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채고 있는 요한을 안고 달래는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는 부성애가 넘치는 자상함이 그득했다.“우리 요한이 착하지? 그만 울어, 응? 우리 사내대장부 맞지? 할아버지랑 아빠가 보고 싶었어?”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아이 얼굴의 눈물을 닦아내며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계속하여 살살 달랬다.“어디 보자, 요한이 얼굴이 얼룩 고양이가 됐네? 아빠가 둥개둥개 비행기 태워줄까? 아...”원이림은 문득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요한이 그 놀이터 가고 싶구나? 거기 가서 놀고 싶어서 운 거야?”요한은 원이림의 품에 안긴 지 얼마 되지 않고부터 울음을 뚝 그쳤다. 비록 몇 달밖에 안 되는 아기지만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고, 낮에는 원승진, 원이림과 같이 노는 것에 익숙해져 오늘 그들이 보이지 않자 울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하나 지금은 거의 그치고 흑진주 같은 눈망울에 눈물만 그렁그렁한 채 원이림을 쳐다보며 끄억끄억 작게 흐느낄 뿐이다.“아유, 착해라...”원이림은 아이를 안고 별장으로 걸어갔다.“아빠랑 놀이터 가자...”그러자 원승진이 여은진을 보며 자애롭게 말을 걸어왔다.“은진아, 너 오늘 바쁜 거 아니면 우리 집에 같이 갈래? 요한이 노는 것도 보고 같이 놀아주기도 하면서 말이야. 지 아빠가 놀이터 만들어줬는데 엄청 좋아해.”여은진은 제안에 거절하지 않고 함께 별장으로 걸어들어갔다. 대문을 지나 뒷마당으로 향하며 여은진은 눈앞의 광경에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원승진이 사들인 이 별장은 앞마당에 정자와 화초가 적당하게 어우러진 2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여은진이 살고 있는 별장과 같은 구조였다. 그러나 뒷마당은 그녀의 집과 완전 딴판이었다.면적도 무려 300평이나 되는데, 기존에 살고 있던 주인은 뒷마당에 매우 큰 유리 하우스를 지었고, 그 옆에는 유기농야채와 과일들을 심는 밭을 만들었었다.전에 그 주인은 심은 채소와 과일들을 여은진한테 가져다 주기도 했고, 그녀가 아직 임신 중일 때 집주인의 요청으로 유리 하우스에 와서 거기에 심은 진귀한 품종의 화초를
딴 열매를 원이림은 세심하게 그 속의 씨를 제거하고, 전과 같이 새콤달콤한 과즙이 흘러내리는 체리를 요한의 입안에 넣어주었다.요한은 오물오물 잘도 받아먹었다. 워낙에 식탐이 있는 요한은 싫은 내색 없이 주는 대로 전부 받아먹고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유식 추가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생후 네댓 달 된 아이에게, 원이림은 너무 많이 먹게 할 생각이 없었다.몇 알만 먹이고 입에 넣어주던 동작이 멈춰버리니 요한은 그 탐스럽고 빨갛게 익은 체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군침을 입 밖으로 흘렸다.그 모습에 원이림은 픽 웃음을 터트리며 자상하고도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안 돼. 오늘은 이만큼이면 됐어. 내일에 또 먹자, 요한아.”요한은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체리를 계속 입에 가져다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원승진이 작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나자 입에 넣으려다 말고 습관적으로 손에 쥔 열매를 얌전히 바구니에 넣었다.그 후 원이림은 아이를 안고 신선한 자두와 복숭아를 몇 개 더 따고, 원승진은 밭에서 참외를 서너 개 따서 바구니 속에 함께 집어넣었다.아이와 더 놀고 싶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상황이니만큼 원승진은 아이를 일찍 돌려보내기로 하였다. 괜히 또 여은진이 기분 나빠할까 봐서였다. 그리하여 속으로는 미련이 남았지만 꾹 참고 원이림한테 얘기했다.“인제 그만 네가 요한이를 안고 집에 돌려보내거라.”“네.”원이림도 순순히 대답했다.그는 한쪽 팔에 요한이를 안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뒷마당에서 걸어 나왔다. 원승진도 뒤를 따라 같이 별장 밖에까지 나와서는 시름이 놓이질 않아 당부를 덧붙였다.“너 이 자식, 태도 똑바로 하고. 은진이가 아무리 쌀쌀맞게 대해도 넌 성질 부리면 안 된다, 알았어? 그리고 가능하면 잘 얘기해 봐. 예전처럼 요한이를 매일 여기 데려다 맡길 순 없는지. 내가 애를 돌볼 테니까 은진이 걔는 할 일 하러 가라 하고.”원이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를 안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그 뒤에서 잠
