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을 해주는 원이림에 윤성아는 고마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대표님, 정말로 고마워요. 하지만 전 저 때문에 회사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게 더 싫어요. 그러면 전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마음도 편하지 않을 날이 더 많아질 거예요. 게다가 전 지금 제 아버지 일로 해결해야 할 일도 있고요. 나중에...”윤성아는 이미 마음속에 계획이 있었고 그걸 원이림에게 말해주었다.“아버지 사건이 해결되면 전 영주시를 떠나 해외로 갈 생각이에요. 공부하고 싶거든요.”원이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윤성아를 보았다.“영주시를 떠나 앞으로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거야?”윤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강주환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계속 질척대니 그녀는 영원히 영주시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만이 진정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원이림은 시선을 떨구고 있는 아름다운 윤성아를 보며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 가면 안 돼?”그녀는 4년 전 그가 빗속에서 우연히 만난 웃음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마치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맑고 순진무구한 아이였으며 백합꽃처럼 순결해 보이기도 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에 그의 마음마저 따듯해지게 만들었다.아버지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 영주시로 내려와 창업한 지 4년, 그는 매번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빗속에서 찬란하게 웃어주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녀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4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난 그녀를 보니 그는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욕망이 생겼고, 그가 30년을 살아오는 동안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사람이었다.원이림은 이런 귀한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윤성아에게 말했다.“만약 아버님 일로 그러는 거라면 휴가를 주지. 아버님 사건을 해결한 뒤에도 마음이 울적하거나 휴식이 필요한 것 같으면 장기 휴가를 내주지. 휴가 기간이 얼마나 되든 상관없어. 마음 정리가 되면, 그때 돌아와도 돼. 그러니 굳이 사직서를 낼 필요
강주환은 깊어진 두 눈으로 윤성아를 빤히 보았다.“내가 누구길 바랐는데?”“...”윤성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주환은 그녀를 무시한 채 원룸 안으로 들어갔다.자그마한 사이즈에 인테리어 마저 단조로웠고, 게다가 먼지가 여기저기 쌓여 있는 걸 보아 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집 같았다. 그는 바로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곤 이내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정말 이딴 곳에서 지내겠다고? 우리 집으로 정말 죽어도 오기 싫은 거야?”이곳은 나엽의 명의로 된 원룸이 아니었기에 강주환은 집주인을 조사하지 않았고 정말로 윤성아가 전세를 맡은 집이라고 생각했다.윤성아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그의 모습에 마음이 살짝 놓였다.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았던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완강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대표님, 이곳은 대표님을 환영하지 않아요.”“응, 그래.”남자는 화조차도 나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칠흑 같은 눈동자로 심지어 그녀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내 예상보다 빨리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엽의 집에서 나왔네? 아주 착하게 말이야.”그는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이내 윤성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틋한 눈길로 그녀는 보았다.“여기서 조금만 더 얌전했으면 더 좋겠네. 얼른 내 곁으로 돌아와. 나랑 같이 엠파이어 가든으로 가서 살자, 응?”윤성아는 거절했다. 그녀는 이미 그에게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절대 그의 곁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강주환은 눈썹 사이를 확 구겼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완강한 태도의 그녀를 보며 말했다.“고집 좀 그만 부리면 안 돼? 내 곁으로 돌아오면 너에게도 나쁠 것 없잖아. 안 그래?”그는 거대한 몸집을 굽혀 천천히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면서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꼭 그렇게 내가 움직이게 만들어야겠어? 네게 더는 갈 곳이 없게 만들어야 돌아올 거냐고.”윤성아는 그를 밀쳐냈다. 그녀는 낯선 남
