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바로 화를 냈다.“애초에 네가 네 엄마랑 함께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나?! 내가 네 아버지 사건에 증인 해주면 그 돈을 갚겠다고 말이야! 나도 들었어. 고소가 취하되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약속대로 경찰서에 가서 증언도 했어. 증인으로 법정에 서겠다고도 했고. 너희들이 고소를 진행하든 말든 사실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네 아버지가 빌려 간 돈 1억 6천도 이젠 2억이 되었지! 계약서에 사인도 했으니 반드시 네가 갚아야 해.”그들의 말엔 문제가 없었다.하지만...“전 돈이 없어요!”윤성아는 담담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게다가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절대 주지 않을 거예요.”양지강은 이런 사람들에게 속아 도박에 손을 대게 되었고 사채업자들은 일부러 그에게 돈을 빌려주어 이자를 뜯어냈다. 그랬기에 그들이 진정한 살인자였다.“이자를 잔뜩 불러서 우리 아버지 손에서 많은 돈을 뜯어냈잖아요! 그리고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감금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도망칠 일도 없었어요. 빗속에서 뺑소니 당하는 일도 없다고요! 당신들의 행동은 전부 불법이라고요!”사채업자는 어처구니가 없음에 웃음만 내뱉었다. 그리곤 음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하하, 윤성아 씨. 뭘 그렇게 고집을 부려? 자꾸 그러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그는 손을 저어 사인을 보냈다.“잡아!”윤성아는 그렇게 사채업자들한테 붙잡히게 되었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얌전히 돈 갚을래, 아니면 널 팔아줄까? 얼굴 하나 반반하니 분명 값을 높이 쳐 받을 수 있을 거야!”남자는 손으로 윤성아의 턱을 잡고 휙휙 돌려 살펴보았다.남자의 얼굴엔 긴 흉터가 있었고 눈빛도 아주 매서웠다.“합법이든 불법이든 난 상관 안 해.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이 불법이니까!”그들은 윤성아에게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주었고 얼른 아는 사람에게 연락해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오늘 밤에 팔아버리겠다고 협박했다.윤성아는 핸드폰을 들었지만
강주환은 유단자였다.그는 빠르게 몸을 피하면서 동시에 틈 사이로 공격을 해왔고 바로 쇠파이프와 각목을 잡았다. 그리곤 그들 손에서 빼앗아 사채업자들과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그들은 아주 살벌하게 싸웠다.항상 줄곧 책상 앞에 앉아 두뇌 싸움만 해오던 남자는 흡사 학생이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학생 시절이었다고 해도 그는 이렇게 격하게 누군가와 싸운 적이 없었다.“움직이지 마!”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강주환은 이미 네댓 명이나 쓰러뜨린 뒤였다. 지금은 오직 그와 흉터남, 그리고 또 다른 흉터남의 부하 한 명이 서로 대치 중인 상태였다.강주환이 입고 있는 옷은 한눈에 봐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였고 귀티가 흘렀으며 절대 사채업자일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호진 그룹의 대표님이라는 신분을 밝힌 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윤성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빠르게 피 묻은 겉옷을 벗어들고 윤성아 앞에 다가가 몸을 숙였다.“이젠 괜찮아, 집에 가자.”윤성아는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하늘은 어느새 노을이 졌고 붉은 노을빛이 낡아빠진 창문을 통해 들어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비추었다. 노을빛에 비친 남자의 그림자는 더욱 길고 거대했다.그는 검은색 정장 바지에 흰 셔츠만 입고 있었다. 비록 셔츠에 피가 살짝씩 묻어있었지만 따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준수한 얼굴을 보니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이마 부분엔 사채업자들한테 맞았는지 부어올라 있었지만, 그의 사람을 홀리는 미모에 전혀 영향 주지 않았다.“이제 괜찮아.”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는 달리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벗은 겉옷을 윤성아의 몸에 걸쳐주며 그녀를 꽈악 껴안았다. 그리곤 그녀를 들어 올려 차에 태웠다...강주환은 윤성아를 데리고 엠파이어 가든으로 돌아왔다.돌아온 뒤에도 그는 여전히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그녀를 달랬다.“괜찮아, 이젠 안전해졌어. 괜찮아, 응?”그는 계속 그녀를 달랬다.“내가 있으니까 누구도 널
강주환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말했다.“그러니까 책임져.”윤성아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어, 어떻게 책임을 지는데요?”“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남자는 윤성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그렇게 윤성아는 다시 강주환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그의 내연녀가 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강주환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윤성아가 다시 곁으로 돌아왔기에 그는 베린 그룹과 나엽 또한 원래 상태로 돌려주었다.모든 게 그렇게 잘 흘러가는 것 같았다.윤성아는 얌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낮에는 집에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고 가끔 마트로 가서 장을 봤다. 그리고 밤이면 강주환과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것만 빼면 그녀는 강주환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강주환도 예전보다 더 그녀를 아껴주고 있었고 매일 밤 몸을 섞고 나면 항상 그녀를 다정하게 끌어안아 마치 부부의 생활을 보내는 듯한 기분이었다.그러나 두 사람의 소식을 들은 안효주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날, 안효주는 심지어 두 눈으로 직접 강주환이 엠파이어 가든으로 들어가고 밤새 그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녀는 메슥거림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생리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바로 그곳을 떠났다. 너무 일찍 했던 터라 문 연 약국은 없었고 안효주는 대충 아무 약국 앞에서 문 열기만을 기다렸다가 바로 임신테스트기를 구매했다.아침이 밝고 윤성아는 먼저 일어나 강주환에게 아침밥을 만들어 주었다.기분이 좋아 보이는 강주환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 이제 그만 집에 박혀있고 싶어요. 저도 일하고 싶어요. 다시 베린 그룹으로 돌아가도 될까요?”강주환은 바로 미간을 구겼다.“일하고 싶은 거라면 호진으로 와. 다시 원래 자리를 만들어 주지.”윤성아는 거부했다. 호진 그룹보다 그녀는 베린 그룹의 업무 분위기를 더 좋아했고 직장 동료도 그녀
