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은진은 고개를 들어 줄리아와 시터 아주머니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오늘 저녁밥은 줄리아가 아니라 아주머니가 하셨나 봐요?”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줄리아가 먼저 입을 뗐다.“사모님, 맛이 다른 게 느껴져요?”“그럼요. 아주머니가 하신 거 맞죠?”여은진은 입꼬리를 올린 채 물었다.약간 긴장한 기색의 줄리아와 시터 아주머니는 눈을 서로 마주치더니 동시에 여은진의 물음에 대답했다. 다만 줄리아는 ‘아니요’하며 고개를 저었고, 시터 아주머니는 ‘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여은진이 듣고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둘은 또 한 번 눈빛을 교환하며 다시 대답했다.“네.”“아니요.”이번엔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한집에 살면서 이렇게 손발이 안 맞을 수가.여은진은 이미 어떻게 된 건지 파악했고, 약간 답답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이번에는 좀 사실대로 얘기해주셨으면 좋겠는데.”그제야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아니에요.”아주머니보다 입빠른 줄리아가 먼저 이실직고했다.“사모님, 오늘 저녁 식사는 다 원이림 씨께서 준비했어요. 여기 주방에서 직접 하셨어요. 이 반찬들과 도련님 이유식을 전부 그분이 한 거예요.”대충 감은 잡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좀 놀랬다. 그 남자 곁에서 몇 년이나 지냈지만, 줄곧 그녀가 그의 모든 일상생활을 보살펴 줬다.그가 요리도 할 줄 아는 남자였던가. 그것도 이 정도 수준급으로...원이림이 한 반찬이라면 이대로 수저를 내려놓는 게 맞지만, 처참하게 버림을 당하기엔 음식이 너무 아까웠다.여은진은 줄리아한테 새로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하진 않고, 식탁 위에 놓인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을 계속 입으로 밀어 넣었다. 요한이도 이유식을 잘 먹고 있었다.그녀는 오늘따라 배가 좀 고팠는지 밥을 두 공기나 먹고 오골계탕도 반 솥을 비워냈다.연이어 며칠, 원이림은 저녁마다 그녀와 요한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그리하여 며칠 뒤, 그가 또 요한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와서는 돌아갈
차 문이 열리고 여은진이 차에서 내리자 비서가 그녀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 보고했다.“아가씨, 지금 제일 위급한 건 시용자 중의 한 명인데, 알레르기 반응으로 호흡곤란까지 오고 있어요. 아가씨가 오기 전에 방금 병원으로 실려 가서 아직 상태가 어떤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누가 소식을 새어나가게 했는지 벌써부터 기자들이 와서 집중취재를 하겠다고 난리예요.”여은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전히 흔들림이 없는 자세였다.원이림의 비서로 예전에 크고 작은 돌발 사건들을 많이 겪은 터라 그녀도 일 처리하는 재주와 능력은 노련한 사업가 못지않았다.“우선 직원을 병원에 보내서 알레르기가 제일 심하다는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지켜보라고 해. 절대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되는 거 알지? 가족들이나 기타 시용자들은 잘 위로하고 다독여 줘. 그 밖에 기자들 쪽은 회사 홍보팀에 맡겨. 사건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말라고 해. 단, 언론에 우리 입장을 밝혀. 사건 조사 확실히 해서, 시용자와 대중들한테 꼭 명확한 답변을 할 거라고.”...여은진은 매우 조리 있고 일사불란하게 사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그리고 오자마자 즉시 실험실로 가서 조제된 향수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확인부터 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하지 못했다.여은진은 병원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원이림도 그녀와 같이 갔다.병원에 나타나자마자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물 샐 틈도 없이 에워싸고는 갖가지 취재 장비를 들이댔다.“여은진 씨, 여은진 씨가 이번에 일어난 향수 알레르기 사건의 주요 책임자라면서요? 시용자가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그 향수가 여은진 씨 본인이 직접 블렌딩한 향수라던데, 맞나요?”“여신은 초창기에 향수와 화장품 사업으로 회사를 일으켰다고 들었는데, 고 여건명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로부터 여신 그룹의 향수와 화장품 사업은 나날이 쇠퇴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여신 그룹 주가도 변동이 심하던데요.”“여은진 씨, 대체 여신 그룹
