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런 경우는 그녀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 18년 동안 그녀는 하수구의 쥐처럼 살았고, 주동적으로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이익과 자기 보호를 위해 무언가를 팔아야 했다.예를 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정상적인 사람이 칼에 찔린 유찬혁을 만났더라면 첫 번째 반응은 바로 경찰에 신고하여 병원에 보내는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그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유찬혁을 끌고 와서 붕대를 감아 주고 출혈 과다로 길거리에서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이미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서지현은 심장이 쿵쾅거리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 사악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돌아서서 문을 잠그고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죽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다.그리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밖으로 끌고 나가 어딘가로 던지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서지현은 자기 자신에게 놀라 그 사악한 생각이 머리를 점령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혼자서 뺨을 두 번 세게 때렸다.한참 후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 손을 떨면서 유찬혁을 향해 걸어갔다.먼저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체크해 봤는데 다행히 없는 것은 아니고 미약했다.서지현은 돈이 들어 있는 철제 상자를 찾아내고 유찬혁을 자신의 몸에 업히려고 시도했다.그녀는 나이가 어리고 몸집이 가늘어서 몇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그녀는 밖으로 뛰어나가 도움을 청했다.지하실에 있는 모든 방을 두드렸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어려움이 있어서 그녀를 돕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집시 할머니는 그녀를 약간 노려보며 소리쳤다.“이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이 사람을 병원에 데려간다면 우리는 모두 끝장이야!”“할머니!”서지현도 마음이 급해서 소리를 질렀다.“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좀 도와주면 안 돼요?”“이러다 경찰까지 부르겠어! 죽고 싶으면 너 혼
최연준과 강서연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병원에 도착했다.수술실밖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곽보미는 초췌한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었고, 손에는 여전히 복주머니를 쥐고 있었다. 강서연은 최연준의 등을 토닥이며 다 잘될 거라고 작은 목소리로 위로했다.남양에서 온 몇 명의 보디가드는 안색이 차갑고 이 층의 각 출구를 지키고 있었다.사람은 물론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가기도 힘들었다.서지현은 벽에 바짝 붙어 서서 눈앞의 이 사람들을 조심히 바라보았고 철제 상자를 꼭 안고 있었다.이 사람들은 전부 돈이 많고 신분이 높아 보이는데 유찬혁은 그들의 친구이다...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서지현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온몸에 오한이 들었고 철제 상자만 지켰다.상자 안에는 그녀의 전 재산이 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이것으로 유찬혁을 병원에 데려오려고 했었다.그러나 지금은 필요 없을 것 같다.지금 일어나는 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수술실 불이 꺼지고 의사가 나와 땀에 젖은 마스크를 벗자 곽보미가 쏜살같이 달려가 물었다.“지금 어떤 상황이에요?”“환자는 큰 이상이 없고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환자 상처가 감염됐지만 봉합한 후에는 더 이상 문제가 없습니다. 다행히 제때 도착했어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곽보미는 숨을 길게 내쉬었고 눈물이 멈추지 않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서지현도 조마조마한 마음이 가라앉았다.다행히 제때에 병원에 데려온 그녀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그녀는 수술실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었고 유찬혁이 이미 치료를 받았으니 그녀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둘러 여기에서 탈출하는 것이다.나석진은 손을 흔들며 부하들에게 병원 수속을 밟는 등 여러 가지 잡일을 하게 했다.서지현은 지키는 사람이 없어진 것을 보고 등을 벽에 대고 살금살금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강서연에게 들켰다.“잠시만요!”그러자 서지현은 깜짝 놀라
서지현은 입을 꾹 다물고 경직된 사지를 약간 떨면서 잠시 그 경찰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그의 눈을 피했다.낯이 익은데...아마도 이 경찰관은 자주 달동네를 돌아다니며 집시들을 도둑처럼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서지현의 용모는 사람들로 하여금 잊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하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큰 눈을 껌벅이었다. 평소에는 머리가 빨리 돌아갔는데 지금은 정신이 딴 데 가 있다.그러나 어깨의 힘이 갑자기 세지더니 곧이어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낯익은 얼굴인가요?”나석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저와 제 약혼녀는 직업이 모두 배우예요. 우린 같은 영화에도 출연했어요!”경찰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신반의했다.“저희 쪽에서도 일부분 영어로 번역되어 해외에서 방영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찰관님께서는 제 약혼녀가 낯이 익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자주 대중 앞에 나서는 스타이기 때문에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그래요...”경찰은 잠시 망설이다가 여권을 나석진에게 돌려주고 마지막으로 서지현을 한 번 더 보았다.그는 아직도 그다지 믿지 않았지만 부하가 그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속삭였다.“나석진 씨는 사모님의 사촌오빠로서 남양 배경을 가지고 있어 보통 신분이 아닙니다.”경찰은 즉시 얼굴을 바꾸고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나석진은 예의 바른 미소를 잃지 않았고 서지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오랫동안 놓지 않았다.몇 명의 경찰이 떠날 때까지 서지현의 그 텅 빈 머리는 여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고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보호받는 따뜻함이 있었다.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그녀의 세계에 들어온 남자는 나석진이 처음이었다.예전에 그녀는 경찰을 마주할 때면 늘 길을 잃은 쥐처럼 허겁지겁 도망쳤다.그런데 오늘 그녀는 뜻밖에도 당당하게 경찰과 마주 서 있었고 당당하게 한 남자의 보호를 받았다.경찰이 그녀의 신분증을 조사하려고 하자, 그의 곁에 있던 남자가
