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강사랑은 손에 들린 임신 테스트기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테스트기 위에 선명한 두 개의 빨간 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화장실 칸막이 안에 앉아 언제 임신이 된 건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마 지난달쯤이었겠지.’그때 사랑은 심태경을 따라 C시로 출장을 갔었다. 마침 호텔 스위트룸에 준비된 콘돔은 떨어져 있었고, 온천에서 막 나온 사랑은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태경이 그녀를 침대에 눕혔을 때에도 사랑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를 받아들였다.달콤하면서도 짜릿한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눈을 떴을 때, 태경은 이미 말끔한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었다.사랑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그날 떠나기 전에 병원에 가서 피임약을 처방 받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사랑은 원래 기억력이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며칠은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 태경을 따라다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까다로운 상사였고, 사랑을 봐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사랑이 모든 일이 끝나고 병원에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며칠이 지나버렸다. 그녀는 그때 잠시 고민했지만, 이렇게 쉽게 임신할 리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그 일을 뒤로 미뤘다.현실로 돌아온 사랑은 조용히 임신 테스트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을 나와 찬물로 얼굴을 씻으며 진정하려 애썼다.세수를 마친 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사랑은 생각했다.‘내가 임신을 했다니... 이제 어떡하지?’...사랑이 사무실로 돌아가자, 비서실 신입 비서가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왔다.“강 비서님, 또 누가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사랑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누군데?”비서실 신입 이미현이 밖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소 거만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또 그 송예진 아가씨예요.”소문에 의하면, 얼마 전 태경과 사귀던 여자라고 했다. 하지만 두 달도 채 안 되어 차인 뒤로, 송예진은 두 번이나
고등학교 때, 태경은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시절의 사랑은 존재감이 거의 없었고, 마치 동화 이야기 속 지나가는 행인처럼 왕자와 공주의 달콤한 사랑 묵묵히 지켜보았다.언제부터 태경을 짝사랑해왔는지, 사실 사랑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태경이 결혼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3년 동안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사랑은 태경과 말 한마디밖에 한 적이 없었다.“안녕, 난 강사랑이라고 해.”그러나 태경은 사랑이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수줍어하며 자신에게 말을 건 적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사랑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실 불을 켜지 않아, 방안은 무척 어두웠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만졌다. ‘내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니. 그것도 나와 태경의 아이. 아니야, 임신 테스트기도 정확한 건 아니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사랑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할 시간이 없었기에, 내일 다른 브랜드의 테스트기를 몇 개 더 사서 검사해 보려 했다.‘임신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만약 정말 아이를 가졌다면... 그건 너무나도 골치가 아픈 일이야.’태경은 자신의 계획을 벗어난 그 어떤 일도 좋아하지 않았고, 사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태경은 매번 주의를 했지만, 유독 지난달 출장 갔을 때 콘돔을 쓰지 않았다.‘그때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지. 태경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만약 태경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직접 병원에 예약해서 수술 날짜를 잡겠지.’아무도 태경이 결정한 일을 바꿀 수 없었다.막 결혼했을 무렵, 사랑은 천진난만하게 태경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그것이 단지 자신의 환상이란 것을 깨달았다.사랑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생각하면 슬플 것이 뻔했기에, 그녀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으며 억지로 잠을 잤다.그날 저
사랑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시간 나는 대로 갈게요.”덕훈은 멋쩍게 웃었다.“건강검진은 내일로 예약했으니 꼭 병원에 가보세요.”사랑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알았어요.”그녀는 태경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제시간에 도착할게요.”...오후 내내 사무실에서 진한 커피 냄새가 퍼졌고, 사랑은 토할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서야 좀 나아졌다.퇴근하기 전 사랑은 화장실에 가서 한번 더 토했다. 그녀는 자신의 입덧이 이렇게 심할 줄 몰랐다.찬물로 세수를 하자, 가방 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사랑이 전화를 받는 순간,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화장실이에요.”[지하 차고에서 기다릴게. 오늘 저녁 본가에 가서 밥 먹어야 하니까.]“네, 대표님.”다행히 두 사람이 매달 본가에 가서 식사를 하는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박나은은 사랑이 하루 빨리 손자를 낳아주기를 기대했다.차에 올라탄 사랑은 태경의 옆자리에 앉으며 약간 긴장했다. 태경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마치 무언의 압박처럼 다가와 숨이 막힐 듯했다.차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한 거야?”사랑은 방금 토했으니 지금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그래요? 괜찮은 것 같은데.”태경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입술은 오히려 빨갛군.”이 말에 사랑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태경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강 비서, 나 몰래 바람피운 거 아니지?”무심코 한 농담이었지만, 사랑은 가슴이 떨리며 잔뜩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그럴 리가요.”태경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요즘 고생했으니, 며칠 휴가 내서 푹 쉬어.”사랑은 생각해 보았다.‘이참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면 되겠다.’그녀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잘 알고 있었기에, 태경이 예약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지 않을 것이다. 두려운 동시에 태경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좋아요.”차는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