“당신 말해봐. 당신이 만들었다는 그 향수인지 뭔지 하는 거, 안에 독이 든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내 딸이 왜 갑자기 응급실로 실려와? 어이구... 흑흑... 내 딸 저렇게 죽으면 난 어떻게 살라고...”그녀는 울며불며 여은진한테 설명하라고 꽥꽥 소리 질렀다.옆에 있는 십여 명의 가족들도 하나같이 고래고래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으라고 추궁했다.원이림은 기분이 매우 언짢아 눈살을 구겼다.그는 이 열댓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기 전부터 여은진을 품 안에 꼭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실 시용자 어머니가 쥐어 당기고 잡아 뜯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그가 감당하내고 있었다. 하지만 막는다고 막았는데도 여은진이 피해를 보게 되자 그의 숨결은 차가워졌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새카만 눈으로 울면서 자꾸 엉겨 붙는 그 여자를 향해 서늘한 일침을 가했다.“진정 좀 하시죠. 우리는 여기에 따님의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습니다. 자꾸 이렇게 울고불고 잡아 끌어당긴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들...”원이림은 차가운 눈매로 기타 열몇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장희란 씨를 위해서라면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그의 기세에 눌려 다들 삽시에 조용해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희란의 어머니는 더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면서 옷을 잡고 뒤흔드는 동작도 더 과격해졌다.“아이고야... 세상에,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어! 내 딸은 응급실로 들어가 생사도 모르는데, 내 딸 저렇게 만든 놈은 큰소리나 치고 있고. 너희 여신 그룹이 아무리 돈 많고 잘났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고 무시해도 되는 거야?! 흑흑...”장희란의 어머니는 상스럽게 울부짖는데 능한 사람이었다.행패를 부리기 시작하면 아마 열 남자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무지막지했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부터 누가 그녀한테 단단히 일렀다. 제대로 패악을 부리게 되면 받을 액수가 더 많아질 거라고.“죄송합니다.”여은진은 사과하며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 줄만 알았던 기자회견 현장에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한 남자가 불시에 튀어나와 손에든 유리병 속의 내용물을 여은진이 앉아있는 쪽으로 냅다 뿌리는 것이었다.너무 돌발적인 상황이라 현장 질서를 유지하는 경호원들도 전혀 반응할 틈이 없어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하지만 여은진 곁에 앉아있던 원이림은 그 광경을 보고 신속하게 일어나 몸을 돌리며 여은진을 온몸으로 감싸안았다. 그 액체는 원이림의 검은색 정장 뒷면에 몽땅 뿌려졌고 그의 목뒤에도 조금 튀었다.코를 푹 찌르는 자극적인 냄새와, 피부에 닿자마자 지옥 불에 데는 듯한 따가운 통증이 전해졌다.‘이건 황산?!’눈이 뒤집힌다는 게 바로 이런 순간을 말하는 거구나, 원이림은 생각했다.이걸 방금 막지 못하고 여은진의 얼굴에 뿌려졌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니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아니, 그런 생각은 하는 것조차 싫었다.피바람이 휘몰아칠 듯한 그의 주변 공기는 삽시에 10도는 내려앉았을 것이다.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그였다, 최소한 지금은.몸을 돌리며 경호원한테 이미 제압당한 남자를 난도질할 것 같은 눈으로 노려봤다.“누가 시켰어?!”“시킨 사람 없어. 나 절로 그런 거야.”남자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경호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발악하며 소리를 질렀다.“너희들이 독이 있는 걸로 사람을 해쳤잖아! 그러니까 너희들도 똑같이 당하고 얼굴 망가져 보라고 그러는 건데, 뭐가 잘못됐어?!”더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원이림이 눈짓하자 경호원은 즉시 그 남자를 끌고 장내에서 나가려고 했다.한 짓과는 정반대로 겁대가리가 많은지, 도살장에 끌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는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이거 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깡패야, 너희들? 어디 데려가서 조용히 묻으려고 그러는 거야?”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그를 질질 끌고 나가기만 했다.이때 이미 정신을 차린 여은진은 일어나서 원이림한테로 급히 걸어왔다. 그의 손을