“저기요.”서지현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당신 눈에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조금 전 그의 경멸하는 태도와 눈빛은 경찰 앞에서 그녀를 구해준 그 남자와는 사뭇 달라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그 부풀어 오른 풍선 같은 마음은 마치 한순간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려 사라진 것 같았다.그래, 그녀 같은 사람은 그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어.“서지현 씨, 화내지 마세요.”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찬혁 씨는 우리의 친구예요. 지금 위험에 처해 있어서 우리가 모두 걱정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일에도 많은 의문점이 있으니 아가씨께서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길 바라요!”서지현은 몸을 굽혀 바닥에 있는 철제 상자를 주웠다.사실을 말할 게 뭐가 있는가?진실을 그녀는 천 번을 말했지만, 그들은 모두 믿지 않는다!“또 또 벙어리 행세를 하기 시작하네.”나석진은 그녀의 팔을 꽉 잡고 목소리를 높였다.서지현은 너무 아파서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알게 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의 이 가느다란 팔은 이미 그에게 여러 번 잡혔고 혈 자국이 생겼다.“내가 방금 왜 경찰 앞에서 감싸줬다고 생각해?”나석진은 악물고 말했다.“만약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경찰서에서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거야!”“이거 놔요!”서지현은 힘껏 몸부림쳤고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그녀는 구석으로 몰린 작은 짐승처럼 결연한 눈빛으로 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들은 귀족이고 부유한 가문이고 높은 지위의 사람이다. 그녀와 천양지차다.만약 그녀를 죽이고 싶으면 개미 한 마리를 밟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가?하지만 그녀는 또 무엇을 잘못했는가? 사람을 구하는 것도 잘못인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잘못인가?유찬혁을 만난 날 지하실로 끌고 가서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그 거리에서 피 흘리다 죽게 놔뒀어야 한다는 건가?서지현은 두려움과 분노 때문에 몸이 떨렸다.집시 할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이런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고 모두 거만하게 남을 업신
서지현은 눈앞의 부드럽고 하얀 손을 바라보았는데 그녀가 보았던 지하실에 있는 수많은 거친 손들과는 전혀 달랐다.손의 주인도 아우라가 있는 듯 예쁘고 부드럽지만 눈빛에는 결연함이 스며 있어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하지만 서지현은 그녀 같은 사람은 이렇게 깨끗한 손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깊게 한 번 쉬고 스스로 일어섰다.하지만 강서연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서지현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찔린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고 한참 후 물었다.“저를... 믿으세요? 저 같은 사람은 남을 속이고 무엇이든 다 하는 사람인데 지금도 연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강서연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 줬다.“서지현 씨는 연기를 못하지만 우리 여기에 연기 잘하는 영화배우가 있어요. 연기에 대해서는 이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고 어쩌면 다음에 경찰을 만나면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요!”서지현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석진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서연아,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지 마! 이 사람은...”“어쨌거나 서지현 씨가 없었더라면 유 변호사님은 정말 길거리에서 죽었을지도 몰라요!”강서연은 그에게 눈짓을 했다.“어쨌거나 이번에 다행히 찾았잖아요. 서지현 씨도 고충이 있으니 더 이상 원망하지 마세요.”서지현은 강서연을 고맙게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그녀는 강서연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떠나려 했지만 떠나기 전 또 무언가가 떠올라 강서연에게 달려가 상자를 열어 보여줬다.“이 돈은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서지현은 정중하게 말했다.“원래 찬혁 오빠를 병원에 데려가 입원하려고 했는데 보니까 다 부자들이라 쓸모가 없을 것 같아서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돈은 깨끗한 거예요. 제 출신이 안 좋지만 법을 어긴 적이 없어요. 저는 평소에 집시들과 함께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관광객들에게 팁을 받습니다. 관광객들을 끌