방 안에 가만히 있던 윤성아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분명히 들었다. 고은희가 큰 목소리로 강주환을 부르는 것을 말이다. 물론 안효주가 임신했다는 말도 똑똑히 들었다.‘둘이 진짜 살림 차리기로 한 건가?’윤성아는 강주환과 4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장장 4년을 말이다.그녀는 강주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생각처럼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은 절대 양지에 나갈 수 없는 존재임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반년 전 강주환과 송유미가 약혼했을 때 자신은 이미 떠나야 했다고 윤성아는 생각했다. 가정 있는 남자의 사생활에 끼어든 결과는 파국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파국이란 어떤 것인지 윤성아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뻔한 건 물론이고 아이까지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주환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또다시 한데 얽히고설키고 말았다.그날 밤 강주환은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서 평소의 냉철함도 잃은 채 오로지 윤성아를 위해 사채업자와 싸워줬다. 그리고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좋다고, 그녀 외에는 아무와도 몸을 섞지 않겠다고 말았다.하지만...‘거짓말... 역시 다 거짓말이었어. 하긴 남자가 침대에서 한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만약 강주환이 말한 대로 했다면 안효주가 임신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것도 그의 아이를 말이다.“하하...”윤성아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얼굴에는 씁쓸함과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가슴은 커다란 돌에 깔린 것처럼 숨이 올라오지 않아 너무나도 괴로웠다.몸은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추웠다. 구해줄 사람 하나 없는 차가운 얼음물 말이다.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에 윤성아는 몸을 웅크리고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도 몸은 도무지 따듯해지지 않았다.한동안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있던 윤성아는 평평한 배를 쓰다듬었다. 이미 사라진 작은 생명과 다시는 생명을 품
이튿날.강주환은 안효주와 함께 운성시로 향했다. 이번에는 고은희도 함께 안효주의 친정에 방문했다. 두 집안 사람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은 그날로 사진 찍혀 뉴스로 보도되었다.운성에서 돌아온 다음 강주환은 안효주와 함께 병원에 갔다. 그리고 고은희의 요구하에 그녀는 완전히 강주환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녀의 태교를 위한 결정이라고 했다.고은희가 감시하고 있던 탓에 강주환은 이틀 연속 꼬박꼬박 집에 돌아가서 두 사람과 함께 식사했다. 그러자 그와 같은 방을 쓰고 싶었던 안효주가 잔머리를 굴리면서 말했다.“어머님, 의사가 그러는데 아이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알 건 다 안대요. 그래서 태교는 일찍 시작해야 한댔어요. 태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남편이라는데, 저랑 주환 씨는...”안효주는 서운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주환 씨는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저한테 항상 차갑게 굴어서 서운할 정도라니까요.”고은희는 곧바로 안효주의 뜻을 알아차렸다. 집안 출신이 마음에 드는 데다가 일찍이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싹싹하게 굴던 예비 며느리가 기특하게 임신까지 해줬으니, 그녀는 당연히 안효주의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효주의 손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당장 주환이한테 말해서 둘이 같은 방을 쓰게 할 테니까!”고은희의 예상과 다르게 강주환은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논리정연하게 고은희를 설득하기도 했다.“저는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인데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임신한 사람이랑 같은 방을 쓰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요?”고은희는 강주환의 말에 바로 설득되었다. 젊은이의 충동 때문에 소중한 손주가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저녁 식사가 끝난 다음 강주환은 외출 준비를 했다. 그러자 고은희가 곧바로 그를 불러 세우면서 말했다.“이 시간에 어디로 가는 거니?”강주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윤성아를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는 한시 빨리