이윽고 커다란 몸집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남성의 기운이 너무 위압적으로 느껴져 여은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남자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새카만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요한이를 달라며?”“아... 네.”여은진은 그녀와 고작 반보 떨어진 원이림을 향해 팔을 뻗어 그의 품에 안겨있던 요한이를 데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원이림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삐끗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너무 놀란 여은진은 생각할 틈도 없이 그를 부축했다. 동그랗게 뜬 눈매에 걱정이 어려있었다.“왜 그래요?”“아, 별거 아니야.”다시 똑바로 선 원이림은 짙고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죽을 고비를 넘긴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허약해. 방금 다리에 쥐가 났는지 갑자기 힘이 풀려서...”진지하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여은진은 따로 의심하진 않았다.무사히 그의 품에서 요한이를 받아 안으니, 그가 떠날 준비를 하며 한마디 남겼다.“요한이가 울면서 혹시 날 찾게 되면, 언제든지 날 불러. 아직 몸이 이래서 휴양차 계속 별장에 있을 거야.”여은진은 그렇게 하겠다고도 안 하겠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아이를 안은 채 묵묵히 그가 떠나는 걸 보기만 했다.돌아서는 순간, 원이림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흑요석같이 검은 눈동자는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조금 전 반응으로 봐서 여은진도 그에 대한 감정을 다 내려놓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분명 일말의 여지는 있었다. 그게 아니면 왜 가까이 다가서니 얼굴이 붉어지고, 쓰러질 뻔하니 그런 걱정되는 눈빛을 하고 있었겠는가.그녀의 마음을 되찾을 앞으로의 계획에 자신감이 더 붙었다.이튿날 아침, 여은진은 아침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회사로 갔다.원승진은 와서 요한이랑 한참 놀아주다가 전처럼 애를 안고 그의 별장으로 갔다.줄리아와 시터 아주머니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여은진이 그리 하라고 분
여은진은 고개를 들어 줄리아와 시터 아주머니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오늘 저녁밥은 줄리아가 아니라 아주머니가 하셨나 봐요?”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줄리아가 먼저 입을 뗐다.“사모님, 맛이 다른 게 느껴져요?”“그럼요. 아주머니가 하신 거 맞죠?”여은진은 입꼬리를 올린 채 물었다.약간 긴장한 기색의 줄리아와 시터 아주머니는 눈을 서로 마주치더니 동시에 여은진의 물음에 대답했다. 다만 줄리아는 ‘아니요’하며 고개를 저었고, 시터 아주머니는 ‘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여은진이 듣고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둘은 또 한 번 눈빛을 교환하며 다시 대답했다.“네.”“아니요.”이번엔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한집에 살면서 이렇게 손발이 안 맞을 수가.여은진은 이미 어떻게 된 건지 파악했고, 약간 답답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이번에는 좀 사실대로 얘기해주셨으면 좋겠는데.”그제야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아니에요.”아주머니보다 입빠른 줄리아가 먼저 이실직고했다.“사모님, 오늘 저녁 식사는 다 원이림 씨께서 준비했어요. 여기 주방에서 직접 하셨어요. 이 반찬들과 도련님 이유식을 전부 그분이 한 거예요.”대충 감은 잡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좀 놀랬다. 그 남자 곁에서 몇 년이나 지냈지만, 줄곧 그녀가 그의 모든 일상생활을 보살펴 줬다.그가 요리도 할 줄 아는 남자였던가. 그것도 이 정도 수준급으로...원이림이 한 반찬이라면 이대로 수저를 내려놓는 게 맞지만, 처참하게 버림을 당하기엔 음식이 너무 아까웠다.여은진은 줄리아한테 새로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하진 않고, 식탁 위에 놓인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을 계속 입으로 밀어 넣었다. 요한이도 이유식을 잘 먹고 있었다.그녀는 오늘따라 배가 좀 고팠는지 밥을 두 공기나 먹고 오골계탕도 반 솥을 비워냈다.연이어 며칠, 원이림은 저녁마다 그녀와 요한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그리하여 며칠 뒤, 그가 또 요한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와서는 돌아갈