“그런데 그냥 진작에 알아채지 못한 것뿐이야. 나도 사실 사랑하고 있었는데.”그의 다정한 말은 물 흐르듯이 고백으로 이어졌다.“은진아, 사랑해. 널 이미 사랑한 지 오래야.”꽉 다잡고 있던 양손을 풀며 그는 다시 깍지를 꼈다. 그리고 절대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를 앞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오롯이 그녀만 담고 있었다.“그간 우리한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다행히 아직 안 늦었어. 은진아, 부정하고 싶어도 우린 인연이고 필연이야. 네가 날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으면, 나한테 기회만 준다면, 우린 뭐든 가능해.”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가벼운 키스로부터 시작해 점점 더 깊게 들어갔다.하지만 성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이 키스로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그녀와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지 증명하려는 사람처럼 아주 정성스럽게 입술을 겹쳐왔다.긴 키스가 끝나고 두 입술이 떨어졌다.원이림의 눈동자는 어느새 욕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멍하니 있는 여은진을 보니 입가에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한참 동안의 키스로 인해 그녀의 입술이 액체로 번들거렸다. 원이림은 그걸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며 닦아내고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전엔 네가 날 쫓아다녔잖아. 난 다리도 긴데, 네가 애 많이 먹었을 거야. 이젠 내가 널 쫓아다닐게. 내가 네 사랑을 구걸할게. 날 받아줄 때까지 계속 쫓아다닐 거야. 그게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아니면 평생이든.”그는 이미 시간이 오래 걸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저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이웃이라도 좋고, 요한이 생부 신분만이라도 괜찮았다. 그녀를 관심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기회만 준다면 성심성의껏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여 다시 사랑에 빠지게 할 것이다.“그래도 있잖아, 은진아.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말아줄래? 너 쫓아다니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하루라도 빨리 널 품에 안고 싶어. 우린 이미 십 년이
너무 오래 운 탓인지 흐느끼는 걸 금방 멈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여은진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검고 커다란 눈망울로 원망하는 듯이 여은진을 쳐다봤다.“미안해, 엄마가 미안해...”여은진은 아이한테 연신 사과하며 설명했다.“엄마가 볼 일이 있어서 어제는 못 돌아왔어. 요한이 혼자 집에 둬서 엄마한테 화났어? 앞으로 절대 이러지 않겠다고 엄마가 약속할게. 아무리 바빠도 꼭 제 시간에 돌아와서 우리 요한이랑 놀아줄게, 응?”여은진은 요한이를 안고 거실로 걸어갔다. 원이림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둘은 요한이를 한참 달래줘야 했다. 겨우 눈에서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리자 거실에 깔린 매트에서 장난감도 갖고 놀고 이리저리 기어다니기도 하며 정서가 꽤 안정돼 보였다.그러다 원이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요한은 또 가버리는 줄 알고 그가 있는 쪽으로 마구 기어가더니 조그마한 입술을 삐죽거리며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원이림은 얼른 요한을 들어 안아 온화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빠 안 가. 아빠는 주방에 요한이랑 엄마가 먹을 저녁밥 차리러 가는 거야.”말하는 동시 주방 쪽을 흘깃하며 눈짓을 하자 요한이가 알아듣는 듯했다.아이를 내려놓았는데 요한이는 바로 놀지 않고 원이림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나서야 안심한 듯 여은진과 놀이를 했다.원이림은 요리를 아주 뚝딱뚝딱 빨리 만들었다. 30분이 지나자 그는 국과 반찬 4가지, 그리고 요한이의 이유식까지 완성하여 식탁에 올렸다.세 식구가 한 식탁에 오손도손 앉아 식사를 했다.전에는 없었던 화면이었다. 이렇게 따뜻하고 화목한 한 가족 분위기라니. 마음이 설레고 무한한 상상을 하게 되는 행복한 순간이었다.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나고 원이림은 요한이와 한참을 더 놀아주다가, 아이가 그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어버리자 아기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하지만 그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여은진이 보다못해 물었다.“안 가요?”“응.”원이림은 당연한 것처럼 대답하며
