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유찬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보미야, 촬영할 때 NG 하잖아. 배우 컨디션 안 좋으면 NG도 많이 나고... 그럼 나도 한 번만 NG 해주면 안 돼? 내가 약속할게.”유찬혁이 더없이 정중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는 반드시 한 번에 통과하고 곽 감독님의 최고의 남자 주인공이 될 거야!”곽보미는 잠시 멈칫하고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하지만 이내 다시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몸을 굽혀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으며 눈에는 행복함이 가득했다.“그래.”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제부터 내 대본에는 네가 유일한 남자 주인공이야. 하지만 너는 감독의 지시를 따라야 해. 더 이상 독단적으로 대본을 바꾸면 안 돼. 알겠어?”유찬혁은 입꼬리를 올렸다.“곽 감독님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밤이 되자 강서연은 최연준의 곁에 누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곱씹었다.유찬혁이 부상을 입고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지금 그가 위험에서 벗어난 것까지 사실 2주일에 불과했지만, 너무 길게 느껴졌다.강서연은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며 작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뭐 하는 거야?”최연준이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잠자코 누워 있어...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안 참을 거야.”그녀는 이 말을 듣자마자 얼른 손을 거두었다.“여보.”최연준이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큰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둥근 배를 어루만졌으며 목소리에는 약간의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아기는 언제 나올 수 있어?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둘만의 시간이 없었어...”“왜요, 이제 와서 아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요?”“아니...”남자는 억지로 웃으며 마음속으로는 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우리의 아이예요. 그런 생각 하면 안 돼요!”강서연이 진지하게 그를 쳐다보았다.임산부는 약간의 감상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서지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더욱 그러하
강서연과 최연준은 밤새 달려 신제품 패션 회장에 도착했다.신제품 런칭쇼는 내일 오전에 진행된다. 그런데 스태프가 저녁에 마지막 점검을 하다가 십여 벌의 맞춤 드레스가 각기 다른 정도로 파손된 것을 발견했다. 구멍 뚫린 곳이 크진 않았지만 미관에 영향을 미쳐 아예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딱 봐도 누군가 일부러 망가뜨린 것이 분명했다.강서연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옷들을 자세히 살펴본 후 물었다.“이 옷들이 3일 전에 도착한 거 아닌가요? 그때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어요?”“이 옷들은 브랜드 측의 수석 디자이너들이 직접 가져온 거예요. 운송 차량마저 방탄 차량이고 도착해서도 꼼꼼하게 살폈었는데 그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최연준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고 당장 CCTV를 확인하라고 분부했다.“서연아, 조급해하지 마.”최연준이 그녀를 위로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이 회장은 맨체스터에서 보안이 가장 좋은 곳이야. 정말로 누군가 일부러 망가뜨린 거라면 분명 CCTV에 찍혔을 거야.”강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발표회가 바로 내일인데...”“내일 발표회는 잠시 취소하도록 해.”최연준이 휴대 전화를 꺼내 비서에게 연락했다.“고급 드레스의 런칭쇼를 연기한다고 알려. 그리고 구체적인 시간은 미정이야.”“여보...”강서연이 긴장한 얼굴로 최연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고급 드레스 런칭쇼는 국제 패션 위크의 일부분이라 각계에서도 매우 중시했고 드레스의 디자이너들도 전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만약 김중 그룹에서 이 행사를 망친다면 체면이 깎이는 건 물론이고 거액의 위약금까지 물어내야 한다.“괜찮아.”최연준은 강서연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을 꽉 잡았다.“런칭쇼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시 미뤘을 뿐이야. 위약금을 물어도 괜찮아. 난 당신의 건강이 가장 중요해. 고작 이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선 안 되지. 안 그래?”강서연이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내가 이 프로젝트의 담당자니까 책임을 져도 내가 져야
화들짝 놀란 곽보미가 강서연을 붙들었다.“흥분하지 말아요. 애가 놀라면 어떡해요.”강서연은 웃으며 곧장 회의실로 돌아가 디자이너들과 어떻게 디자인을 수정하면 좋을지 상의했다.구멍 난 부분이 그리 크지 않아 조금만 수정하고 동양의 요소를 가미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디자이너들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수정본을 확인한 그들의 두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동양 요소들의 고귀함과 신비함이 드레스를 더욱 남다르게 만들어주었다.“그림으로 보면 효과는 아주 좋아요.”한 디자이너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만든다는 건 아마 어려울 것 같아요.”회의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고 다른 디자이너들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이 드레스들은 전부 수작업으로 제작한 거예요. 이 부분도 예외는 아니고요.”“여기에 동양 요소가 담긴 무늬를 새긴다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우리는 자수를 수놓을 줄 몰라요. 지금부터 배운다면 시간이 될까요?”강서연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구멍 난 곳에 자수를 수놓는 건 물론이고 바느질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무늬가 옷감과도 잘 어울려야 하고 터진 자리가 절대 보여선 안 되었다. 그야말로 난도가 높은 작업이었다.