...유찬혁은 이미 VIP 병실로 옮겼다.요즘은 줄곧 곽보미가 그를 돌보고 있었다.이번 영국 여행은 정말 몽환적이어서 유찬혁은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다. 다만 이 꿈이 너무 아름다워 눈을 뜰 때마다 곽보미가 곁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어.”그가 부드럽게 말했다.“여기 의사와 간호사가 있어서 매일 오지 않아도 돼. 정말 너무 고생이야.”“나랑 같이 가기 싫어?”곽보미는 신선한 딸기를 가지고 왔는데 알이 동그랗고 통통한 것을 하나 골라 그의 입가에 갖다 대었다.유찬혁이 웃으며 꼼짝도 하지 않자 곽보미가 잠시 멈칫했다.“너 이거 안 먹어?”“아니.”유찬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네가 딸기를 먼저 한입 먹고 나머지 부분을 나한테 주면 돼!”곽보미는 웃으며 눈가가 약간 촉촉해졌다.“보미야...”유찬혁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등에 살포시 얹었다.“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어?”곽보미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여 말을 하지 않았다.“내가 왜 영국에 왔는지 알아?”“네가 영국에 온 것을 나는 몰랐어.”곽보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나중에 듣기로는... 네가 여기 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들었어.”유찬혁은 고개를 저었다.“네가 여기 있기 때문이야.”곽보미는 마음이 흔들렸다.“내가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한밤중이었고 전에 맨체스터에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여기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 공항 밖에 대기하고 있는 저 택시들 속에 현지 불법 택시가 있을지는 상상도 못 했어... 불행히도 나는 딱 그런 차를 타가지고 그 기사가 나를 그 달동네로 데려갔을 때야 느낌이 왔어.”“그냥 순순히 그 사람들에게 물건을 주면 되잖아!”곽보미는 조급했다.“그 사람들은 단지 재물을 노리고 있을 뿐, 목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야! 얌전히 가방을 넘겨주고 핸드폰과 여권만 남겨주라고 하면 되잖아!”유찬혁은 시종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그렇게 영리한 변호사가 어떻게 이런 대처 능력도 없
“응, 그래.”유찬혁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곽보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건... 어째서 정석대로 흘러가지 않는 거야!줄거리는 분명히 그녀가 가방을 뒤지겠다고 하자 그는 필사적으로 막아섰고, 그녀는 정말로 일어나서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서 뒤집었고, 그리고 그가 급하게 잡아채는 사이에 그녀도 그에게 끌려갔고, 마지막에는...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온 세상이 핑크빛이 되어야 했잖아!감독 생활을 하면서 대본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다!“내 가방은 저기에 걸어 놓았어. 가져와 줘.”유찬혁이 웃으며 말하자 곽보미는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 어쩔 수 없이 그를 한 번 보고는 가방을 건네주었다.“열어서 제일 안쪽에 있는 층을 꺼내봐.”곽보미는 지시대로 했다.변호사의 가방은 안에 3층 겉에 3층, 모두 중요한 사건 자료를 담고 있다.그녀는 그가 말한 대로 손을 뻗어 안을 만져 보다가 갑자기 작은 물건을 만졌는데, 천의 질감이 매우 익숙했다...그녀가 꺼내 보니, 뜻밖에도 다른 하나의 복주머니였다.“이건...”“이걸 꺼냈어?”유찬혁이 웃었다.“이게 이렇게 빨리 나오면 안 되지! 다시 만져봐!”곽보미는 의심 서린 눈빛으로 계속해서 만져 들어갔다.맨 안쪽 층 아래에서 그녀는 작은 편지를 꺼냈는데 꺼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거의 멈췄다. 편지에 적힌 글씨는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했고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지나간 한 장면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처음으로 사랑감정이 싹튼 그 시절, 그녀는 글씨를 곱씹으며 수도 없이 써서 이 연애편지를 만들었고, 그에게 직접 줄 용기가 없어 그의 탈의실 옷장 안에 몰래 숨겼다.결국 같은 반 남학생에게 발각되었는데... 바로 그 소문 잘 내는 배경원이었고 결국엔 그 일이 모두가 알게 되어 전교의 화제가 되었다.한동안 곽보미는 열등감에 집 밖으로 나가기도 싫어했다.그 편지에 서명이 없어 아무도 그것이 그녀가 준 것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그녀는 주위의 시선이 바늘처럼 자기를 찌르는 것만 같았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유찬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보미야, 촬영할 때 NG 하잖아. 배우 컨디션 안 좋으면 NG도 많이 나고... 그럼 나도 한 번만 NG 해주면 안 돼? 내가 약속할게.”유찬혁이 더없이 정중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는 반드시 한 번에 통과하고 곽 감독님의 최고의 남자 주인공이 될 거야!”곽보미는 잠시 멈칫하고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하지만 이내 다시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몸을 굽혀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으며 눈에는 행복함이 가득했다.“그래.”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제부터 내 대본에는 네가 유일한 남자 주인공이야. 하지만 너는 감독의 지시를 따라야 해. 더 이상 독단적으로 대본을 바꾸면 안 돼. 알겠어?”유찬혁은 입꼬리를 올렸다.“곽 감독님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밤이 되자 강서연은 최연준의 곁에 누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곱씹었다.유찬혁이 부상을 입고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지금 그가 위험에서 벗어난 것까지 사실 2주일에 불과했지만, 너무 길게 느껴졌다.강서연은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며 작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뭐 하는 거야?”최연준이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잠자코 누워 있어...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안 참을 거야.”그녀는 이 말을 듣자마자 얼른 손을 거두었다.“여보.”최연준이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큰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둥근 배를 어루만졌으며 목소리에는 약간의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아기는 언제 나올 수 있어?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둘만의 시간이 없었어...”“왜요, 이제 와서 아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요?”“아니...”남자는 억지로 웃으며 마음속으로는 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우리의 아이예요. 그런 생각 하면 안 돼요!”강서연이 진지하게 그를 쳐다보았다.임산부는 약간의 감상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서지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더욱 그러하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