이 방은 자신의 여자와 아들의 방인데 그도 물론 여기 남고 싶었다. 여자를 안고 저 침대에서 같이 잠들고 싶었다.하나 어쩔 수 없이 그는 떠나야 했다. 떠나기 전 그는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여은진을 보며 낮게 한탄했다.“대체 난 언제 이 방에서 널 안고 잘 수 있는 거야...”이튿날.아침 일찍 깬 여은진은 눈을 뜨자마자 크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아기침대를 보니 요한은 이미 데려가고 없었다.세수하고 양치를 마친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에서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아기를 안고 어르며 놀고 있었다.계단을 내려가는 기척을 듣고 남자는 고개를 들어 보더니 아이한테 말했다.“요한아, 엄마가 일어났네? 가자, 우리 엄마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원이림은 요한이를 안고 계단 입구까지 마중와서 그녀가 내려가 셋이 같이 밥 먹으러 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은진은 아침밥을 먹을 생각이 없었다.“난 배 안 고파요. 회사에 가보고 싶어요. 당신 별일 없으면 집에서 요한이 봐줘요. 나랑 회사에 같이 갈 필요 없어요.”원이림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회사 가더라도 밥 먹고 가.”“...”여은진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어서 말했다.“이따가 너한테 해줄 얘기도 있어.”그의 태도가 견결했다. 그리고 그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여은진은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같이 다이닝 룸으로 걸어갔다.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으며 여은진은 물었다.“이따 할 얘기라는 게 뭔데요?”원이림은 그제야 털어놓았다.“내가 따로 조사 맡겼던 거, 결과 나왔어. 알레르기 사건, 그거 단순한 사고 아니었어. 뒤에서 배희주가 사주한 거야.”그 말에 여은진은 미간을 좁혔다. 이번 일이 누가 주동한 것일 거라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 사람이 배희주라고? 왜? 여석진 때문에?여은진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한 원이림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여석진 때문이겠지. 배희주 씨가 워낙에 부족한 것 없이 자라서 성격이 제멋대로잖아. 누
도망을 쳐서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그날부터 그녀는 배씨 가문의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아이도 사생아로 되는 것이다. 배희주는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믿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는 꼭 그녀와 아이에 대해 책임질 거라고.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역시나 맞았다. 지금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그저 다른 여자를 품은 그의 마음을 조금씩 돌려놓는 것이다.“석진아.”배희주는 그의 이름을 가볍게 부르며 또 한 번 사실을 그에게 단단히 각인시켜 주었다.“여은진은 널 안 좋아해. 그녀 마음속에 넌 그냥 가족이고, 동생이야. 그냥 그 여자 가족으로 남으면 안 돼?”그녀는 부드럽게 설득을 이어나갔다.“내가 조사해 봤어. 원이림 그 사람 괜찮더라. 인품이나 집안이나, 여은진이 좋아할 만해. 그 남자가 예전엔 여은진을 좋아 안 했어도 지금은 좋아하고 있어. 그리고 여은진한테 아주 잘해준대. 그대로 세 식구가 같이 살면 엄청 행복할 거야... 그러니까, 넌 이제 그 일에 상관하지 마. 원이림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이참에 알아봐도 좋잖아. 그리고 그 남자가 여은진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고. 만약...”배희주는 잠깐 말을 멈추며 생각을 고르다가 계속해서 이어나갔다.“만약 원이림이 여은진을 보호할 능력이 안 된다면, 그때 다시 네가 나타나서 이 일을 해결하면 되잖아, 안 그래?”여석진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 그는 계속 배씨 가문에 남아 있으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외부의 상황을 살폈다. 배씨 가문에 있다고 해서 완전히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의 사람을 통해 일을 조사하라고 시켰고, 부득이한 상황이 나타나면 여은진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배치했다.조사하라고 시킨 사람한테서 이번 일이 배희주와 관련 있다는 소식이 오자, 여석진은 음침한 얼굴로 배희주를 찾아다녔다.그는 안색이 어둡다 못해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배희주한테 거칠게 따져 물었다.“내가 이미 여기 있잖아. 너랑 아이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