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묻고 있잖아요.”강서연의 말투가 거세졌다.“누가 회의장을 이렇게 세팅했냐고요!”김유정은 재미난 구경을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전 모릅니다.”“모르면 매니저님이 직접 내 명찰을 정확한 자리에 가져다 놓아요.”강서연의 목소리가 힘차고 쩌렁쩌렁했으며 또 아주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자리에 있던 영국인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도 단번에 알아챘다.김유정은 이 상황이 창피했지만 여전히 억지를 부렸다.“이사님, 회의 시간이 이미 다 지났어요. 계속 이깟 작은 일을 물고 늘어질 건가요? 영국 사람들은 시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렇게 질질 끄시면 이사님이 손을 잡기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맞아요. 영국 사람들은 시간을 중요시하고 그 사람들만의 규정이 있죠.”강서연이 싸늘하게 웃었다.“하지만 여긴 김중 그룹이고 내가 책임진 프로젝트예요. 내가 진행하는 회의에서 내가 정한 규정이 바로 지켜야 할 규정이에요!”표준적인 영어에 발음도 아주 정확했다. 목소리가 그리 높진 않았지만 현장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조금 전까지 짜증 내던 대표들도 다시 묵묵히 자리로 돌아갔다.김유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매니저님.”이효연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경멸 섞인 눈빛을 보냈다.“사모님이 시키신 대로 안 하고 뭐 해요? 얼른 명찰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요.”김유정은 화들짝 놀란 나머지 온몸이 굳으면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매니저님은 부하 직원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이런 중요한 회의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했어요. 아무래도 매니저 자리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이... 이사님.”“내일부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필요 없어요.”강서연이 차갑게 웃었다.김유정은 창피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녀가 따지기도 전에 강서연이 손을 흔들자 문밖에 있던 경호원들이 바로 들어와 김유정을 끌어냈다.“언니, 언니
김유정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또 타깃을 곽보미에게로 옮겼다.이제 더는 강서연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곽보미를 귀찮게 구는 바람에 곽보미는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그날은 주말이었다. 마침 햇볕도 따스하여 강서연은 정원의 의자에 기댄 채 햇볕 쪼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집사가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곽보미가 헝클어진 머리와 다크서클이 짙은 모습으로 뛰어 들어왔다.“으악. 서연 씨, 나 좀 살려줘요. 제발 그 여우 같은 여자를 처리해 주면 안 돼요? 제발요.”강서연이 피식 웃더니 곽보미를 끌어당겨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요 며칠 김유정이 곽보미에게 보낸 문자와 메일을 보았다.몸과 마음이 힐링 되는 문구 말고도 사진도 수두룩했다. 섹시한 사진, 민낯 사진, 투명 메이크업 사진, 진한 메이크업 사진, 일상 사진 등을 여러 각도로 찍어서 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포스러운 건 어젯밤 한밤중에 보낸 얼굴 사진이었다.“이젠 내가 매일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겠어요?”곽보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여주인공 자리를 달라고 맨날 보채요. 이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죠?”강서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차단하면 되잖아요.”“차단 안 해봤을 줄 알아요?”곽보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내가 차단할 때마다 사무실로 찾아온다니까요. 이러니 내가 연수나 할 수 있겠어요? 수업도 제대로 못 듣고 편집도 못 해요.”강서연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안아주었다.따지고 보면 이 일은 강서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강서연이 김유정의 일자리를 자르지 않았더라면 김유정도 맨날 곽보미를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더는 못 버티겠어요.”곽보미가 의자를 세게 내리쳤다.천재 감독 곽보미는 그동안 수많은 장면을 연출했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침착함을 잃는 법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유
강서연은 곽보미의 어깨를 잡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최연준은 경찰을 따라 지하 1층으로 향했고, 두 사람은 천천히 뒤를 따라갔는데 발에 족쇄가 채워진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경찰이 한숨을 쉬며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임산부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서연을 돌아봤다.“여기서 기다려, 내가 금방 나올게.”곽보미는 안색이 어둡고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그 계단을 내려가니 지하 1층의 음침하고 좁은 공간이 나왔다.경찰이 문을 열자 안에는 흰 천을 덮고 누워있는 남자였는데 음침한 불빛이 비쳐 등골이 서늘해졌다.곽보미는 문에 기대어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최연준 씨.”경찰이 손으로 가리켰다.“신원을 확인해 주세요.”최연준은 억지로 정신을 버티며 천천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고 손을 살짝 떨면서 그 사람의 얼굴에 덮인 흰 천을 걷어 올렸다.유찬혁이 아니다!그의 심장은 뭔가에 세게 맞은 것처럼 갑자기 심하게 뛰었고 손발에 힘이 빠져 등 뒤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다시 환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아니에요.”경찰은 끄덕이며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그럼 제 친구는...”“최연준 씨, 걱정하지 마세요.”경찰이 공손하게 말했다.“경력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수색하겠습니다.”곽보미은 담벼락에 기대어 주저앉아 크게 숨을 헐떡이더니 삽시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최연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말했다.“먼저 돌아가서 쉬고 있으세요. 찬혁이는 무사할 거예요.”“지금까지 왜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요!”곽보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시간을 끌수록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최연준은 한숨을 쉬고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유찬혁의 능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으로 그는 핸드폰과 여권을 모두 빼앗긴다 해도 어떻게든 그들에게 소식을 전할 방