문제는 그들도 자수할 줄 몰랐고 맨체스터를 다 뒤져도 자수 장인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다. 지금부터 배운다고 해도 여전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한참 고민하던 강서연은 오성에서 사람을 데려와야 하나 망설였다.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생각이 갑자기 뇌리를 스쳤다. 나석진이 서지현을 처음 만났을 때 그 혼혈 소녀가 외투를 그에게 팔려고 했었다.그때 나석진이 이런 평가를 했다.“서연아, 걔가 그 외투를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몰라. 바느질이 어찌나 꼼꼼한지 나까지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니까. 허, 정말 감쪽같았어.”어릴 적부터 호의호식하며 지낸 나석진은 항상 좋은 것만 보면서 자랐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한다는 건 손재간이 엄청나다는 게 분명했다.강서연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새어 나왔다.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여길 활보하고 다니는 거예요? 이렇게 다니면 당신이 저 사람들의 타깃이 된다는 거 몰라요? 아마 몸에 지닌 걸 다 뺏겨서 팬티 바람으로 도망쳐야 할걸요?”나석진은 잠깐 흠칫하다가 이내 가볍게 웃었다.“그 정도로 심각해?”서지현이 진지하게 말했다.“찬혁 오빠가 당한 걸 보고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그때는 저녁에 사고가 났잖아...”“아저씨.”서지현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이 거리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밤낮을 가리지 않아요.”“뭐?”나석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범죄라는 소리에 놀란 게 아니라 아저씨라는 호칭에 충격을 받았다.‘아저씨? 아까 찬혁 씨는 오빠라고 불렀잖아! 내가 아저씨라고 불릴 정도로 늙어 보여? ’나석진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고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그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서지현은 기분이 별로라는 걸 눈치챘다.‘하긴, 귀한 사람이 이런 곳에 왔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서지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정하게 물었다.“아저씨는 절 찾으러 왔어요? 찬혁 오빠는 인제 괜찮죠? 제... 제가 잘못했어요. 찬혁 오빠를 지하실에 며칠이나 가둬놓는 게 아닌데... 그래도 제가 찬혁 오빠의 목숨을 살려줬는데 용서해 주면 안 돼요?”서지현이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아저씨... 전 정말 배상할 돈이 없어요... 하지만 힘은 있어서 하라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경찰에 신고하지만 말아줘요. 저... 강제적으로 추방되면 진짜 갈 곳이 없어요.”나석진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서지현은 마음이 움찔했다.‘망했다! 그날 병원에서도 참 괴상했어. 아저씨처럼 잘난 사람은 당연히 나 같은 사람을 얕잡아보겠지. 인제... 정말로 나에게 뭐 어쩌려는 거 아니야?’“아저씨...”서지현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아저씨? 지금 제 말 듣고 있어요?”고개를 돌린 나석진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당장이
호텔 룸 밖에 서 있는 강서연은 안의 상황이 걱정되었다.그 룸은 나석진의 스위트 룸이었는데 서지현이 안에 들어간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이틀 동안 나석진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서만 지냈다. 굳게 닫힌 방 안에는 서지현이 갇혀있었다.그는 경호원까지 데려다가 방문을 지키게 하면서 정작 자신은 여유롭게 밖으로 돌아다녔다. 호텔로 돌아오면 거실 소파에 축 늘어져 긴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술잔을 흔들며 그윽한 눈빛으로 방문을 쳐다보면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곤 했다.강서연은 경호원에게서 나석진이 서지현을 잡아 온 그날 딱 두 마디만 했다고 들었다.“들어가 있어!”이게 첫마디였다고 한다. 그러고는 모든 드레스와 설계도를 그녀에게 던지고 퉁명스럽게 두 번째 말을 내뱉었다.“자수를 완성하지 못하면 밥도 없어!”강서연이 실소를 터트렸다. 물론 나석진이 진짜로 서지현을 굶길 리가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평소 매우 점잖고 팬들에게도 다정한 나석진이 왜 서지현을 만난 후에 이성을 잃은 것일까?“서연이 왔어?”나석진은 그제야 문 앞에서 왔다 갔다 망설이는 강서연을 보고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가려야 하는 음식도 많았다. 아무거나 마실 수 없어 그냥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 강서연은 웃으며 컵을 건네받고는 안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지현 씨는...”“걱정하지 마.”나석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솜씨가 재빠르고 능숙해서 하루만 더 주면 다 완성할 거야.”그가 손을 흔들자 경호원이 옷장에서 서지현이 자수를 마친 몇 벌을 꺼냈다. 옷을 보자마자 강서연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이 세상에 이런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정말로 있구나!’“어때? 괜찮지?”나석진이 말을 이었다.“저 녀석 다른 재주는 없어도 손재간은 아주 훌륭해. 허, 예전에 남양 집에도 자수를 놓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는데 다들 고수였어. 그런데 다 얘보다 못해.”“오빠가 이렇게까지 칭찬
