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곽보미의 어깨를 잡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최연준은 경찰을 따라 지하 1층으로 향했고, 두 사람은 천천히 뒤를 따라갔는데 발에 족쇄가 채워진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경찰이 한숨을 쉬며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임산부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서연을 돌아봤다.“여기서 기다려, 내가 금방 나올게.”곽보미는 안색이 어둡고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그 계단을 내려가니 지하 1층의 음침하고 좁은 공간이 나왔다.경찰이 문을 열자 안에는 흰 천을 덮고 누워있는 남자였는데 음침한 불빛이 비쳐 등골이 서늘해졌다.곽보미는 문에 기대어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최연준 씨.”경찰이 손으로 가리켰다.“신원을 확인해 주세요.”최연준은 억지로 정신을 버티며 천천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고 손을 살짝 떨면서 그 사람의 얼굴에 덮인 흰 천을 걷어 올렸다.유찬혁이 아니다!그의 심장은 뭔가에 세게 맞은 것처럼 갑자기 심하게 뛰었고 손발에 힘이 빠져 등 뒤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다시 환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아니에요.”경찰은 끄덕이며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그럼 제 친구는...”“최연준 씨, 걱정하지 마세요.”경찰이 공손하게 말했다.“경력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수색하겠습니다.”곽보미은 담벼락에 기대어 주저앉아 크게 숨을 헐떡이더니 삽시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최연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말했다.“먼저 돌아가서 쉬고 있으세요. 찬혁이는 무사할 거예요.”“지금까지 왜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요!”곽보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시간을 끌수록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최연준은 한숨을 쉬고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유찬혁의 능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으로 그는 핸드폰과 여권을 모두 빼앗긴다 해도 어떻게든 그들에게 소식을 전할 방
유찬혁은 감히 크게 움직이지 못하여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보았는데 몸에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고 흰 셔츠에는 피와 땀으로 흥건하여 볼품이 없었다.상처를 싸맸는데 수법은 매우 허술했다.유찬혁은 고개를 들어 소녀를 보고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당신이 저를 구했어요?”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웃었는데 마치 유럽 교회 벽화에 그려진 천사 같았다.“제가 구해줬다고 하면 은혜를 갚을 건가요?”유찬혁은 열이 나서 머리가 아직 좀 띵해 잠시 멈칫했다.그는 텅 빈 머릿속에서 다시 일어난 일을 정리했다.곽보미를 찾으러 맨체스터에 왔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불법 택시에 올라탔다. 그는 몇 번 와본 적이 없어 맨체스터의 길을 잘 몰랐고 차가 골목으로 들어가자 운전기사는 험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한패를 불렀다.그 뒤로...그는 칼에 찔렸다.그러다 의식을 잃었고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여기요.”소녀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녀는 유찬혁에게 약 두 알과 물 한 컵을 건네며 빨리 삼키라고 했다.“해열제와 소염제예요.”소녀는 설명했다.“제가 비싼 것을 살 수 없어 이거는 가장 싼 것이에요.”약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 유찬혁은 가볍게 웃었다.그는 약을 먹고 소녀를 보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써니.”써니는 햇빛이라는 뜻이다.이런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미소도 이렇게 깨끗하니 써니에 어울린다.“당신 이름이 뭐예요?”소녀는 그에게 다가와서 물었다.“외국인인데... 어디서 왔어요?”“제 이름은 유찬혁이고 영어 이름은 없어요. 오성에서 왔는데 혹시 그곳을 들어보셨어요?”유찬혁이 웃으며 대답했다.“오성 출신이에요?”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영어는 순식간에 정통 한국어로 바뀌었고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한 줄로 드러났다.“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잖아요. 영어를 그렇게 오래 쓸 필요도 없고요!”“써니 씨는...”“저는 반 영국인이에요.”써니는 미소를 지었다.유찬혁은 고개를 끄덕였
며칠째 유찬혁의 소식이 없자 최연준은 겉으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강서연은 그의 마음속이 얼마나 애타는지 알고 있었다.이 남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그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주는 것을 원치 않아 강서연은 어떻게 그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그녀 앞에서 최연준은 항상 상냥하게 웃는 좋은 남편이다.다만 강서연은 그의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고, 그의 웃는 모습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나석진이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남양으로 휴가를 가는 김에 그녀의 부모님을 방문했다고 말했다.강서연은 담담하게 응했고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무슨 일이야?”나석진이 히죽히죽 웃었다.