유찬혁은 감히 크게 움직이지 못하여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보았는데 몸에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고 흰 셔츠에는 피와 땀으로 흥건하여 볼품이 없었다.상처를 싸맸는데 수법은 매우 허술했다.유찬혁은 고개를 들어 소녀를 보고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당신이 저를 구했어요?”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웃었는데 마치 유럽 교회 벽화에 그려진 천사 같았다.“제가 구해줬다고 하면 은혜를 갚을 건가요?”유찬혁은 열이 나서 머리가 아직 좀 띵해 잠시 멈칫했다.그는 텅 빈 머릿속에서 다시 일어난 일을 정리했다.곽보미를 찾으러 맨체스터에 왔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불법 택시에 올라탔다. 그는 몇 번 와본 적이 없어 맨체스터의 길을 잘 몰랐고 차가 골목으로 들어가자 운전기사는 험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한패를 불렀다.그 뒤로...그는 칼에 찔렸다.그러다 의식을 잃었고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여기요.”소녀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녀는 유찬혁에게 약 두 알과 물 한 컵을 건네며 빨리 삼키라고 했다.“해열제와 소염제예요.”소녀는 설명했다.“제가 비싼 것을 살 수 없어 이거는 가장 싼 것이에요.”약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 유찬혁은 가볍게 웃었다.그는 약을 먹고 소녀를 보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써니.”써니는 햇빛이라는 뜻이다.이런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미소도 이렇게 깨끗하니 써니에 어울린다.“당신 이름이 뭐예요?”소녀는 그에게 다가와서 물었다.“외국인인데... 어디서 왔어요?”“제 이름은 유찬혁이고 영어 이름은 없어요. 오성에서 왔는데 혹시 그곳을 들어보셨어요?”유찬혁이 웃으며 대답했다.“오성 출신이에요?”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영어는 순식간에 정통 한국어로 바뀌었고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한 줄로 드러났다.“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잖아요. 영어를 그렇게 오래 쓸 필요도 없고요!”“써니 씨는...”“저는 반 영국인이에요.”써니는 미소를 지었다.유찬혁은 고개를 끄덕였
며칠째 유찬혁의 소식이 없자 최연준은 겉으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강서연은 그의 마음속이 얼마나 애타는지 알고 있었다.이 남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그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주는 것을 원치 않아 강서연은 어떻게 그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그녀 앞에서 최연준은 항상 상냥하게 웃는 좋은 남편이다.다만 강서연은 그의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고, 그의 웃는 모습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나석진이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남양으로 휴가를 가는 김에 그녀의 부모님을 방문했다고 말했다.강서연은 담담하게 응했고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무슨 일이야?”나석진이 히죽히죽 웃었다.“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혹시 산전 우울증이야?”“무슨 소리예요!”강서연이 요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이야기해 주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내일 영국으로 갈게.”강서연은 깜짝 놀랐다.“보미 씨 때문이면 지금은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지금 상황이 특수하기 때문에 반드시 보미 씨 곁에 있어야 해!”나석진은 더없이 확고하게 말했다.“하지만...”“내가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해야 한다고? 서연아, 나를 과소평가하지 마. 내가 그 유찬혁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런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는 그래도 조금은 힘을 보태주고 싶어.”강서연이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할 건데요?”“몇 사람을 데리고 갈 거야. 그 사람들은 남양군의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몸에 지니고 있는 장비도 최신형이어서 사람을 찾는 것에 대해 더 유리할 거야. 그리고 약도 챙겨갈게. 칼에 찔려서 좋은 치료를 받지 못하면 후유증이 남을지도 몰라. 윤제 그룹의 약은 효과가 있을 거야!”강서연은 너무 감동해서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 말도 하지 마!”나석진은 활달하게 웃었다.“그 사람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유찬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곽보미를 위해서 그녀를 도와 이 고비를 넘길 것이다.그는 유찬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곽보미는 평생 안심할 수 없다는 것