그녀의 말에 안효주는 눈앞에 있는 여자가 윤성아의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윤성아의 동생이 사고를 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안효주는 아주 불쾌한 얼굴로 윤정월을 밀쳐냈다. 그리곤 차갑게 식은 눈길로 윤정월을 보며 말했다.“미쳤어요? 제가 다시 한번 말씀해 드리죠. 전 윤성아가 아니에요! 그 뻔뻔한, 다른 사람의 내연녀 노릇이나 하는 당신 딸이 아니라고요! 운성 안씨 가문이라고 알아요?”안효주는 거만한 태도로 이어서 말했다.“그 병신 같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세요. 전 안씨 가문의 딸 안효주라고요! 그쪽이 찾는 딸은 영주시 베린 그룹에 있고, 여전히 뻔뻔하게 베린 그룹의 대표님을 꼬시고 있다고요. 거기로 가면 아줌마 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질색하는 얼굴로 윤정월을 발로 차 냈다. 그리곤 이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한정판 핸드백을 든 채 윤정월의 시야에서 유유히 사라졌다.윤정월은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만 빤히 보았다. 그녀의 걸음걸이를 보니 확실히 윤성아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만난 사람이 윤성아가 아니라면, 어떻게 윤성아랑 똑같이 생길 수가 있는 거지?”그녀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리고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22년 전.윤정월은 혼전임신으로 여자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녀가 아이를 낳은 그 날, 병원에는 또 다른 출산 임박 환자로 다른 임산부가 이송되었고 엄청 강대한 그들의 기세에 병원이 떠들썩하게 되었다.윤정월은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쑥덕대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옆 침대에 있던 임산부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꺼냈다.“쯧쯧, 세상에. 듣기로는 저 집안 아내가 영주시로 친가 부모님을 만나러 왔다가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고 하던데, 분명 집안에 돈이 많겠네요! 남편의 차림새만 봐도 비싼 정장 쫙 차려입고 있잖아요. 심지어 차까지 끌고 왔다던데요? 전 자동차를 TV에서만 봤는데!”윤정월이 입원한 병실엔 총 세 개의 침대가 있었고 전부 임산부들이 누워있었다.
그녀는 이미 윤성아와 똑같이 생긴 안효주를 만났다.‘그럼 죽은 쪽이 내 딸이라는 거야?'윤정월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20여 년 동안 드디어 그녀가 부잣집에 보낸 친딸을 찾았는데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정월의 호화로운 나날의 꿈도 파사삭 사라지게 되었다.분명 안씨 가문에서 자신의 딸을 홀대해준 것이라고 여기며, 그래서 딸이 죽게 된 것으로 생각하니 안씨 가문의 사람들이 증오가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안씨 가문으로 쳐들어가 따질 수 없었던 그녀는 모든 탓을 윤성아로 돌리기로 했다.게다가 양신우가 사고를 쳤기에 급전도 필요한 상태였다. 윤정월은 윤성아가 영주시 베린 그룹에서 일하며 또 회사 대표님을 꼬시고 있다는 안효주의 말을 떠올렸다.그녀는 바로 베린 그룹으로 향했다.마침 이날, 윤성아의 인수인계를 받은 새로운 직원이 모르는 부분이 있다며 윤성아에게 연락해 회사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윤성아는 모든 일을 마친 후 베린 그룹에서 나오게 되었다.“윤성아!”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타난 윤정월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엄마,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윤정월은 분노 가득한 얼굴로 그녀의 앞에 멈춰서더니 손을 들어 윤성아의 뺨을 때렸다.“짜악!”있는 힘껏 때린 윤정월에 윤성아의 고개가 돌아가고 머리카락도 흐트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볼엔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빨갛게 부어올랐다.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딸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는데 윤정월은 기뻐하기는커녕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왜 다짜고짜 뺨부터 때리는 거지?'“불길한 년! 네 아버지를 네가 죽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젠 네 동생까지! 너 때문에 감방 가게 생겼어!”‘그리고 내 딸도 너 때문에 죽었다고!'