“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혹시 산전 우울증이야?”“무슨 소리예요!”강서연이 요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이야기해 주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내일 영국으로 갈게.”강서연은 깜짝 놀랐다.“보미 씨 때문이면 지금은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지금 상황이 특수하기 때문에 반드시 보미 씨 곁에 있어야 해!”나석진은 더없이 확고하게 말했다.“하지만...”“내가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해야 한다고? 서연아, 나를 과소평가하지 마. 내가 그 유찬혁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런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는 그래도 조금은 힘을 보태주고 싶어.”강서연이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할 건데요?”“몇 사람을 데리고 갈 거야. 그 사람들은 남양군의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몸에 지니고 있는 장비도 최신형이어서 사람을 찾는 것에 대해 더 유리할 거야. 그리고 약도 챙겨갈게. 칼에 찔려서 좋은 치료를 받지 못하면 후유증이 남을지도 몰라. 윤제 그룹의 약은 효과가 있을 거야!”강서연은 너무 감동해서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 말도 하지 마!”나석진은 활달하게 웃었다.“그 사람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유찬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곽보미를 위해서 그녀를 도와 이 고비를 넘길 것이다.그는 유찬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곽보미는 평생 안심할 수 없다는 것
유찬혁은 눈을 뜨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잡혀 일어났다.상처가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에 여태껏 온화하고 점잖았던 그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미안해요! 미안해요!”서지현이 연거푸 사과를 했다.“제가 좋은 약을 찾아서 너무 흥분한 바람에 찬혁 오빠 몸에 상처가 있다는 걸 잊어버렸어요.”유찬혁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상처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말은 요즈음 벌써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그는 자신에게 자문해 보았다. 변호사로서 한 번도 부정한 돈을 받은 적이 없고, 매번 정의를 위해 일했지, 한 번도 양심에 찔린 일을 한 적이 없다!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원수를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한다니!유찬혁은 쓴웃음을 지었고 소녀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제가 누구를 돌본 적이 없어요.”서지현은 중얼거리며 물과 약을 건네주었다.“찬혁 오빠가 내 첫 남자예요!”“풉...”유찬혁이 방금 마신 물이 모두 뿜어져 나왔다.서지현이 황급히 수건으로 닦으며 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내 말이 틀렸어요? 찬혁 오빠가 처음이고, 그리고 또 남자잖아요! 그래서...”“이보세요, 한국어는 이렇게 쓰는 게 아니에요!”유찬혁은 어쩔 바를 몰라 했다.서지현은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영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많은 말들이 어설프게 나온다.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기 시작했다.유찬혁이 약을 먹는 것을 보고 서지현은 기뻐했다.“이것은 집시의 약인데 집시를 들어봤어요?”“네, 알아요.”“그 사람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상처를 입는 것도 다반사이기 때문에 어떤 칼부림, 총상, 타박상에 대처하는 데 특히 뛰어나요! 찬혁 오빠의 이 정도 상처는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유찬혁이 웃었다.“아무튼 나는 지금 가망이 없지만 지현 씨 말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수 밖에 없어요.”“네?”서지현은 이해하지 못했다.“당신은 지금 아직 살아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유찬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마도 약을 먹은 탓인지 그
유찬혁은 그녀의 수입이 어디에서 오는지 약간 궁금해했다.서지현은 그를 돌아보고는 매우 경계하며 조용히 작은 상자를 거두었다.“걱정하지 마요. 그 돈을 건드릴 생각은 전혀 없어요.”유찬혁은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챘다.“그런데 저를 도와 제 친구들에게 연락해 줄 수 있어요? 더 많은 돈을 줄 수 있어요...”“안 돼요!”서지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지현 씨, 부탁할게요!”“꿈도 꾸지 마요! 나는 절대 경찰에 신고 안 해요!”그녀의 예쁜 얼굴에는 노여워하는 표정이 어려 있었고 그를 살뜰히 보살펴 주던 소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유찬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에 신고하지 않아요. 친구에게만 연락하는 것뿐인데...”“찬혁 오빠 친구는 분명히 경찰을 부를 거예요!”서지현이 소리쳤다.“어쨌든... 내 인생을 망친다면 나도 찬혁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그를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문을 쾅 하고 닫았다.유찬혁은 또 익숙한 문 잠그는 소리를 들었고 그는 당황하여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를 막으려고 했지만 몸 상태가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곧추세우고 아픔을 억누르며 외쳤다.“서지현!”문밖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그는 매우 화가 나서 침대를 세게 두드렸다.