차 문이 열리고 여은진이 차에서 내리자 비서가 그녀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 보고했다.“아가씨, 지금 제일 위급한 건 시용자 중의 한 명인데, 알레르기 반응으로 호흡곤란까지 오고 있어요. 아가씨가 오기 전에 방금 병원으로 실려 가서 아직 상태가 어떤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누가 소식을 새어나가게 했는지 벌써부터 기자들이 와서 집중취재를 하겠다고 난리예요.”여은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전히 흔들림이 없는 자세였다.원이림의 비서로 예전에 크고 작은 돌발 사건들을 많이 겪은 터라 그녀도 일 처리하는 재주와 능력은 노련한 사업가 못지않았다.“우선 직원을 병원에 보내서 알레르기가 제일 심하다는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지켜보라고 해. 절대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되는 거 알지? 가족들이나 기타 시용자들은 잘 위로하고 다독여 줘. 그 밖에 기자들 쪽은 회사 홍보팀에 맡겨. 사건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말라고 해. 단, 언론에 우리 입장을 밝혀. 사건 조사 확실히 해서, 시용자와 대중들한테 꼭 명확한 답변을 할 거라고.”...여은진은 매우 조리 있고 일사불란하게 사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그리고 오자마자 즉시 실험실로 가서 조제된 향수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확인부터 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하지 못했다.여은진은 병원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원이림도 그녀와 같이 갔다.병원에 나타나자마자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물 샐 틈도 없이 에워싸고는 갖가지 취재 장비를 들이댔다.“여은진 씨, 여은진 씨가 이번에 일어난 향수 알레르기 사건의 주요 책임자라면서요? 시용자가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그 향수가 여은진 씨 본인이 직접 블렌딩한 향수라던데, 맞나요?”“여신은 초창기에 향수와 화장품 사업으로 회사를 일으켰다고 들었는데, 고 여건명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로부터 여신 그룹의 향수와 화장품 사업은 나날이 쇠퇴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여신 그룹 주가도 변동이 심하던데요.”“여은진 씨, 대체 여신 그룹
“당신 말해봐. 당신이 만들었다는 그 향수인지 뭔지 하는 거, 안에 독이 든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내 딸이 왜 갑자기 응급실로 실려와? 어이구... 흑흑... 내 딸 저렇게 죽으면 난 어떻게 살라고...”그녀는 울며불며 여은진한테 설명하라고 꽥꽥 소리 질렀다.옆에 있는 십여 명의 가족들도 하나같이 고래고래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으라고 추궁했다.원이림은 기분이 매우 언짢아 눈살을 구겼다.그는 이 열댓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기 전부터 여은진을 품 안에 꼭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실 시용자 어머니가 쥐어 당기고 잡아 뜯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그가 감당하내고 있었다. 하지만 막는다고 막았는데도 여은진이 피해를 보게 되자 그의 숨결은 차가워졌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새카만 눈으로 울면서 자꾸 엉겨 붙는 그 여자를 향해 서늘한 일침을 가했다.“진정 좀 하시죠. 우리는 여기에 따님의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습니다. 자꾸 이렇게 울고불고 잡아 끌어당긴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들...”원이림은 차가운 눈매로 기타 열몇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장희란 씨를 위해서라면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그의 기세에 눌려 다들 삽시에 조용해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희란의 어머니는 더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면서 옷을 잡고 뒤흔드는 동작도 더 과격해졌다.“아이고야... 세상에,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어! 내 딸은 응급실로 들어가 생사도 모르는데, 내 딸 저렇게 만든 놈은 큰소리나 치고 있고. 너희 여신 그룹이 아무리 돈 많고 잘났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고 무시해도 되는 거야?! 흑흑...”장희란의 어머니는 상스럽게 울부짖는데 능한 사람이었다.행패를 부리기 시작하면 아마 열 남자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무지막지했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부터 누가 그녀한테 단단히 일렀다. 제대로 패악을 부리게 되면 받을 액수가 더 많아질 거라고.“죄송합니다.”여은진은 사과하며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 줄만 알았던 기자회견 현장에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한 남자가 불시에 튀어나와 손에든 유리병 속의 내용물을 여은진이 앉아있는 쪽으로 냅다 뿌리는 것이었다.