윤성아는 안씨 가문의 딸을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딸은 이미 4년 전에 죽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윤정월을 보았다. 비록 이미 윤정월에게 한번 팔려봤지만 이렇게 쉽게 자신을 팔아버리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지!”사채업자는 바로 대답을 하였다.“전에 양지강이 우리한테서 1억 6천만 원을 빌려 간 게 맞지만, 시간도 많이 흘렀고 이자도 같이 오르거든. 그래서 갚아야 할 돈은 1억 6천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들이 불쌍하기도 하니까 2억만 받을게!”사채업자는 윤성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뭐, 계약서에 사인만 해준다면 나도 내가 본 걸 말해 줄 수 있지. 물론 필요하다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도 해주지. 그날 밤에 말이야. 내가 네 아버지를 쫓아갔을 때 확실히 어떤 차가 네 아버지를 치고 도망가는 것을 보았지.”그렇게 사채업자에게서 목격담을 들은 후 윤정월을 윤성아의 손을 확 끌어와 그들이 내민 계약서에 인장을 찍어버렸다. 그리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윤성아는 어두워진 눈길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엄마가 어떻게 제가 무조건 그 2억 원을 갚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거죠? 정말로 제가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해 그 사람들이 이상한 곳으로 팔아버릴까 걱정도 안 되시는 거예요?”윤정월은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넌 어차피 강 대표의 내연녀잖아. 강 대표가 너한테 그만한 돈도 안 주든? 게다가 이젠 베린 그룹의 대표랑도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그녀의 말에 윤성아는 주위 사람마저 얼려버릴 정도로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덧 창백해진 안색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와 대표님은 오래전부터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예요! 그리고 베린 그룹의 대표님과는 더더욱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요!”“그게 무슨 말이니?”윤정월은 매서운 눈빛으로 윤성아를 보았다.“네 말대로 정말 그렇다면, 네 동생 4억 원은 어디서 구해? 그럼 여태까지 날 속인 거니?”...그날.별빛 아파트로 온 윤정월은 양지강이 사고당한 날의 CCTV 영상을 보게 되었고 뺑소니 범인 안효주의 얼굴 또한
윤성아는 아주 확고했다.제 생각을 말한 그녀는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엄마, 이젠 이 얘기는 그만 해요. 밤이 늦었는데,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윤정월은 이내 한숨을 깊게 쉬었다.“어휴...!”그날 밤.윤정월은 윤성아 해준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한 뒤 윤성아와 함께 잤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강주환의 곁으로 돌아가라며 윤성아를 설득했지만, 윤성아는 아주 확고했다.윤정월은 점차 짜증이 치밀었다.“넌 어떻게 된 애가 이렇게 융통성이 없니! 강 대표가 없이 돈을 어떻게 마련하려고 그러니? 네가 강 대표 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씨 가문 딸을 어떻게 이길 거냐고. 강 대표가 그 여자를 싸고도는데 네게 그 여자를 이길 능력이나 있어? 아니잖아. 아버지 복수는 또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 네 동생은?”윤성아는 그만 듣고 싶었다. 느껴지는 무력감에 힘없이 말했다.“엄마, 저 피곤해요. 일단 오늘은 자요.”윤정월은 그런 그녀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다음 날 아침.일찍 일어난 윤성아는 간단히 씻은 뒤 원룸을 나가 윤정월의 세면용품을 사곤 돌아오는 길에 죽도 사 오려 했다.그녀는 아침을 간단히 먹은 뒤, 바로 윤정월과 함께 양신우를 보러 운성시로 갈 생각이었다.그러나 윤성아가 원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띵동.”윤정월은 현관문을 열자 그곳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기품이 좋은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강 대표님께서는 여기 어쩐 일로 오셨어요?”강주환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윤성아가 포기하지 않고 운성시로 넘어가 안효주를 상대로 계속 고소를 시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목격자도 찾아다닌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래서 특별히 그녀를 보러 온 것이었다.그러나 윤정월이 그에게 문을 열어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눈앞에 있는 여자가 그간 윤성아에게 했던 악독한 짓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강주환은 저절로 미간이 구겨 들어갔다. 그는 칠흑 같은 두