그런 무력감이 마음을 가득 채우자 그는 침대에 누워 곰팡이가 핀 천장을 보며 탄식했다....남양에서 온 전용기가 맨체스터 공항에 순조롭게 착륙했다.나석진은 여러 명의 호송 아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로비에서 기다리는 곽보미가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영국으로 달려온 것이었는데 그녀는 이미 초췌해졌고 두 개의 깊게 파인 눈꺼풀과 짙은 다크서클은 물론 살도 많이 빠져 몰라볼 정도로 말랐다.그리고 그녀는 복주머니를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나석진은 그것을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한순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곽보미가 그를 향해 억지웃음을 짓자 나석진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정말 웃기 싫으면 내 어깨에 기대서 울어도 돼요.
곽보미는 순간 당황해서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떨어뜨렸다.조급해할까?그녀는 정말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그녀는 그저 자신이 요즘 갈팡질팡하며 허둥대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살면서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그 복주머니만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찬혁이 그녀에게 준 것이고 위에는 그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다.그때 복주머니를 건네줄 때 행운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는데 지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운을 바쳐 그의 평안을 바꾸려 했다.곽보미는 머리가 복잡해졌고 입을 벌렸지만 한마디도 안 나왔다.“나는...”“알고 있어요!”나석진은 태연하게 웃었다.“당연히 조급하겠죠! 내가 없어진다면 누가 남주를 맡을 수 있겠어요?”곽보미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후 말을 했다.“미안해요.”나석진은 잠깐 멈칫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계속 자르고 있었다.“나는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니 나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뜬금없이 왜 저에게 말하는 거예요?”그를 보는 곽보미의 눈에는 감사의 빛이 가득했다.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녀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아직 찬혁이를 잊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그녀는 복주머니를 꽉 쥐었다.“요즘 눈만 감으면 전부 학창 시절 때의 화면이에요.”“음...”나석진이 웃었다.“집착이네요!”곽보미도 같이 웃어줬다.“그럼 유찬혁 씨가 나보다 어디가 더 좋은지 말해 줄래요?”곽보미는 이 문제를 대답할 수 없었다.사람의 감정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특히 그녀처럼 집착이 심한 사람은 한 사람을 좋아하면 평생 바뀌지 않을 것이다.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그녀는 그의 흰 셔츠에 햇볕 냄새가 나는 것이 좋았고, 그가 캠퍼스 길에서 그녀를 만날 때마다 스쳐 지나가는 그 웃음이 좋았고, 토론대회에서 그의 패기가 좋았고, 그가 인내성 있게 그녀에게 문제를 설명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그들이
서지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나석진을 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등 뒤에서 한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이 사람은 옷에 많은 신경을 쓰고 또 귀공자 느낌이 들고 눈빛은 날카로워서 쉬운 상대는 아닌 것 같다...나석진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는데 힘이 자기도 모르게 세졌다.서지현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자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저기요, 이거 놔주세요!”“아직 제 질문에 대답 안 했어요.”“무슨 문제요?”소녀는 눈을 굴렸다.“이 옷을 말하는 거예요? 흠, 글쎄...”서지현은 나석진에게 다가갔고 천진난만한 미소 속에는 약간의 요연함을 띠고 있었다.“먼저 손을 놓으면 말해 줄게요!”나석진의 손가락은 자기도 모르게 힘을 풀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서지현은 그를 밀치고 토끼처럼 반대 방향으로 재빨리 도망갔다.‘경찰이야, 경찰일 거야!’서지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경찰이 아니면 왜 저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지? 망가진 옷인데 죽은 사람한테서 벗겨낸 게 아니냐고 묻다니.’하마터면 사복 경찰에게 잡힐 뻔했다고 긴장했다.서지현은 미친 듯이 달려갔지만 나석진이 계속 자기를 쫓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가 뒤돌아보자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나석진은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고, 또 남자고 힘이 넘쳐서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사실 나석진은 왜 따라왔는지 모르겠다.단지 무의식적으로 그 옷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그 브랜드는 자신이 모델을 한 적이 있는데, 오성의 브랜드 모델로서 그는 여러 차례 발표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그때마다 곽보미가 와있었고 곽보미가 나타난 곳에는 반드시 유찬혁이 있었다.한번은 유찬혁이 즉석에서 주문 제작한 것이 있었는데 스타일과 원단이 방금 이 소녀가 들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이런 맞춤 제작형 복장은 수량이 희소하고, 디자인과 재질도 매우 정교한 데다가 자신이 모델도 한 적이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리고 유찬혁이 영국에 오자마자 칼에 두 번 찔렸다고 한다...이것은 더욱 나석진의 의심을 일으