서지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떠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아쉬웠다.조급해진 나석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서지현이 아무 반응이 없자 얼굴을 톡톡 치려던 그때 의사가 말렸다.“아가씨가 그동안 너무 과로해서 이런 거니까 푹 자게 내버려둬요. 한잠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겁니다.”“한잠이요? 벌써 12시간이나 잤다고요.”시계를 내려다보는 나석진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너무 오래 자서 바보가 되는 건 아니겠죠?”의사는 헛웃음을 짓더니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석진은 모든 화를 문 앞의 경호원에게 쏟아냈다.“거기 서서 뭐 해? 다시 가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 와!”“도련님, 그건...”경호원도 어이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방금 나간 의사는 벌써 다섯 번째 의사였다. 물론 의사마다 전부 똑같은 말만 했다.서지현이 이틀 밤낮을 자지 않고 꼬박 새웠으니 당연히 충분한 수면이 필요했다. 너무나도 정상적인 일인데 왜 도련님은 이토록 긴장하는 걸까?경호원들은 또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두려워 의사를 찾으러 가는 척했다.나석진은 문을 쾅 닫고 들어와 서지현의 옆에 앉았다.소녀의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있긴 하지만 안색은 그래도 괜찮았다. 발그스름한 두 볼이 마치 봄날의 벚꽃 같았고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은 동화 속의 잠자는 공주 같았다.나석진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녀에게 바느질하라고 할 때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밥도 먹지 말고 잠도 자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서지현이 진짜로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이틀 밤낮을 꼬박 새우면서 아주 훌륭한 무늬를 드레스에 수놓았다. 그러다가 결국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왜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거야? 설마 바보는 아니겠지?’나석진은 후회막심했고 자신을 자책했다.‘고작 호칭 때문에 어린애에게 왜 그랬을까? 품위나 잃게...’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갈색 곱슬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숱이 많고 촘촘하여 아주 예뻤다.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석진은 깜짝 놀랐다. 다른 요구라도 얘기할 줄 알았는데 단지 맛있는 밥 한 끼뿐이었다.그의 뇌리에 범죄자가 득실거리던 그 길거리가 또다시 떠올랐다. 더럽고 협소한 지하실, 그리고 광장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여행객의 시선을 끄는 집시들... 이 세상에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미안한 마음이 밀려온 나석진은 고개를 들어 기대 가득한 소녀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힘겹게 대답했다.“알았어.”서지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잠도 푹 잤겠다, 이따가 맛있는 음식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니, 이게 바로 천국인 건가?잠시 후 누군가 밥을 가져왔다. 전부 이 호텔의 최고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었는데 일하는 이틀 동안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어 보였다.서지현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고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먹으려다가 갑자기 다시 멈추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한 후 음식을 탁자 위로 옮겼다.나석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침대 옆까지 가져다줬으면 침대에서 먹으면 되지, 왜 내려와?”“먹다가 흘리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이렇게나 좋은 침대를 더럽힐 수는 없죠.”서지현은 연어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감탄했다.“너무 맛있어요! 너무!”나석진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서지현이 이깟 침대를 왜 이렇게나 아끼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더러워지면 청소부에게 맡겨 깨끗이 빨라고 하면 되는데.서지현도 나석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무슨 물건이든 그에게는 별거 아니었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할라.”나석진은 옆에 서서 물과 휴지를 챙겨주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춧가루를 뿌리는 것조차 도우미가 옆에서 뿌려줬었는데 이젠 그가 어린 소녀를 챙겨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최연준은 나석진에게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나석진은 처음에는 사양하는 척하다가 이내 캐리어를 들고 그의 별장으로 들어왔다.두 남자는 카펫 위에 앉아서 한잔했고 강서연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태교 음악을 들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이었는데 선율이 웅장하면서도 고상하고 역동적이었다.하지만 나석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머리에는 온통 그 광장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집시들은 제대로 된 악기가 없어 교향곡 같은 걸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단지 탬버린 하나와 건반 하나로 커다란 광장을 파티 현장으로 만들었고 주변에 놀라움을 선사했다.‘그 계집애가 롱 원피스를 입고 하늘하늘 춤추는 모습은 어떨까? 목소리가 밤꾀꼬리 같아 노래를 부르면 아주 듣기 좋겠지? 그러면 주변에 보는 남자들도 많을 텐데...’그 생각에 마음이 움찔한 나석진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꽉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였다.“뭐 해요?”최연준이 귀띔했다.“형님 차례예요.”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나석진은 최연준이 조롱 섞인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 카드를 내지 않아도 이미 진 상황이었다.“그만 놀아요.”그는 카드를 휙 던지며 툴툴거렸다. 최연준은 웃으며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나석진이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그렇게 걱정되면 가서 보면 되잖아요.”강서연이 피식 웃었다.“손발이 멀쩡하고 잡는 사람도 없는데 왜 안 가요?”“서연이 너 지금 날 내쫓는 거야?”나석진은 그녀를 째려보고는 최연준에게 시선을 옮겼다.“와이프 좀 단속해요.”하지만 최연준은 아예 강서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와이프 말이 맞아요.”“당신...”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외로운 건 솔로뿐이다. 나석진은 약이 바싹 올랐다.“매제는 정말 도움이 안 돼요.”최연준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석진은 술잔을 내려놓더니 피식 웃었다.“아내 바보가 따로 없다니까요.”“네...”최연준은 진지한 척했다