“내가 손을 놓으면 바로 도망가겠지?”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서로의 숨결조차 애매하게 얽혀 있었다.사랑은 거짓말을 했다.“도망 안 가요.”태경은 사랑의 눈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손을 내려놓으며 더 이상 사랑을 잡지 않았다.사랑은 다시 일어나 태경과 떨어진 곳에 가서 앉았다.태경은 자신을 피하는 사랑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가볍게 웃으며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도리어 입을 열어 물었다.“저녁에 뭘 먹고 싶어?”사랑은 심심한 나머지,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고 있었다.“다 돼요.”집에 있을 때, 태경은 아주 캐주얼하게 입었는데, 헐렁한 긴 바지에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 무척 점잖아 보였다.“그럼 알아서 요리할게.”사랑은 놀라서 잠시 망설였다.“요리해주는 이모님은요?”태경은 담담하게 말했다.“휴가 줬어.”사랑은 바로 물었다.“왜요?”태경은 사랑의 멍청한 모습을 보기 좋아했다. 이런 사랑은 평소의 강 비서와 무척 달랐다. 그는 사랑의 얼굴을 주물렀다.“집에 편식하는 사람이 있잖아?”사랑은 태경이 지나치게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을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돈으로
태경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에 말이 많아졌다.“날 구해준 적이 있어.”정말 간단한 한마디였다.사랑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그랬군요.”태경은 담배에 붙을 붙였고, 불꽃이 치솟는 순간, 다시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이상해?”사랑은 아직도 연기를 해야 했기에, 뻣뻣하게 웃으며 눈시울까지 빨개졌다.“좀 놀랍긴 해요.”태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랑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얼굴이 무척 하얬고, 마치 놀란 토끼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 어렸을 때 납치를 당한 적이 있거든.”사실 어린 시절도 아니었다. 열여섯, 열일곱 살이면, 한창 사춘기였다.태경은 지금 태연하게 예전에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있었다.“대략 이주 동안 갇혀 있었는데, 난 내가 그 사람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운이 좋게도 어떻게 맞아도 견뎌낼 수 있었더라고.”그 시절을 생각하니, 태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렬하게 살아남고 싶었다. 그는 살고 싶었고, 이를 깨물어서라도 살아남으려 했다.사랑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그럼 그때 강세영 씨를 좋아하게 된 건가요?”태경은 사랑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하다가 계속 말했다.“넌 세영 아버지 알아? 강남복이라고, 돈은 좀 있지만 금방 C시로 왔기에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남에게 미움을 샀어.”태경은 여전히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어떤 기억은 희미하지만, 대부분의 화면은 아직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세영은 사실 겁이 엄청 많아. 그날 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세영이 울고 있는 것을 들었거든. 우리의 손발은 모두 묶여 있었고, 납치범은 심지어 나의 눈을 가려서 난 사실 세영의 얼굴을 보지 못했어. 솔직히 그때 세영의 울음소리를 들으니까 좀 짜증이 났거든.”‘울면 그만이지만, 끝도 없이 계속 울다니.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다만 당시의 태경은 그런 말을 할 힘이 없었다.사랑은 기억났다. 처음에 그
태경은 사랑을 바라보며, 잠시 후 입을 열었다.“미안,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미안하다고? 나한테 얼마나 미안하겠어? 그냥 해본 말이겠지.’사랑은 아파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태경에게 한 번 애원한 것은 이미 그녀의 한계였기에, 사랑은 고통을 참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 가서 일 봐요.”태경은 넥타이를 매고, 양복 외투를 꺼낸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아래층에서, 기사와 경호원은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태경은 차 열쇠를 기사에게 건네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담초동 별장으로 가.”“네, 도련님.”태경은 문득 무슨 일이 생각났는지, 집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강 비서 지금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까, 오늘 밤 잘 지켜봐요.”집사는 즉시 정신을 차렸다.[네.]태경은 전화를 끊은 다음, 더 이상 사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강사랑도 이제 성인이니, 아프면 알아서 의사를 부르겠지.’세영이 전화에서 한 말을 생각하며, 태경은 미간을 비볐고, 낮은 소리로 기사에게 좀 빨리 운전하라고 분부했다....사랑이 아파서 기절하기 진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지금 들어오라고 말할 힘조차 없었다.잠시 후, 윤미숙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아가씨, 도련님께서 아가씨 상황을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괜찮으세요?”사랑은 창백한 얼굴을 들고 말했다.“차 좀 불러줘요. 병원에 가고 싶어요.”“네, 지금 바로 갈게요.”심지어 수술을 마친 그날에도 사랑은 지금처럼 아프지 않았다. 복부의 통증은 그녀를 기절시킬 만큼 강했다.정신을 차린 후, 사랑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 옆에 엎드려 잠시 쉬고, 옷장에서 캐시미어 코트를 꺼내 외투를 걸치고 스카프를 둘렀다. 지금 그녀에게 찬바람은 독이었다. 자칫하면 감기에 걸릴 수 있었다.‘이제 나 자신 말고 누가 날 걱정해 주겠어.’사랑은 계단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집사는 사랑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그녀