강주환은 단호하게 안효주를 뿌리쳤다.“내가 전에도 말했지? 내 사생활에 간섭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그때는 성아가 그리운 마음에 너를 대체품으로 뒀어. 하지만 대체품이 설사 내 아내가 된다고 해도 대체품일 뿐이야. 내가 밖에서 누굴 만나든 넌 간섭할 자격이 없어. 성아를 만날 생각도, 감히 다치게 할 생각도 하지 마. 안 그러면 너는...”강주환은 위험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싸늘하게 경고했다.“송유미보다 훨씬 처참한 최후를 맛보게 될 거야. 이번 일로 어머니한테 들먹이며 나한테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더 미움만 받게 될 테니까.”말을 마친 강주환은 안효주를 밀어내고 차에 올라탔다.혼자 밖에 남은 안효주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그녀는 운성 안씨 가문에서 태어난 고귀한 재벌이었다. 근데 왜 도박꾼의 딸, 더러운 피를 타고난 여자의 대체품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 여자가 할 수 있는 걸 나라고 왜 못 하겠어? 나도 할 수 있어! 그 여자만 빠져주면 돼! 그 여자만 빠져주면 주환 씨는 나랑만 만날 거고, 나랑 주환 씨의 행복한 생활에 개입할 사람도 사라지는 거야!’...얼마 후, 호진 그룹이 M국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강주환이 일주일간 출장을 가게 되었다.강주환이 출장 간 첫날, 베린 그룹은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따낸 것을 축하하기 위해 회식을 한다고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우니, 윤성아는 집으로 돌아가 식사를 준비하거나 따로 허락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쿨하게 회식에 참석하기로 했다.지난번처럼 필름이 끊기지 않기 위해 윤성아는 무턱대고 술을 마시지 않았다. 동료들이 함께 마시자고 해도 적당히 거절하면서 빠져나갔다. 그래도 회식 막바지에 가자 약간 알딸딸해졌다.회식 자리에서 천우혁이라는 남자는 윤성아를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베린 그룹의 게임 엔지니어로 24살의 나이에 컴퓨터 천재로 평가받았다.얼굴이 꽤 잘생겼던 천우혁은 특히 미소가 가장 매력적이었다. 교회 오빠를 떠올
천우혁은 잠깐 멈칫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네.”“하지만 저는 우혁 씨한테 관심 없어요. 연애할 생각은 더욱 없고요. 그러니 저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윤성아는 깔끔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천우혁의 상처받은 얼굴은 곁에 있던 동료 비서가 다 속상할 정도였다.“괜찮아요.”천우혁은 금당 다시 밝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굳건하게 윤성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저는 성아 씨가 좋아요. 좋아하는 건 제 일이고 제 마음이니 거절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성아 씨가 거절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제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천우혁은 집요하기도 하고 열정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을 시작으로 갑작스러운 애정 공세를 시작했다.그는 매일 같이 윤성아의 자리로 가서 디저트와 마실 것을 선물했다. 윤성아뿐만 아니라 같은 사무실을 쓰는 동료 비서의 것도 있었다. 윤성아가 수도 없이 거절했는데도 그는 자기 마음이라고 우기며 멈추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대부분 사람이 다 천우혁이 윤성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원이림도 포함해서 말이다.오늘 윤성아는 결재받을 일이 있어서 대표이사실에 가게 되었다.“대표님, 결재받을 서류를 가져왔어요.”“이리 줘.”원이림은 서류를 살펴보다가 금방 사인했다. 그리고 윤성아에게 다시 건네주면서 무심한 듯 물었다.“천우혁 씨가 윤 비서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사실이야?”“네.”윤성아는 남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는... 천우혁 씨를 좋아해?”“아니요.”단호하게 머리를 흔드는 윤성아의 모습에 원이림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그러면 내가 앞으로 회사에서는 조심해 달라고 일러둘게. 계속 이러는 건 회사 분위기에도 좋지 않으니까.”“고마워요, 대표님.”윤성아는 감정 없는 눈빛으로 원이림을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다른 할 말이 있으실까요?”“없어, 이만 나가 봐.”윤성아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서
여은진은 아주 호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 베린 그룹 비서실의 실세이기도 했다.시끄러운 구경꾼들을 몰아내고 난 여은진은 윤성아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다른 사람 말은 들을 것 없어요. 성아 씨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돼요. 저는 원 대표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거든요. 자, 이젠 일하러 갈까요?”이날 결과적으로 베린 그룹의 모든 사람이 윤성아가 호진 그룹 강주환 대표의 내연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우혁도 포함해서 말이다.이러한 사실에도 천우혁이 윤성아에 대한 열정을 꺾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누군가의 내연녀일 리가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퇴근길, 천우혁은 급기야 999송이의 장미꽃과 깔끔한 정장을 무기 삼아 베린 그룹 아래에서 윤성아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성아 씨, 사랑해요!”천우혁은 높은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러고는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서 물었다.“제 여자친구가 되어줄 수 있어요?”때는 퇴근 시간이라 회사 아래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사귀어라!”“사귀어라!”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외치고 있었다.천우혁의 도를 넘은 행동에 윤성아는 슬슬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이 많을 때 거절하면 더욱 효과적일 것 같아서 입을 열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난 윤성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진동이 몇 번 더 울리고 난 후에야 수락 버튼을 눌렀다.전화 건너편에서는 남자의 불쾌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회사 앞이야. 빨리 와.”“...”윤성아는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차를 발견했다. 선팅이 되어 있는 관계로 차 안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이때 전화 건너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네가 스스로 올래? 아니면 나한테 끌려올래?”“제가 스스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윤성아는 바로 남자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