유찬혁은 눈을 뜨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잡혀 일어났다.상처가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에 여태껏 온화하고 점잖았던 그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미안해요! 미안해요!”서지현이 연거푸 사과를 했다.“제가 좋은 약을 찾아서 너무 흥분한 바람에 찬혁 오빠 몸에 상처가 있다는 걸 잊어버렸어요.”유찬혁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상처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말은 요즈음 벌써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그는 자신에게 자문해 보았다. 변호사로서 한 번도 부정한 돈을 받은 적이 없고, 매번 정의를 위해 일했지, 한 번도 양심에 찔린 일을 한 적이 없다!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원수를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한다니!유찬혁은 쓴웃음을 지었고 소녀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제가 누구를 돌본 적이 없어요.”서지현은 중얼거리며 물과 약을 건네주었다.“찬혁 오빠가 내 첫 남자예요!”“풉...”유찬혁이 방금 마신 물이 모두 뿜어져 나왔다.서지현이 황급히 수건으로 닦으며 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내 말이 틀렸어요? 찬혁 오빠가 처음이고, 그리고 또 남자잖아요! 그래서...”“이보세요, 한국어는 이렇게 쓰는 게 아니에요!”유찬혁은 어쩔 바를 몰라 했다.서지현은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영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많은 말들이 어설프게 나온다.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기 시작했다.유찬혁이 약을 먹는 것을 보고 서지현은 기뻐했다.“이것은 집시의 약인데 집시를 들어봤어요?”“네, 알아요.”“그 사람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상처를 입는 것도 다반사이기 때문에 어떤 칼부림, 총상, 타박상에 대처하는 데 특히 뛰어나요! 찬혁 오빠의 이 정도 상처는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유찬혁이 웃었다.“아무튼 나는 지금 가망이 없지만 지현 씨 말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수 밖에 없어요.”“네?”서지현은 이해하지 못했다.“당신은 지금 아직 살아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유찬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마도 약을 먹은 탓인지 그
유찬혁은 그녀의 수입이 어디에서 오는지 약간 궁금해했다.서지현은 그를 돌아보고는 매우 경계하며 조용히 작은 상자를 거두었다.“걱정하지 마요. 그 돈을 건드릴 생각은 전혀 없어요.”유찬혁은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챘다.“그런데 저를 도와 제 친구들에게 연락해 줄 수 있어요? 더 많은 돈을 줄 수 있어요...”“안 돼요!”서지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지현 씨, 부탁할게요!”“꿈도 꾸지 마요! 나는 절대 경찰에 신고 안 해요!”그녀의 예쁜 얼굴에는 노여워하는 표정이 어려 있었고 그를 살뜰히 보살펴 주던 소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유찬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에 신고하지 않아요. 친구에게만 연락하는 것뿐인데...”“찬혁 오빠 친구는 분명히 경찰을 부를 거예요!”서지현이 소리쳤다.“어쨌든... 내 인생을 망친다면 나도 찬혁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그를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문을 쾅 하고 닫았다.유찬혁은 또 익숙한 문 잠그는 소리를 들었고 그는 당황하여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를 막으려고 했지만 몸 상태가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곧추세우고 아픔을 억누르며 외쳤다.“서지현!”문밖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그는 매우 화가 나서 침대를 세게 두드렸다.그런 무력감이 마음을 가득 채우자 그는 침대에 누워 곰팡이가 핀 천장을 보며 탄식했다....남양에서 온 전용기가 맨체스터 공항에 순조롭게 착륙했다.나석진은 여러 명의 호송 아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로비에서 기다리는 곽보미가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영국으로 달려온 것이었는데 그녀는 이미 초췌해졌고 두 개의 깊게 파인 눈꺼풀과 짙은 다크서클은 물론 살도 많이 빠져 몰라볼 정도로 말랐다.그리고 그녀는 복주머니를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나석진은 그것을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한순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곽보미가 그를 향해 억지웃음을 짓자 나석진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정말 웃기 싫으면 내 어깨에 기대서 울어도 돼요.
곽보미는 순간 당황해서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떨어뜨렸다.조급해할까?그녀는 정말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그녀는 그저 자신이 요즘 갈팡질팡하며 허둥대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살면서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그 복주머니만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찬혁이 그녀에게 준 것이고 위에는 그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다.그때 복주머니를 건네줄 때 행운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는데 지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운을 바쳐 그의 평안을 바꾸려 했다.곽보미는 머리가 복잡해졌고 입을 벌렸지만 한마디도 안 나왔다.“나는...”“알고 있어요!”나석진은 태연하게 웃었다.“당연히 조급하겠죠! 내가 없어진다면 누가 남주를 맡을 수 있겠어요?”곽보미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후 말을 했다.“미안해요.”나석진은 잠깐 멈칫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계속 자르고 있었다.“나는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니 나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뜬금없이 왜 저에게 말하는 거예요?”그를 보는 곽보미의 눈에는 감사의 빛이 가득했다.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녀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아직 찬혁이를 잊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그녀는 복주머니를 꽉 쥐었다.“요즘 눈만 감으면 전부 학창 시절 때의 화면이에요.”“음...”나석진이 웃었다.“집착이네요!”곽보미도 같이 웃어줬다.“그럼 유찬혁 씨가 나보다 어디가 더 좋은지 말해 줄래요?”곽보미는 이 문제를 대답할 수 없었다.사람의 감정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특히 그녀처럼 집착이 심한 사람은 한 사람을 좋아하면 평생 바뀌지 않을 것이다.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그녀는 그의 흰 셔츠에 햇볕 냄새가 나는 것이 좋았고, 그가 캠퍼스 길에서 그녀를 만날 때마다 스쳐 지나가는 그 웃음이 좋았고, 토론대회에서 그의 패기가 좋았고, 그가 인내성 있게 그녀에게 문제를 설명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