세영은 무릎을 벌리며 태경의 다리에 앉았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고, 매번 말다툼을 한 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태경아, 내가 잘못했어.”세영은 눈물을 점점 많이 흘리더니, 눈물투성이가 되었다.“나한테 이러지 마.”그녀의 우는 모습은 무척 불쌍해 보였고, 목이 메어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도 무척 간드러졌다. 보는 사람 마저 마음이 아팠다.태경은 잠시 침묵하다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세영의 턱을 쥐었다. 어두운 룸 속에서, 남자는 진지하게 손수건으로 천천히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응.”‘내가 세영과 뭘 따지겠어. 그럴 필요가 없잖아.’세영은 여전히 붉은 눈시울로 소파에 놓인 태경의 핸드폰을 힐끗 보았다. 이미 통화가 끊긴 상태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계속 말했다.“나도 널 떠나기 위해 출국한 게 아니야.”태경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알아, 네가 아픈 거.”세영은 멈칫했다. 그녀는 태경이 이 일을 모르는 줄 알았다. 잠시 후, 세영은 또 울먹이며 유난히 억울했다.“약 먹고 주사 맞고, 수술받을 때도 엄청 아팠어.”태경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다른 사람이 생각났다. 그날 창백한 얼굴로 수술실에 누워있는 사랑을 떠올렸고,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가슴이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떠올렸다.“왜 날 찾아오지 않은 거야?”“내가 뭐 하러 널 찾아가? 나한테 화풀이를 하라고?” 태경은 세영을 밀어냈다. “그때 그곳에 남아서 병을 치료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야.”세영은 태경의 말을 믿기로 했다. 태경은 그녀를 속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를 달래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태경이 세영을 가장 사랑했을 때조차도, 위로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면 더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세영이 성질을 다 부리면, 다시 기회를 주어 화해하곤 했다. 소년 시절의 태경 또한 오만한 성격이었기에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가끔 세영은 방관자의 입장에서 태경의 싸늘한 태
이혼을 하든 말든 사랑은 상관없었다. 지금 이혼하나, 2년 후에 이혼하나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물론 그렇게 되면 사랑은 다른 방법을 찾아 남청연의 병원비를 벌어야 했다. 다른 모든 것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터였다.사랑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태경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만약 이혼을 원하신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녀는 언제든 계약을 앞당겨 종료하는 것에 협조할 수 있었다. 태경이 계약서의 규정에 따라 상응하는 위약금을 배상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사랑은 자신이 말을 마치고 난 후, 태경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은 무척 차가웠다.태경의 변덕스러운 기분을 줄곧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사랑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완곡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물론, 앞당겨 종료한다면, 나에도 배상금이 있는 거 맞죠?”사랑은 행여나 태경이 화가 나서 약속을 번복할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제야 태경이 왜 감정이 없는 거래를 하기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확실히 간단하고 편리했다. 앞으로도 번거로움이 없을 것이고, 그저 충분한 돈만 있으면 된다.태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랑을 쳐다보더니 냉소를 지었다.“강 비서, 나한테서 배상금을 충분히 받지 못한 거야?”이 말이 나온 순간, 사랑은 가슴이 아팠다. 정말 각박하고 매정한 남자였다.태경은 인정사정 없이 말했고, 사랑은 시간이 좀 걸려서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좀 초라해 보였는데, 생각해 보면 태경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난 이미 심태경에게서 적지 않은 배상금을 받은 것 같아. 아이를 지우면서, 천만 원 넘은 돈을 받았잖아.’사랑은 마음이 이미 마비되어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은 욕심이 많은 법이죠. 돈이 많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태경은 손으로 사랑의 턱을 잡으며, 좁고 긴 눈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담담
태경은 들으면서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난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을 많이 하면, 내가 엄청 신경 쓰이는 것 같잖아.’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차가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때 가도 정말 이렇게 소탈하게 생각할 수 있길 바라.”태경은 남자를 잘못 만나 고생한 여자들을 많이 보아왔다.그에게는 멍청한 사촌 여동생이 있었다. 재벌가의 아가씨였던 그녀는 가난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몇 년 동안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겨우 그 남자를 손에 넣었고, 각 방면으로 잘 챙겨주었지만, 결국 그 남자는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돈을 충분히 모은 후에 그녀를 차버렸다.사촌 여동생은 울면서 태경을 찾아와 애원했다. 이를 갈며 그 남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태경은 그녀의 부탁에 짜증이 났지만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어떻게 하기도 전에, 사촌 여동생은 마음이 약해져 얼른 멈추라고 했다.당시 태경은 무척 냉담하게 물었다.“대체 어쩌자는 거야?”사촌 여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이렇게 맞는 것을 보니까, 내 마음이 아프단 말이에요.”태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마음이 왜 아파?”만약 자신의 아내가 이렇게 그를 대한다면, 태경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날 놀리고, 내 감정을 짓밟는다면, 죽어도 싸지.’태경의 사촌 여동생도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하면 반드시 갚아줘야 했고, 속도 좁아서 의심이 많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남에게 거의 당한 적이 없던 재벌 집 아가씨가 남자에게 버림받는 것을 참을 수 있었다니.정신을 차리자, 태경은 사랑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럴게요.”태경은 사랑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나름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부드럽지만 자존심이 있었고, 강경하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항상 약속을 잘 지켰다.그러나 태경은 여전히 사랑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그때 가서 돈도 낭비하고, 시간도 낭비했지만 괜히 마음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