윤정월은 아주 확신했다.“다만 대표님껜 이미 결혼할 상대가 있었네요. 그러니 성아도 다른 사람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괜히 또 송유미 같은 사람이 나타나 우리 성아를 괴롭히면...”그녀는 일부러 말을 하다 말았다. 하지만 분명 강주환의 자기 뜻을 알아차렸을 거라 확신했다.“강 대표님, 전 이미 성아를 설득해 봤어요. 만약 정말 진심으로 한 남자를 사랑한다면 명성이 어떻게 되든 딱히 상관없을 거예요. 그냥 강 대표님이 우리 성아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그걸로 된 거예요.”윤정월은 계속 말을 이었다.“그러니 다시 성아를 강 대표님 곁에 두세요. 성아도 이젠 그런 껍데기뿐인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요. 강 대표님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성아는 분명 그걸로도 행복해할 거예요.”강주환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윤정월을 보았다.“정말로 성아가 나를 좋아할 거라 확신해? 정말로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나랑 함께 있겠다고 그랬어?”윤정월이 답했다.“네, 확신해요! 성아도 곧 돌아올 시간이네요. 일단 들어와서 기다려요. 직접 성아에게 물어보면 될 거예요. 애가 좀 고집이 셀 뿐이지 마음속엔 오직 대표님뿐이거든요.”말을 마친 윤정월은 또 강주환에게 말했다.“제 아들이 운성시에 혼자 남겨져서 돈도 구했겠다 얼른 가봐야겠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윤정월은 돈을 챙긴 채 나가버렸다.한참 지나고, 윤성아는 물건을 바리바리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강주환에 그녀는 어리둥절했다.“네가 나를 좋아한다고?”남자의 다짜고짜 물었다.“네?”윤성아는 더욱 어안이 벙벙했다.‘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강주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뻗으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깊은 두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네 엄마가 그러더군. 네가 날 좋아한다고. 모든 걸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나랑 같이 있고 싶다고.”윤성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싸늘한 눈길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엄마가 헛소리 한 거예요. 믿지 마요. 그런 일 없
지금 상황에 아무리 그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해도 쉽게 그의 심기를 건드릴 것 같았다.창밖엔 노을이 지고 있었고 붉은 태양이 특히나 더 아름다워 보였다.강주환은 잠에서 깨어난 여자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하늘에 걸린 노을보다 더 아름다워 그의 시선을 자꾸 빼앗았다.“이렇게 얌전하게 굴면 얼마나 좋아.”그의 큰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더니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계속 이렇게 얌전하게 내 말만 듣는다면, 나도 앞으로 계속 너만 아껴줄 거야.”윤성아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강주환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일어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배고파요?”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리곤 이내 몸을 일으키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제가 만들어 줄게요.”강주환이 말했다.“난 아무거나.”그는 비록 편식했지만, 윤성아와 함께 4년간 생활을 한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솜씨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오늘 이미 그녀를 힘들게 했으니 그냥 대충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면 되었다.“그래요.”윤성아는 실크로 된 잠옷을 입었고 겉옷을 찾아 잠옷 위에 걸쳤다.주방으로 들어간 윤성아는 냉장고에서 식자재를 꺼냈고 빠르게 네 가지 음식과 국을 만들어냈다.두 사람은 다시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누구도 말 꺼내는 사람 없이 그저 조용하게 묵묵히 음식을 먹어치웠다.식사를 마친 후, 윤성아는 고개를 들고 맞은 편에 앉은 남자를 보았고 다시 4억에 관해 얘기를 꺼냈다.잘 흘러가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해졌다.강주환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네 생각엔? 네 가치가 얼마인 것 같아? 4억으로 언제까지 내 곁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은데?”윤성아가 답했다.“두 달이요.”그녀의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두 달만 지나면, 그땐 대표님이 저를 놓아줬으면 좋겠어요.”강주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조롱의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그녀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