너무 돌발적인 상황이라 현장 질서를 유지하는 경호원들도 전혀 반응할 틈이 없어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하지만 여은진 곁에 앉아있던 원이림은 그 광경을 보고 신속하게 일어나 몸을 돌리며 여은진을 온몸으로 감싸안았다. 그 액체는 원이림의 검은색 정장 뒷면에 몽땅 뿌려졌고 그의 목뒤에도 조금 튀었다.코를 푹 찌르는 자극적인 냄새와, 피부에 닿자마자 지옥 불에 데는 듯한 따가운 통증이 전해졌다.‘이건 황산?!’눈이 뒤집힌다는 게 바로 이런 순간을 말하는 거구나, 원이림은 생각했다.이걸 방금 막지 못하고 여은진의 얼굴에 뿌려졌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니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아니, 그런 생각은 하는 것조차 싫었다.피바람이 휘몰아칠 듯한 그의 주변 공기는 삽시에 10도는 내려앉았을 것이다.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그였다, 최소한 지금은.몸을 돌리며 경호원한테 이미 제압당한 남자를 난도질할 것 같은 눈으로 노려봤다.“누가 시켰어?!”“시킨 사람 없어. 나 절로 그런 거야.”남자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경호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발악하며 소리를 질렀다.“너희들이 독이 있는 걸로 사람을 해쳤잖아! 그러니까 너희들도 똑같이 당하고 얼굴 망가져 보라고 그러는 건데, 뭐가 잘못됐어?!”더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원이림이 눈짓하자 경호원은 즉시 그 남자를 끌고 장내에서 나가려고 했다.한 짓과는 정반대로 겁대가리가 많은지, 도살장에 끌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는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이거 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깡패야, 너희들? 어디 데려가서 조용히 묻으려고 그러는 거야?”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그를 질질 끌고 나가기만 했다.이때 이미 정신을 차린 여은진은 일어나서 원이림한테로 급히 걸어왔다. 그의 손을
“그런데 그냥 진작에 알아채지 못한 것뿐이야. 나도 사실 사랑하고 있었는데.”그의 다정한 말은 물 흐르듯이 고백으로 이어졌다.“은진아, 사랑해. 널 이미 사랑한 지 오래야.”꽉 다잡고 있던 양손을 풀며 그는 다시 깍지를 꼈다. 그리고 절대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를 앞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오롯이 그녀만 담고 있었다.“그간 우리한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다행히 아직 안 늦었어. 은진아, 부정하고 싶어도 우린 인연이고 필연이야. 네가 날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으면, 나한테 기회만 준다면, 우린 뭐든 가능해.”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가벼운 키스로부터 시작해 점점 더 깊게 들어갔다.하지만 성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이 키스로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그녀와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지 증명하려는 사람처럼 아주 정성스럽게 입술을 겹쳐왔다.긴 키스가 끝나고 두 입술이 떨어졌다.원이림의 눈동자는 어느새 욕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멍하니 있는 여은진을 보니 입가에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한참 동안의 키스로 인해 그녀의 입술이 액체로 번들거렸다. 원이림은 그걸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며 닦아내고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전엔 네가 날 쫓아다녔잖아. 난 다리도 긴데, 네가 애 많이 먹었을 거야. 이젠 내가 널 쫓아다닐게. 내가 네 사랑을 구걸할게. 날 받아줄 때까지 계속 쫓아다닐 거야. 그게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아니면 평생이든.”그는 이미 시간이 오래 걸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저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이웃이라도 좋고, 요한이 생부 신분만이라도 괜찮았다. 그녀를 관심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기회만 준다면 성심성의껏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여 다시 사랑에 빠지게 할 것이다.“그래도 있잖아, 은진아.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말아줄래? 너 쫓아다니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하루라도 빨리 널 품에 안고 싶어. 우린 이미 십 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