서지현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런 경우는 그녀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 18년 동안 그녀는 하수구의 쥐처럼 살았고, 주동적으로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이익과 자기 보호를 위해 무언가를 팔아야 했다.예를 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정상적인 사람이 칼에 찔린 유찬혁을 만났더라면 첫 번째 반응은 바로 경찰에 신고하여 병원에 보내는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그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유찬혁을 끌고 와서 붕대를 감아 주고 출혈 과다로 길거리에서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이미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서지현은 심장이 쿵쾅거리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 사악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돌아서서 문을 잠그고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죽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다.그리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밖으로 끌고 나가 어딘가로 던지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서지현은 자기 자신에게 놀라 그 사악한 생각이 머리를 점령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혼자서 뺨을 두 번 세게 때렸다.한참 후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 손을 떨면서 유찬혁을 향해 걸어갔다.먼저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체크해 봤는데 다행히 없는 것은 아니고 미약했다.서지현은 돈이 들어 있는 철제 상자를 찾아내고 유찬혁을 자신의 몸에 업히려고 시도했다.그녀는 나이가 어리고 몸집이 가늘어서 몇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그녀는 밖으로 뛰어나가 도움을 청했다.지하실에 있는 모든 방을 두드렸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어려움이 있어서 그녀를 돕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집시 할머니는 그녀를 약간 노려보며 소리쳤다.“이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이 사람을 병원에 데려간다면 우리는 모두 끝장이야!”“할머니!”서지현도 마음이 급해서 소리를 질렀다.“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좀 도와주면 안 돼요?”“이러다 경찰까지 부르겠어! 죽고 싶으면 너 혼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호텔 후문에서 촬영된 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선명히 비쳤다. 화면 속에는 영미와 정대명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음향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왔다.“제가 이미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매수했어요. 당신은 그저 그 아이를 훔쳐내기만 하면 됩니다.”“영미 아가씨, 여자애를 훔쳐서 뭘 하려는 건데? 여자애는 값도 안 나가잖아!”“제가 하라는 대로 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영미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진 영미는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아니, 저 여자가 최씨 가문의 딸을 훔치려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매년 이상한 일이 생긴다지만, 올해는 더하네.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보배 같은 아이를 훔쳐려했다고?”“말도 안 돼...”영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급히 변명했다.“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최 도련님, 제 말을 들어봐 주세요!”“음성이 이렇게 뚜렷한데,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강소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영미를 꿰뚫어 보며 입을 열었다.“설마 저 영상 속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영미 씨, 정말 어리석군요.”최군형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우리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그렇게 쉽게 매수될 거라고 믿었습니까?”“뭐라고요?”영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문밖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영미가 매수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경호원들이었다.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에 영미는 몸이 떨렸다.“당신들... 날 배신한 거예요?”영미는 멍한 얼굴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영미야,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강소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분들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이야. 이분들이 한 행동은 단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야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